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성 담론의 지적 계보 - 자유주의를 넘어서 서강학술총서 68
조승래 지음 / 서강대학교출판부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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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20180920 조승래(1954~) [공공성 담론의 지적 계보](2014)라는 불량교양식품 분석

 

 

 

 

공익우선론 + 퍼블릭 굿, 양손에 떡쥐고 싶어하며,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들고, 혓바닥 짧은 놈이 침 멀리 뱉으려 합니다.

 

 

 

 

수군작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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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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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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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zt가설에 따라서 ('가치이모션 이론'이 가장 최근의 이름임 ㅋㅋ), 우리 대뇌피질연합 안의 독수리 5형제들은 우주만물 인간만사를 제각각 디컴인합니다.

 

이것은 종교에 대해서도, 공동체에 대해서, 프로퍼티에 대해서도, 프리덤에 대해서 그러한데, 위의 3개의 스키마는, 독수리 5형제들이 이들 아이템들을 어떤 가치지향적인 이모션들로 관념화하는지를, 그리고 그것을 언어화하면 대략 어떤 범위의 개념낱말로 쓸 수 있는지를 개략적으로 (정답이 아니고) 알기쉽게 요약해본 것입니다.

 

본 벗들 가운데 ', 이건 좀 아닌데, 어 이건 이렇게 고치면 더 낫겠는데'하는 의견에 대해서 나는 완전개방상태이니, 꾸지람과 지적질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종교에 관한 스키마의 설명은 건너 뛰겠습니다. 저 정도 그림으로도 충분히 이해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더 설명이 필요하다 여겨지면 물음주세요.

 

우리들 각자의 마음 속에서 매순간 아옹다옹하고 있는 독수리5형제들(사실은 그 작은넘들까지하면 명)은 우리의 평생을 같이가는 벗들입니다. 우리는 애네들을 내보낼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최근 배운 진화생물학에서는 <제노타입genotype>이라고 하더군요. 이들 제노타입은 타고난innate 것이고, 내재적이고intrinsic, 대물림받은inherit 것이라서, 우리가 죽지않는한, 우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애네들을 개무시하거나, 외면하거나, 달래거나, 억누르거나, 아니면 개발시켜주는 것 뿐인데, 이렇게 현행화된current 도는 행동현실화된actualized 애들을 진화생물학 용어로는 <페노타입phenotype>이라고 한답니다.

 

*제노타입/페노타입은 대단히 쓸모만땅인 학술개념용어이니 외워둘만 합니다. 엄청 많은 거시기들을 이 개념용어 짝으로 쉽게 서술할 수 있씁니다.

 

1. 퍼블릭public 및 그와 관계된 여러 낱말들

 

우리 일상언어세계에서, "공적, 공공의, 공공"으로 쓰는 낱말의 원천언어source langage"퍼블릭"입니다. "퍼플릭"의 어원학은 ()푸플리쿠스publicus 또는 ()포풀루스populus로 보나 봅니다.

 

https://en.wiktionary.org/wiki/public

 

피플 https://www.etymonline.com/word/people#etymonline_v_4

 

퍼블릭 https://www.etymonline.com/word/public#etymonline_v_2

 

위키와 온라인어원학사전 둘을 모아보면, "(사적인 어떤 집단이 아니라) 어떤 전일체로써 인민들에 어울린다Pertaining to the people as a whole (as opposed a private group)"라는 설명이 눈에 들어옵니다.

 

예전에 가라타니 고진 [세계사의 구조]할 때에 잠시 푸블리쿠스/프리바투스/인디비둠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있고, 이번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상태(인간의 조건)]에서도 푸블리쿠스/프리바투스 설명이 나옵니다.

 

*demosios() : RES PUBLICUS() 1) belonging to the people or state, public 2) publicly, in public places, in full view of all

 

*idios() : RES PRIVATUS() 1) pertaining to one's self, one's own, belonging to one's self 2) the term privatus refers to a citizen who is not a public official or a member of the military

 

https://en.m.wikipedia.org/wiki/Privatus

 

* atomos() : INDIVIDUUM() : 1) An indivisible entity. 2) A single individual person or thing. 3) Atom

 

위의 어원학 안에는 여러가지 소중한 정보들이 들어있습니다.

 

1)데모크라시의 '데모스(민중)'가 원조인 ()폴리테스(시민)와 구별되는 제2 의 짝퉁-시민이라는 점

 

2) 얼간이, 멍청이, 바보, 백치의 뜻인 '()이디오트idiot'()이디오스이고, 이것이 바로 고전고대에서는 ()프리바투스(빼앗긴 자, 박탈당한 자, 결여된 자)의 뜻이라는 점

 

3)인디비둠, 더이상 '나눌수 없는 거시기'()인디비두얼이라는 점

 

그리고 "퍼블릭"의 어휘가족들은 "퍼블리서티publicity", "퍼블릭니쓰publicness"로 확장됩니다.

 

이 가운데 "퍼블리서티"가 칸트-아렌트의 도덕철학 개념용어인데, 다른 하나인 "퍼블릭니쓰"가 서양학술장 안에서 과연 학술개념용어로까지 쓰이는 지,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퍼블릭니쓰를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퍼블릭니쓰"의 경우, 스탠포드철학디비를 뒤져도 쓰인 사례가 두개 밖에 안나옵니다.

 

https://plato.stanford.edu/search/searcher.py?query=publicness

 

"퍼블리서티"로 검색하면, 52개가 나옵니다.

 

https://plato.stanford.edu/search/search?query=publicity

 

특히 아예 [퍼블리서티]라는 제목의 단일 아티클도 있습니다.

 

https://plato.stanford.edu/entries/publicity/

 

그리고 다음처럼 상당한 전문적인 학술연구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1. Hypothetical Publicity

1.1 Kant’s Hypothetical Publicity Test

1.2 Sidgwick on Covert Utilitarianism

1.3 Sidgwick’s and Kant’s Examples

1.3.1 Sidgwick on Celibacy and Lying

1.3.2 Kant on Rebellion and Secession

1.4 Does the Kantian Test Prohibit Actual Secrecy?

1.4.1 Sidgwick’s Meta-Secrecy Doctrine

1.4.2 Glomar Responses

1.4.3 The Judiciary’s True Goal

1.4.4 The Optimal Confidentiality of FoI Laws

2. Actual Publicity

2.1 Voting

2.1.1 Mill’s (1861) Case Against Secret Ballot

2.1.2 Why Worry About Open Vote?

2.2 Deliberation

2.2.1 Can Publicity Civilize Representatives?

2.2.2 The Quality of Deliberation

3. Rawls on Public Reason and Public Rules

3.1 The Doctrine of Public Reason

3.2 The Doctrine of Public Rules

3.3 The Good Faith Efforts Objection

4. Conclusion

Bibliography

Academic Tools

Other Internet Resources

Related Entries

 

의 아티클의 목차를 들여다보면, 칸트, , 롤즈가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서양 학술장 안에서는 "퍼블리서티"가 인정된 학술개념용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일본학계의 신조어 : “공공성공익公益을 뜻한다

 

그렇다면 "공공성公共性"이라는 왜색한자조합낱말의 원천언어는 무엇일까요? ??? 나로선 이게 궁금합니다. 그래서 구글링해보니, 역시나 예측대로 일본학술장 안에서 쓰이는 용어입니다.

 

https://ja.wikipedia.org/wiki/%E5%%AC%E5%%B1#%E5%%AC%E5%%B1%E6%%A7

 

그러나 답답하게도, 일본학술장은 "공공公共"의 원천언어가 "퍼블릭"이라는 것은 밝혔지만, "공공성公共性"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퍼블리서티인지, 퍼블릭니쓰인지를 분명히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위키재팬 안에서 "퍼블리서티"를 검색해봅니다. 결과 0입니다. "퍼블릭니쓰"도 검색해봅니다. 결과 0. 일본학술장은 게다가 "오피셜official""공공公共"이고, 코먼common"공공公共"이고, 오픈open"공공公共"이라고 번역해서 쓰고 있음을 봅니다.

 

http://www.ritsumei.ac.jp/acd/cg/law/lex/-6/murakammi.pdf

 

이 파일은 아예 제목자체가 [공공성에 대하여]입니다. 입명관대학立命館大学 촌산홍村上弘이 쓴 논문입니다. 이 논문 안에는 총 27"퍼블릭"이 나오지만, 단 한번도 "퍼블리서티""퍼블릭니쓰"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를 통해서, 일본학술장 안에서는 "공공 또는 공공적"의 원천영어는 있지만, "공공성"은 원천영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나는 "공공성"이 순수한 100% 일본학계의 창작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며, 그리고 한국 학계 역시 일본학계의 식민지로써, 그대로 "공공성"을 베껴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말하자면, 일본이나 한국의 학자들이 쓰고있는 "공공성"은 서양학계의 "퍼블리서티"와 어떠한 관계도 1도 안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위의 촌상홍의 논문 [공공성에 대하여]를 보면, 촌상홍의 정리한 바를 바탕으로, 일본학계의 "공공성" 개념의 규정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양과 다른 일본 "공공성" 개념의 가장 큰 차이는, 일본학계는 <공공성을 공적인 이해관계 또는 공적인 이익>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일본학계의 공공성 개념규정은 얼핏보아서는 유틸리타리아니즘입니다. (그러나 뒤의 분석에서도 보게 되듯이, 일본의 공공성은 유틸리타리아니즘도 아닙니다) 그런 서양의 "퍼블리서티" 개념규정은, 칸트-아렌트에 따르자면, 정반대로 안티-유틸리타리아니즘입니다. 그러면 촌상홍의 논문 안에서 공공성개념규정들을 찾아보겠습니다. 첫째로 촌상홍은 일본국어사전의 대표격인 [대사림][광사원]에서의 공공성규정을 제시합니다.

 

.....日本語辞典大辞林』(松村公共性意味調べてみると,「社会一般利害影響性質特定集団られることなく社会全体かれていることとされているまた,『広辞苑』(新村では,「社会一般利害正義する性質定義しているこちらはかりにくい

 

일본어를 몰라서, 구글발번역의 도움을 빌려서 한글로 옮겨 봅니다.

 

.....일본어 사전의 "대사림(마츠무라 )에서 '공공성'의 의미를 살펴보면 '널리 사회 일반에 이해 · 영향을 미칠 성격. 특정 집단에 한정하지 않고 사회 전체에 열려 있는 것 "이라고되어있다. 또한 코우지엔(신촌)"널리 사회 일반에 이해와 정의를 갖는 성격"이라고 정의하고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1장 마지막까지, 촌상홍의 논문은, 일본 안에서의 "공공성" 개념사용을, 학문분야별로 쭈욱 점검합니다. 정치학, 사회학, 공공정책, 경제학, 일본 헌법 및 기타 법률들. 그리고 2장 첫부분에서 촌상홍은 다시한번더 "공공성" 개념규정들을 정리합니다.

 

.....이 장에서는 1 장에서 언급 한 것과 다른 연구자의 견해를 참고로하면서, 필자의 견해로 공공성을 다음의 세 가지 요소 · 측면의 집합으로 생각 것 같다.

 

1)많은 시민이나 사회 집단의 공통 이익 (의 일부)

2)시민이나 사회 집단이 다른 개별 이익 (사익)의 총합 (의 일부)

3)국가 나 지방 자치 단체 등의 "전체"의 이익 (의 일부)

 

 

그리고 논문의 맨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촌상홍은 앞에서 보앗던 것과 다르지 않게 일관되게 총정리합니다.

 

.....(역시 구글발번역)결론

이 소론에서는 공공성의 정의와 의미에 대해 다각적으로 구체적인 예를 가지고 올리면서 공부했습니다. 필자의 의견은 공공성은 "많은 시민과 사회 집단의 공통 이익 ","시민과 사회 집단이 다른 개별 이익 (사익)의 총합, 국가집이나 지방 자치 단체 등의 '전체'이익 '이라는 3 가지 측면하며 각각 특정 조건을 충족 부분으로 구성된 집합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소 절충적인 결론이며, 또한 상식적인 견해를 확인한 적이 될지도 모른다.

 

이상에서 보듯이, 일본학계는 자신들이 내리고 쓰고 믿고있는, 그러한 공공성개념규정이 혹시나 잘못은 없는지를 전혀 반성이나 성찰없이, 즉자적이고 또한 당연하다는 확신을 갖고, "공공성"<공익公益>과 동일시 합니다.

 

3. 서양학계의 퍼블리서티 또는 퍼블릭 굿의 두 계열

 

그러면 일본학계의 공공성과 서양학계의 퍼블리서티 또는 퍼블릭 굿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를 더나아가, 어떻게 대립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서양 학계에서 퍼플리서티 또는 퍼블릭 굿에 관해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칸트- 아렌트> 계열처럼 인터레스트를 사갈시하는 정치철학자들과, <마키아벨리- 홉스- 루쏘- 맨더빌스미스- 벤담- - 맑스>에 이르는 인터레스트를 인간행동 및 동기의 원천으로 인정한 정치철학자들, 이렇게 두 계열로 나눌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앞엣계열은 워낙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버츄의 윤리학 전통때문에 그리고, 중세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등의 그리스도교 윤리학 때문에, 근대 칸트의 도덕철학의 영향력 때문에 그리고, 현대 들어와서는 아렌트의 영향력 때문에, 롤즈계열의 자유주의, 메킨타이어-샌델류의 코뮤니타리아니즘, 그리고 페티트-포칵-스키너계열의 공화주의까지도 퍼블리서티 또는 퍼블릭 굿(공적인 선)을 결코 벤담이나 밀 계열의 유틸리타리아니즘의 <퍼블릭 인터레스트>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다시말해서, 조승래의 책에 등장하는 정치철학자들은 단 한명도 인터레스트를 퍼블릭 굿으로 승인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비롯한 여러 도덕철학의 글월들 안에서 왜 그토록 퍼블리서티와 퍼블릭 굿 그리고 퍼블릭 리전(공적인 이성)을 강조했는지를 알면, 그리고 칸트가 철저하게 인터레스트를 주관적이고 불순하며 래디컬 이블(근본적인 악)로 간주해서 배척했는지를 알면, 칸트의 막대한 영향력과 그의 이러한 윤리적인 가치지향 때문에, 거의 주류의 근대 서양철학자들이 칸트를 따라서 퍼블릭 인터레스트트를 퍼블릭 굿으로 간주하지 않았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퍼블릭 인터레스트를 퍼블릭 굿이라고 주장하는 반대편에는 마키아벨리의 국가이성으로부터, 홉쓰의 리바이어던, 루쏘의 일반의지 또는 인민의 이익, 맨더빌의 허영과 악덕이 퍼블릭 인터레스트를 낳는다는 주장, 스미스의 셀프-인터레스트가 퍼블릭 인터레스트를 낳는다는 주장, 그리고 그 유명한 벤담- 밀의 유틸리타리아니즘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계열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https://www.britannica.com/topic/general-will

 

특히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학계의 공공성이 벤담-밀류의 유틸리타리아니즘의 그것이 아니라 루쏘- 맑시즘류의 그것에 더 가깝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지점을 들여다 볼 차레입니다.

4. 일본학계의 공익= 공공성은 왜 유틸리타리아니즘의 퍼블릭 인터레스트가 아닌가, 오히려 마키아벨리- 홉스- 루쏘- 헤겔- 맑시즘- 파시즘의 공익우선론인가

 

그런데 여기서 또한번 우리를 헤깔리게 하는 지점이 나옵니다. 분명히 공익이라는 일본원천언어의 영어옮김낱말은 퍼블릭 인터레스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본학계의 공익= 공공성이 위에 말한 서양 정치철학 및 도덕철학의 <마키아벨리- 홉스- 루소- 맨더빌스미스- 벤담- - 맑스>에 이르는 계보의 문제의식과 100% 동일할까요?

 

동일하다고 흔히들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내 판단으로는 아닙니다. 일본학계의 공익은 서양학계의 퍼블릭 인터레스트를 주장한 이론들 가운에데서 유틸리타리아니즘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이제 이것을 한번 들여다 보겠습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KakaoTalk_20180913_151535375.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2590pixel, 세로 1931pixel

사진 찍은 날짜: 2018년 09월 13일 오후 3:05

카메라 제조 업체 : LG Electronics

카메라 모델 : LGM-G600K

플래시 모드 : 플래시 끔

 

이를 위해 조승래의 책 빨간띠지에 적힌 글귀를 먼저 들여다 보겠습니다. "개인적 자유주의는 어떻게 사회적 공공성을 훼손했는가?"라는 띠지의 글귀는 조승래의 식민지 노예지식인의 의식상태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이기적인 자유주의가 어떻게 사회적인 공적 이익을 훼손해 왔는가?'라고 이 글귀의 정체를 디컴인하면 되는데, 이 글귀를 벤담- 밀의 유틸리타리아니즘의 관점에서 읽으면, 완전코미디가 됩니다.

 

왜냐하면, 유틸리타리아니즘을 공부한 우리는, "이기적인 인터레스트(유틸리티)의 총계산합계가 사회적인 공적인 인터레스트이다(유틸리티)라는 유틸리타리아니즘의 형태식fomula를 알기 때문에, 위의 띠지글귀를 유틸리타리아니즘 용어들의 쓰임새로 옮기면, 앞의 "개인적= 이기적 자유주의"가 바로 유틸리타리아니즘이고, 뒤의 "사회적 공적 이익"도 역시 유틸리타리아니즘이기 때문에, 이 글귀는 "이기적인 인터레스트가 어떻게 사회적인 공적인 인터레스트를 훼손하는가"라는 문제 의식을 담은 글귀가 됩니다.

 

우리가 이미 알 듯이, 벤담이나 밀같은 유틸리타리아니스트들과 스미스같은 고전적인 리버럴리스트들은 <이기적인 인터레스트들이 공적인 인터레스트를 이룬다>라고 주장했지, 결코 <이기적인 인터레스트들이 공적인 인터레스트를 해친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유틸리타리아니스트들과 리벌러리스트들은 모두 프라이빗 센트릭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익이 공익을 해친다>라고 주장하려먼, 그러한 관점의 이념을 서양 정치철학 또는 도덕철학의 전통 안에서 누가 주장했는가를 찾아보면 됩니다. 바로 마키아벨리와 홉스, 루쏘와 헤겔, 맑시스트 그리고 파시스트들입니다.

 

마키아벨리는 마이네케 [국가이성의 이념](39회차)에서 보았듯이 그 유명한 <국가이성, 국가이익>으로 <군주의 이익 곧 국가이익이 공적 선이다>를 처음 제시한 이론가입니다.

 

홉스(42회차) 역시 원자적인 인디비두얼들의 셀프-인터레스트들의 총합이 리바이어던인 군주에게 계약으로 이전되면, 그것으로 끝. 그다음부터는 본성자연의 라이트말고는 무엇이든지 군주의 이익에 종속된다고 했으므로, <공익우선론>입니다.

 

루쏘도 [사회계약론](46회차)에서 확실하게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이번 아렌트의 [혁명론](56회차) 안에서도 아렌트가 루소와 시에예스 등의 프랑스혁명가들의 일반의지론이 그러했음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물론 윌 오브 올will of all이 프라이빗 인터레스트의 파티큘라한 의지의 총합이지만, 총의지와 달리 일반의지는) <파티튤라한 인터레스트가 제너럴한 인터레스트를 훼손하면 처벌해야한다>라고 루쏘의 일반의지 곧 국민의 인터레스트 이념은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루쏘의 일반의지론이 일본학계의 지성들에게 막강한 영향을 끼쳤음을 추정해볼만 합니다.

 

또한 다음은 헤겔과 맑시즘과 파시즘입니다. 이사야 벌린이 논증했듯이, 이들 역시 <사익은 공익에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포지티브 리버티의 이데올로기들입니다. 우리는 일본학계의 좌파는 맑시즘의 노예들을, 우파는 파시즘의 노예들임을, 그리고 둘 모두 헤겔의 찬양자들임을 잘 압니다. 따라서 이상으로 일본학계의 공공성개념은 이처럼 마키아벨리- 루소- 헤겔- 맑시즘- 파시즘 계열의 <공익우선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승래의 빨간띠지의 글귀를 우리는 서양지성사에서 '공적 인터레스트'를 주장한 유틸리타리아니즘의 맥락이 아니라, <공익우선 곧 포지티브 리버티>를 주장한 마키아벨리- 루소- 헤겔- 맑시즘- 파시즘 계열의 맥락에서 디컴인해야 그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해야만 저 띠지의 글귀가, 일본학계의 공공성 개념규정에 따를 때에만, 자기 모순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일본학계의 공공성 개념규정에 따르자면, <이기적인 이익은 공적인 이익을 침해해선 안된다>라고 말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서양지성사와 근대 서양 학술장 안에서, 특히 퍼블릭 굿의 윤리학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무식한 주장은 먹히질 않습니다. 오직 일본한국 그리고 중국 같은 헬아시아들이, 퍼블릭센트릭하므로, 국가가 개인보다 먼저 있고, 더 앞서므로, 공적 이익이 사적 이익보다 더 위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조승래가 80년대 운동권 똥86 좌파학습한 게 이처럼 커서도 여전히 머릿 속 지성에 문제를 일으킨 것은 아닐까요?

 

 

5. 조승래의 공공성

 

조승래는 "공공성, 공공, 공동체; 공공의, 공동의, 공동체의; 공적, 공개적인, 공동체의"를 같은 뜻새김으로, 같은 뉘앙스인 "공공성= 퍼블릭 인터레스트"로 씁니다. 이렇게 조승래가 분석의 목적이자 도구로 쓰고 있는, "공공성"이라는 낱말은 일본학계의 신조어이고(실질적으로 조승래는 책 안에서, 단한번도 "공공성"을 개념규정 하지 않습니다만), 그 개념설계의 지적계보 역시 자신의 책 속에 소개한 학자들이 아니라, <마키아벨리- 홉스- 루쏘- 헤겔- 맑시즘- 파시즘><공익우선론 또는 포지티브 리버티>이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조승래가 공공성의 지적 계보라고 언급한 <그린- 샌델- 아렌트- 페티트 및 롤즈, 포칵, 스키너> 그 누구도 유틸리타리아니즘 입장에서 퍼블리서티 또는 퍼블릭 굿을 개념규정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퍼블리서티 또는 퍼블릭 굿" 개념규정은, 칸트-아렌트에 따르자면, 정반대로 안티-유틸리타리아니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승래가 공공성의 지적 계보라고 언급한 <그린- 샌델- 아렌트- 페티트 및 롤즈, 포칵, 스키너>는 오히려 정반대로 철저한 안티-유틸리타리아니즘 입장에서, 퍼블리서티 또는 퍼블릭 굿을 개념규정합니다.

 

그리고 퍼블릭 인터레스트를 주장했다고는 하더라도, 맨더빌- - 스미스- 벤담- 밀은 네거티브 리버티 곧 프라이빗 센트릭의 <사익우선론>이므로, 또한 <이기적 자유주의가 공익을 훼손시킨다>는 조승래(일본학계)의 주장에는 반대됩니다.

 

, 이야기가 길어지면 다시 한번 중간요약해야지요.

 

문제는 '공공성' 개념규정에 있다. '공공성'은 일본학계의 신조어로써, 영어로 하자면, <퍼블릭 인터레스트>이다. 서양학술장 주류 안에서는 퍼블리서티 또는 퍼블릭 굿은 결코 <퍼블릭 인터레스트>가 아니다.

 

퍼블릭 인터레스트는 서양학술장 안에서, 네거티브 리버티 이념의 유틸리타리아니즘과 마키아벨리- 홉스- 루소- 헤겔- 맑시즘- 파시즘의 포지티브 리버티 이념에서 대표적으로 주장되지만, 이 둘 가운데에서, 유틸리타리아니즘은 프라이빗 센트릭이므로 <사익우선론>이다. <공익우선론>은 마키아벨리- 루소- 헤겔- 맑시즘- 파시즘 계열이다.

 

조승래 책의 정치이론가들인 그린- 아렌트- 샌델- 페티트는 유틸리타리아니스트도 아니며, 더군다나 이들은 인터레스트가 아니라 버츄(아레테)라든가, 프리덤을 퍼블릭 굿으로 전제근거한다.

 

따라서 조승래의 책 제목은 코미디이다, 그린- 아렌트- 샌델- 페티트라는 반-유틸리타리아니스트들을 다루면서, 책 제목을 [공익의 담론, 그 지적 계보]라고 한 셈이므로. 유틸리타리아니즘의 관점에서 보아도, 조승래의 주장은 말이 안된다. <이기적인 이익이 공적인 이익을 만든다>가 서양 유틸리타리아니즘인 것이지, <이기적인 이익은 공적 이익을 해친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이익은 공적 이익을 해친다>는 관점은 철저하게 포지티브 리버티 이념이고, 동양적인 것이고, 일본학계의 관점이다. 조승래는 일본학계의 식민화된 한국지성이자, 어쩔 수 없는 전근대적 동양인이다.

 

서양지성사에서 <이기적인 이익이 공적 이익을 해쳐서는 안된다>라고 말한 애들은 마키아벨리- 홉스- 루소- 헤겔- 맑스- 전체주의자들인데, 80년대 똥86들의 좌파학습이 이러했다. 오늘도 현재에도 대다수 동양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중국한국의 전근대적인 식민지 지성들은 여전히 헤겔- 맑스- 파시스트- 국가주의자들로 살고 있다. <이기적인 이익이 공적 이익을 해쳐서는 안된다>고 여전히 되뇌이면서 살고 있다.

 

조승래가 책 안에서 다루는, 서양의 고전적인 리버럴리스트, 네오-공화주의자, 코뮤니타리아니스트들 할 것 없이, 이들은 <퍼블릭 굿 또는 코먼 굿(공적 선, 공공선, 공동선 등등으로 손가락-낱말들이 있음)>이 무엇인가를 고민했지, 퍼블릭 인터레스트를 고민한 것이 아니다.

 

이상입니다. 아마 지금도 여전히 <퍼블릭 굿><퍼블릭 인터레스트>가 왜 서로 다른지, 알쏭달쏭한 벗들도 있을 터입니다. 그런 벗들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왜 서로 다른지>, <개인적인 것이 이기적인 것과 왜 서로 다른지>도 알쏭달쏭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개인되기를 자기인생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우리 모두의 서글픈 역사에서 비롯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나이테 )에서 퍼블리서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다른 그의 책이라든가, 아렌트의 책들에서 우리는 <퍼블릭 굿>에 대한 서양 지성사의 가장높은 생각들을 만납니다. 특히 지난 회차 아렌트의 책 두권 안에는 맑시즘이 왜 어떻게 <퍼블릭 굿><퍼블릭 인터레스트>로 변질시켰는지의 이유, 프랑스혁명의 <퍼블릭 굿>이 왜 어째서 미국혁명의 그것보다 못한지가 잘 논증되어 있습니다.

 

 

6. 정리

 

, 이제 정리해보지요. 조승래는 "공공성"<공익公益>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말하자면, 조승래는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로, '개인적''이기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서양학계에서는, 공적 이익은 유틸리타리아니즘 및 포지티브 리버티 이념의 주장이고, 자유주의/ 공화주의/ 코뮤니타리아니즘의 퍼블리서티는 <이익이 아니라 선>이다.

 

칸트를 이어받은 롤즈에게 퍼블리서티(퍼블릭 굿)는 자율로서의 프리덤이다.

 

아렌트를 이어받은 공화주의자들에게 퍼블리서티(퍼블릭 굿)은 프리덤 애즈 넌-도미네이션이다.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를 이어받은 코뮤니타리아니즘에게 퍼블리서티(퍼블릭 굿)은 버츄(아레테)이다.

 

그러니 조승래는 책제목은 [사익우선론, 그 지성사의 계보]가 되거나, 아니면 [공익우선론, 그 지성사적인 계보]이거나 아니면, [공적 선의 담론, 그 지성사적 계보]가 되었어야 합니다. 첫째 제목이라면 <맨더빌- - 스미스- 벤담과 밀>의 지적 계보를 전문연구했어야 마땅합니다. 만약 <그린- 이렌트- 샌델- 페티트>를 연구하려면, 책 제목이 마지막것이었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조승래의 가치지향이 포지티브 리버티이므로, 아마도 <마키아벨리- 홉스- 루소- 헤겔- 맑시스트- 파시스트>를 두 번재 책 제목으로 연구했더라면 가장 합당했을 듯 합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책 제목은 조승래로서는 긍정하고 찬성하는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비판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암시적으로 암묵적으로, 조승래는 포지티브 리버티 이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20시절 공부한 그대로 반-자본주의자라서, 신자유주의를 악의 축으로 여깁니다. 또한, 일본학계에 식민화되어서, 공익우선론자입니다. 그러면서 <리버럴리즘 vs 코뮤니타리아니즘>이라는 지적 유행에, 그리고 신-공화주의라는 지적 유행에 편승해서, 이상한 잡탕상태의 불량-짬뽕을 만들어 냅니다.

 

공익우선론 + 퍼블릭 굿, 양손에 떡쥐고 싶어하며,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들고, 혓바닥 짧은 놈이 침 멀리 뱉으려 합니다.

 

이제 내가 왜 조승래의 책이 불량품이라고 하는지, 벗들이 이해할 듯 합니다. 이 얼마나 웃기는 짬뽕입니까? 이게 오늘날 서글픈 한국식민학술장의 실태입니다. 우수학술도서상을 받은 전문학술책이 책 제목에서부터 코미디이고, 그 띠지 또한 가관도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는 마냥 조승래의 단순무식한 식민지적 지성을 그저 남의 일이라 여길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조승래는 또다른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승래에 우수학술도서상을 준 대한민국이 여전히 나의 현실세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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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최근에 접한 뉴스 가운데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것 중 하나. 그것은 <대표적인 군대 내부 의문사의 하나인 허원근 일병 사건을 두고 의문사위와 국방부가 대립갈등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두개의 국가기관 사이의 이 험악한 대립갈등의 진실과 정체>에 1차적인 시선이 모아져야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내가 들은 게 없어서 그런지, 피플타임즈를 비롯 인터넷 정치사이트들 가운데 어디에서도 이 사태에 관해서 명쾌하게 심도깊은 분석이나 진단을 접해 보지 못하고 있다. ('수군작, 당신이 해라'라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며칠 동안 이 사태의 의미와 역사성에 대해서 아주 촉각을 곤두세우고 이야기하는 벗을 보면서, 그리고 '참으로 안타깝다, 이 사태에 대해서 의식있는 논객들의 담론생산이 정말 부족하다'는 그의 탄식을 들으면서, 나 역시 적지않은 자책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정치사이트 글쓰기에 뛰어 들고 싶지 않으며, 당장 그럴 수 있는 형편이 아닌 현상황에서 여기에 나마 글을 남겨보려 한다.

의문사위는 아시다시피 '국가기관'이다. 고전적인 좌파의 시각에서 보자면, 행정부란 지배계급의 통치도구인 국가폭력기구의 하나이다. 국방부는 더욱더 명확하게 대표적인 국가폭력기구의 하나로 공인된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는 국가폭력장치 내부의 이질적 요소들 간의 불화인가? 뭔가 나에겐 복잡한 생각거리가 여기서 주어진다. 조금씩 나는 이 지점에서 고전적 좌파의 시각에서 조금 벗어나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사고의 차원이 이동함을 느낀다. 폭력 이기 이전에 '직장이자 관성이자 이권관계인 그 무엇' 그리고 '열정과 진실의 미시화된 정치'....이러한 성분들이 '폭력장치'라는 일방적 규정에 거부반을 일으키는 것이다. 다들 이런 정도의 느낌은 갖지만, 이러한 거부반응의 진정한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이것이 ??? 인 것이다. 아마도 <메커니즘>의 복잡한 변수들을 적어보자면, 아래같은 질문들은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의문사위로 대표되는 세력>의 역사적 정체는 무엇인가? '노무현 정치분파, 신흥지배귀족'과 의문사위 관계자들 사이 관계는 무엇인가? 국방부로 대표되는 '구기득권, 구지배귀족'의 저항은 어떤 성격의 것인가? '84년 4월 2일 의문의 죽음을 당한 허원근 일병 사건의 진상규명'으로 표상되는 <인권과 진실의 지향>은 과연 현단계 한국시민사회의 역사적 성숙에 어떤 바로미터가 될 것인가?

일부 언론은 이번 사태의 진정한 역사성에 둔감한 정도가 지나쳐서, '국가기관 간 꼴불견 폭로전'이라는 식의 우스개거리식 비아냥이나 조장하는 듯 하다. 희화화를 통한 <우민주의 공작>은 언제나 저질 언론사 기자들의 고질병이다.

2기 의문사위(위원장 한상범) 소속 박종덕 조사 3과장 등 2명에게 국방부 특조단 소속 인모 상사가 '권총 1발을 쏘며 위협하고 수갑을 채우는' 폭력을 행사한 사태.

이번 사태는, 국가기구-지배귀족 그리고 <시민권과 진실의 역사적 성장 메커니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사태이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수군작^_*
2004.7.13










이정우 : 가슴에 총 두방 쏘고 안죽자 머리에 한방 그것도 m16 장총으로 내일 휴가가는데 말예요, 대한민국 육군은 이런 초인군대거덩 (07.14 23:48)  

이정우 : 이렇게 자살할수있는 인간 한명만 있으면 김정일 목 따오는거 시간문제이고 부시 조지는거 아무일도 아니네 뭐. 이러니 의문사이지. (07.14 23:49)  

이정우 : 84년이면 내 해병대 있을때인데 나도 사격장에서 자살하는놈 봤는데 m16으로는 목을 겨눠 골통을 관통해도 가슴은 못쏘아요. (07.14 23:51)  

이정우 : 팔이 가제트 팔도 아니고 어떻게 한방도 아니고 두방을 자기가슴에 쏘고 안죽으니까 다시 자기 머리에 쏠수 있는지 누구 설명해 (07.14 23:52)  

이정우 : 줄수 있는사람 있으면 나와봐여, 그런데 군빠리들은 한사코 자살이라니 죽은 허원근이만 불쌍치. 완전히 정신병동에서 얼마나 외로웠 (07.14 23:53)  

이정우 : 을까? 나도 군대제대했지만 대한민국 군대 빨리 개혁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07.14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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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장 오래된 원형

[몽골리안 1만년의 지혜](폴라 언더우드, the walking people, 그물코 출판사)라는 책에 서술된 내용들입니다. 이로쿼이 북미 인디언 부족이 극동아시아로부터 출발하여 베링해협을 거쳐서 현재의 캐나다-미국 북부에 정착하기 까지, 그들이 겪었던 당시의 사실들을 기록한 역사책이지요. '역사'라는 어휘를 내가 썼는데요.... 이들에게(아니 모든 인류에게도 마찬가지인데) '역사'란, 대대로 부족 가운데 가장 뛰어난 기억력과 가창력의 소유자들을 중심으로 구비전승되어져 온 노래입니다. 그러니 '이 단계에서의 역사'란 것을 잘 이해하면 지금 우리들이 곧잘 '신화'라고 부르는 것의 출발지점, 발생학적 원형을 볼 수 있게 되지요.

그러니 '신화' 이전에 '역사'가, '사실'이, 있었던 것입니다. [몽골리안 1만년의 지혜]를 쓴 폴라 언더우드는 이로쿼이 부족의 구비전승자의 5대 후손입니다. 책을 읽어 보시면 알게 됩니다만, 이들 이로쿼이 인디언들의 상상력에 경탄하게 되지요. 신화 이전의pre-mythos '사실로서의 역사'와 상상력 사이에 나타나는 묘한 융합이 그것입니다. 덧붙이자면, '상징계'에 들어서기 시작한 '상상계'의 형상적 사유들이란 것이지요.

구비노래인 까닭에 모든 서술들은 대단히 사실적입니다. 하지만 객체에 대한 명칭들은 '상상된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언제 틈나면 상세하게 분석해 볼 마음입니다. 여하튼 간에 [몽골리안 1만년의 지혜]는 문학적으로 상징화되고 형식화되기 직전에 놓인 전-신화적인 사실 또는 역사의 원형이 무엇인지 만끽하게 해줍니다.

물론 책의 주인공들인 이로쿼이 인디언들이 알타이 북방 유목부족의 직접적인 선조는 아닙니다. 인종학적으로는 이로쿼이 인디언들은 고아시아족 홍인종이지요. 하지만 [몽골리안 1만년의 지혜]에 나타나는 이로쿼이 인디언들의 '사실적 역사'를 통해서 1만년전(아니 그보다 더 오래) 동북아시아 극동지역의 인종사회에서의 변동을 추적할 수 있더군요. 기후와 같은 자연환경의 변화는 물론이고 어떻게 해서 고아시아 홍인종들이 새롭게 나타난 알타이 황인종들의 진입으로 인해서 베링해협 너머로 밀려 나는 지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즉 1) 인종적 자연적 혼합상태라는 문화사적 역사성, 2) 시간적 동시성, 두가지 점에서 나는 [몽골리안 1만년의 지혜]를 통해서 고대 모계제 사회의 원형들이 어떻게 사회학적으로 역사학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지를 감잡았습니다. 그래서 주저없이 [몽골리안 1만년의 지혜]를 알타이 고대신화의 가장 오래된 모계원형에의 통로라고 추정합니다.


2. 고도화된 모계제 신화의 원형

이번에 올린 만주족 창세신화 [천궁대전]이 알타이 신화의 두번째 단계의 원형입니다. [몽골리안 1만년의 지혜]와 비교해 보면, [천궁대전]은 이미 충분할 정도로 '상징계'에 들어선 텍스트입니다. [천궁대전]은 이미 충분할 정도로 모든 등장 대상들에 대한 명칭이 '추상화'되어 있고, 벌어지는 모든 사실은 이미 관념화된 형상들, 즉 신들의 거대한 드라마입니다. 대충으로 보자면 한 100여명의 신들, 자세하게는 수백명을 넘는 신들이 등장합니다.

[천궁대전]은 문학적으로 보아도 이미 고도의 형식화를 이루고 있지요. [몽골리안 1만년의 지혜]에서 보여지는 것, 즉 '자신들이 경험한 사실들에 대한 직접적인 정서'의 노래'가 보여주는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역사-서술을 이미 훨씬 뛰어넘어서, [천궁대전]은 온 우주와 세상을 넘나들면서 허구적 상상력 그자체의 나래를 활짝 펴고 있습니다. 만주족의 상상력은 이 세상과 인간, 자연과 인간 사이에 놓인 수많은 수수께기와 같은 드라마들을 최초의 여신 아부카와 최초의 악마적 남신 예루리 사이의 '전쟁'을 축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합니다. 이처럼 [몽골리안 1만년의 지혜]가 놓인 '사실과 역사'로부터 [천궁대전]의 형식화된 문학적 '상징들'로의 발전과 변형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천궁대전]은 맨 끝부분 9모링 후반부 전까지, 즉 <아부카 언두리 남신>으로 <아부카 여신>이 바뀌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아부카-바나무-와러두>라는 3 여신의 모계제적 원형을 유지합니다. 이점은 정확하게 [몽골리안 1만년의 지혜]에서 이로쿼이족을 지도하는 <3 여성 선지자들>의 역할과 동일합니다. 이러한 '모계제적 원형의 유지'는 [몽골리안 1만년의 지혜]와 [천궁대전] 사이의 원형적 연속성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남성 부계권력의 원형

[부도지]가 그것입니다. [부도지] 역시 그 우주창조에서는 마고와 두 딸들이라는 <3 여신>의 모계원형이 유지됩니다. 하지만 [부도지] 전체 구성에서 곧바로 모든 사건과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남자들, 특히 <황궁씨-유인씨-환웅씨-임검씨-신라>라는 부계 계승자들, 즉 기부장 권력으로 넘어 갑니다.

[천궁대전]이 맨 마지막에 가서 <아부카 여신huhu에서 아부카 언두리enduri(남신)>으로 변형되는 것에 비하면 [부도지]에서는 초반부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부계제 신화에 바쳐집니다. 두 텍스트 사이에 이처럼 엄청난 분량과 초점의 이동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그런다 해도 [단군기]나 [삼국유사] 또는 [규원사화]처럼 애초부터 가부장제 남성 신격들이 등장하고 주도하는 것에 비하자면, [부도지]는 아직도 [몽골리안 1만년의 지헤}와 [천궁대전]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고대의 모계원형을 마지막까지 고수하는 텍스트의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부도지]에서 초반부 조금(전체의 약 10/1) 다루어진 <마고-궁희-소희>라는 3 여신의 원형이 '과연 어떤 본래 진면목과 내용을 가지고 있나'를 알려면, 그러므로 [천궁대전]을 읽어야 하고, [천궁대전]을 통해서 [부도지]에 간촐하게 서술된 <3 모계-여신>의 보다 풍성한 맥락을 알게 되고, 다시 [몽골리안 1만년의 지혜]를 읽으면, 마침내 '그러한 [부도지-천궁대전]의 여신들이 발생한 사실적 역사 현장이 어떠한 것이었나'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 내 글의 초점이지요.

게다가 형식 상에서도 [부도지]는 이미 중국 도교의 사상적 문학적 영향을 깊이 보여줍니다. 어떤 하나의 텍스트에서 이질적이고 오래적인 사상들이나 스타일들이 많이 발견될 수록, 복잡하게 혼합되어 있을 수록, 그 텍스트는 후대의 것입니다. 소박하고 사실적이며 직접적일 수록 보다 원초적인 것이구요. 이런 점에서, [몽골리안 1만년의 지혜]가 어떠한 외부적 외래적 사상의 작용을 받지 않은 100% 순수한 이로쿼이족의 내재적 상상력의 결실이자 문학적으로도 대단히 소박하고 진실된 사실주의 단계의 것이라면, [부도지]의 어휘들은 이미 중국 도교의 침투로 인해서 모든 어휘와 사고가 경직되고 정형화된 것입니다. [부도지]가 [단군기]나 [규원사화]와 같은 재야도가사서로 분류되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천궁대전]은 물론 중국 도교나 불교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요. [천궁대전] 역시 순수한 만주족의 내적 상상력과 형상적 사유의 결실입니다. 하지만 [몽골리안 1만년의 지혜]와 비교하면 [천궁대전] 역시 그 문학적 형식화의 발전단계에서는 이미 소박한 사실적 묘사를 넘어쓴 고도로 형식화된 상징적 형상사유의 단계입니다.


4. 끝으로

이렇게 간략하게 나마 [몽골리안 1만년의 지혜]로부터 [천궁대전]을 거쳐서 [부도지]에 이르는 알타이 모계원형의 3가지 발전 형태를 요약해 보았습니다. 많은 신화학자들이나 고대사 연구자들이 북방 알타이적 원형의 고유성과 순수성을 찾아서 방황합니다. 이들의 마음 속엔 서양 자본주의 근대성이 내세우는 그리스-유태적(헬레니즘-헤브라이즘) 가부장적 남성성의 오리엔탈리즘에 맞서서, '알타이적 독자성'을 만들어 내려는 옥시덴탈리즘적 열정과 욕망이 넘치는 것이지요.

하지만 나는 그것을 <모계/부계>라는 '원형의 분열'에서 보다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해석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오리엔탈리즘/옥시덴탈리즘'의 대립 자체가 <이성의 간계>에 지나지 않으며, <모계/부계 원형의 대립과 분열>을 통해서 나아가야 하며, 그로부터 인간이 <모계원형>의 비밀을 깊이 이해한다면, 근대성-남성성-오리엔탈리즘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나는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동양이냐/서양이냐'를 떠나, 동서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이 바로 모계원형의 기초 위에서 태어난 신화적 패러다임들이었으며, 그것은 근대적 남성성이 비하하듯이, 정착문명의 이성주의가 경멸하듯이. 결코 원시적이거나 미개하거나 열등한 것이 아님을 다시 인식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말입니다.

<모계원형의 단계>로 들어서야만 정신적 갈등과 억압의 족쇄들로부터 인간정신은 자유를 얻습니다. 모계원형의 경지에 이르면, 이집트의 이시스, 메소포타미아의 이쉬타르-티아마트, 그리스의 데메테르-키벨레-가이아, 알타이의 아부카, 인도의 칼리 등등 모든 거룩하고 신성한 신격들이 <죽음/삶, 선/악, 빛/어둠, 동/서. 육체/영혼 등의 모든 이원론>의 해체와 무용함과 무상함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무상함과 혼돈을 통해서 인간 정신은 드높은 화해와 비밀의 해방에 이를 수 있는 것 아닐까하고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오리엔탈리즘/옥시덴탈리즘'의 갈등과 투쟁은 남성성-부계원형의 숙명이자 업보에 불과해 지니까요.

이러한 점에서 [몽골리안 1만년의 지혜], [천궁대전], [부도지]로 이어지는 <모계원형의 계보>는 남성-이성-정착문명의 권력이 판치는 오늘날 어떻게 인간 정신이 자신의 방향을 정해야 할 지 많은 시사점과 지혜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수군작^_*
200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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