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불 선진국 - 연대와 공존, 사회권 선진국을 위한 제언
조국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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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은 뒤의 마음을 글로 정리하기 힘들 때가 있다. 이 책의 경우엔 술술 읽다가도 문득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아픔 위에 이 활자들을 쌓은 건가'라는 생각이 들어 먹먹했다. 독서 감상을 나중으로 미룰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은 이유다.


대한민국 앞에 붙는 '선진국'이라는 칭호는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의 희생을 대가로 미리 당겨 받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소외되었던 자들이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인 '사회권'을 이제는 자유권 수준으로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p.21

선진국 대한민국은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계급·계층·집단의 희생에 기초하여 이루어졌고, 불평등과 양극화라는 심각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선진국이라는 칭호는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이런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미리 당겨 받은 칭호다. 이 점에서 대한민국은 '가불 선진국'이다.


교수, 국가인권위원, 민정수석비서관, 법무부 장관 업무를 수행하며 오랫동안 고민해온 사안을 담은 책인 만큼 내용의 폭이 넓고, 사례는 구체적이고, 수치는 명확해서 읽는 맛이 있었다.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1, 2장에서 문재인 정부의 성과와 현재를 진단하고 3장에서 7장에 걸쳐 대한민국의 앞날에 놓인 과제를 하나씩 살펴보는 형식이다.

(3, 4장: 주거 및 지역 균형 / 5, 6장: 노동 인권과 경제민주화 / 7장: 사회적 차별)


세계 속 한국의 위상에 높아진 데에는 현 정권의 외교, 안보, 방역 성과가 큰 몫을 했고 정치, 경제, 민생 부문에서도 어느 정도 성과를 내었다는 게 저자의 의견이다. 언론자유지수는 높아졌고, 권력기관(국정원, 기무사령부)의 민간인 사찰이 폐지되었으며, 검경 수사권이 조정되고 공수처가 설립되었다. 건강보험 보장이 강화되었고 청년 정책의 폭이 넓어져 민생에 숨통이 트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소득·자산 격차가 심화했고, 집값은 여전히 오르고 있으며, 지방간 불균형도 여전하다. '위험의 외주화'로 인한 산업재해도 잇따르고 있다. 예상치 못한 코로나 감염병으로 인해 정부 중후반의 역량을 경제 살리기에 쏟아야 했던 고충은 백번 이해하지만 아쉬움이 따른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p.87

양극화 자체도 문제지만, 계층 상승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2018년 OECD는 한국의 저소득 계층이 중산층으로 이동을 하려면 다섯 세대, 약 15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발표한 바 있다(이는 OECD 평균인 135년보다 높은 수준으로, 미국, 영국, 이탈리아와 같은 수준의 시간이다).

p.90

2021년 7월 통계청의 <2020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수도권 인구가 처음으로 2,600만 명을 돌파했다. 총인구 5,182만 9,000명 가운데 50.2퍼센트가 수도권에 사는 것이다. (중략) 우리나라는 GDP의 51.8퍼센트, 일자리의 49.7퍼센트가 수도권이 집중되어있는 상태다.


흥미롭게 읽었던 대목은 '주거'를 다룬 3장이었다. 내 집 장만은 갈수록 요원해지고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하는 상황을 타개할 방법으로 다양한 주거 형태를 제시한다. '사회주택의 천국'이라 불리는 네덜란드의 총 주택 대비 장기 임대 공공주택 비율은 무려 34%에 달하는데, 20세기 초반에 유명 건축가들이 '사회주택은 사회적 예술'이라 여겨 디자인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덕에 뛰어난 미적 감각을 뽐낸다. 공공주택에 대한 멸시나 선입견은 없다. <도시별 삶의 질 순위 보고서>에서 10년 연속 1위를 차지한 비엔나에도 좋은 입지에는 멋진 디자인의 임대주택이 자리 잡고 있다.

주거는 물량 공세로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닌 만큼, 주거 문제를 분석한 뒤 '지역 균형'으로 자연스레 초점을 옮겨가는 저자의 식견이 명쾌했다. 5천만 인구 중 50%가 수도권에 살고 있으며 일자리의 49%가 수도권에 몰려있다는 <2020 인구주택총조사> 결과는 더 이상 놀랍지도 한다.


5, 6장 '노동 인권과 경제민주화'에서는 비정규직 문제(동일 노동 동일 임금, 사회연대임금제). 주 4.5일 노동제, 산업재해, 프랜차이즈 본사·플랫폼 기업의 갑질에 관해 고민해본다. 7장에서는 여성,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탈북민이 어떻게 사회권을 침해받고 있는지, '권리를 보장받을 권리'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세상에 맞서야 하는 이들의 현실을 살핀다.


맺음말에서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경제적 약자에게 사회권이 보장되지 않으면 자유권은 유명무실해짐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선진국 칭호를 가불한 대한민국에 꼭 맞는 제도를 만들어가려 해도 모자랄 텐데, 앞으로의 대한민국이 전진은 커녕 뒤로 가진 않을지 걱정스럽다.


p.217

사회권은 국가가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시민의 '권리'다. 권리는 그 주체가 요구하고 주장해야 권리가 된다. 헤겔은 말했다. "의무만 있고 권리 주장이 없는 사람은 노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나치즘, 파시즘, 개발독재 등에서 발생한 자유권의 부재를 비판하고 넘어서면서도,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경제적 약자에게 사회권이 보장되지 않으면 자유권이 유명무실해짐을 직시해야 한다. 법철학자 존 롤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평등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새로운 '반성적 평형'을 이루어내야 한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정의와 형평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성찰하면서 새로운 규칙과 제도를 만들어내야 한다.



정경심 교수는 '사실과 법리 판단에 대하여 심각한 이견이 있지만'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아 수형 생활을 하고 있다. 부산대와 고려대는 딸 조민의 학위를 취소했다. 두 대학교는 작년 '논란이 되고 있는 사안(표창장, 생기부 일부 내용)이 대학교 합격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한 바 있지만 대선 이후 연달아 학위를 취소시켰고, 한 학생의 지난 10년과 앞으로의 미래는 송두리째 날아갔다. 고려대 학위 취소가 발표되자 뇌종양이 있는 정경심 교수는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곽노현 전 교육감을 비롯한 교수·연구자 2,500명은 '조민 입학 취소는 최악의 학폭'이라며 부산대와 고려대에 '연좌제 처벌'을 질타했다. '교수가 제자를 보호하는 데에 사용해야 할 대학 자율권이 발휘되기는커녕, 대학이 특정 학생의 미래를 박탈했다'는 취지다.


조국 전 장관과 그의 가족이 힘든 시기를 부디 건강하게 잘 버텨주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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