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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하우스
스티븐 J. 굴드 지음, 이명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월
평점 :
생명의 다양성을 논하고 진화가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고자 애쓰는 이 책은 엉뚱하게도 야구 이야기에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저자가 다양한 잣대를 동원하여 지구상 생명체의 대표 주자로 박테리아를 꼽고 있는 방식을 그대로 원용하자면, 아마도 저자의 머릿속에는 야구가 가장 많이 들어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나도 야구를 좋아하는지라 큰 불만은 없었지만, 야구 이야기는 책의 전체 흐름을 따라가는데 도움이 되진 않았다는 느낌이다. '풀하우스'라는 표현으로 반복 강조하듯이, 저자는 진화론이 역사적으로 수반해온 진보 이데올로기, 인간(!)중심주의를 무너뜨리고 인간과 같은 소위 고등생물의 출현은 특정 출발점에서 시작된 다양성 증가의 우연한 결과일 뿐이라고 공들여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야구에서 4할 타자가 사라진 것은 다양성이 증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선수들의 전반적 수준이 증가하면서 일종의 평준화 경향이 나타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법하다.
물론 4할 타자 멸절의 이유를 다양성의 차원에서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해버릴 수는 없다. 야구는 생명 진화와는 또 다른 복잡한 측면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문에 진화 논의에서 야구 이야기는 곁길로 샌 느낌이 드는 셈이다. (사소한 점으로 역자는 한국어-영어-과학 세 분야의 실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들어 어려움을 호소했는데, 이 책의 경우 야구 지식도 상당히 필요했을 것이다. 다행히 상당한 지식을 보여주긴 했으나 안타깝게 자그마한 오역들도 눈에 띄었다.)
굴드가 사용하는 핵심적인 논리는 사실 생물학적이라기 보다는, 분포와 관련한 통계학적 상식에 해당한다. 여기에 '왼쪽벽'과 '오른쪽벽'이라는 특정 분포의 상한과 하한을 두고 이 한계의 존재가 야기하는 결과들을 설명하고 있다. 이 '벽'의 개념을 이해시키기 위해, 야구 이야기의 앞과 뒤에 자신의 투병 경험 에피소드와 술취한주정뱅이 모형을 동원한 점은 성공적인 도구였다.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한 가지 의문은, 진화를 진보와 동일시하는 습관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렇게 복잡한 설명들과 함께 박테리아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방법 밖에 없었을까 하는 점이다. 어쩌면 진보가 내포한 문제점은 특정 기준을 설정하고 비교를 시도하는 것일텐데, 굴드도 박테리아를 칭송하면서 (자기 나름의) 기준을 동원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이 책은 한 진지한 학자가 독자들을 향해 던지는 진지하고 유머섞인 대화의 시도이다. 내가 굳이 길게 비평한 것은 아마 기대했던 바가 컸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