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붓다 - 바람과 사자와 연꽃의 노래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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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간 읽어보고 싶은데' 하고 눈에 밟히는 책 중에는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북드라망, 2021)도 있다. 저자는 고전평론가 고미숙. 우연한 계기로 《청년 붓다》를 통해 저자를 먼저 접하게 되었다.


인간은 죽고 태어나기를 되풀이한다는 윤회설, 새해가 되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절에서 소중히 가져와 현관에 붙이던 부적, 부처님께 108배를 하면 간절히 바라던 일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 '불교'라는 말을 접하면 흔히 이런 모습을 떠올렸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어떤 작업을 계기로 불교를 다룬 책과 스님이 쓴 책을 여러 권 읽고, 불교 신문을 읽고, 유명한 스님들의 유튜브 설법도 챙겨보았다. 아이가 걸음마를 떼듯 하나둘 톺아나갔다. 그런데 어릴 적 어른들의 어깨너머로 보고 들으며 가졌던 불교의 이미지와 이제야 새로 알아가기 시작한 불교는 왜 이리 다르단 말인가. 불교에 없는 말은 아닌데, 와전되어 잘못 알고 있었던 이야기. 알면 알수록 '불교는 이런 거래'라는 해묵은 이야기들이 산산이 조각났다.


청년 붓다는 이른 나이에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나.


고전평론가인 저자는 이 책에서 붓다의 생애를 시간순으로 들려준다. 붓다는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으며 어떻게 부처가 되었는가. 맛보기로 이야기하자면 붓다는 지금의 네팔 카필라바스투 지역에 터를 잡은 샤카족의 슈도다나 왕과 마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다. 12세에 태자로 책봉되는데,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다.


문체는 구어체에 가까워서 제법 술술 읽힌다. 딱딱한 문체에 익숙한 터라 부들부들한 문체에 적응하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책 중반을 넘어서니 옆집 언니 목소리를 통해 듣는 듯 친숙하게까지 느껴졌다. '탐(貪), 진(瞋), 치(痴) 삼독(三毒)' 같은 조금은 생소한 불교 용어가 가끔 나오는데, 앞쪽에서 언급하며 풀어서 설명해 주어 그리 어렵지 않다.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차라리 삶의 철학에 가깝다.

붓다(석가모니)는 신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고자 한 우리 같은 사람일 뿐이다.


p.274

'불교'하면 가장 먼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반야심경』의 구절이 떠오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공(空)이 바로 연기다. 연기법은 생성과 소멸의 원리에 더하여 세계의 상호의존성, 곧 누구도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이치가 핵심이다. 세상이 모두 연기적 조건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누구도, 그 어떤 대상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신이건 인간이건 그 무엇이건. 이것이 바로 공의 핵심이다. 공은 '없다'가 아니다. '허무하다'는 더더욱 아니다. 무상하게 흘러가는 변화 그 자체다. 고로,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하다.

연기법을 깨닫는 순간 고타마 존자는 붓다가 되었다.


p.279

세계를 움직이는 다르마는 연기법이다. 만물의 상호연관성이 그것이다. 이 연기법을 모르면 무명에 갇혀 괴로움을 겪게 된다. 그럴 때 인간은 탐진치 삼독을 '내 것' 즉 '자아'라 여기고 그것을 굳게 지키려 한다. 한 철학자의 언어를 빌리면, '생명의 바다에 무명의 폭풍이 몰아닥칠 때 자아라는 괴물이 우뚝 솟아난다.' 이 자아라는 망상에서 벗어날 때, 그것이 곧 열반이다.


p.301

무아는 달리 표현하면 존재와 세계의 상호작용을 의미한다. 나라고 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면 더 이상 이기적인 욕망에 복무할 이유가 없다. 자연스럽게 그 마음은 타자와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당연한 일이다. 나의 욕망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에서 어떻게 타자와 연결될 것인가로 나아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연결이 곧 생명이고 운동이다. 따라서 무아는 결코 허무주의, 비관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자아의 감옥에 갇혀 있다가 비로소 그 감옥의 벽을 부수고 나온 격이니 그야말로 환희용약하지 않겠는가. 그 자유와 기쁨의 파동이 마음의 경계를 넘어 확장해 가는 것이 바로 자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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