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마을 이야기 1
제임스 캐넌 지음, 이경아 옮김 / 뿔(웅진)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이란 영화 제목이 생각났다. 유사한 내용은 아니지만 본의 아니게 '생과부'가 된 그녀들의 처지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라는 절대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전쟁 때문에 남편을 빼앗기고 졸지에 과부가 되어버린 그녀들. 계속되는 내전과 게릴라들의 약탈로 마을의 남자들은 모두 끌려가게 되고 마리키타에는 여자들만 남게 된다. '남자들이 사라졌다. 여자들만 사는 동네. 과부마을 이야기.'라는 카피와 제목은 뭔가 신나고 유쾌한 여자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게 했다. 그러나 나의 기대처럼 가볍고 경쾌한 책이 아니었다. 오히려 묵직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마지막엔 우울함을 벗고 그 속에 희망을 발견하는 작가의 솜씨에 감탄했다.

마리키타에서 게릴라와 함께 사라진 건 남자들 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합법적으로 휘두르던 온갖 권력과 질서 등도 함께 사라졌다. 오랜 세월동안 남자들의 지배적 구조에 순응해 살았던 여자들은 이러한 변화에 여전히 소극적이고, 심지어 여전히 자신들을 보살펴 줄 남자들을 나타나 그들이 마을을 다시 이끌어주길 기대한다. 그러나 여전히 남자들은 마리키타에 나타나지 않고, 여러가지 혼란과 실패를 겪은 후 그녀들은 드디어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어 가기 시작한다.


1권에서는 남자들이 사라지게 된 배경과 함께 마을 과부들의 사연을 차례로 들려준다. 치안판사가 된 로살바부터 창녀촌을 운영하던 에밀리아, 우연히 마리키타로 흘러들어온 과르니소와 우연히 남편이 숨겨뒀던 거금을 찾게 된 프란시스카, 그리고 특별한 과부인 산티아고까지 다양한 사연을 품고 있는 과부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로살바는 남편과 비교적 행복했던 반면 프란시스카는 온갖 학대와 냉대, 무시를 견디며 살아왔다. 남편을 잃는 것은 로살바에게는 슬픔이지만 프란시스카에겐 해방이다. 또한 학교 선생님인 과르니소는 남자에게 강간당한 기억에 평생을 시달리며 괴로워하지만, 도냐 에밀리아는 남자들에게 성(姓)을 파는 것을 사업으로 한다. 게릴라들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여장을 했던 훌리오는 그때의 충격으로 벙어리가 되면서 자신을 자신을 진짜 여자로 여기게 되고, 특별한 과부 산티아고는 어느날 만신창으로 돌아온 사랑하는 연인 파블로를 떠나보낸다. 1권에서 쭉~ 이어지는 마리키타 과부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자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2권에서는 남자들이 사라지고 혼란에 빠졌던 과부들이 조금씩 자신들만의 새로운 규칙과 질서를 만들어 가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출산장려를 핑계삼아 중성에서 남자로 돌아와 여자들을 농락하고 신의 이름으로 어처구니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마을의 마지막 남자인 신부가 쫓겨나면서 마을은 온전히 여자들만(정신적 여자인 훌리아와 산티아고도 포함하여) 남게 된다. 그리고 남자들의 시간이 정지해 버린다. 남자들의 질서와 남자들의 시간을 잃어버린 과부들은 또다시 혼돈의 상태에 빠지지만, 곧 여자들의 시간을 만들고 더이상 남자를 기다리는 대신 온전히 자신들의 힘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남자들의 법칙인 우열, 권위 등을 버리고 모두가 동등하고 다함께 행복한 '뉴마리키타'를 건설한다. 그렇게 그녀들은 남자에 의해 보호받는 삶이 아닌 자신들의 힘으로 개척하는 삶을 찾아간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들의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여자들의 시간을 만들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정립해 가던 그녀들은 하나둘 자신의 몸을 가리던 옷을 벗기 시작한다. 화려한 색깔의 옷들 마저 금지 당하고 검은 상복만 강요됐던 그녀들의 옷은 여자들의 시간을 맞이하면서 점점 짧아지더니 급기야 완전히 사라진다. 그리고 알몸으로 거리낌없이 거리를 활보하며 새롭게 태어난 자신과 자신들의 자유를 만끽한다. 그녀들이 벗은 건 옷이지만, 그 '옷'은 그간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해 왔던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행했던 속박이며 그런 옷을 '벗는 행위'는 그녀들을 옭아매던 구속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자아를 만나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닐까. 남편에게서 온갖 냉대를 받으며 멸시와 모욕을 견디며 살아야 했던 마리키타의 과부들은 옷을 벗고 알몸이 됨으로써 온전한 자아를 찾게 되고, 그전엔 남자들에게만 주어졌던 지도자와 의사결정자의 역할을 서로의 협력 속에 해냄으로써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루어 간다. 


내전이 한창인 콜롬비아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과부마을의 이야기와 내전의 원인인 게릴라와 무장단체, 정부 군인 등을 인터뷰로 이루어진 이야기를 번갈아 나열하고 있다. 전쟁터로 끌려간 남자들과 마을에 남은 여자들의 이야기를 교대로 보는 느낌이랄까. 그런 진행구조로 인해 전쟁이란 것이 그 어느쪽에도 결코 득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둘 다 전쟁의 희생자일 뿐이다. 오직 전쟁을 일으킨 남자들의 이기심만이 지탄의 대상이 된다.

남자들이 만든 전쟁과 다툼을 떠나 서로 도움으로써 공존하는 여자들만의 마을 뉴마리키타. 그러나 작가는 이 세계에서 남자를 완전히 배제해 버리진 않는다. 전쟁터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남자들은 여전히 오만하고 권위의식에 젖어있는 모습을 보이지만 조금씩 변화하는 그들을 통해 화해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남자가 여자를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국회에서도 동등한 동료로 인정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라는 책의 첫머리에 실린 수전 B. 안토니의 말처럼 여자와 남자가 동등한 인격체로 서로를 존중하는 곳으로 뉴마리키타를 내세운다.


<과부마을 이야기>는 단순히 과부가 된 여자들의 살아가는 이야기 뿐만 아니라 그 원인이 된 전쟁과 그동안 억눌리며 살아왔던 여자들의 속내와 이상적인 공동체의 제안 등 여러가지 복합적이고 무거운 주제가 골고루 어우러져 있다. 재미를 쫓기보단 진중한 생각을 요하는 소설이었다. 작가 제임스 캐넌은 콜롬비아에서 태어나 25세에 뉴욕으로 건너가 활동한 까닭에 영미작가로 분류되나 이 책은 그 내용으로 볼 때 남미소설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이후 너무 오랫만에 접한 남미소설과의 만남, 묵직하면서도 뒷맛은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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