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_선전포고

 

 

식탁 위는 온갖 음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구운 감자를 곁들인 돼지고기 바비큐, 푹 끓인 닭 육수에 옥수수와 콩을 넣어 만든 수프, 바나나를 곁들인 샐러드, 산탄데르에서 공수해 온 스페인식 소시지까지. 늦은 저녁 치고는 호화로운 상차림이었다. 카를로스는 선뜻 포크를 들지 못하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보스의 눈치를 살폈다.


디에고 모레노. 동물농장의 주인인 그는 가정부들이 음식을 내오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표정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개자식은 어디 있나?”


한참 만에 디에고의 입이 열렸다. 그는 카를로스가 잡아온 포로의 행방을 묻고 있었다.


일단 가둬놨습니다.”

의뢰인이 누군지 불었나?”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죽지는 않을 겁니다. 상태가 좀 호전되면 이것저것 캐 볼 작정입니다.”


디에고는 그제야 포크를 들었다. 카를로스는 보스의 눈치를 보며 식사를 시작했다. 새벽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한 숟가락도 뜨지 못했다. 으깬 감자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메말라 있던 식도가 욱신거렸다.


꼭 알아내야 해. 누가, 어떻게 우리 농장의 위치를 알아냈는지.”


디에고가 돼지고기를 씹으며 말했다.



1주일 전. 비야비센시오에 있는 농장에서 큰 불이 났다. 그 농장은 코카 잎을 재배하는 곳으로, 동물농장의 소유였다. 불은 농장을 송두리째 태워버리고야 간신히 진화됐다. 수백 평에 달하는 밭은 어떤 작물도 심을 수 없는 죽은 땅이 되어버렸다.


관할서 경찰관들은 잿더미가 된 오두막 안에서 머리가 잘려 나간 알몸뚱이 시체 두 구를 발견했다. 농장주 부부였다. 단순 화재가 아니라 방화였던 것이다. 농장주의 머리는 근처 야산에서 발견됐다. 배고픈 코요테들에 의해 얼굴의 절반이 뜯겨 나간 후였다. 부인의 머리는 근처 개울가에서 퉁퉁 불어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모습으로 발견됐다.


디에고 모레노는 동물농장의 보스가 된 후 한 번도 공격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동물농장은 콜롬비아 전역을 호령하는 남미 최대의 마약 조직, 메데인 카르텔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존재 자체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에 메데인 카르텔의 조직원조차 동물농장에 대해 알지 못했다.


메데인 카르텔에서 동물농장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 메데인 카르텔의 고문인 마약업계의 원로 에르난도 가차, 나머지 한 명은 메데인 카르텔을 지배하는 보스 파블로 에스코바르였다.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동물농장을 베일 속에 감춰둔 장본인이다. 그는 호시탐탐 메데인 카르텔을 노리는 정부와 경쟁 조직들이 모르는 자신만의 돈줄을 확보하고 싶어 했다. 동물농장이 그 돈줄이었다. 디에고는 수익금의 70퍼센트를 파블로에게 바쳤다. 그는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꾸준히 사업을 성장시켜왔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정체불명의 적들이 디에고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동물농장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디에고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미증유의 습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앞길이 막막했다. 그때 그의 귓가에 솔깃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코카 잎 농장을 습격한 조직이 콜롬비아 방위 결사대라는 우익 게릴라 조직이라는 것이다. 정보를 전해준 이는 에르난도 가차였다. ‘연금술사라 불리는 그는 마약 제조 공정에 정통한 인물로, 메데인 카르텔의 마약 레시피를 개발한 인물이다. 메데인 카르텔의 설립을 함께 한 창립 멤버로 충분히 신뢰할 만한 인물이다. 디에고도 그의 정보라면 전적으로 신뢰했다.


콜롬비아 방위 결사대는 원래 정치색을 띤 게릴라 조직이었지만, 지금은 돈에 움직이는 용병집단에 불과했다. 디에고는 카를로스를 시켜 보복공격을 감행하는 한편, 그들을 움직인 의뢰인이 누군지를 알아내고자 오늘의 습격을 계획했다.


이런 걸 찾았습니다.”


카를로스는 식사를 마치고 난 후, 깨끗이 치워진 식탁에 지도 한 장을 올려놓았다. 콜롬비아 방위 결사대 아지트에서 발견한 지도였다. 동물농장이 자리 잡은 엘 카르멘과 보고타, 비야비센시오 일대가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지도 위에는 여러 개의 동그라미와 한 개의 ×자가 그려져 있었다. ×로 표시된 곳은 일주일 전 불타버린, 소녀의 부모가 목숨을 잃은 바로 그 코카 잎 농장이었다. 디에고는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하나씩 짚었다. 모두 그가 소유한 코카 잎 농장과 마약 보관 창고가 있는 장소였다.


의뢰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만만한 놈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동안 우리 거점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별짓을 다하지 않았습니까? 멀쩡한 트럭 기사를 일주일마다 갈아치우고, 물건 운송 루트도 수시로 바꾸고요.”


카를로스가 말했다.

디에고는 라이터를 꺼내 지도에 불을 붙였다. 그는 타들어가는 종잇조각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한판 붙어보자 이건가?”

모든 거점에 경비원들을 더 배치해야겠어요.”


카를로스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경계를 강화한다고 막을 수 있을까? 불길한 예감이 디에고를 엄습했다. 메데인 카르텔은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경쟁 조직인 칼리 카르텔은 콜롬비아 변방으로 쫓아냈다. 정부와도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였지만 일단락된 지 오래다.


메데인 카르텔을 지배하는 콜롬비아 마약상들의 보스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현상수배범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어디까지나 시늉일 뿐이다. 그는 콜롬비아 전역에 수십 개에 달하는 자기 소유의 별장을 오가며 자유로운 도피 생활을 즐겼다. 자신의 위치를 함부로 노출하지는 않았지만, 경찰도 굳이 그를 잡으려 하지 않았다.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정재계, 경찰, 검찰, 법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뿌려 둔 뇌물 덕분이었다. 쫓는 자는 의욕이 없고 쫓기는 자는 여유로운 기묘한 추격전 속에서 콜롬비아 정부는 사실상 메데인 카르텔을 방치했다. 그들과 전쟁을 벌일 여력도, 의욕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기묘한 평화가 찾아왔다.


그런데 코카 잎 농장을 불태운 습격자들은 이제 호시절은 끝났다고 선포라도 하듯이 난폭한 방식으로 농장주 부부를 처형했다. 일종의 선전포고인 셈이다.


옛날에는 모든 조직에 총잡이들이 득시글거렸지. 지금은 어딜 가도 인부들뿐이야.”


디에고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싸울 일이 없었으니까요. 양키 놈들 약 빠는 속도에 맞춰서 물건을 보내려면 같은 인건비로 인부들을 쓰는 게 이득 아닙니까.”

카를로스가 말했다. 동물농장도 같은 이유로 총잡이들의 숫자를 줄이고 인부들을 늘려왔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야 할지도 몰라.”

그전에 우릴 건드린 게 누군지 알아내서 속전속결로 해치워야죠.”


카를로스의 말이 맞았다. 그러나 디에고를 사로잡은 불길한 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일단 정보를 모아보자고. 오늘 수고했어.”


카를로스가 꾸벅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그가 막 현관문을 나서려 할 때쯤, 디에고가 불러 세웠다.


…… 그 농장주 부부한테 딸이 하나 있지 않았나?”

안 그래도 놈들의 본거지에서 어린 여자애 하나를 구조했습니다. 인질로 잡혀갔던 모양이에요. 위독한 상태입니다. 날이 밝는 대로 의사를 부르려고 합니다.”

잘 돌봐줘. 상태가 호전될 때까지 우리가 데리고 있자고.”


카를로스가 저택을 떠났다. 디에고는 창가에 서서 시가에 불을 붙였다. 먹구름처럼 뿌연 담배 연기가 허공에 뿜어져 나왔다. 창 너머, 어둠이 내려앉은 동물농장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아빠…….”


어둠 저편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여긴 너무 춥고 어두워요……, 아빠…….”


수시로 되풀이되는 환청이다.


왜 우리만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거죠? 아빠는 언제까지 거기에 계실 거예요?”


디에고는 슬픔에 가득 찬 얼굴로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공기를 헤치며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느린 속도로 흐느적거렸다









 <슬픈열대>

  7월 14일 출간예정


  [연재 이벤트]

  슬픈열대가 연재되는 동안 기대평을 덧글 로 남겨주세요! 
  10명에게 <슬픈열대 금속뱃지>
  3명에게는<슬픈열대 사인본과 뱃지>  드립니다.
  ( 발표: 7월 14일 )




댓글(3)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greenview 2017-07-05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회가 궁금하네요! 속도감이 좋아요.

샤오와 2017-07-05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밀을 간직한 북한 공작원 권순이의 사연이 궁금하네요.
뭔가 더 큰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도 맘에 듭니다.
출간이 기대되요!!

2017-07-18 1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