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책 쏜살 문고
토베 얀손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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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도 외할머니와 이렇게 지낼 수 있었을까?'

나를 바라보던 내 순간 그러했듯이, 아마도 여전히 한결같은 미소를 지으며 하늘에서 세상을 굽어보고 계실 외할머니가 읽는 내내 떠올랐던 책.

(여담이지만 내가 사리를 분별하고 남들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외할머니는 귀가 많이 안 들리셔서 농담을 주고받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곳은 모두 정정하셔서 아흔이 넘도록 밭일을 하며 지내셨다)


머릿속에 떠오른 궁금증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보고 어른 앞에서도 할 말은 하는 당찬 아이 소피아, 부러질지언정 좀처럼 휘지 않는 성깔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손녀딸과 언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소피아의 마음만큼은 다치지 않게 석양처럼 소피아를 감싸주는 할머니.


매해 따스한 계절이 되면 소피아와 아버지와 할머니는 외딴섬에 있는 별장을 찾는다. 낯선 친구들을 별장에 초대하기도 하고, 할머니와 풀밭에 누워 하늘나라를 상상해 보기도 한다. 섬을 통째로 삼켜버릴 것 같은 폭풍우를 함께 겪기도 하고, 죽은 오리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이웃 섬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낯선 이들을 몰래 정찰하다가 부끄럽게 들키기도 한다.


예상을 깨는 어린아이의 당돌함이 읽는 내내 신선했는데, 그 당돌함은 아이의 언행을 어떤 방식으로든 포용할 수 있는 지혜를 지닌 할머니의 토양에서 싹텄을 거란 점은 굳이 말로 드러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 '토베 얀손'은 그 유명한 무민 시리즈를 연재한 작가다. 1914년 핀란드에서 태어나 주로 회화 작품 활동을 하다가 무민 시리즈를 연재하며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안데르센상을 수상했고, 인생의 후반부에는 다수의 소설 작품을 집필했다. 묵직한 여운이 있었던 토베 얀손의 다른 소설집 <두 손 가벼운 여행>과 영화 <토베 얀손(Tove)>(2020)까지 접한 뒤 이 책을 펼쳐보니 아무래도 <여름의 책>에 등장하는 천방지축 소피아와 담배를 좋아하는 소피아의 할머니는 모두 토베 자신을 글로 그려낸 것만 같다.


펼치고 싶은 것이 많을 예술가로서의 섬세한 내면과,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을 한 인간으로서의 내면.




"책은 안 되겠어." 소피아가 성을 내며 말했다. "맞춤법을 계속 고민해야 하면, 그것 때문에 방해가 돼서 생각을 할 수가 없잖아. 그럼 어디까지 썼는지도 기억이 안 나고. 그럼 다 뒤죽박죽이 될 거야!"
책은 여러 장으로 되어 있었고, 전부 엮어서 제본이 되어 있었다. 소피아는 책을 바닥에 던졌다.
"제목이 뭐니?"
"조각난 지렁이에 대한 논문. 하지만 못 쓸 거야!"
"앉아서 불러 보렴." 할머니가 말했다. "뭐라고 쓸지 네가 말하면 내가 쓸게. 시간은 많잖아. 안경이 어디 갔지?"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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