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자 - 2012 제36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최민석 지음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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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수는 그 풍경을 뒤로하고, 훈련을 하고 있었다. 트레이닝복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쓴 채, 손에는 붕대를 감고 빗줄기를 비추고 있는 가로등을 향해 주먹을 뻗고 있었다. 어느덧 체중을 감량한 53세의 공평수는 놀랍게도 상체를 좌우로 날렵하고 리드미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매끄러운 동작 뒤로 달빛을 받은 밤바다가 보였다. 바람의 입김으로 밤바다의 살결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허공엔 빗방울이 애잔하게 뿌려지고 있었고, 그 허공으로 상체를 움직이며 주먹을 뻗는 공평수는 흡사 빗방울이라도 때리려는 듯했다. 그 풍경은 어떤 힘이 있었는지 나를 얼어붙게 했다. 나는 먼발치에 서서 발을 떼지도 못한 채, 그의 동작을 계속 응시했다. 주먹은 허공을 향해 뻗어지고 있었고, 그 허공 속에서 빗물이 부서지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그를 조롱했던 언어와 멸시했던 눈빛들도 부서지고 있다, 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훈련이 단지 복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삶은 무의식적으로 이산화타노만 내뱉으면 살아지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 주는 하나의 주장처럼 인식되었다. 그가 뻗는 것은 주먹이지만, 그가 하는 것은 복싱이지만, 그의 행위에는 그 어떤 주장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p168~169)

* 올해 최민석의 에세이와 소설을 꾸준히 읽었는데, 참 일관성이 있는 작가다.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왜? 이 작품이 수상작인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재미는 있지만 탁월하지는 않다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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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한 것들의 세계 - 가장 크고, 가장 빠르고, 가장 치명적인 생물의 진화
매슈 D. 러플랜트 지음, 하윤숙 옮김 / 북트리거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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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희생자는 나무가 아니라 북대서양대합quahog clam, 아르크티카 이슬란디카Arctica islandica로, 기후변화를 연구하던 연구자들이 수심 80m의 차가운 해저에서 비슷한 부류의 다른 조개 200개와 함께 이 대합을 건져 올렸다. 대합은 몇백 년이나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나무가 나이테를 더하듯 조개도 매년 껍데기에 성장선을 더해 간다. 여기에는 형성 시기의 환경과 관련한 엄청난 정보가 담겨 있다. 나이테와 마찬가지로 성장선도 성장 여건이 우호적일 때 더 커진다.

대합은 가장 흔하게 잡히는 조개 종류였으므로(혹시 클램 차우더를 먹은 적 있다면 몇백 년 정도 살다가 잡힌 동물의 살을 먹어 소화했을 수도 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과학자들은 흔히 어부들이 그러듯이 잡은 조개를 전부 배 안의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이후 실험실로 돌아가 조개 성장선을 세기 시작한 과학자들은 그제야 비로소 자신들이 잡은 조개가 이제껏 연구한 다른 어떤 것보다 오래 산 조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세었을 때는 조개의 나이가 405살이었다. 다시 세어 보고, 방사성탄소연대측정까지 시도해 보니 한 세기가 늘었다. 태어났을 당시 중국이 명나라 왕조여서 ‘밍Ming‘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 조개는 죽을 때 507살이었다.(p.174~175)


* 명나라 때 태어난 조개 조오오오오오상님이라니! 또 4800년 이상 산 강털소나무...(트로이를 세울 무렵 태어난) 소나무 조오오오오오오오상님이라니! 이 책은 차례에 소개된 대로 큰 것들, 작은 것들, 오래 사는 것들, 빠른 것들, 시끄러운 것들, 강인한 것들, 치명적인 것들, 똑똑한 것들에 대한 상식을 뛰어넘는 과학적 발견, 혹은 연구 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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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과 O
김현 외 지음 / 알마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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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나는 자연스럽게 <인디아나 존스>에 빠졌다. 아서왕의 전설을 따라 성배와 성궤를 찾고 나치와 맞서 신비한 고대의 힘을 선한 편(미국...)에 돌려주는 고전적이면서 현대적인(당시 기준으로) 대모험 판타지. 이 영화에 빠진 것이 나뿐만은 아니겠지만 나는 좀 많이 빠진 것 같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5학년 때까지 매번 장래희망에 고고학자를 써냈으니 말이다. 어느 날 내 머리가 좀 컸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나를 불러, 아들아, 한국에는 고고학자가 없단다, 있다 해도 인디아나 존스처럼 모험을 하는 게 아니라, 방구석에 처박혀 한자나 본다며 꿈을 산산조각 냈다. 아버지는 이후에도 내 꿈을 여러 번 조각냈는데 고고학자 이후 탐정으로 장래희망을 바꾼 뒤에는 불륜 커플 뒤꽁무니나 쫓는 일이다, 라고 했고 소설가가 될 거라는 말에는 소설가는 직업이 아니다, 그건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다(이 말은 모순적이지만 진정성의 차원에서는 진실에 가깝다...), 영화감독이 될 것이라는 말에는 영화감독은 그저 여배우나 만나려는 눈먼 자들일 뿐이다라고 했다. 결국 그가 원한 나의 장래희망은 의사나 검사였는데 그것이 고고학자보다 나와 거리가 더 멀다는 사실은 머지않아 그와 나 둘 모두 알게 되었고 나는 소설가가 되었다.(p31~32, 정지돈의 글)

* 책 전편을 구성하는 작가들의 글들은 기대에 못미쳤지만, 옮겨 적은 정지돈의 글을 읽고는 슬몃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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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청춘 - 어른 되기가 유예된 사회의 청년들
장 비야르 지음, 강대훈 옮김 / 황소걸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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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이게도 여가 혁명과 인터넷 혁명은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기만의 시간'을 위협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위의 두 흐름에 매몰되지 않는 법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예를 들어 전화나 인터넷에 매몰되지 않고, 아이들을 학교 수업 외에 3~4가지 방과 후 활동에 보내지 않고, 특정 기간에는 뉴스나 신문을 보지 않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자기 시간에 대한 현대인의 갈증은 요가와 에로티시즘 시장의 성장에서 잘 드러난다. 지난 1세기 이래 개인이 내밀한 관계를 맺는 파트너 숫자는 4~5배로 증가했다. 이런 현상은 어쩌면 자기 시간에 대한 지배력, 특히 가장 내밀한 시간을 되찾겠다는 몸부림의 표시인지도 모른다.

현대사회의 노동은 1900년대보다 육체적으로 훨씬 덜 힘들다. 그러나 대개 노동강도는 훨씬 높고, 더 스트레스를 받으며, 더욱 비대면적이다. 무엇보다 인터넷이 발달함에 따라 근무시간과 개인 시간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인터넷 덕분에 퇴근한 뒤에도 업무에 접속할 수 있는데, 이는 노동자에게 스트레스가 되므로 법적인 규제가 필요하다. 업무와 '단절될 권리'는 현재 제도화하는 중이며, 차츰 사회적 공감대도 생겨나고 있다.(p. 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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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의 넓이 창비시선 459
이문재 지음 / 창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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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크



회사 반대쪽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이십삼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등 뒤에서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스마트폰 전원을 껐다
이대로 가다 기차를 타면 바다가 나오리라
느리게 날카로워지는 능선에 눈길을 주다가
문득 내 이름을 불러보았다
이문재 이문재 이문재
부르면 부를수록 낯설어져서 그만두었다
버스는 마주 오는 차를 모두 비켜가며 달렸다
세상의 아침은 세상의 아침에게만 아침이었다
스마트폰을 껐는데도 내가 켜지지 않았다
다들 내보냈는데도 내가 들어오지 않았다
기차를 두어번 갈아타면 항구까지 가리라



별내



땅 이름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듯이

경기도 남양주 별내
그 먼 곳

당신이
내 생에서 떨어지지 않듯이



1인 시위



아마존 정글 속 나비 한마리 날갯짓이
카리브해 연안에 허리케인을 일으킨다는
나비효과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비가 1인 시위 원조라는 생각이 든다

한밤중에 구글어스 들어가 생각느니
어제 오후 턱뼈가 빠질 뻔했던 내 하품은
나비 날갯짓에 견주면 수백배 더 큰 파동이었을 텐데
그간 내가 떠벌린 말들 여기저기 써 갈긴 글들
나비 한마리 날갯짓에 비하면
수천만배 더 거대한 에너지였을 터인데

급상승 급강하 전후좌우 동서남북
구글어스 들어가 생각느니
이런 나비가 너무 많았구나
곳곳에 나비가 너무 많아서 문제였구나
눈짓 손짓 발짓은 물론이거니와
꿈과 희망 주의 주장이 너무 많았구나
나비가 아니고 온통 나비 날갯짓
하루하루 여기저기 1인 시위였구나

1인의 시위만 있고 1인의 삶은 없었구나
1인들의 시위만 있고 1인들의 사회는 없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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