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 발생 21분 경과

2호선 서초역 ~ 교대역 구간


지하철에 들러붙은 괴물들은 온몸이 검은 털로 뒤덮이고 등에 날개가 붙어 있는 게 꼭 서양 전설에 나오는 가고일처럼 보였다. 가끔 날개를 펼쳐 한번에 먼 거리를 날아가기도 하고, 네 발을 이용해 빠르게 천장과 벽을 타고 이동하기도 했다. 놈들은 오직 사람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빠르게 이동하면서 지하철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과 탈출하려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있었다. 우리가 저곳을 탈출한 건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나와 지태, 연아가 괴물들로 뒤덮인 지하철을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데 또 다시 불이 꺼졌다. 암흑 속에서 사람들의 비명과 괴물들의 포효만 들려왔다. 빌어먹을 정전이 반복되고 있었다. 불빛이 사라지자 나는 반사적으로 양옆에 있는 연아와 지태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빨리 여기를 뜨자!”


둘에게 소리치며 돌아섰다. 터널 저 앞쪽에 정전되지 않은 지하철역이 보였다. 


“저기! 무슨 역이지는 몰라도 저기로 가자.”


왼쪽에서 지태가 소리쳤다. 나는 양손으로 각각 지태와 연아를 붙잡고 불빛이 보이는 지하철역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마 교대역일 거야! 지하철 뒤쪽이니까.”


오른쪽에서 연아가 소리쳤다. 방금 잠시 불빛이 들어왔을 때 확인한 바로, 지금 우리가 가는 방향은 우리가 타고 있던 지하철 뒤편이었다. 지하철이 조금 전 지나친 역이 교대역이니까, 저 앞에 불빛이 보이는 역은 교대역일 것이다.


우리 셋은 서로의 손을 잡고 나란히 달렸다. 바닥이 울퉁불퉁해서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자 지태와 연아가 내 손을 잡지 않은 나머지 한 손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바닥을 비췄다. 바닥엔 검은 자갈이 가득했다. 그 사이로 쇠로 된 지하철 선로가 드러나 있었다. 우린 바닥을 보면서 넘어지지 않게 선로를 따라 달렸다. 우리 뒤로 지하철이 멀어지면서 사람들의 비명과 괴물들의 포효도 조금씩 멀어졌다. 앞쪽에 우리보다 먼저 지하철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스마트폰 불빛에 의지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여러 개의 스마트폰 불빛들이 흔들거렸다. 


교대역이 가까워질수록 승강장 불빛이 강해지면서 우리가 달리는 지하 터널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하 터널은 사각형 모양이고, 터널 가운데 커다란 기둥들이 세워져 있었다. 기둥을 지나가면 반대편 선로가 나오는 구조였다. 여태 사방이 어두컴컴해서 기둥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야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교대역 승강장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교대역은 한가운데 양방향 선로가 설치되어 있고, 선로를 중심으로 바깥쪽에 승강장이 있는 구조다. 그런데 승강장 곳곳이 붕괴되어 선로와 승강장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다행히 천장에 설치된 형광등만은 무사해 승강장의 피해 상황을 살펴볼 수 있었다. 


“아까 지하철이 멈춘 다음에 폭발음 같은 게 들렸잖아. 그게 저기가 무너지는 소리였나 봐.”


연아가 헉헉대며 말했다. 


“설마 밖으로 못 나가는 건 아니겠지?”


지태가 불안한 듯 물었다.


“일단 가보자. 이제 다 왔으니까.”


나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계단이 다 무너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태의 물음에 애써 차분하게 대답했다. 


교대역에 도착한 우리를 맞이한 건 생각보다 더 처참하게 부서진 승강장의 모습이었다. 폭격을 맞거나 강력한 지진이 휩쓸고 간 것 같은 광경이었다. 스크린 도어의 유리는 산산조각 나 선로와 승강장 바닥에 흩뿌려져 여기저기가 반짝였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커다란 콘크리트 더미에 깔려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었다. 승강장 벽은 가혹한 신이 망치로 내려친 것처럼 여기저기 부서져 있었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계단은? 계단은 어떻게 됐어? 우리 못 나가?”


지태가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우린 교대역 승강장에 있어야 할 계단을 하나하나 다 찾아봤다. 계단 주위에는 계단뿐만 아니라 벽과 천장이 함께 무너져 계단을 올라가면 나와야 할 출구가 붕괴 잔해에 막혀 있었다. 모든 계단이 그랬다. 눈 씻고 찾아봐도 교대역 승강장에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출구는 모두 막혀 있었다.


“젠장! 여긴 왜 이렇게 된 거야!”


지태가 울분에 차 소리쳤다. 


“아까 그 괴물들이 여기를 이렇게 만든 걸까?”


연아가 진심으로 궁금한 듯 물었다. 연아는 궁금한 게 생기면 답을 찾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게 연아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비결이라면 비결일 것이다.


“그건 나중에 알 수 있겠지. 우리가 여기서 살아 나간다면 말이야.”


내가 대답했다. 연아가 호기심을 느낀다는 것은 알았지만, 일단 살아야 할 일 아닌가. 연아는 나의 마음을 읽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요! 거기 누구 없어요?”

“살려주세요! 여기 사람 있어요!”

“이거 좀 치워달라고! 거기 아무도 없어!”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고!”


우리 말고도 지하철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한 사람들이 막혀버린 출구 앞에서 바득바득 외쳤다. 혹시라도 바깥에 누군가 있다면 저들의 목소리를 듣고 구조해줄지도 모를 일이다. 


“저기, 학생들! 좀 도와줄래요?”


응? 분명히 ‘학생들’이라고 했는데……. 우릴 부른 건가? 

나는 외침이 들린 쪽을 돌아봤다. 임신해서 배가 불룩한 누나가 잔해 더미에 깔린 남자를 구하려는 듯, 무거운 콘크리트 덩어리를 들고 있었다. 그런데 힘에 부친지 낑낑대면서 우리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허겁지겁 달려가 함께 콘크리트 덩어리를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지태와 연아도 달려와 함께 콘크리트 덩어리를 들어올렸다. 아래 깔려 있던 남자가 나오기만 하면 되는데 다리가 부러졌는지 혼자 좀처럼 나오지 못했다. 연아가 남자의 상체를 잡고는 잔해 더미에서 꺼냈다. 나와 지태, 누나가 손을 놓자 쿵 소리를 내며 콘크리트 덩어리가 떨어졌다. 잔해 더미에서 빠져 나온 남자는 다리에 입은 부상 때문에 괴로워했다. 하지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119 구조대원이나 의사가 와서 치료를 해줘야 했다.


“고마워요.”


누나는 우리에게 짧게 인사를 하곤 잔해 더미에 깔린 또 다른 사람에게로 갔다. 누나는 계속 잔해 더미를 치우면서 아래 깔린 사람이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와줬다. 문득 주위를 보니 승강장 곳곳에 붕괴된 잔해들에 깔려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평소와 다름없이 승강장에서 2호선 지하철을 기다리던 사람일 것이다. 밖으로 나갈 출구만 찾느라 이들을 발견하지 못한 나 자신을 꾸짖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겨오더니 멀리서 괴물들의 포효가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봤다. 우리가 탈출한 지하철 방향으로 정전되어 어두컴컴한 터널이 보였다. 마치 먹물을 뿌려놓은 것처럼 새카만 터널 속에서 무언가가 몰려오고 있었다. 괴물들이다. 도망가야 한다.


“강남역으로 가자! 그 새끼들이 또 오는 것 같아!”


나는 지태와 연아에게 소리쳤다. 

승강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어두컴컴한 터널을 쳐다보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사람들은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강남역 방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우리 셋도 강남역 방향으로 달렸다. 그런데 여전히 승강장에서 잔해 더미에 깔린 사람을 도와주느라 낑낑대는 누나가 눈에 들어왔다. 괴물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 


“언니! 저기 괴물들이 와요! 빨리 도망가요!”


내가 누나를 도와줘야 하나 그냥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연아가 누나에게 외쳤다. 누나는 우리를 한 번 쳐다보고는 어두컴컴한 터널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터널 속에서 또 괴물들의 포효가 들려왔다. 어두워서 잘 안 보였지만 분명히 오고 있었다, 괴물들이.


누나는 잔해 더미에 깔린 사람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고는 강남역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나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불룩한 배를 움켜잡았다. 동시에 달리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안 돼. 혹시 지금 산통이 온 건가? 


“야, 저 누나 도와줘야 되는 거 아냐?”


지태가 달리면서 물었다. 우리 셋 다 강남역 방향으로 가면서도 계속 누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는 이번엔 고민하지 않고 누나에게 달려갔다. 누나는 배를 움켜쥐고 엉거주춤 뛰면서 나를 쳐다봤다. 


“가만히 있어요!”


내가 소리치고는 양팔로 누나를 눕히듯 안아 올렸다. 누나는 놀란 얼굴이 되더니 옆으로 누운 모습으로 나에게 안겼다. 이 정도 무게면 달릴 만하다. 나는 누나를 안아 올린 채 연아와 지태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괜찮겠어요?”


누나가 아픔을 참느라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물었다. 


“괜찮으니까 내 목에 팔 감으세요! 그게 더 안전해요!”


나는 달리면서 대답했다. 누나가 내 목에 팔을 감았다. 아주 약간 가벼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괜찮겠냐?”


지태가 함께 교대역 승강장을 빠져 나가면서 물었다. 


“괜찮아! 이따 힘들면 바통 터치하자!”

“오케이.”


지태와 내가 번갈아 가며 누나를 들면 충분히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강남역에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는 가정하에.


다행히 강남역으로 가는 지하 터널은 정전되지 않았다. 터널 벽면의 형광등에 쭉 불이 들어와 있었다. 이번 구간은 두 개의 선로 사이에 기둥이 없어서 사각형 터널이 탁 트여 있었다. 간만에 시야가 확 넓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조금 더 달려가니 다시 터널 중앙에 기둥이 나왔다. 우린 오른쪽 선로로 들어가 계속 달렸다. 곧 완만한 커브 길이 나왔다. 커브 길에 들어서자 갑자기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가 많았다.


“잠깐만! 잠깐만요! 잠시만 멈춰보세요!”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들 중 가장 앞에 있는 사람이 우리를 멈춰 세웠다. 옷차림으로 봐선 지하철 기관사 같았다. 우린 어쩔 수 없이 급정거하듯 사람들 앞에 멈춰 섰다. 지태가 맞은편 사람들에게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쪽으로 가면 안 돼요! 빨리 저쪽으로 도망치세요! 이쪽으로 가면 다 죽어요!”


그러자 기관사가 우리에게 되물었다.


“아니, 왜 다 죽습니까? 좀 전에 지나간 사람들도 알 수 없는 소리만 하고 가버렸어요. 이쪽으로 가봤자 강남역도 역삼역도 다 막혔다고 하는데도 가버리더라고요.”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우리가 가려고 하는 강남역이랑 역삼역도 막혔다고?


“게다가 그쪽에서 오는 사람들은 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더라고요. 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기관사가 이어서 물었다. 이에 연아가 나서서 대답했다.


“이쪽으로 가셔도 교대역이 막혀서 못 나가요. 그리고 교대역 뒤쪽에선 괴물들이 사람들 죽이고 있어요. 절대 이쪽으로 가지 마세요.”


연아의 말에 사람들이 술렁였다.


“괴물……이라고요?”


기관사 역시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이럴 시간 없어요! 안 돌아갈 거면 우리라도 지나가게 비켜주세요! 여기 산모 있는 거 안 보이세요?”


다급해진 연아가 한 손으로 누나를 가리키며 버럭 소리쳤다. 


“아니, 이쪽으로 가봤자 강남역도 막혔는데…….”


기관사가 계속 강남역 방향으로 가려는 우리를 말렸다.  


“가다 보면 어딘가는 뚫려 있겠죠! 비키세요!”


또 다시 연아가 소리쳤다. 비키지 않으면 맞은편 사람들을 때릴 것만 같은 기세였다. 그때, 갑자기 강한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이어서 타타타탁! 하고 무언가가 빠르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야! 뛰어!”


나는 본능적으로 소리치고는 인파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사람들이 어어, 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비켜요! 비켜!”


나는 막무가내로 인파를 뚫고 계속 전진했다. 내 뒤로 지태와 연아가 따라왔다. 잠시 후 뒤통수 너머에서 키에에에엑! 하는 괴물의 포효와 사람들의 비명이 동시에 들려왔다. 괴물이다. 바로 뒤에 또 괴물들이 나타난 거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패닉 상태가 되면서 마구 뒤엉키기 시작했다. 누나를 안고 있는 터라 나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지태야! 길 좀 뚫어라!”


나는 고개를 돌려 지태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내 뒤에 있던 지태가 앞으로 달려나오며 온몸으로 사람들을 밀어냈다. 중학교 때였나. 패싸움에 휘말렸을 때도 지태가 이렇게 상대편 애들을 밀치며 길을 뚫은 뒤 함께 달아난 적이 있었다. 


“연아야, 잘 따라와! 누나, 꽉 잡으세요!”


나는 뒤에 있는 연아와 품에 안긴 누나에게 소리쳤다. 그러곤 지태처럼 으와아아악! 기합을 넣으며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질주했다. 다닥다닥 몰려 있는 사람들을 머리와 어깨로 마구 밀치며 전진, 또 전진했다. 그러는 한편 품에 안은 누나가 사람들에게 부딪혀 다치지 않도록 더욱 꽉 끌어안았다. 뒤쪽은 비명과 포효가 뒤섞인 아수라장이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2호선 지하철에서 겪었던 끔찍한 상황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1분쯤 무작정 사람들을 뚫고 달리자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눈앞에 직선 길이 펼쳐졌다. 행동반경이 조금 넓어졌다.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 강남역 쪽으로 뛰어갔다. 직선 길이 끝나고 커브 길을 한 번 더 지나가자 강남역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관사의 말대로 강남역도 모든 출구가 막힌 것 같았다. 교대역과 마찬가지로 폭격을 맞은 것처럼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혹시라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출구가 있을까 봐 우린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역시나 모든 출구는 막혀 있었다. 잔해 더미에 깔려 괴로워하는 사람들만 보일 뿐이었다.  


“잠깐만……. 나 여기서 좀 내려줄래?”


누나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통증 때문에 괴로운 얼굴이었다.


“왜요? 여기도 막혔어요. 더 가야 돼요.”

“아니, 저 사람들 몇 명이라도 좀 도와주려고…….”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누나는 잔해 더미에 깔린 사람들을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자기도 아프면서 누굴 도와주겠다는 건가? 그보다 지금 여기서 한두 사람 잔해 더미에서 구해낸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빨리 바깥으로 나가서 119 구조대원이나 의사를 불러오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하지만 누나는 이제 통증이 좀 가라앉았다며 계속 내려달라고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누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누나는 심호흡하고는 잔해 더미에 깔린 어느 여자에게 다가가 그녀를 덮고 있는 콘크리트 덩어리를 낑낑대며 치웠다. 


“왜 그래? 누나 놔두고 가려고? 이제 내가 안을까?”


지태가 강남역 승강장을 둘러보다가 나에게 물었다. 


“아니, 누나가 여기 깔려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며 내려달랬어.”

“또? 자기도 아프면서 왜? 저 사람들 구해줘봤자 움직이기도 힘들 텐데…….”


지태 역시 누나를 돌아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연아는 누나를 보자 함께 잔해 더미에 깔린 사람들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나는 교대역 쪽 지하 터널을 쳐다봤다. 괴물들을 피해 도망쳐 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괴물들이 쫓아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여길 벗어나야 한다. 내가 지태에게 말했다.


“일단 나도 조금만 도와줄게. 넌 혹시 괴물들이 오는지 망 좀 봐줘.”  

 

머리로는 빨리 여길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 몸은 누나와 연아를 도와주러 가고 있었다. 지태는 알겠다며 우리가 도망쳐 온 터널 쪽을 바라보면서 괴물들이 다가오는지 감시했다. 


나와 연아, 누나는 힘을 합쳐 잔해 더미에 깔린 사람들을 몇 명 더 구조했다. 그들은 대부분 뼈가 부러지거나 중상을 입어 괴로워하면서도 우리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하지만 움직이기 힘든 그들을 위해 내가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이제 다시 가자.”


누나가 말했다. 나와 연아는 그 말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터널을 감시하고 있던 지태에게 다시 출발하자고 소리쳤다. 내가 누나를 다시 안으려 하자 누나는 괜찮다며, 살살 뛰어가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지태가 와선 넉살 좋게 웃으며 소리쳤다. 


“에이! 우리, 육상 선수예요! 같이 뛰면 누나, 우리 못 쫓아와요!” 


그러면서 누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이어서 연아도 소리쳤다.


“언니, 얜 지프, 쟨 스포츠카라 생각하면 돼요! 언니가 타고 싶은 대로 골라 타세요!” 


그러곤 차례대로 지태와 나를 가리켰다. 투척 선수인 지태와 단거리 선수인 나를 적절히 비유한 말이었다. 누나는 못내 알겠다며 힘없이 미소 지었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따스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미소였다.

우린 육상 훈련을 하는 것처럼 쉬지 않고 계속 뛰어갔다. 나와 지태는 이렇게 달리는 것이 일상이라 괜찮았지만 연아는 점점 지치는지 헉헉댔다. 


“스포츠카 한 번 탈래?” 


내가 연아에게 농담을 던지자 그녀는 얕보지 말라며 더 빨리 달릴 수도 있다고 큰 소리쳤다. 연아는 지는 것을 무지 싫어하는 성격이다. 


“얼마나 더 빨리 달릴 수 있는지 한번 볼까?”


나는 연아의 등을 밀며 속력을 냈다. 그러자 연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해, 이 바보야! 힘들다고!”


하지만 그녀는 기어이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나와 지태의 속도에 맞춰 계속 뛰었다. 역시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니까.


대략 10분쯤 뛰어가자 역삼역이 나왔다. 기관사의 말대로 역삼역도 폐허가 되어 모든 출구가 막혀 있었다. 누나는 이번에도 잔해 더미에 깔린 사람들을 구해주려고 했지만 통증이 너무 심해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나와 지태, 연아가 나서서 몇 명을 도와줬다. 그러곤 바로 다음 역인 선릉역 방향으로 출발했다. 이번엔 내가 누나를 안았다.


선릉역으로 가는 지하 터널은 이제까지의 사각형 지하 터널과는 달리 아치형 터널이었다. 가운데 기둥도 없고 직선 길이 쭉 이어져 있어서 시야가 탁 트였다. 사람들의 통화하는 소리와 자갈 밟히는 소리가 터널에 울려 퍼졌다. 어쩐지 예감이 좋았다. 선릉역에는 혹시 위로 나갈 수 있는 출구가 뚫려 있지 않을까 기대됐다. 기관사도 강남역, 역삼역은 막혔다고 했지만 선릉역은 아예 언급도 하지 않았으니까. 추측건대, 그 사람들은 역삼역과 선릉역 사이에서 지하철이 멈춰 어느 쪽으로 갈지 고민하다가 역삼역 방향으로 걸어왔을 것이다. 그러니 선릉역은 출구가 뚫려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어느 정도 상황이 안정되자 우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통화가 연결되지 않고 자동 응답 서비스로 넘어갔다. 지금 시각은 오후 6시 30분. 엄마가 버스를 타고 집에 가고 있을 시간이다. 연아가 인터넷을 검색해본 바로는 서울의 모든 지하철이 운행을 멈추면서 지상에서는 교통난이 빚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엄마는 지금 꽉 막혀버린 도로에 갇혀 있는 신세일 것이다. 우리는 잠깐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엄마가 아마 버스에서 졸고 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졸다가 버스 종점까지 간 적도 있는 엄마니까. 어쩌면 엄마는 서울이 이 모양이 됐다는 것도 모를 수 있다. 괴물은 지상에는 전혀 출몰하지 않았다고 하니까. 

선릉역에 거의 가까워지자 다시 중앙에 기둥이 나타나고 터널 모양도 사각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새로운 인파가 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선릉역 앞 지하 터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다만 이들은 움직이지 않고 멈춰 서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뭐지? 혹시 이거 줄 서 있는 건가? 선릉역 계단으로 나가려고?”


지태가 사람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승강장에는 출구가 몇 개 없으니까. 이 많은 사람들이 나가려면 꽤 오래 걸릴 거야.”


내가 지태의 말에 대답했다. 

우린 사람들 뒤쪽에 다가가 무슨 상황인지 물어봤다. 그사이 나는 누나를 바닥에 내려 벽에 기대앉을 수 있게 해줬다. 누나의 안색은 더욱 좋지 않았다. 그래도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이분들도 방금 여기 왔는데,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르겠대.”


지태가 말했다. 하긴 행렬 뒤쪽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보다 조금 전에 여기 도착했을 테니,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이다. 행렬 앞쪽에 가야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겠지.


셋 중 키가 큰 편인 내가 고개를 빼고 앞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행렬이 꽤나 길어서 앞쪽의 상황이 잘 보이지 않았다. 마치 검은 장막을 덮어놓은 것처럼 행렬 앞쪽은 시커멓기만 했다.


“어두워서 잘 안 보여. 저 앞엔 전등이 나갔나 봐.”


까치발을 한 채 내가 말했다.


“단아, 나 좀 들어봐. 내가 한번 볼게.”


연아가 말했다. 그 말에 바로 연아의 허리를 감아 들어올렸다. 내 머리 위로 우뚝 솟은 연아가 앞쪽의 상황을 스마트폰으로 찍은 후 다시 바닥으로 내려왔다. 연아가 찍은 사진을 확대하니 흐릿하긴 해도 행렬 앞쪽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앞쪽이 어두컴컴해 보였던 건 전등이 나갔기 때문이 아니었다.


시커먼 연기였다. 시커먼 연기 사이로 불타는 지하철과 선릉역 승강장이 보였다. 우리가 마지막 기대를 걸었던 선릉역은 화재로 휩싸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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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D 2017-10-19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같은 전개네요. 뒷이야기가 기대됩니다.

브로캉 2017-10-22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탈출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