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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 이곳 도서관에서 시민이 함께 볼 책으로 <잃어버린 여행가방>을 선정하고 저자인 박완서님 초청해 강연회를 개최했었다. 유명하신 분을 직접 뵙는다는 설렘으로 그 강연회에 갔었는데, 수수한 차림에 일흔이 넘은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정정하셨던 그분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특히 수수한 차림새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 모습에 노년의 아름다움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그 강연회에서 들려주셨던 박완서님의 이야기중 자신의 집 마당에 대한 이야기가 적지 않았는데 그 내용의 대부분을 이 책 <호미>에서 다시 만날 수 있어 나 혼자 괜시리 반가웠했다. ^ ^
<호미>라는 토속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제목만큼이나 표지 또한 단아하다. 박완서님이 자연속에 머무는 자택에서 자연과 함께 하며 쓴 글들을 모아서 엮은 이 산문집은 각각 글들의 첫머리와 끝머리에 녹색의 잎을 달고 있다. 하얀 백지위에 그 녹색 잎 하나로 싱그러움을 느끼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자연의 냄새가 넘실대는 느낌을 받는다.
- 작년에 그 씨들을 받을 때는 씨가 생명의 종말이더니 금년에 그것들을 뿌릴 때가 되니 종말이 시작이 되었다. 그 작고 가벼운 것들 속에 시작과 종말이 함께 있다는 그 완전성과 영원성이 가슴 짠하게 경이롭다. 좁은 마당에 다 뿌리기엔 너무 많은 씨지만 나중에 솎아줄 요량으로 다 뿌릴 작정이다. 씨를 맺은 이상 푸르고 예쁜 싹으로 돋아나 단 며칠이라도 햇빛을 누리게 하고 싶다. (47쪽, 『시작과 종말』)
번잡한 서울에서 조용한 전원주택으로 이사한 박완서님은 매일 아침 마당에서 흙을 만지며 두어 시간을 보낸다고 하신다. 서로 시간을 정해놓은 듯 일정한 순서로 피어나는 꽃들을 가꾸며 그것들과 함께 대화하고 숨쉬면서 느릿느릿 편안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처음 자신의 마당에 꽃들을 가꾸는 데서 시작한 이야기는 자연과의 대화에서 차츰 범위를 넓혀 사람과 그 관계로 와 닿는다. 책 속에 펼쳐지는 작가의 주변 사람들과 가족의 이야기, 매일 비슷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풍경들 속에서 반짝이는 삶의 지혜를 건져올리는 노작가의 안목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 피정이 끝나는 마지막 날 점심시간 마침내 침묵의 계율이 풀렸다. 그 동안 아무도 침묵을 갑갑해하거나 말할 수 있는 시간을 그리워하지 않았건만 혀가 풀리자 마치 폭죽이 터진 것 같았다. 웃고 떠들고 노래 부르고 포옹했다. 그건 말이 아니라 침묵이 터뜨린 폭죽이었다. 침묵이 피워낸 백화난만한 꽃밭. 침묵은 결코 우리를 가두지 않았건만 우리는 해방감을 느꼈다. 만약 갇혀 있었다면 결코 그런 해방감을 못 느꼈을 것이다. 침묵이란 지친 말, 헛된 말이 뉘우치고 돌아갈 수 있는 고향 같은 게 아닐까. (94쪽, 『그리운 침묵』)
작가의 말처럼 일흔이란 나이는 거저 먹는 게 아닌가 보다. 이런 느긋함과 여유로움, 관조의 자세는 그만큼의 세월이 만들어낸 결과물인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니,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비슷하게 돌아가는 일상속에서 매사에 조급하게 발을 동동 구르거나 작은 일에도 화를 벌컥내는 여유없는 나의 마음이 참 부끄러워진다. 그래서 사소한 작은 것들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는 노작가 박완서님의 글을 읽으며 그럴 수 있는 그분의 마음이 더더욱 부럽다. 어쩜 삶에서 행복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본다. 항상 불행은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에서 시작되었으니까.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박완서님의 따뜻함이 묻어나는 산문집, <호미>
그 속의 여유로움을 함께 누려보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