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여느 아이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동네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손가락이 길어 한 옥타브를 무리 없이 누르고, 숙제도 성실하게 해오는 학생이었다. 유년 시절이 지나 집에 있던 피아노가 어디론가 사라진 뒤에도 학교 음악실이나교회에서 틈나는 대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피아노 치는 것을꽤 좋아했다. 그러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곡 연습에 돌입했다. 좋아했던 남자애가 피아노를 멋들어지게 잘 쳤기때문이다. 피아노를 잘 쳐서 걔를 좋아했던 건지, 걔가 좋아서 - P21
피아노 치는 모습마저도 좋았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피아노를치는 남자에게 반하지 않기란 거의 도전에 가깝다는 사실을그때 알았다. - P22
"좋아한다, 가 사투리로 뭐예요?" (뻔뻔하기도 하지) 그가 웃으며 답했다."좋아하맨마씸."술에 취한 나는 그 말이 잘 외워지지 않아 말하고 또 말했다.섬에 사는 사람들의 언어는 바람 소리를 이길 만큼 억세다고들었다. 강력 접착제처럼 입에 착 달라붙는 발음 외국어로 들릴 만큼 이국적이었다. 망설임을 뒤로하고 마침내 내뱉는 청년의 고백처럼 그 말은 단단해 보였다. 살랑살랑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가을밤, 닿을 듯 말 듯 젊고 아름다운 기운이 우리를 - P57
에워싸고 있었다. 그와 더 가까워지기 직전, 백지상태의 머릿속에서 여러 호기심이 떠올라 잠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어떤사람일까?‘ ‘어떤 음악을 들을까?‘ ‘어떤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할까?‘ 그날 우리는 편의점 앞 벤치에서 밤을 새웠고, 다음 날아침 나는 비행기를 타고 내가 속한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좋아하맨마씸. - P58
오랜만에 읽은 조해진작가의 소설이다. 책을 읽는 것도 몇 줄의 후기를 남기는 것도 버거운 시간인데. 소설이 힘이 되고 위안이 된다. 오래전에 읽어 줄거리는 희미하지만, <로기완을 만났다>의 로기완과 <단순한 진심>의 문주를 보면 작가가 쓰고 싶고 말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어떤 것들인지 짐작이 된다.(책 속에서) 백복순과 백복희를 만나기 전까지, 연희는 대학 시절의 나와 비슷한 질감의 시간을 보냈을 거라고 나는 확신했다. 이유도 모른 채 태어나 의지와 상관없이 사는 것일 뿐, 근원적인 마음의 끝은 죽음에 닿아 있던 그 암전의 시간 말이다. 그랬으므로, 연희는 아픈 백복순과 백복순이 낳은 백복희를 외면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 외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 모녀는 연희에게 두 번이나 지켜 주지 못한 생명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고 다시는, 어떤 생명이든, 차갑게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을 테니까. 생명은 연희에게 위로이자 구원이었을 테니까.- p.175
그리고 어느 퇴근길에 선물 같은 순간을 한 번 더 만날 수있었다.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구간인 옥수역과 압구정역 사이에서, 지하철 디제이가 말했다. 한강을 지나고 있으니 고개를 들어 밖을 보시라고, 잠깐이라도 마음에 여유를 가지시라고, 마침 해가 지고 있었고 세상에 다시 없을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나는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 모든 게 엄청나게 황홀한 우연, 그러니까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 P139
어른들은 행복해지려면 적어도 10~20만 원은 필요하지않나요? 학교에 다닐 땐 2만 원만 있어도 행복해질 수 있었는데, 어른이 된 후로 행복의 인플레이션이 일어난 거죠. 똑같은 기쁨을 얻는 데 더 많은 돈이 필요해진 거예요.그런데 이 아이는 사탕 하나에 진심으로 웃을 수 있어요. 난이런 걸 잃어버렸구나, 싶었습니다. - P75
안 그랬던 것 같은데보관함에 담겨 있는 책중 읽은 책을보관한 책에서 삭제하면 읽은 책에서도삭제해 버린다. 여간 불편한 게 아닌데나만 불편한가.다음 업데이트에 고쳐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