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붓다 - 바람과 사자와 연꽃의 노래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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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간 읽어보고 싶은데' 하고 눈에 밟히는 책 중에는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북드라망, 2021)도 있다. 저자는 고전평론가 고미숙. 우연한 계기로 《청년 붓다》를 통해 저자를 먼저 접하게 되었다.


인간은 죽고 태어나기를 되풀이한다는 윤회설, 새해가 되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절에서 소중히 가져와 현관에 붙이던 부적, 부처님께 108배를 하면 간절히 바라던 일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 '불교'라는 말을 접하면 흔히 이런 모습을 떠올렸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어떤 작업을 계기로 불교를 다룬 책과 스님이 쓴 책을 여러 권 읽고, 불교 신문을 읽고, 유명한 스님들의 유튜브 설법도 챙겨보았다. 아이가 걸음마를 떼듯 하나둘 톺아나갔다. 그런데 어릴 적 어른들의 어깨너머로 보고 들으며 가졌던 불교의 이미지와 이제야 새로 알아가기 시작한 불교는 왜 이리 다르단 말인가. 불교에 없는 말은 아닌데, 와전되어 잘못 알고 있었던 이야기. 알면 알수록 '불교는 이런 거래'라는 해묵은 이야기들이 산산이 조각났다.


청년 붓다는 이른 나이에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나.


고전평론가인 저자는 이 책에서 붓다의 생애를 시간순으로 들려준다. 붓다는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으며 어떻게 부처가 되었는가. 맛보기로 이야기하자면 붓다는 지금의 네팔 카필라바스투 지역에 터를 잡은 샤카족의 슈도다나 왕과 마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다. 12세에 태자로 책봉되는데,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다.


문체는 구어체에 가까워서 제법 술술 읽힌다. 딱딱한 문체에 익숙한 터라 부들부들한 문체에 적응하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책 중반을 넘어서니 옆집 언니 목소리를 통해 듣는 듯 친숙하게까지 느껴졌다. '탐(貪), 진(瞋), 치(痴) 삼독(三毒)' 같은 조금은 생소한 불교 용어가 가끔 나오는데, 앞쪽에서 언급하며 풀어서 설명해 주어 그리 어렵지 않다.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차라리 삶의 철학에 가깝다.

붓다(석가모니)는 신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고자 한 우리 같은 사람일 뿐이다.


p.274

'불교'하면 가장 먼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반야심경』의 구절이 떠오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공(空)이 바로 연기다. 연기법은 생성과 소멸의 원리에 더하여 세계의 상호의존성, 곧 누구도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이치가 핵심이다. 세상이 모두 연기적 조건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누구도, 그 어떤 대상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신이건 인간이건 그 무엇이건. 이것이 바로 공의 핵심이다. 공은 '없다'가 아니다. '허무하다'는 더더욱 아니다. 무상하게 흘러가는 변화 그 자체다. 고로,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하다.

연기법을 깨닫는 순간 고타마 존자는 붓다가 되었다.


p.279

세계를 움직이는 다르마는 연기법이다. 만물의 상호연관성이 그것이다. 이 연기법을 모르면 무명에 갇혀 괴로움을 겪게 된다. 그럴 때 인간은 탐진치 삼독을 '내 것' 즉 '자아'라 여기고 그것을 굳게 지키려 한다. 한 철학자의 언어를 빌리면, '생명의 바다에 무명의 폭풍이 몰아닥칠 때 자아라는 괴물이 우뚝 솟아난다.' 이 자아라는 망상에서 벗어날 때, 그것이 곧 열반이다.


p.301

무아는 달리 표현하면 존재와 세계의 상호작용을 의미한다. 나라고 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면 더 이상 이기적인 욕망에 복무할 이유가 없다. 자연스럽게 그 마음은 타자와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당연한 일이다. 나의 욕망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에서 어떻게 타자와 연결될 것인가로 나아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연결이 곧 생명이고 운동이다. 따라서 무아는 결코 허무주의, 비관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자아의 감옥에 갇혀 있다가 비로소 그 감옥의 벽을 부수고 나온 격이니 그야말로 환희용약하지 않겠는가. 그 자유와 기쁨의 파동이 마음의 경계를 넘어 확장해 가는 것이 바로 자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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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미술관 - 지친 하루의 끝, 오직 나만을 위해 열려 있는
진병관 지음 / 빅피시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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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다는 행위를 새삼스레 곱씹어본다. 따분함을 견디지 못해 끝내 책장을 덮어버린 책은 그렇다 쳐도, 적어도 흥미진진하게 읽은 책은 재미나게 읽은 만큼 선명히 기억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기억 속에 고이 담아두었다가 문득 생각날 때 꺼내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다고 모조리 필사를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책을 다 읽고서 '막연한 느낌'만 남는 나의 독서 방식을 어떻게 고쳐볼 순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김영하 작가가 한 말이 떠올랐다. 한동안 살뜰히 챙겨본 예능 <알쓸인잡>에서 김영하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은 책을 읽고 나면 내용의 70% 이상은 바로 잊는다고. 하지만 책을 기분 좋게 봤다는 느낌은 남기 마련이라고. 아무래도 방금 다 읽은 책의 내용을 섬세히 떠올리지 못하는 건 나 뿐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 《위로의 미술관》을 읽으며 마음의 위안은 얻었지만, 어느 지점에서 왜 미소 지었는지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들 내 탓은 아닌 거다. 틈틈이 펼쳐 읽을 때마다 마음이 따스해졌으니, 그걸로 되었다. 그럼에도 잡아두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 끄적이는 중.


《기묘한 미술관》으로 독자들을 만난 적 있는 저자는 《위로의 미술관》을 통해 오늘날 많은 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회화 작품에 얽힌 이야기와 화가의 일생을 들려준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되는 날', '유난히 애쓴 날', '외로운 날', '휴식이 필요한 날'. 총 네 개의 장에 저마다 어울리는 화가를 배치했다. 화가 한 명당 6, 7쪽 정도의 페이지를 할애해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위로'라는 책의 취지에 걸맞게 말이 쉽고 부드러워서 가뿐하게 읽기 좋다.

고흐, 모네, 모지스, 마티스, 프리다 칼로, 고갱, 몬드리안처럼 무척 익숙한 화가들에서부터 알폰스 무하, 조르주 쇠라, 귀스타브 쿠르베, 칼 라르손, 라울 뒤피처럼 어디에선가 한 번쯤 작품을 본 적은 있지만 이름은 생소한 화가들까지. 미술을 그리 깊이 알지 못하는 내가 읽기에 제격이었다.

다만 주제별로 화가를 엮어서 읽는 내내 시대가 끊임없이 넘나드니 누군가에겐 머리 아프게 느껴질 수도 있을 듯하다. 물론 조각난 시대를 퍼즐 맞추는 머릿속에서 끼워맞춰 보는 재미도 있다.


--p.134

뒤피는 "삶은 나에게 항상 미소 짓지 않았지만 나는 언제나 삶에 미소 지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평생 즐거움이 담긴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인생도 누군가의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린 시절은 가난했고, 작품 활동을 왕성히 하던 시기에는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으며, 노년에는 육체의 고통을 경험했다. 그의 인생은 그림 속 음표처럼 오르락내리락했고, 그가 사랑한 파도처럼 몰아치며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삶에 미소를 지으며 단조보다 장조를, 우울한 날보다는 눈이 부시게 빛이 좋은 날의 파도를 그려냈다. 그리고 모든 걸 경험한 그는 우리에게도 물러서지 말고 무엇보다 삶의 주어진 기쁨을 느끼라고 지금도 말하고 있다.

--


앞서 살다 간 화가들의 생애를 읽는데 왜 위로가 될까?

내가 좋아하는 이 그림을 그린 그의 삶도 나 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구나. 사는 내내 힘들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했던, 그저 나와 같은 사람이구나. 이렇게 삶을 마주한 한 인간으로서의 연민, 동지애 같은 것을 느끼기 때문 아닐까. 마냥 기쁨만 있을 수는 없다. 때로는 삶이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다. 산다는 건 그런 거니까.


뒤피는 "삶은 나에게 항상 미소 짓지 않았지만 나는 언제나 삶에 미소 지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평생 즐거움이 담긴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인생도 누군가의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린 시절은 가난했고, 작품 활동을 왕성히 하던 시기에는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으며, 노년에는 육체의 고통을 경험했다. 그의 인생은 그림 속 음표처럼 오르락내리락했고, 그가 사랑한 파도처럼 몰아치며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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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것의 역사 - 개역판
빌 브라이슨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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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책을 읽을 때, 작가가 어떤 생을 살아왔는지 떠올리며 읽는 편이다. 언제부턴가 그러기 시작했으니 그 '언제부턴가' 이전에는 그러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한데... 번역을 공부하면서 생긴 일종의 버릇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 책의 저자는 책 좀 읽는다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본 빌 브라이슨. 미국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유럽을 여행하다가 반해버린 영국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영국 시민권을 획득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스테디셀러를 여럿 남긴 작가. 1951년에 태어났으니 지금은 일흔둘 정도 된 할아버지다. 여행작가가 쓴 과학책이라니. 책 두께는 제법인데 그 깊이도 두께와 같으려나. 반신반의하며 책을 펼쳤는데, 대뜸 빌 브라이슨이 축하 인사를 건넨다.


p.13

당신을 환영하고 축하한다. 나에게는 당신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 큰 기쁨이다. (중략) 우선, 당신이 지금 이곳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각자 떠돌아다니던 엄청나게 많은 수의 원자들이 놀라울 정도로 협력적이고 정교한 방법으로 배열되어야만 했다. 너무나도 특별하고 독특해서 과거에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 존재하지 않을 유일한 배열이 되어야만 한다. 그 작은 입자들이, 우리가 바라듯이, 앞으로 많은 시간 동안 아무 불평도 없이 정교하고 협동적인 노력으로 당신의 육체를 유지시켜줄 것이고, 그런 노력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주지도 않을 우리에게 귀중한 삶을 경험하도로고 해줄 것이다.

서늘한 실험실 기운 물씬 풍기는 원자 단위의 깨알 같은 축하가 어쩐지 따스하다.


우주, 태양계, 지구를 이루고 있는 물질, 원자, 세포, 빙하기.

빌 브라이슨은 이런 것들에 대해 '인간이 얼마나 알고 있는가'보다는 '인간은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책에서 설명하는 방대한 지식을 온전히 머릿속에 욱여넣기란 불가능하지만, 인간이 어느 시기에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디까지 알게 되었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인간은 한낱 먼지 같은 존재'라는 이제는 너무 뻔해 무감각해진 표현이 세상 절절히 와닿는다.


빌 브라이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류'의 역사는 '지구'의 역사를 기준으로 할 때 손톱의 때만큼이나 하잘것없다.


p.380

지구의 45억 년 역사에서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최근에 등장한 것인가를 더 잘 이해하려면, 두 팔을 완전히 펴고, 그것이 지구의 역사 전체를 나타낸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중략) "인간의 모든 역사는 손톱줄로 손톱을 다듬을 때 떨어져 나오는 중간 크기의 부스러기 하나에 들어간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라더니, 온통 지구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잖아?'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면, 이쯤에서 이 책의 제목 '거의 모든 것(Nearly Everything)'이라는 말속엔 우주와 지구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손톱 부스러기만큼 사소한 '인류'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거의 없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지구의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 손톱의 때만큼 사소한 존재인 인류는 끊임없이 지구를 생각하고 상상한다. 지구상에서 '상황을 충분히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생물'도 우리 인간뿐이다.


책의 처음을 축하와 감사로 열었던 빌 브라이슨은 책의 마지막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행운과 능력으로 눈길을 돌린다,



p,536

이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이 엄청난 행운이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살아있는 모든 생물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우주에서 어떤 형태이거나와 상관없이 생명을 얻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성과이다. 물론 인간인 우리는 두 배의 행운을 얻은 셈이다. 우리는 존재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 가치를 인식할 수 있고 다양한 방법으로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이제 겨우 이해하기 시작한 능력이다.







당신을 환영하고 축하한다. 나에게는 당신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 큰 기쁨이다. (중략) 우선, 당신이 지금 이곳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각자 떠돌아다니던 엄청나게 많은 수의 원자들이 놀라울 정도로 협력적이고 정교한 방법으로 배열되어야만 했다. 너무나도 특별하고 독특해서 과거에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 존재하지 않을 유일한 배열이 되어야만 한다. 그 작은 입자들이, 우리가 바라듯이, 앞으로 많은 시간 동안 아무 불평도 없이 정교하고 협동적인 노력으로 당신의 육체를 유지시켜줄 것이고, 그런 노력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주지도 않을 우리에게 귀중한 삶을 경험하도로고 해줄 것이다. - P13

지구의 45억 년 역사에서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최근에 등장한 것인가를 더 잘 이해하려면, 두 팔을 완전히 펴고, 그것이 지구의 역사 전체를 나타낸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중략) "인간의 모든 역사는 손톱줄로 손톱을 다듬을 때 떨어져 나오는 중간 크기의 부스러기 하나에 들어간다." - P380

이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이 엄청난 행운이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살아있는 모든 생물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우주에서 어떤 형태이거나와 상관없이 생명을 얻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성과이다. 물론 인간인 우리는 두 배의 행운을 얻은 셈이다. 우리는 존재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 가치를 인식할 수 있고 다양한 방법으로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이제 겨우 이해하기 시작한 능력이다. - P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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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책 쏜살 문고
토베 얀손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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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도 외할머니와 이렇게 지낼 수 있었을까?'

나를 바라보던 내 순간 그러했듯이, 아마도 여전히 한결같은 미소를 지으며 하늘에서 세상을 굽어보고 계실 외할머니가 읽는 내내 떠올랐던 책.

(여담이지만 내가 사리를 분별하고 남들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외할머니는 귀가 많이 안 들리셔서 농담을 주고받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곳은 모두 정정하셔서 아흔이 넘도록 밭일을 하며 지내셨다)


머릿속에 떠오른 궁금증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보고 어른 앞에서도 할 말은 하는 당찬 아이 소피아, 부러질지언정 좀처럼 휘지 않는 성깔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손녀딸과 언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소피아의 마음만큼은 다치지 않게 석양처럼 소피아를 감싸주는 할머니.


매해 따스한 계절이 되면 소피아와 아버지와 할머니는 외딴섬에 있는 별장을 찾는다. 낯선 친구들을 별장에 초대하기도 하고, 할머니와 풀밭에 누워 하늘나라를 상상해 보기도 한다. 섬을 통째로 삼켜버릴 것 같은 폭풍우를 함께 겪기도 하고, 죽은 오리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이웃 섬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낯선 이들을 몰래 정찰하다가 부끄럽게 들키기도 한다.


예상을 깨는 어린아이의 당돌함이 읽는 내내 신선했는데, 그 당돌함은 아이의 언행을 어떤 방식으로든 포용할 수 있는 지혜를 지닌 할머니의 토양에서 싹텄을 거란 점은 굳이 말로 드러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 '토베 얀손'은 그 유명한 무민 시리즈를 연재한 작가다. 1914년 핀란드에서 태어나 주로 회화 작품 활동을 하다가 무민 시리즈를 연재하며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안데르센상을 수상했고, 인생의 후반부에는 다수의 소설 작품을 집필했다. 묵직한 여운이 있었던 토베 얀손의 다른 소설집 <두 손 가벼운 여행>과 영화 <토베 얀손(Tove)>(2020)까지 접한 뒤 이 책을 펼쳐보니 아무래도 <여름의 책>에 등장하는 천방지축 소피아와 담배를 좋아하는 소피아의 할머니는 모두 토베 자신을 글로 그려낸 것만 같다.


펼치고 싶은 것이 많을 예술가로서의 섬세한 내면과,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을 한 인간으로서의 내면.




"책은 안 되겠어." 소피아가 성을 내며 말했다. "맞춤법을 계속 고민해야 하면, 그것 때문에 방해가 돼서 생각을 할 수가 없잖아. 그럼 어디까지 썼는지도 기억이 안 나고. 그럼 다 뒤죽박죽이 될 거야!"
책은 여러 장으로 되어 있었고, 전부 엮어서 제본이 되어 있었다. 소피아는 책을 바닥에 던졌다.
"제목이 뭐니?"
"조각난 지렁이에 대한 논문. 하지만 못 쓸 거야!"
"앉아서 불러 보렴." 할머니가 말했다. "뭐라고 쓸지 네가 말하면 내가 쓸게. 시간은 많잖아. 안경이 어디 갔지?"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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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불 선진국 - 연대와 공존, 사회권 선진국을 위한 제언
조국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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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은 뒤의 마음을 글로 정리하기 힘들 때가 있다. 이 책의 경우엔 술술 읽다가도 문득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아픔 위에 이 활자들을 쌓은 건가'라는 생각이 들어 먹먹했다. 독서 감상을 나중으로 미룰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은 이유다.


대한민국 앞에 붙는 '선진국'이라는 칭호는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의 희생을 대가로 미리 당겨 받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소외되었던 자들이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인 '사회권'을 이제는 자유권 수준으로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p.21

선진국 대한민국은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계급·계층·집단의 희생에 기초하여 이루어졌고, 불평등과 양극화라는 심각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선진국이라는 칭호는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이런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미리 당겨 받은 칭호다. 이 점에서 대한민국은 '가불 선진국'이다.


교수, 국가인권위원, 민정수석비서관, 법무부 장관 업무를 수행하며 오랫동안 고민해온 사안을 담은 책인 만큼 내용의 폭이 넓고, 사례는 구체적이고, 수치는 명확해서 읽는 맛이 있었다.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1, 2장에서 문재인 정부의 성과와 현재를 진단하고 3장에서 7장에 걸쳐 대한민국의 앞날에 놓인 과제를 하나씩 살펴보는 형식이다.

(3, 4장: 주거 및 지역 균형 / 5, 6장: 노동 인권과 경제민주화 / 7장: 사회적 차별)


세계 속 한국의 위상에 높아진 데에는 현 정권의 외교, 안보, 방역 성과가 큰 몫을 했고 정치, 경제, 민생 부문에서도 어느 정도 성과를 내었다는 게 저자의 의견이다. 언론자유지수는 높아졌고, 권력기관(국정원, 기무사령부)의 민간인 사찰이 폐지되었으며, 검경 수사권이 조정되고 공수처가 설립되었다. 건강보험 보장이 강화되었고 청년 정책의 폭이 넓어져 민생에 숨통이 트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소득·자산 격차가 심화했고, 집값은 여전히 오르고 있으며, 지방간 불균형도 여전하다. '위험의 외주화'로 인한 산업재해도 잇따르고 있다. 예상치 못한 코로나 감염병으로 인해 정부 중후반의 역량을 경제 살리기에 쏟아야 했던 고충은 백번 이해하지만 아쉬움이 따른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p.87

양극화 자체도 문제지만, 계층 상승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2018년 OECD는 한국의 저소득 계층이 중산층으로 이동을 하려면 다섯 세대, 약 15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발표한 바 있다(이는 OECD 평균인 135년보다 높은 수준으로, 미국, 영국, 이탈리아와 같은 수준의 시간이다).

p.90

2021년 7월 통계청의 <2020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수도권 인구가 처음으로 2,600만 명을 돌파했다. 총인구 5,182만 9,000명 가운데 50.2퍼센트가 수도권에 사는 것이다. (중략) 우리나라는 GDP의 51.8퍼센트, 일자리의 49.7퍼센트가 수도권이 집중되어있는 상태다.


흥미롭게 읽었던 대목은 '주거'를 다룬 3장이었다. 내 집 장만은 갈수록 요원해지고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하는 상황을 타개할 방법으로 다양한 주거 형태를 제시한다. '사회주택의 천국'이라 불리는 네덜란드의 총 주택 대비 장기 임대 공공주택 비율은 무려 34%에 달하는데, 20세기 초반에 유명 건축가들이 '사회주택은 사회적 예술'이라 여겨 디자인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덕에 뛰어난 미적 감각을 뽐낸다. 공공주택에 대한 멸시나 선입견은 없다. <도시별 삶의 질 순위 보고서>에서 10년 연속 1위를 차지한 비엔나에도 좋은 입지에는 멋진 디자인의 임대주택이 자리 잡고 있다.

주거는 물량 공세로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닌 만큼, 주거 문제를 분석한 뒤 '지역 균형'으로 자연스레 초점을 옮겨가는 저자의 식견이 명쾌했다. 5천만 인구 중 50%가 수도권에 살고 있으며 일자리의 49%가 수도권에 몰려있다는 <2020 인구주택총조사> 결과는 더 이상 놀랍지도 한다.


5, 6장 '노동 인권과 경제민주화'에서는 비정규직 문제(동일 노동 동일 임금, 사회연대임금제). 주 4.5일 노동제, 산업재해, 프랜차이즈 본사·플랫폼 기업의 갑질에 관해 고민해본다. 7장에서는 여성,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탈북민이 어떻게 사회권을 침해받고 있는지, '권리를 보장받을 권리'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세상에 맞서야 하는 이들의 현실을 살핀다.


맺음말에서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경제적 약자에게 사회권이 보장되지 않으면 자유권은 유명무실해짐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선진국 칭호를 가불한 대한민국에 꼭 맞는 제도를 만들어가려 해도 모자랄 텐데, 앞으로의 대한민국이 전진은 커녕 뒤로 가진 않을지 걱정스럽다.


p.217

사회권은 국가가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시민의 '권리'다. 권리는 그 주체가 요구하고 주장해야 권리가 된다. 헤겔은 말했다. "의무만 있고 권리 주장이 없는 사람은 노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나치즘, 파시즘, 개발독재 등에서 발생한 자유권의 부재를 비판하고 넘어서면서도,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경제적 약자에게 사회권이 보장되지 않으면 자유권이 유명무실해짐을 직시해야 한다. 법철학자 존 롤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평등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새로운 '반성적 평형'을 이루어내야 한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정의와 형평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성찰하면서 새로운 규칙과 제도를 만들어내야 한다.



정경심 교수는 '사실과 법리 판단에 대하여 심각한 이견이 있지만'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아 수형 생활을 하고 있다. 부산대와 고려대는 딸 조민의 학위를 취소했다. 두 대학교는 작년 '논란이 되고 있는 사안(표창장, 생기부 일부 내용)이 대학교 합격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한 바 있지만 대선 이후 연달아 학위를 취소시켰고, 한 학생의 지난 10년과 앞으로의 미래는 송두리째 날아갔다. 고려대 학위 취소가 발표되자 뇌종양이 있는 정경심 교수는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곽노현 전 교육감을 비롯한 교수·연구자 2,500명은 '조민 입학 취소는 최악의 학폭'이라며 부산대와 고려대에 '연좌제 처벌'을 질타했다. '교수가 제자를 보호하는 데에 사용해야 할 대학 자율권이 발휘되기는커녕, 대학이 특정 학생의 미래를 박탈했다'는 취지다.


조국 전 장관과 그의 가족이 힘든 시기를 부디 건강하게 잘 버텨주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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