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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무라카미 류 지음, 정윤아 옮김 / 문학수첩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나는 무라카미 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다. 하루키는 소설보다는 오히려 수필이 더 좋았는데 류는 소설 이외의 작품은 보지 못한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의 소설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다. 몇 작품을 읽다가 이건 내 취향이 아니자나~라는 생각이 들어 더이상 그의 책을 들지 않았었다. <교쿄>를 마지막으로 몇 년 동안 그의 책은 읽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작품 몇 편으로 너무 섣불리 그에 대한 선입견을 만들어 버렸는지도 모르지만 싫은 걸 억지로 읽을 수도 없는 것 아닌가.(류의 팬들에겐 미안할 따름이다;;)
생각해 보면 무라카미 류의 문체는 조용하고 담담하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지적이다. 내가 좋아하는 대부분의 특성을 갖고 있다. 심지어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했던 이상일 감독의 영화 <69-식스티나인>도 무척이나 재미있게 봤다. 그런데도 그의 작품을 보면 별다른 욕구가 생기지 않는다. 이거 뭔가 단단히 미운털을 박은 모양이다. 그런데 웃긴 건 그의 책을 피한지 오래라 그 이유조차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것이다.
파란색의 표지가 돋보이는 <공항에서>를 처음 봤을 때 무라카미 류라는 이름에 바로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희망을 이야기한다'라는 글귀가 눈에 머물렀다. 사회의 절망과 퇴폐를 그리는 것은 너무 진부한 시대가 되어 버렸다며 이젠 희망을 이야기 해보자고 말하는 무라카미 류. 그의 말을 듣다보니 아하~ 왜 그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살며시 생각날 것 같기도 하다. 절망과 퇴폐, 그 대신에 류가 희망을 이야기한다... '희망'이라는 한 단어에 맘이 동해 다시 그의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어디에나 있지만, 그 어디에도 없는 나'라는 책띠지의 카피가 무척이나 인상적인 <공항에서>는 무언가를 꿈꾸며 제각기 자신만의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8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편의점에서, 술집에서, 공원에서, 공항에서 등등의 제목처럼 각 단편은 특정 장소에서의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나는 생각의 파노라마로 이루어져 있다. 각 편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머무르고 있지만 그들과 소통하기 보다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들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쫓아가는 주인공의 내면과 주변의 사람들을 살피는 외면이 적절하게 교차되며 점점 벌어지는 시간의 속도를 조절한다.
과거와 현재 속에 떠오르는 삶의 편린들을 들여다보던 주인공은 어느 순간에 이르러 그동안 잊고 있었거나 또는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어왔던 자신의 꿈을 되새김질 한다. 그리고 꿈을 향해, 지금의 모습이 바뀌길 바라는 희망에 부풀어 떠날 준비를 한다. 전혀 다른 장소에서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는 다른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책의 주인공들은 모두 '떠나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모두의 희망을 이루어주 듯이 마지막 편의 주인공은 공항에 선다. 그리고 떠나기 위해 발걸음을 내려놓는다. 이 책의 제목을 <공항에서>라고 정한 것은 이러한 주인공들의 마음을, 더 나아가 독자의 마음을 담은 것이리라.
절망과 퇴폐 대신 희망을 이야기하는 무라카미 류의 글은 조금 낯설지만 훨씬 푸근하다. 그래서 이제까지 읽은 작품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든다. <공항에서>는 작고 얇은 책이지만, 그 속에 적지 않은 따뜻함을 담고 있다. 비록 신선했던 글의 구성이 각 단편마다 매번 반복되어 나중엔 조금 지루하게도 느껴지고, 몇몇 단편의 끝은 쉽게 이해되지 않으며, 등장하는 여자들마다 술집과 인연을 맺고 있는 점이 꽤나 거슬렸지만(여자는 술집 아니면 일할 곳이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ㅅ-;),, 그럼에도 이 책에 공감하게 되는 건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흔하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하고 소박한 인물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덮는 순간, 나도 떠나고 싶어졌다. 가슴 속에 품어만 왔던 나의 희망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