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산문
박준 지음 / 달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쉬이 읽히나 쉬이 넘어가지 못하고 머물러 서있게 만드는 글들을 읽었다.
저자의 시집을 한 권쯤은 읽은 줄 알았는데, 계절 산문이 처음 읽게 된 그의 글이고 시집을 보관함에 담아둔다.

시간들이나 그때의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글들은 마음을 누른다.
아마도 숲이 울창해 지고, 다시 앙상해지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그런 문장들을 계속 곱씹어 읽어본다.




과거를 생각하는 일에는 모종의 슬픔이 따릅니다. 마음이 많이 상했던 일이나 아직까지도 화해되지 않는 기억들이 슬픔을 몰고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문제는 즐겁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은 장면을 떠올리는 것에도 늘 얼마간의 슬픔이 묻어난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것은 켜켜이 쌓인 시간이 만들어낸 일이라 생각합니다. 숲이 울창해지는 일도 다시 나무들이 앙상해지는 일도 이러한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 p.39

낮이 분명하게 길어졌습니다. 저는 하루종일 저의 하루를 살아가느라 이렇게 지쳤는데 어둠은 조금 전에야 막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허정허정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초입에는 어느 집 담장 너머 만발한 능소화들이 이정표처럼 서 있습니다. 이 길이 제 집으로 가는 길이 맞는다는 듯이, 혹은 지금부터가 여름이라는 듯이.
능소화는 바람에 흔들리고 덩달아 능소화가 만들어낸 그림자도 흔들립니다. 발끝으로 그림자를 몇 번 따라 짚어보다가 그만둡니다. 온통 흐르는 것들을 지나 드디어 제 방으로 돌아옵니다. 제가 누우면 하루와 어둠과 가난도 따라 눕습니다. 함께 잠이 듭니다. 벌써부터 방은 덥고 새벽쯤 땀을 흘리며 잠이 깬 저는 일어나 물을 마십니다. 물을 마시고 살금살금 자리로 돌아와 조용히 다시 눕습니다.
- p.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스러운 사이 - 제주 환상숲 숲지기 딸이 들려주는 숲과 사람 이야기
이지영 지음 / 가디언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에 대한 정보 없이 -가령 몇 군데의 TV에 출연했다는 사실 같은 것- 오로지 표지가 주는 매력에 이끌려 집어든 책이다. 책을 읽는 내내 환상숲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든다. 다음번 제주에 '환상숲곶자왈공원'을 예매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버려진 땅을 일군 아버지와 어머니, 평생 인연을 맺은 남편과, 두 아이들의 이야기가 숲책 곳곳에 스며들어 있으니 다 읽고 한 번 더 책의 숲으로 들어갈 볼만하다.




  내가 안내했던 손님 중 가장 고령의 어르신은 96세 할머님이시다. 이른 새벽 일어나 깨끗한 물을 묻힌 참빗으로 곱게 빗은 듯 정갈하게 묶은 머리는 검은빛이 전혀 없는 은발이었다. 손이나 얼굴의 잔주름이 나무의 나이테처럼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양옆 손자들의 부축에 손사래를 칠 만큼 정정하셨다.

  다행히 그 시간대에 다른 일행에도 어르신들이 많이 참가하셨다. 덕분에 천천히 느긋하게 숲을 둘러보는 시간이 되었다.

  중간쯤 돌았을 때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집어 들어 지팡이 대용으로 사용하시던 칠십대 할머님이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으셨다. 그러고는 당신께서는 더 이상 못 가겠으니 여기서 멈추겠다고 앓는 소리를 했다. 그러자 96세 할머님께서 나직한 목소리로 꾸짖으셨다.

  "야! 내가 네 나이면 시집을 한 번 더 갔겠다."

  다 함께 깔깔 웃었고, 덕분에 칠십대 할머님 또한 나머지 길을 가뿐하게 걸으셨다. 너무 멋지지 아니한가? 나도 그런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p.30~31)


  이제는 우리 아이들이 똑같이 싸우고 있다. 아직 말도 잘 못하는 둘째가 어찌나 오빠의 성질을 건드리는지, 왜 첫째는 가만있는 둘째를 이유 없이 건드리고 가는지, 왜 똑같은 장난감이 두 개여도 하나를 가지고 싸우는지 하루라도 조용히 넘어갈 때가 없다. 그래도 저렇게 싸우는 시간이 쌓이면, 서로에게 가장 진솔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는 걸 알고 있다. 또한 이렇게 많이 싸워본 아이가 다른 자리에 가서도 쉽게 주변 사람들과 맞춰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무도 서로 자리 경쟁을 하며 자랄 때 더욱 크게 자라난다. 그렇다고 마냥 경쟁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며 서로 타협하기도 하고 양보하기도 하면서 본인들의 살아갈 공간을 만들며 궁극적으로는 숲을 이룬다. 갈등이 있기에 고민이 있고 발전이 있고 화목이 생기듯, 부딪히는 것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두 형제를 통해 배운다.


(p.51~52)


  "돈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진 세상입니다. 화려하고, 간단하고, 편리합니다. 저희는 어려운 길을 택했습니다. 남들은 결혼식 준비를 위해 피부마사지를 받지만, 저희는 꽃을 심고 돌을 나르고 바느질을 했습니다. 조금은 어색하고 서툴고 불완전할 테지만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부터 끝날 때까지를 모두 함께한다는 것이 더욱 의미 있지 않을까요?"


(p.1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유지혜 지음 / 김영사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린 시절 나는 여느 아이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동네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손가락이 길어 한 옥타브를 무리 없이 누르고, 숙제도 성실하게 해오는 학생이었다. 유년 시절이 지나 집에 있던 피아노가 어디론가 사라진 뒤에도 학교 음악실이나교회에서 틈나는 대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피아노 치는 것을꽤 좋아했다. 그러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곡 연습에 돌입했다. 좋아했던 남자애가 피아노를 멋들어지게 잘 쳤기때문이다. 피아노를 잘 쳐서 걔를 좋아했던 건지, 걔가 좋아서 - P21

피아노 치는 모습마저도 좋았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피아노를치는 남자에게 반하지 않기란 거의 도전에 가깝다는 사실을그때 알았다. - P22

"좋아한다, 가 사투리로 뭐예요?" (뻔뻔하기도 하지) 그가 웃으며 답했다.

"좋아하맨마씸."

술에 취한 나는 그 말이 잘 외워지지 않아 말하고 또 말했다.
섬에 사는 사람들의 언어는 바람 소리를 이길 만큼 억세다고들었다. 강력 접착제처럼 입에 착 달라붙는 발음 외국어로 들릴 만큼 이국적이었다. 망설임을 뒤로하고 마침내 내뱉는 청년의 고백처럼 그 말은 단단해 보였다. 살랑살랑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가을밤, 닿을 듯 말 듯 젊고 아름다운 기운이 우리를 - P57

에워싸고 있었다. 그와 더 가까워지기 직전, 백지상태의 머릿속에서 여러 호기심이 떠올라 잠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어떤사람일까?‘ ‘어떤 음악을 들을까?‘ ‘어떤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할까?‘ 그날 우리는 편의점 앞 벤치에서 밤을 새웠고, 다음 날아침 나는 비행기를 타고 내가 속한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좋아하맨마씸. - P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순한 진심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읽은 조해진작가의 소설이다. 책을 읽는 것도 몇 줄의 후기를 남기는 것도 버거운 시간인데. 소설이 힘이 되고 위안이 된다. 오래전에 읽어 줄거리는 희미하지만, <로기완을 만났다>의 로기완과 <단순한 진심>의 문주를 보면 작가가 쓰고 싶고 말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어떤 것들인지 짐작이 된다.

(책 속에서)

백복순과 백복희를 만나기 전까지, 연희는 대학 시절의 나와 비슷한 질감의 시간을 보냈을 거라고 나는 확신했다. 이유도 모른 채 태어나 의지와 상관없이 사는 것일 뿐, 근원적인 마음의 끝은 죽음에 닿아 있던 그 암전의 시간 말이다. 그랬으므로, 연희는 아픈 백복순과 백복순이 낳은 백복희를 외면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 외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 모녀는 연희에게 두 번이나 지켜 주지 못한 생명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고 다시는, 어떤 생명이든, 차갑게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을 테니까. 생명은 연희에게 위로이자 구원이었을 테니까.

- p.1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고 어느 퇴근길에 선물 같은 순간을 한 번 더 만날 수있었다.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구간인 옥수역과 압구정역 사이에서, 지하철 디제이가 말했다. 한강을 지나고 있으니 고개를 들어 밖을 보시라고, 잠깐이라도 마음에 여유를 가지시라고, 마침 해가 지고 있었고 세상에 다시 없을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나는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 모든 게 엄청나게 황홀한 우연, 그러니까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 P1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