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들지 않는다는 것 - 하종강의 중년일기
하종강 지음 / 철수와영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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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든다는 게 뭘까.. 한편으론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다는 뜻으로 쓰이고, 다른 한 편으론 세상에 물든었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어쩌면 우리는 철이 들면서 두 가지를 동시에 직면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 우리는 세상에 적당히 물들고,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자신은 아직 철이 들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남자가 있다. 중년의 나이에 스스로 철없다고 선언하다니 신선하다. 그의 중년 일기에는 이렇게 철들지 않은 그의 일상과 일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 가족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철들지 않은 자의 행복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종강이란 이름 옆에 한울노동문제 연구소 소장, 한계레 신문 객원논설위원 등등의 직함들이 줄지어 있다. 그 중 '노동상담가'라는 단어가 유난히 눈에 띈다. 그 개념이 명확하게 잡히진 않으나 노동운동의 연장선이 아닐까하고 조심스레 예측해 보며 책을 넘긴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건 순전히 '노동상담가'라는 그의 직업 때문이었다. 고도로 자본주의화 되어가는 사회에서 가진 자들의, 힘 있는 자들의 시선과 논리에 익숙해져 가는 내 좁은 시야를 철없음으로 사회에 대거리를 하는 그를 통해 좀 더 넓혀보고자 하는 마음이 동했기 때문이다. 

쉬운 문체로 씌여진 그의 글들은 '일기'라는 제목처럼 편안하다. 그래서 금새 친근함을 느낄 수 있다. 글의 길이도 대체로 한두 장을 넘기지 않아 읽기에도 별다른 부담이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글 속에는 현 사회에 대해 항거하는 그의 목소리가 크고 작게 실려있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밀어부치지 않아 큰 부담은 없다. 독자는 그의 말에 동조할 수도 있고, 다른 의견을 내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사회의 주류적 시선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의 글이 좀 더 재미있는지도 모르겟다.

30년째 노동운동에 대한 상담을 해오고 있는 그는 학생시절 소위 운동권이었단다. 그의 글에서 학생운동 이야기가 스쳐가면 대학시절 전혀 뜻하지 않게 경험했던 매캐하고 따끔해 눈물콧물 다 빼던 최루탄의 기분나쁜 감각이 되살아나곤 했다.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이야기할 때면 분신자살했던 전태일과 올초에 본 영화 <오래된 정원>과 곧 개봉할 영화 <화려한 휴가>도 덩달아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던 치열했던 80년대의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 책에서 스크린에서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했던 그 일들이 아직도 이 땅 곳곳에 남아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기분이 묘해진다. 

<철들지 않는다는 것>은 '노동상담가' 하종강의 글이지만 '자연인' 하종강의 일기이기도 하다. 빡빡하게 사회비판적인 글로 점철되어 있지 않을까 염려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의 일상에서 만난 소소한 것들이 그의 글에 담겨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대부분의 글들에서 달지 않은 문장이 한두 줄 발견되곤 하지만 그 점이 바로 그의 글이 매력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것들로 다시 한 번 그런 문제들을 생각해 볼 계기를 마련해주니 그또한 나쁘지 않다.

이 책에는 일상적인 개인글, 노동상담을 직업을 통해 만나는 일과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의 가족에 대한 에피소드, 마지막으로 철들지 않은 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여러가지 이야기 중에 그의 유머가 가장 잘 살아나는 가족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는데, 쉽지 않은 길을 가는 남편에게 힘을 주는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누구보다 멋져 보였다. 항상 바쁜 남편과 아빠를 이해하는 그의 가족들을 위해 그가 조금은 덜 바빠도 되는 세상이 어서 왔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그 밖에 가난한 사람들끼리 서로의 정을 나누는 '고무장갑 할인 판매'나 일상의 웃음을 전해주는 '진돗개'ㆍ'누워서 깨닫다' 등이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책의 앞머리에 나오는 '비'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가슴에 박혔다. '굵은 비'가 내릴 때 농민들은 자식처럼 키운 작물들이 이리저리 휩쓸려가고 상처입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데, 라디오에선 한가하게 낭만 운운하며 비오는 창가에서 커피 한 잔 어떠냐는 소리를 할 때 욕이 나왔다는 이야기. 물론 각자의 입장에 따른 차이겠지만 먼저 가지지 못한 사람들, 힘든 사람들을 생각하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어제 밤에도 비가 무척 많이 왔는데 별다른 비피해 없으시길 기도한다!)

하종강은 자신을 가르켜 철들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철들지 않았다는 의미가 그의 모습과 비슷한 것이라면 그것 또한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든다. 모두가 철이 들고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갈 때 철들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뜻을 펼쳐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중년, 하종강. 그의 바람대로 철없는 그의 삶이 오늘도 굳건히 이어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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