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에두아르 르베 지음, 정영문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서협찬 #은행잎4기

“나는 파편을 쓴다.” (p.117)

어떠한 서사나 인과관계 없이 오로지 ‘나’에 관한 문장들이 이어진다. 그러나 현학적인 단어나 심오한 비유 대신 직관적이고 명료한 서술이어서 부담 없이 읽힌다.

다채로운 주제와 그에 관한 견해를 밝힌다. 계절, 문학, 음악, 작가들부터 갖가지 취향을 나열한다. ”내 삶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삶을 사는 것보다 더 오래 걸릴 것이“(p.8)라고 밝힌다. 그래서인지 사소하고 세세한 나 자신을 더 들여다보려 애쓰는 문장들은 열띤 기색이 없다. 다만 두서없이 나열된 채, 모두 ‘나’라는 존재를 그려내기 위한 ‘파편들’로 자리한다.

읽으면서 은연중에 독자인 나 역시 나를 정의하는 문장들이 떠올랐다. 작가의 문장에 대해 동조하거나 다른 견해를 덧붙여갔다. 작가가 선창하면 나는 나름의 문장으로 답가를 부르는 것이다.

그가 시인들이 그려내는 “언어적 작업”이나 “고유한 언어를 만들려는 시인의 시도”보다는 다만 “시에 담긴 사실과 아이디어를 좋아한다”(p.69)는 문장을 쓰면, 나는 그 쉽게 읽히지 않는 시의 고유한 아름다움이 좋다고 답하거나, 또는 아무 말도 답하지 않는다.

이렇게 작가의 『자화상』을 읽는 내내, 나를 이루는 문장 파편, 기억 조각, 순간 회상 등을 모으게 된다. 무엇을 택하고 버릴지 선택은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진다. 나만의 자화상이 어렴풋하게 얼비친다.

작가가 적나라할 정도로 자기를 드러내는 때에 다소 물러서고, 같은 의견과 흥미로운 생각을 보여줄 때 다시 다가섰다. 자리에 붙박여 글을 읽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유롭게 오가는 느낌을 감각하는 게 새뜻했다.

이 읽기의 경험은 한 생애의 처음에서부터 어느 순간까지 다다르게 하고야 만다. 삶을 관통하는 시간의 흐름이 책 표지를 매만지는 질감처럼 느껴진다.

“어머니의 복중이라는 고독과 무덤이라는 고독 사이에서 나는 많은 사람과 어울리게 될 것이다.”(p.31)

이 무수한 나날을 모아쥐고 나를 만난다.

#은행잎서재 #에두아르르베 #자화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행소원
유은정 지음 / 반타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서협찬 #서평단

국가대표 선발전을 앞둔 아티스틱 스위밍 고등부가 공포 서사의 시작점이다. 선의의 경쟁과 동경이 악의와 질투로 변하는 사이, 불행소원은 점점 정교해지고 모두를 집어삼키려 한다.

또래 집단이 모여서 일상을 함께 보낸다는 점에서 학교는 낭만과 공포 모두의 자리가 될 수 있다. 아직 세파에 찌들지 않아서 더 순도 높은 사랑과 미움에 연연하기 쉬운 탓이다.

『불행소원』은 이 불안정해서 아름다운, 청춘들의 심리를 집요하게 따라붙는다. 아주 사소한 악의가 지독한 저주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다각도에서 비춘다.

“네가 너무 좋았어. 너랑 친해지고 싶었어. 너와 함께 듀엣을 하고 싶었어. 그게 진짜 내 소원이었어.”(p.328)

우정은 영원히, 질투는 극악하게, 미움은 다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감정에 달리 이유 붙일 겨를이 없다. 쉽게 빠져들고 밀려나고, 친구 관계가 세상 전부가 되는 시절은 분명 있다.

겪었고, 겪고, 겪을 것이다. 여기서 마음의 벽이 해체되고 읽는 내내 공포가 스민다.

그 시절만의 정서는 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방향도 갈피도 모두 그 무렵 어느 일상, 어떤 감정, 어느 친구와 연결되어 있다. 헐거이 풀어지기도 하지만 영혼이 송두리째 매이기도 한다.

그래서 공포는 무람없이 끼어든다. 아티스틱 스위밍을 연습하는 장면들, 불행의 근원인 수영장 뿐 아니라 텀블러, 정수기 물, 옆에서 손에 묻은 물 터는 사람까지 의심스럽다. “겹겹이 질투와 두려움이 끈적”(p.79)이고, 실체 없던 감정이 구체적인 “불행”을 바랄 때 더 거세진다.

물비린내 나는 문장들이 젖은 머리카락, 수영장 바닥의 균열, 불행을 읊어대는 목소리들을 앞세운다. 자꾸만 심연으로 끌어당긴다.

공들인 설정과 생생한 장면들이 영상화를 기대하게 한다. 목덜미에 오소소 돋은 게 소름인지 어디서 튄 물인지 문득 선득해진다.

불행소원 비는 법이 적힌 “메시지를 막을 방법은 없다. 불행소원을 피할 방법도 없다.“(p.19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배우자의 죽음에 관하여 매드앤미러 1
아밀.김종일 지음 / 텍스티(TXTY)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서협찬 #서평단

같은 한 문장에서 시작된 다른 두 이야기, 매드앤미러 시리즈 1권이다.

아밀 작가의 「아름다움에 관한 모든 것」과 김종일 작가의 「해마」가 한 권으로 묶였다. 두 작가의 세계관은 각각 다르지만 아래 하나의 문장에서 태동했다.

: 행복한 신혼, 죽음에서 돌아온 남편이 문득 낯설게 느껴진다.

이질감이 느껴지는 이 문장은 선득하다. 담담히 공포를 예고한다. 한창 장밋빛 미래를 설계하기 급급할 신혼 생활, 당연히 죽음은 멀 것이다. 사랑에 겨워 방금 영원을 맹세한 남편이 낯설 리가 없지 않나.

그러나 아밀과 김종일은 아주 멋지게 해낸다. 각자 고유한 문체와 서사로 쌓아올린 이야기들은 따로 읽어도, 연달아 읽어도 좋다.

“지금 그 말…… 비유적 표현이야, 직설적 표현이야?”(p.84)

함락되지 않을 것만 같던 열애의 요새는 의심이 돋는 순간 무력해진다. 사랑에 갖다붙이는 영원이나 맹세와 같은 말들은 허황된 겉치레나 다름없어진다.

두 작품 속 아내 은진과 회영은 저마다의 이유로 각자의 남편 동우와 시광을 의심하게 된다. 신뢰가 깨지게 만드는 일의 진위와 상관없다. 그저 철옹성 같던, 연인의 사랑이 무색해지는 장면들은 낯설지 않아 더 무섭다.

미의식에 관한 위선을 드러내는가 하면 동물에 대한 잔혹한 행동을 들키고도 태연하다. 아내에게 사랑을 말하던 입으로 남에게 아내를 험담하거나 “대등한 관계”(p.16)라 동의했으면서 신체적 힘의 우위를 내세우기를 주저하지도 않는다.

눈 먼 사랑으로 포장하고 감내해야 할 일상은 금세 숨통을 조여온다. 아름다운 신혼에 드리워진 한 겹 베일을 들어올리는 순간, 긴장감에 졸여진 공포가 몸피를 불린다. 익숙한 곳에서 시작해 낯선 지점까지 가닿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도파민 도는 감각에 충실하면서 인간의 다양성과 사랑의 모순을 드러내는 게 인상적이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입체감 있는 캐릭터들의 설정이 끝까지 소름 돋게 한다.

“살아라, 언젠가는 죽어야 하니.”(p.252)



이 매드앤미러 시리즈는 소설 속에 반드시 ‘매미’가 등장한다. 1.매미 찾기 미션과 2. 작품 속에 숨겨진 상대 작가의 파트 찾기 미션은 책을 다각도로 즐기게 한다.

특히, 매미는 단순한 배경으로 소비되기보다는 의미 있는 장면 속에서 강조점을 찍는 상징처럼 나타나곤 했다.

두 작품을 각각 읽다 보면 기시감이 드는 장면과 대사들을 마주하게 된다. 사람 사는 게 저마다 비슷하면서 나름으로 다르다는 게 와 닿는다.

단순히 읽기에서 벗어나서 더 적극적으로 탐구하며 읽기는 작품에 매료되는 깊이를 다르게 한다. (다 읽으면 책에 미션 해답이 부록으로 들어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얼지 마, 죽지 마, 사랑하게 될 거야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20
권혜영 지음 / 은행나무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서협찬 #서평단
온갖 분야 덕질에 능수능란한 작가가 완성한 현실과 환상의 협주곡.

갖가지 육체적 사랑이 난무하는 세계와 어떤 사랑에도 감흥 없는 세계를 서로 맞대면서,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을 우리 앞에 끌어다 둔다.

회빙환 소재의 웹소설이 익숙한 이에게도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도 모두 새로운 장을 열어 보인다. 흥미로운 소재의 클리셰를 비틀어 흔히 기대하던 서사 전개 방법을 전복시킨다. 빙의한 웹툰 속과 웹툰 밖 현실을 교차하며 한데 엮어보인다.

작가는 거침없고 독자는 짜릿하다.

심야근무를 하다 과로사 한 30대 여성 주인공은 눈 떠보니 19금 성인 웹툰 속 등장인물 ‘이누리’가 되어있다. 애석하게도 이 세계의 남자 주인공은 여러 여성을 거느린 문어발이고, 지금껏 그런 사람(이라 쓰고 놈)의 호구를 자처해왔다.

이 양산형 성인 웹툰을 그린 작가 ‘한소연’은 또 한 명의 주인공이다. 첫 작품 데뷔 이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다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여기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심신이 모두 지쳐 한 컷도 그릴 수 없다. “얼어붙은”(p.214) 상태다.

이누리와 한소연은 웹툰과 현실이라는 각자의 세계에서 고군분투한다. 저마다의 사정을 딛고 일어서 보려한다. 죽어서도 이 지경인 현실을 규탄하거나, 잊고 지내던 과거의 열정을 더듬으며 현실 속 돌파구를 찾으려 애쓴다.

결국 종착지는 ‘사랑’이다.

덕질 관련한 순도 높은 애정부터 ‘자신을 위로’하는 법에 관해 무람없이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현재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친구와 협력하고 우정을 나눈다. 무심하게 제삼자의 눈으로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파악하고 돌파하는 용기도 삶을 향한 애착, 곧 사랑이다.

각자의 삶에서 사랑을 회복하는 지점, 어떻게든 살아내겠다는 의지의 발로가 곧 나를 향한 사랑이고 순애임을 두 주인공을 통해 직시하게 된다.

일단 빠져들면 출입구를 쉽게 찾을 수 없는 아주 매력적인 소설.

흥미롭고 솔직하다. 밖에서 읽다가 뒤를 흘끔대는 순간들이 있지만, 뭐 어떤가. 어느 때든 간에 “왔어?”라고 말하며 환대해 줄 세계는 분명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이 책을 열면 그 문이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수의 괴이도감
현찬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서협찬


모든 거짓을 뒤집어엎어 밝은 진실 아래 보는 것이 다 좋은 줄로만 아시오? 가만히 놔둬야 하는 때도 있는 법이오. 그게 사람에 대한 배려고, 예의요. p.225

바다 밖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엇인가. p.245


신라와 가야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동양풍 판타지적 요소가 가득하다. 작가가 공들여 빚은 세계관은 현실이라는 경계를 넘어서서 시야를 확장시킨다.

악의는 없었으나 순리를 거슬러 이무기의 저주를 받게 된 강수, 두꺼비님과 인간 사이에 난 맹인 점복사 두타비 그리고 흰 까치 돌이가 함께 한다.

동양풍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분명 강수와 두타비의 이야기에 마음이 열릴 것이다.

이들은 첫 만남부터 예사롭지 않다. 기이한 사건에 함께 묶여, 제각기 구원자가 되고 동행자가 된다. 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만난 이들은 서로의 낮과 밤을 지켜준다.

우정은 아름답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여정은 이어지고 삶은 기록된다. 만남과 헤어짐, 경계의 안팎에 자리한 존재들, 괴이한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서로 맞대고 스쳐가는 날들은 설화가 되고 기담이 된다.

강수와 두타비의 관계성이 인상 깊다. 서로 대척점에 있으면서 또 닮은 구석이 있는 둘의 조합은 순수한 우정으로 영근다. 티키타카가 잘 맞고, 한쪽이 허술하면 나머지가 기민해 합일이 매끄럽다.

그래서 강수와 두타비의 시간은, 서로 다른 존재들을 이해하고 두 세계가 각기 존재하는 것을 긍정하는 이야기다. 피끓는 쟁투가 아니라 가슴 먹먹한 모험기다.

자연을 숭배하기보단 이해하려는 가야인과 신화 속에 사는 사람들, 신라인(p.234)이 ‘괴이’를 찾는 모험이야기. 이분법적으로 대립하는 게 아니라 공존을 말한다.

그들이 연구하는 이치와 신화에 깃든 묘미가 맞닿으면 비로소 환상의 녘, 영춘이 어슴프레 드러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