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쓴 전설의 소설 <모든 인간은 죽는다>가 나오다니. 어머, 이건 사야돼! 아마도 드라마 "별그대" 때문에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죽지 않는 남자 모티프로 한 보부아르의 소설은 입소문으로만 알려져왔기 때문에 늘 궁금했었다. 강영숙의 <라이팅 클럽>이라는 소설에서 보부아르의 소설 이야기를 처음 봤다. 












2. 요즘 많이 힘들다. 까닭없이 우울해서 하루에도 여러번 가슴이 답답해서 한숨을 쉰다. 팟빵앱으로 <고스트 스테이션>의 2012년 10월 방송을 다시 듣기 하고 있다. 애도의식을 치르는 것.

http://www.podbbang.com/ch/72


그의 말을 듣다보니-물론  그는 평소에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음악가 이전에 우리 시대의 철학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진중권의 문화다방>도 두 번이나 더 들었다. 그가 최근에 발표한 아따라는 노래의 뮤직비디오를 찾아 봤다. 88년 대학가요제에 나온 풋풋한 젊음은 사라지고 통통하고 유쾌한 아저씨 한 사람이 있었다. 자기 목소리 하나로 아카펠라를 만들기 위해 천 번은 덧 씌워 작업했다고 하는데, 뮤직 비디오는 그 작업이 너무도 유쾌하게 그려졌다. 삶을 즐기는 사람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떠났다. 


<고스트 스테이션>의 마지막 달 방송은 들을만하다. 10월 21일자 방송에선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말하는데....그로부터 꼬박 2년 후에 평소 원치 않던 방식으로 죽은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병을 준 것은 죽음을 준비하고, 주변 사람과 작별의식을 치르라는 뜻이라고. 그건 좋은 죽음이라고 했다. 나쁜 죽음은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가는 것이라고. 비명횡사라고 말했다. 그는 그런 죽음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올해 어떤 이들은 좋은 죽음을 맞이했고, 어떤 이들은 나쁜 죽음을 맞이했다. 유채영 씨의 명복을 빈다. 유채영 씨는 1973년 9월 생으로 나와 생일까지 비슷한 동갑내기이다. 그녀는 다행히 좋은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침몰한 배의 승객들과 신해철님은 비명횡사를 했다. 진실을 밝혀야 하는 건 산 사람들의 몫이다. 그들의 나쁜 죽음을 조금이라도 좋게 만들어주는 것이 살아있는 사람들이 슬픔을 이겨내는 방식이자 애도 행위인 것이다. 죽은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젊디 젊은 리세양, 은비양도. 참....슬픈 일이다)


마음이 아프다. 2014년이라는 시간의 공간이. 참 아픈 곳이 되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자세히 파헤쳐 읽어볼 생각이다. 리뷰는 읽은 후에. 


지금 내가 원하는 바로 그 책!

장바구니를 채우고 신중하게 책을 고를 때의 기쁨이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통을 느껴서 호소하고 싶은데 sns를 접어서 말하기도 뻘쭘하고...스맛폰으로 서재에 들어왔다.애들을 재우고 내일 소풍가는 초딩 아들 땜에 김밥말 걱정을 하는 중에 소식을 들었다.

그가 쓰러졌다는 것을 알고 어쩌면 떠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주말에 친구들 만나서 그에 대한 얘기도 했다.마음의 준비를 했지만,막상 그가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니 충격이 왔다.가슴이 팍 찌그러들고 한숨이 나왔다.이럴 수는 없다.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무한궤도의 그 청년을 기억한다.그때 우린 모두 소녀들이었다.그 소녀들이 중년이 되고 그는 떠났다.

난 그의 열광적인 팬은 아니었지만 그를 천재라고 생각했고,노래방에서 그의 노래를 불렀다.잘 못 노는 성격이라 노래방 간 것도 오래된 일이다만.넥스트 시절엔 나도 대학생이었으니 노래도 불렀고 춤도 췄다. 모르겠다.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지...갑작스러워서 있을 수 없는 일이어서 더 그렇다.얼마 전에 진중권의 문화다방에 나와서 시원시원하게 말하던 그였기에.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했다.어쩌면 저토록 아이디어가 풍부할까, 독특한 사람, 비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손가락으로 어찌 다 쓰겠나.
가슴이 아파서 통증이 와서 잠들기가 어렵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마술봉 2014-10-28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날이 되어도 가슴이 아프다.한 사람의 훌륭한 예술가는 세월이 흐르며 우리의 피붙이가 되는가보다.그는 우리 형제이며 이웃이었다.고마워요.해철님.잘가요.
 

 최근에 박완서 소설전집이 새롭게 출판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판본은 절판되고. 1999년에 출판된 것이니 선생님이 살아 계실 때에 나온 전집이다. 세계사의 장편전집도 가지고 있다. 박완서는 내게 한국문학의 시작과 같다. 


고등학교때 신문 연재소설로 한수산, 박범신, 최인호 같은 작가들을 접했지만, 대학에 들어가 박완서 소설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 여성작가의 소설은 처음 읽은 것이다. 그 전에 신문연재소설이나 김주영 선생님의 대하소설등에서 받은 인상은 남성적 스토리 라인이었다. 


그런데 교양국어 교과서에 나온 박완서의 단편소설은 나를 다른 세계로 이끌었다. 그 수업을 진행한 강사는 박사과정 대학원생이었는데, 어쩌면 그토록 강의를 잘 하던지....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그 선생님은 나를 박완서의 문학세계로 이끌었고, 도서관으로 달려가게 만들었다.(사회과학 전공인 나는 문학을 그 선생님에게 처음 배웠다) 나는 그곳에서 다른 세상을 만났고, 여성의 삶, 특히 한국여성으로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박완서처럼 한국 여성의 삶에 대해 천착한 작가가 또 있을까. 박경리 선생님과는 또 다르게 박완서 선생님은 생활이라는 작은 역사를 기록하는 작가였다. 전쟁이라는 큰 담론도 선생님의 손에 들어오면 우리의 내밀한 삶이 되었다. 


박완서의 소설은 나이들어가면서 더욱 가까이 느껴진다. 단편집을 읽다가 김윤식 선생님이 박완서 샘에 대해 평한 글을 읽고, 가슴이 아렸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울림을 주었다.


"묘사란 절대로 남으로 하여금 받아쓰게 할 수 없는 것. 스스로, 직접 써야 하는 것. 그만이 쓸 수 있는 것.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것은 소설일 수 없습니다. 소설이란, 오직 쓸 수 있는 것만을 쓰는 것이지요. 순전히 기억력에 의존하는 소설을 고집하는 작가 박완서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들입니다." 김윤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90년대에 출판된 문학동네 책의 표지는 이런 스타일이 많았다. 책세상의 <잃어버린 거리> 표지는 참말 심오하기도 하지. 



언제부터인가 노벨문학상이 올림픽 메달따기처럼 되어버렸다. 십수 년 전만 해도 그러지는 않았던 것 같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임레 케르테스를 기억하는가?  


서점에 갔다가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라는 제목에 이끌려 세 권의 책을 몽땅 샀던 기억이 난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라는 제목은 듣기만 해도 가슴이 아파지는 제목이다. 작중 화자는 자신의 고통 받는 삶 때문에 아이를 낳아 그 고통을 물려주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남자 이야기가 나온다. 일명 홀로코스트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과거에 노벨문학상은 저항문학을 좋아했더랬다. 


2002년에 노벨상을 받은 작가 임레 케르테스를 잘 알지 못하는 우리가 언제부터 노벨상에 연연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고은 시인이 노벨상 수상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희망고문이 시작되면서 그런 것 같다. 오르한 파묵이라는 작가가 한국에서 유명해지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들이 상업적으로도 성공하기 시작하면서 관심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또 그 사이  sns 가 성행하면서 사람들이 한마디씩 관심을 표명하는 것도 한 몫을 한 것 같다. 


2014년 10월, 과연 누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것인가를 두고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유력 후보의 책을 낸 출판사 직원들이 야근과 밤샘을 하며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사람들이 무라카미 하루키와 밀란 쿤데라를 놓고 설왕설래를 하는 동안, 스웨덴 한림원은 전혀 엉뚱해 보이는 작가를 올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90년대에 한번 한국을 휩쓸고 지나갔던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 그는 공쿠르 상 수장자이지만, 노벨상과 연결되서 거론된 적이 없는 작가이기도 했다. 수상 소식을 전해듣고, 책장을 뒤져보니 세 권의 책이 있었다. 이사를 여러번 하면서 정리를 하고, 사라진 책들도 많다. 그 와중에 90년대 내게 영향을 끼쳤던 좋은 책으로 남아 있었다. 


책에는 밑줄이 그어져 있지만, 자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았다. 다시 읽어야할 시기가 온 것이다. 책은 읽는 순간에 존재한다. 그래서 읽은 책이라도 다시 읽을 때는 전혀 새로운 책이 된다. 읽는 순간을 즐기기 때문에 다시 읽는 것도 고된 일이 아니다. 나는 이제야 제대로 된 독자가 된 것일 지도 모른다. 


모디아노의 문장을 좋아했다. 

책을 다시 펼치니 그 책을 사서 읽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올 가을 나는  다시 서재를 시작한다. 오래 전에 썼던 것들 중에 부끄러운 것들은 숨기고 읽을 만한 것들만 남겨두었다. 몇 주 전에 마음 먹고 정리하면서, 마치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 같은 심정이었다. 


나의 삶이 기억 저 편에 있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회전목마의 데드히트 -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을 쓰려고 할 때, 나는 모든 현실적인 재료-그런 게 있다면-를 큰 냄비에 한꺼번에 집어 넣고 원형을 확인할 수 없을 때까지 용해시킨 다음, 그걸 적당한 모양으로 뜯어서 사용한다. 소설이란 건 많든 적든 그런 것이다. 리얼리티라는 것도 그런 것이다. 빵가게의 리얼리티는 빵 속에 존재하는 것이지, 밀가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9쪽

나는 이런 일련의 문장을-편의상 스케치라 부르기로 하겠다-처음엔 장편에 착수하기 위한 워밍업으로 생각하며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 편 네 편 써나가는 동안 나는 그 이야기들 하나하나가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들은 `이야기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내게는 기묘한 체험이었다.
내가 스케치에 사용했던 건 그 앙금 같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앙금은 내 의식 밑바닥에서, 어떤 형태를 빌려 이야기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10쪽

그렇지만 난 자네 이야기에 아주 재미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해. 소설가의 눈을 통해 말해도 좋다면. 그러나 대체 이 이야기의 어디가 재미있는가 하는 건 실제로 손을 움직여 원고지에 써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 그런 거야. 내 경우에는 문장으로 만들어보지 않고는 사물의 모습이 제대로 잘 보이지 않아.-8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