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그리 쉽게 지난 일들을 잊을 수 있는 걸까. 아니다. 지난 일들의 형식은 기억나되 내용이 모호할 뿐이다. 밟아온 길들의 형식, 발자국은 또렷하되, 걸음 마다 어떤 생각을 했던가, 그 걸음의 힘이라든지 원동력은 무엇이었는지, 좀체 떠오르질 않는다. 지난 일들은, 지우고 싶은 과거이면서 아쉬운 운명이며, 애틋한 발자국이다. 어차피 난 이만큼의 길을 걸어왔으므로, 그동안의 길에 무책임해지고 싶다. 하지만 새로운 시작을 생각하면, 내 뒤에 아무도 없는 듯하고, 있다해도 잘못 본 듯하고, 잘못 봤다손쳐도 누군가 있다고 우기고 싶다.
나는 지금 타인의 생에 간섭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태껏의 생이 근거 모를 부채와 타인에 대한 의무감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부채의식은 미망의 간섭과 참견만을 유발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 나와 너는 따로 존재한다. 우리 인생의 축이 언젠가 만날 일도 있으리라. 그때를 기다린다.
내 길을 찾고 싶고, 내 업을 치르고 싶다.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