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은 왜? - 두 위대한 철학자가 벌인 10분 동안의 논쟁
데이비드 에드먼즈 외 지음, 김태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들은 다큐멘터리 작가와 PD이다. 이 점은 책의 스타일에 대해 많은 것을 이미 알려준다. 잘 만들어진 TV 다큐멘터리처럼 짜여진 이 책은, 약간이라도 현대 철학에 관심 가진 이들의 흥미를 끄는 한 사건을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이어지는 여러 증인들과의 인터뷰 장면은 물론 실제 TV 다큐멘터리였다면 아주 생동감있었겠지만 문자매체인 책에서는 약간 혼란스럽다. 다행히 이 책은 문자매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틈틈히 풍부한 사진 자료를 첨부하여 이해를 돕고 있다. 여전히 독자는 본문과 사진들을 스스로 찾아서 연관시켜야 하는 수고를 감내해야 하지만.

물리적 폭력을 동반된(?) 두 위대한 철학자간의 10분간의 논쟁에 대한 소개와 증인들 인터뷰에 이어, 이 책은 이들을 연결하는 중요 고리인 버트란드 러셀을 소개하고, 곧이어 두 주인공의 전기(biography)로 그 정체를 바꾼다. 학문과 예술의 기운이 넘치던 20세기 초 오스트리아 빈에서 자라난 개종 유태인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진 포퍼와 비트겐슈타인이 어떻게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말하자면 책의 대부분은 두 위대한 지성에 대한 '동시상영' 축약본 전기인 셈이다.

물론 첫 장면에서 지나친 기대를 품지만 않는다면 매우 읽기 쉽게 잘 씌어진 책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면서 몇가지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이 책의 모티브로 사용된 부지깽이 사건은 비록 참석했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 사실이지만, 좁은 방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여러 증언이 다른 것에서 알 수 있듯 그저 하나의 해프닝일 가능성이 높다.

둘째로 포퍼는 비트겐슈타인을 대단한 적수(?)로 생각하고 이 날의 만남을 준비하였을 뿐 아니라 후에도 이 사건을 인생에서 중요한 기점으로 생각하였으나, 비트겐슈타인에게도 과연 '부지깽이 사건'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졌던 건지 적어도 이 책이 알려주는 바에 의하면 의심스럽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책의 제목은 비트겐슈타인의 부지깽이다. 단지 그가 그걸 휘둘렀다는 이유로 (그가 부지깽이를 그런 식으로 만진 것이 처음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세째 불만은 이 책의 중심 메시지에 대한 것이다. 이 책은 포퍼와 비트겐슈타인 개인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평소 이들의 사상을 잘 몰랐던 사람이라도 이 책을 통해 이 시대에 회자되는 위대한 지성들을 마치 한 번 정도는 만나본듯한 느낌을 갖게 해준다. 문제는 마치 이들의 중요한 사상이 이 책이 설명하는 그런 개인적 정황들에 의해 전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책을 '쉽게' 쓰려는 노력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사실 '평소 이들의 사상을 잘 몰랐던' 독자는 이 책을 읽고 난 뒤에도 여전히 이들의 사상에 대해 크게 알게 된 것이 없을 것이다. (참고로 나는 러셀의 책을 읽어본 적이 있고, 포퍼 사상에 대해 약간 알고 있었고,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서는 별 아는 바가 없었다. 책을 읽고 난 후의 내 상태는 여전하다.)

이 책은 포퍼를 훌륭하지만 컴플렉스에 시달린 인물로, 그래서 비트겐슈타인과의 만남에 대해 과장 내지 거짓말까지 한 인물로 묘사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주위 인물들의 입을 빌려)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가진 천재로 묘사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왠지 책의 논조는 비트겐슈타인의 손을 들어주는 듯하면서도, 인물의 개인적 내면을 보여준다는 차원에서는 포퍼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듯하다.

포퍼가 자서전에서 거짓말(?)을 쓴 것은 과연 불완전한 기억 때문인가, 아니면 20세기 철학의 유명한 한 스캔들마저도 '반증가능한' 사건으로 만들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고자 했음인가...이 책의 내용이 TV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진다면 아주 훌륭한 교양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책으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에서 TV교양물보다는 좀 더 수준 높은 내용을 기대한 것이 무리였을까? 즐겁게 읽었으면서도 남는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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