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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일본의 근대 ㅣ 이산의 책 14
마루야마 마사오+가토 슈이치 지음, 임성모 옮김 / 이산 / 2000년 8월
평점 :
일본을 번역 왕국이라고들 한다. 사실 출판물 중 번역물 비중을 비교해 볼 때 유럽 국가들에 비해 크게 높지도 않을 뿐더러, 최근에는 번역물 비중이 떨어지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발빠르게 서양 문물을 번역을 통해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다. 일본의 번역 역사는 근대화 이전부터 중국(과 우리나라?)의 문헌들을 들여가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 변방의 섬나라로서 불리한 위치를 적극적인 번역과 문화 수입으로 극복하고 나름의 발전을 이루었다고 하겠다.
사실 이 책은 매우 독특하다. 일본의 사상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집필을 맡았던 한 노학자가 건강의 이유로 또다른 (약간 젊은?) 노학자에게 이 임무를 넘겼고, 두번째 학자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선임자의 의도를 이해하고 방향을 잡기 위해 그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기록이 바로 이 책이 되었다고 한다. 책의 탄성 과정상 내용의 진행은 자유로우면서도 나름의 질서를 갖추고 있어 대담의 주인공들의 안목에 놀라게 된다. 이들은 단지 번역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번역을 매개로 하여 일본이 어떻게 외부 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화의 길로 걸어갔는지를, 몇몇 주요한 사상가들을 위주로 놀랍도록 상세하게 이야기한다.
사실 나는 일본의 역사에 대해 그리 아는 바가 없어서 낯선 인물, 낯선 사건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이 책의 번역자가 매우 상세하게 첨부한 역주 덕을 좀 보기도 했다. 하지만, 상세한 역주 자체는 일종의 학문적 업적인 것 같고, 나같은 평범한 독자는 그저 두 노학자의 대화를 대강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경험이었다. 한문을 읽고 있는 자신이 번역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던 일본의 중세 사상가로부터, 역자 후기에 수록된 에피소드에서 '문민'이라는 표현을 만들기 위해 토론하는 전후 일본 국회의원들의 논의까지, 진지하게 낯선 문화를 대하는 일본의 모습을 보았다. 너무 빠른 시간에 수동적으로 근대화를 맞아버린 우리 사회의 모습이 처량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