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년대에 출판된 문학동네 책의 표지는 이런 스타일이 많았다. 책세상의 <잃어버린 거리> 표지는 참말 심오하기도 하지.
언제부터인가 노벨문학상이 올림픽 메달따기처럼 되어버렸다. 십수 년 전만 해도 그러지는 않았던 것 같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임레 케르테스를 기억하는가?
서점에 갔다가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라는 제목에 이끌려 세 권의 책을 몽땅 샀던 기억이 난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라는 제목은 듣기만 해도 가슴이 아파지는 제목이다. 작중 화자는 자신의 고통 받는 삶 때문에 아이를 낳아 그 고통을 물려주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남자 이야기가 나온다. 일명 홀로코스트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과거에 노벨문학상은 저항문학을 좋아했더랬다.
2002년에 노벨상을 받은 작가 임레 케르테스를 잘 알지 못하는 우리가 언제부터 노벨상에 연연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고은 시인이 노벨상 수상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희망고문이 시작되면서 그런 것 같다. 오르한 파묵이라는 작가가 한국에서 유명해지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들이 상업적으로도 성공하기 시작하면서 관심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또 그 사이 sns 가 성행하면서 사람들이 한마디씩 관심을 표명하는 것도 한 몫을 한 것 같다.
2014년 10월, 과연 누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것인가를 두고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유력 후보의 책을 낸 출판사 직원들이 야근과 밤샘을 하며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사람들이 무라카미 하루키와 밀란 쿤데라를 놓고 설왕설래를 하는 동안, 스웨덴 한림원은 전혀 엉뚱해 보이는 작가를 올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90년대에 한번 한국을 휩쓸고 지나갔던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 그는 공쿠르 상 수장자이지만, 노벨상과 연결되서 거론된 적이 없는 작가이기도 했다. 수상 소식을 전해듣고, 책장을 뒤져보니 세 권의 책이 있었다. 이사를 여러번 하면서 정리를 하고, 사라진 책들도 많다. 그 와중에 90년대 내게 영향을 끼쳤던 좋은 책으로 남아 있었다.
책에는 밑줄이 그어져 있지만, 자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았다. 다시 읽어야할 시기가 온 것이다. 책은 읽는 순간에 존재한다. 그래서 읽은 책이라도 다시 읽을 때는 전혀 새로운 책이 된다. 읽는 순간을 즐기기 때문에 다시 읽는 것도 고된 일이 아니다. 나는 이제야 제대로 된 독자가 된 것일 지도 모른다.
모디아노의 문장을 좋아했다.
책을 다시 펼치니 그 책을 사서 읽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올 가을 나는 다시 서재를 시작한다. 오래 전에 썼던 것들 중에 부끄러운 것들은 숨기고 읽을 만한 것들만 남겨두었다. 몇 주 전에 마음 먹고 정리하면서, 마치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 같은 심정이었다.
나의 삶이 기억 저 편에 있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