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4
제임스 미치너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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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을 읽었다.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분명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는 나의  기대는
첫장을 넘기면서 확실해졌다. 이 책의 만만찮은 부피와 무게를  느끼며
서서히 작품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작가,  편집자,  비평가,
독자들이 등장하여 그들의 삶과 문학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느낀다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특히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과 함께 문학의 성과가 책이라는 구체적인 상품으로  태어나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도 매우 흥미있었다. 진정한 독자라면 자신이 읽고 있는 책
의 내용만을 읽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출판사,  편집인과  편집
내용은 물론, 책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태어나고 있으며 보다 근본적인
문학에 대해 항상 질문하고 의문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이러한 독자를 '비판적인 독자'라고 부르고 싶다. 그러나 과연 이
러한 독자들의 수는 얼마나 될까. 극히 적을 것이다. [소설]애서도  작
가의 수준과 독자의 수준이 어디까지 일치해야 하는가에  대한  격렬한
토론과 대립이 나온다. 대게의 독자는 다만 문학을 즐기는 정도에 불과
하다. 그들이 문학시장에서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은 분명하고 무시할 수
없지만 문학의 '질'을 발전시키는 동력의 근원이 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고급스러운 독자들은 문학을 발전시킨다고 할 수 있을까.


  문학의 수준에 대한 논쟁은 옳고 그름을 단정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문학의 역할이나 기능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결론이 있다고 본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후기산업사회의 현상으로 모든 예술분야에 포스트모더니
즘을 도입하고 있다. 해체와 재구성을 통한 작품의 해석을 통해 현대사
회의 소외와 모순을 표현하자는 부르짖음이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어떤 작가 - 그를 작가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에
수치를 느끼지만 - 는 이렇게 말했다.
 "문학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시나 소설이란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
단의 하나이며 즐기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정확하게 이렇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뜻으로 얘기를 했다.  그
리고 바로 이러한 류의 작가들이 대게 젊은 작가들이고 그들의  역량이
형편없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함이 있는 것이다. 형편없는 작가들이  마
치 모든 것을 새롭게 해석하겠다는 '전의'에 불타서 기존의 형식과  이
데올로기를 무차별로 싸잡아 매도하고 있다. 그들의 머리에는 돈과  여
자의 벌거벗은 몸과 푹푹 썩어가는 몸뚱아리가 있을 뿐이고, 그들의 가
슴에는 니코틴으로 망가진 폐와 폭음으로 썩어버린 위장만이 있을 뿐이
다. 그들의 생활이 바로 그러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
려진 사실이다. 무분별한 생활과 몰가치한 세계관을 가지고 이기와  나
태의 껍질 속에서 일하지 않고 살아갈려는 기생충같은 인간들,  그들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를 말하는 자들이다.
 얘기가 약간 옆으로 빗나갔지만 좀 더 추가를 해야 할 것같다. 이렇게
내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비난하면 예술의 자유에 대한 공공연한  적
대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점잖은 분들이 충고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표현은 그래도 상당히 점잖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
론, 나의 비난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오늘날의 사조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넓게는 이른바 '순수'라고 하는 모든 관념론자들을 향한  도덕
적인 비난이다.
  나는 그들이, 이른바 순수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는 예술을 지향하
는 사람들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해
배놔라 감놔라 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것은 나의 권리가 아니며  그
만한 힘도 나에게는 없다. 하지만 보라,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짓들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썩어버린 정신의 늪으로 끌어들이고 있는가
를. 그들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문학'이라는 가면을 쓰고  가난하
고 겸손한 우리의 이웃들을 구역질나는 관념의 똥통에 빠뜨리고  있다.
종이 위에 활자를 인쇄한다고 해서 모두 문학작품이 될 수는 없다.  우
리는 진정한 예술과 '쓰레기'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하며 선량한  독자들
을 기만하는 모든 음모들을 폭로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지금  떠들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필두로 한 모든 관념론적 문학에  대한  비판이
있어야 한다.
  어떤 이는 그러한 것들이라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을 일부러  들먹
거리느냐고 하시겠지만 보수적인 언론과 대중매체 - 책, 영화,  텔레비
전, 신문 등 - 를 통해 이러한 내용들은 선량한 독자들의 가슴에  달콤
한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입에 달은 것은 이를 썩게 한다는 간단한  사
실을 잊는 우리의 독자들은 대중매체의 최면술에 이끌려 자신을 타락의
늪으로 끌고가는 것이다. 물론 다른 이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것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이다.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예술이라
는 것은 이념의 도구로서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발전시켜나갈 것이기 때
문에 우리가 보다 근본적인 것을 개혁하지 않는 한, 절대 없어지지  않
을 것이다."
  좋다. 여기에 찬성한다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근본적인 문제에 매
달려 현실의 고통을 외면한다는 것은 직무유기이다. 특히, 다른 무엇에
앞서 인간의 정신을 가름한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함이 있는 것이다. 그
러한 문학이 개인의 이기주의에 함몰하고 경쟁과 폭력과 파괴를 부추기
며 체제에 순응하는 노예같은 인간을 만드는 것임이 분명하다면 그것은
분명 가장 악랄한 이데올로기 선동이며 그 이데올로기가 바로 포스트모
더니즘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일련의 젊은 작가들이  이러
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떠들어대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그들이
누구라고 지적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세계는
무엇이며 그리고 있는 현실은 어떠한가. 후기산업사회의  모순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그럴듯한 명목으로 그들이 하는 짓이란 과연  무엇
일까? 인간에 대한 회의, 소외, 끝없는 절망, 몰가치,  이기주의와  쾌
락, 폐쇄된 자아, 현상의 나열, 등등이다. 그들은 노동을 하지않기  때
문에 일하는 사람의 건강한 몸과 마음을 알지 못한다. 즉, 그들은 병든
인간들인 것이다. 글줄이나 끄적거려서 먹고 살만하거나 인간의 믿음과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자라난 정서불안의  성격파탄자처럼  인간의
문제를 돈과 섹스와 마약으로 해결하려는 그들의 태도는  바로  그러한
자신들의 작품만큼이나 오염되고 타락하고 정신빠져있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한결같이, '이제 이데올로기는 없다. 모든 것은 해체
하고 있는 것이다.' '세기말적 경향은 인간을  정상으로  만들지  않는
다.' 물론 이러한 말을 누가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날마다  써갈기는
그 '작품' 속에 녹아있는 사상들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이데
올로기가 없다고 말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진정한 이데올로기는 시작된
다.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첨병인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이  순진무구한
어리석음을 귀여워해야 할까, 분노해야 할까. 아니다. 그들은 순진무구
한 것이 아니라 저열하고 추악하며 구역질나게 더러운  인간  속물들이
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늘 술에 취
하고 여자들 알몸이나 탐하고 까페나 레스토랑에서 문학 운운하는 그들
의 정서가 철모르는 몇몇 젊은이들을 홀릴지는 모르지만 건강한 정신과
현실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해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문학의 역사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를 가지고  자랑스럽게
떠든다. 자신이 모르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단세포적인  사고방
식이 기가 막히다 못해 헛웃음이 나오지만 그들을 용서해줄 마음은  조
금도 없다. 그들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자
신의 안락과 행복이며 다른 많은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자신의
발가락에 낀 때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인간들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적이 있는가. 그들이 역사에 대해 관심을 보인 적이 있는가. 작품
을 보라, 냉소적이고 천박하며 무지와 황당함으로 분칠한 언어를  교묘
하게 위장하고 있다.
  땀흘리고 일하는 우리의 이웃들과 가난과 고통으로 울고있는 많은 민
중들이 바로 지금 이 시간에 살아있어도 '작가'라는  자들은  침묵하고
있다. 침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은폐하고 왜곡하며 고통받는 사람들
을 모욕하고 있다. 바로 그런 인간들이 우리와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
는 것이다. 누가 이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이렇게 장황하게 얘기를 했지만 요점은 간단하다. 휴머니즘이 결여된
'예술'은 예술일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젊은 작가들의 활동이 심히 우려된다. 나는 예술의, 특히 문학의  다양
한 실험정신을 절대 찬성한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휴머니즘을  발전
시키는 전제에 있어서만 그렇다.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큰 격차가 있고
그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이 훨씬 많다. 진정한 작가라면 이러한 현실을
절대 외면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양심에 조금이라도  배치되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이미 작가로서의 자격을 잃은 사람이다. 작가도 인간인 이
상, 자신의 생각이 있을 것은 당연하지만 작가가 바로  '작가'로  불릴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시작하기  때
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내가 개인적인 일에 함몰하고  비정상적
인 정서를 노출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을 강도높게 비난한 것이다. 인간
들은 때로 절대 화해할 수 없는 길을 가기도 한다. 나는  그것을  원치
않지만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점잖은 인간이 되고 싶지만 인간됨을
포기한 '쓰레기'들과는 같이 쓰레기가 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지 않
을까. 그러나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무지에서 오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이렇게 행동한다면 그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생
각하기에 후자쪽의 혐의가 더 짙은 일련의 젊은 작가들을 보면서  그들
이 좀 더 솔직해지기를 기대한다. 자신들의 역사의식의 부재를  인정하
고 자본주의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이기적이고 쾌락적이었노라고 고
백하고 따뜻한 휴머니즘을 민중에게서 배우겠다고 약속을 한다면  그들
은 용서받을 수 있다.

 뱀의 발 --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에 대한 독후감을  쓸려다가  그만
엉뚱한 소리를 하고 말았다. 좀 건방질지 모르지만 독자의 권리로 나중
에 한 작품을 선정하여 깊이있는 얘기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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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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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를 읽고

 책읽는 재미를 느끼는 것은 읽는 이의 취향과 내용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까이 할 수 없는 특이하고 신비한 것에서 더 큰 흥미와 재미를 느끼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소설들의 내용은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왜 이런 못난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내가 문화적 사대주의에 빠져 있거나 리얼리즘을 외면하고 있어서는 아니고 한 사람의 평범한 독자로서 이런 저런 책들을 읽으면서 느끼게 된 것이다. 최근에 독일작가 - 이름을 잊었다. '쥐스킨트'인가... 나의 이 몹쓸 기억력을 탓하며 - 가 쓴 것을 '열린책들'이라는 출판사에서 펴냈 [향수]라는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강하게 느꼈는데, 이전에 이탈리아의 기호학자이자 작가인 움베르토 에코가 쓴 [장미의 이름]이나 [푸코의 추]를 읽으면서 정말 충격을 받았던 나는 그 충격때문에 다른 책들이 한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 그만한 재미와 지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 어디 그리 흔하랴. 좋은 책을 읽고 눈이 높아진 것을 탓해야 할지 어쩔지 모르던 때에 그나마 [향수]를 다시 찾아 읽었다는 것이 작은 위안이었다. 

 향수를 읽어나가면서 참으로 강한 호기심과 흥미가 끌렸다. 에코처럼 대단히 지적이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지적이었으며 작가가 역사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17세기 프랑스의 풍속을 마치 그림을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특이한 소재를 취급한다는 것은 소재면에서는 매우 큰 장점을 가지고 있으나 그 소재를 어떻게 주제 속에서 자연스럽고 풍부하게 녹여낼 것이가가 역시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그런 면에서 훌륭한 작가라는 것은 자신이 쓸 수 있는 범위에서 치밀하게 작업을 하는 사람을 일컬을 수 있겠다. 
 이 작품 [향수]역시 그런 훌륭한 작가가 드러내는 멋진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독자로서는 새로운 세계를 만나서 책을 읽는 순간에는 완전히 그 세계에 빠져들고 만다면 그보다 큰 행복이 어디있으랴. 사실 나는 에코의 일련의 책들과 이번 쥐스킨트의 향수를 읽으면서 시간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가 있었다. 작품 속에 내가 들어가서 마치 주인공의 그림자처럼 모든 사건의 장소에 내가 있는 듯한 착각을 한 것이다. 그만큼 향수는 나를 매료시켰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자주 쓰는 향수의 발달사 속에 이러한 이야기가 없으란 법은 없다. 어떤 분야에 천재가 등장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인 것이고 이것이 비록 소설이긴 하지만 참으로 설득력이 있다. 조금은 괴기하고 잔혹하며 인간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이 작품의 분위기는 확실히 '서양'이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풍긴다. 같은 인간이면서도 서양과 동양의 인종들은 그 문화와 풍속을 매우 다르게 발전시켜왔다. 이렇게 다른 문화의 발전은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눈, 즉 가치관이 다르게 변해왔음을 나타내며 그것은 어떤 면에서 아직까지도 우리들이 극복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서양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향수]라는 문학작품에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확실히 도전적이며 실험적이고 그런 점에서 매우 진취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때로 매우 황당하게 드러나기도 하는데, 우리 동양인들로서는 별로 신기해하지 않거나 이니면 거의 생각지 않는 것들 가운데서 그들은 어떤 의미를 찾기도 한다. 예를 들면 드라큐라 백작이라든가 늑대인간, 마녀, 유령 등이 그렇다.우리 동양에도 이러한 것들은 얼마든지 있다. 모습을 약간씩 달리 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매우 인간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합리적인 대안까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반해, 서양의 괴기함이란 이성에 호소하기 보다는 영적 - 신적 - 존재에 기대를 거는 수가 많다. [향수]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향수에서도 이와 비슷한 유형을 발견할 수 있다. 첫 장면부터 매우 잔인하고 혐오스러우면서도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이 작품은 결국 마지막까지 독자를 당황하게 한다. 17세기 서양의 사회상이 이렇게 미개하고 야만적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고 생각할 독자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나는 믿는다. 17세기라면 르네상스 이후 인간의 지혜와 과학이 점차 뿌리를 내리는 시기인데, 서양에서는 이러한 과학문명의 발달과 함께 비이성적인 부분도 마지막까지 사라지지 않고 인간을 괴롭혔다. 
 로마 가톨릭의 힘은 여전히 막강했고 민중들의 삶은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한 천재가 자기의 삶과 존재의 의미를 깨닫고 26명의 아름다운 아가씨를 죽여 향수를 그것도 인류의 역사상, 전세게에서 단 하나이며 최초의 향수를 만든다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향수의 발명이 시작된 동기는 아마 많은 사람들이 상식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세의 더럽고 어두운 사회에서 향수가 한 역할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바로 그러한 시기에 무서운 천재가 나타난 것이다. 
 [향수]는 소재, 문학성, 문장(물론 원작을 읽지는 못했지만 번역이 좋은 것을 보니 원작도 분명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묘사 등 어느 하나 나무랄데 없이 훌륭한 작품이다. 이 소설을 쓴 작가의 신비스러운 사생활만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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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 SE (2disc) - [할인행사]
밀로스 포먼 감독, 루이즈 플레쳐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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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책 한 권, 영화 한 편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영향을 끼친 책과 영화가 있겠지만, 10대 청소년 시절, 내 영혼을 흔든 영화에 대해 말하고 싶다.

17, 모든 것들이 낯설었고 어린이도, 어른도 아닌 모호한 정체성으로 혼란스럽던 그 시절, 나는 일찍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둥지에서 막 벗어난 어린 새처럼 모든 것들이 경이로웠고, 낯설고, 거칠었으며 두려운 상대들이었다.

하루하루 고단한 노동의 연속이었으며 미래는 불투명했고,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삶이 재미있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그런 어느 날, 지방에서 주어진 모처럼의 휴일. 함께 일하는 형과 함께 극장 광주 양동 극장, 지금은 그 개천마저 복개되어 흔적조차 사라진 - 에서 영화를 봤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어떤 영화인지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작정 들어가서 보기 시작했다. 주인공(잭 니콜슨)이 얼마나 유명한 배우인지, 아카데미 상을 몇 개를 받았는지도 몰랐고, 심지어는 영화 제목이 뜻하는 아이러니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는 그런 것들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고 영화에 대한 관심도 많지 않았던 때여서 그저 시간만 재미있게 보내면 되는 걸로 생각을 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도 그 영화의 장면들은 내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난 직후, 나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영화를 보기 전과 영화를 보고 난 후 내 자신이 달라진 것을.

잭 니콜슨은 정신병자가 아니지만 중형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정신병자 행세를 하고 정신병동에 갇힌다. 그 속에서 수간호사의 절대권력을 보게 되고, 정신병자 동료들을 위해 위험한 모험을 시작한다.

결국 잭 니콜슨 자신이 전기충격실에 끌려가 진짜 정신병자가 되어버리고, 말이 없던 ‘추장’은 마침내 벽을 부수고 병동을 탈출한다.

잭 니콜슨이 전기충격실에서 나올 때의 모습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거대한 세면기를 들어올려 벽을 부수고 유유히 사라지는 추장의 뒷모습이 눈에 어른거리며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내 몸과 마음 속에서 자라고 있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 눈을 뜬 것이다. 자유롭고 싶은 욕망은 모든 인간의 공통 요소겠지만 실제로 자유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이 생각난다. 인간의 권리, 자유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 준 영화. 이후 [빠삐용], [쇼생크 탈출] 등 자유를 갈망하는 영화들이 늘 마음에 와 닿았고 감동을 주었다.

10대 때, 나를 정신적으로 키운 것이 책이라면, 이 영화도 한 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도 상당히 중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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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쾌청한 날씨. 간단하게 물과 사과, 빵을 넣은 배낭을 메고 똥이와 함께 산으로 갔다. 이 마을에 들어온지 벌써 8년인데도 아직 중미산 정상을 올라가지 못했다. 참 많이 게을렀다는 생각이 들면서 중미산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집에서 약 2킬로미터 정도는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를 걸어야 한다. 아침 시간이라 다니는 자동차는 많지 않았다. 도로 옆에는 눈이 쌓여 있고, 도로 옆 계곡과 산비탈은 온통 가난한 나무와 흰 눈 뿐이다.

날씨도 그리 춥지 않고, 걸으니 땀이 났다. 서종면과 옥천면 경계를 벗어나 조금 올라가면 산행을 시작하는 등산로가 있다. 자동차 도로를 벗어나니 마음이 놓이고 발걸음이 편하다. 임도는 자동차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포장만 안 되어 있을 뿐, 다니기 좋은 길이다. 이 도로가 전부 눈으로 덮여 있었다. 햇살이 화창하게 빛나고 가끔 바람이 나뭇가지를 지나가는 소리가 마치 물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여러 종류의 새소리와 딱따구리가 나무 쪼는 소리도 들린다. 첫 번째 갈림길은 명달리 넘어가는 길과 중미산 자연휴양림으로 가는 세 갈래 길이다. 이곳부터 중미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데, 우리는 휴양림 쪽으로 가장 가까운 곳까지 가서 올라가기로 했다.

임도를 따라 한참을 더 올라가니 중미산 올라가는 직선 코스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중미산 휴양림 매표소 방향이 나온다. 여기서 똥이는 산에 올라가지 않겠노라고 했다. 결국 똥이엄마가 중미산 휴양림 매표소까지 차를 가져와서 똥이와 함께 중미산 포장마차에서 국수를 먹고 내려가기로 했다.

혼자 산행을 시작했다. 갈림길의 시작부터 가파른 길이 시작되었다. 눈이 많이 쌓여 있어서 미끄럽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가파른 길 때문에 더 힘이 많이 들었다. 가다 쉬고, 가다 쉬고를 반복하고, 배낭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오르막 길을 힘겹게 올랐다.

정상 근처에서는 사과 한 조각을 꺼내 먹고, 충분히 쉰 다음 다시 올랐다. 정상은 곧 나올 듯, 보일 듯 하면서도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등산로 입구에서 한 시간을 올라서야 겨우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상은 갑자기 불쑥 나타났다. 솟아오른 바위가 접근하기 어렵게 보이는데, 이 바위를 올라서면 곧바로 정상이었다.

정상에 오르니 아무도 없다. 올라올 때도 오늘 생긴 발자국이 없어서 내가 오늘 처음 오르는 등산객임을 알 수 있었다. 정상 표지석 옆에 앉아 물을 마시고, 빵을 꺼낼 때 사람들이 왁자지껄 올라왔다. 단체로 두 팀이 더 올라와서 사진을 찍고 내려갔다.

중미산은 해발 834미터로, 여기 정상에 서면 멀리 용문산, 유명산, 청계산, 화악산 등 근처 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바람도 불지 않아서 한참을 정상에 앉았다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은 다른 코스를 택했다. 올라올 때 너무 가파른 길이어서 몹시 힘들기도 했지만, 같은 길을 다니는 건 지루해서 좋아하지 않아서다. 경사가 조금 완만한 곳을 택해 내려오는데, 이곳은 눈이 정강이까지 푹푹 빠졌다.

등산객의 발자국이 남아 있어서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지만 눈이 신발 속으로 들어가 몹시 차갑다. 신이며 양말이 금새 젖어 질벅거린다. 그래도 아랑곳 않고 눈속을 헤치며 내려왔다.

나무 사이를 지나는 바람소리와 새소리만 들릴 뿐, 산은 고요하다. 저 아래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가장 큰 소음이다. 눈 위에는 고라니, 멧돼지의 발자국이 남아 있지만, 낮에는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집에 돌아오니 다리가 뻐근하다. 오랜만에 산행을 했고, 다섯 시간을 걸었으니 꽤 운동이 되었을 게다. 샤워를 하고 운동화를 빨아 널고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동형이 아빠가 전화했다. 오늘 서울로 자전거 타러갔던 아빠들이 곧 도착한단다. 문호리로 내려가서 그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나도 함께 가자고 했지만 체력 때문에 거절하고 산행을 한 것이다.

올 여름에 제주도로 자전거를 타러 갈텐데 그때를 위해서라도 체력을 다져야 한다. 산행은 일주일에 한 두 번씩 꾸준히 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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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겨울날씨로는 드물게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햇살이 따뜻한 날이다. 이번 겨울에는 눈이 제법 많이 내려 도로의 아스팔트만

 

검게 보이고 산이며 논이며 밭은 여전히 하얀 들판이다.

어제부터 시작된 두통이 너무 심해서 아침부터 한낮이 될 때까지 침대에서 꼼짝도 못하고 잠을 잤다. 오후에 똥이가 택견을 가고, 집안으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와서 조금 더웠다. 신선한 바람을 맞으려고 문을 조금 열어놓으니 상쾌한 겨울 바람이 들어와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듯 하다.

심하진 않지만 두통이 계속되고, 햇살은 눈부시게 따가워서 카메라를 들고 마을을 한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마을은 조용하다. 노인들은 마을회관 노인정에 모여 있고, 느티나무 아래 컨테이너 도서관에는 젊은 엄마들과 어린이들이 모여 있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아궁이나 나무 보일러를 때는 집에서는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나무 타는 냄새가 향긋하다.

마을을 둘러 싼 병풍같은 산에는 하얗게 눈이 덮여 있고, 마을은 남향으로 앉아 햇살이 밝게 비치는 곳에 집들이 나란히 햇볕을 받으며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개울은 그늘진 곳에는 얼음이 덮여 있고, 해가 비치는 곳은 얼음이 다 녹아서 물 내려가는 것이 보인다. 겨울의 계곡은 물이 거의 바싹 말라있기 마련인데, 올해는 눈이 많이 내려서 겨울 계곡으로는 유난히 물이 많이 내려가고 있다.

여기 저기 마을 사진을 찍고, 어디를 갈까 하다 문득 외따로 떨어진 집이 생각났다. 그 집은 마을에서도 한 가구만 산 아래 뚝 떨어져 있었는데, 그 집 주인이 작가로 알려진 사람이다. 우연히 책을 읽다 그 ‘작가’가 누구인지를 알아냈다.

80년대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에 전두환을 찬양했던 독재에 부역했던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우리 마을에 들어와 살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이상하기도 했다.

그 ‘작가’의 집은 차가 들어가기는 하지만 산길 그대로의 외길에 그늘진 곳이어서 요즘처럼 눈이 많이 내리면 차가 드나들지 못했다. 이 마을에 들어와서 딱 한 번 그 집 앞을 가 본 적이 있었는데,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진 않았지만 워낙 외진 곳이고, 산 속이어서 마을 사람들도 거의 찾지 않는 집이었다.

왜 그 집을 가고 싶었는지 딱히 이유는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도 아니고, 그곳에 가야 할 이유도 없었지만, 발길이 자연스럽게 향했다고 해야 할까, 딱히 이유가 있다면 그 작가를 만나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정도는 마을 이장으로서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포장 도로인 산길로 가는 길은 멀리 돌아가는 길이어서 바로 산 밑에서 길이 없는 곳으로 올라갔다. 눈이 쌓여 있어서 눈밟는 소리가 뽀드득거렸고, 여기저기에 고라니 발자국, 꿩 발자국, 멧돼지 발자국 들이 보였다.

오후 4시에 이미 그 집은 짙은 그늘이 드리웠고, 북향집이어서 처마에 고드름이 길게 드리워 있었다. 남향집과 북향집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주고 있었다. 집앞에 차가 있기에 집에 사람이 있나보다 하고 올라가서 ‘계세요’하고 부르니 대답이 없다.

헌데, 언뜻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조금 더 다가가니 뜻밖의 사람이 거기 있었다. 옆 마을에 살고 있는 작가의 따님이었다. 중학생이 그 친구가 이 시간에 여기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어쩐 일이냐고 물으니, 공부하러 왔단다. 아, 이 집의 주인이 작가여서 글쓰기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문이 잠겨 있고, 집 주인은 출타하고 없어서 한 시간 가량을 밖에서 떨고 있었다.

휴대전화가 없어서 연락도 하지 못하고 무작정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 휴대전화를 빌려주어 그 ‘작가’와 통화를 하도록 했다. ‘작가’라는 사람은 저녁에나 들어올 수 있다고 했단다. 오늘 이 시간에 약속을 해놓고, 아무런 연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어긴 그 ‘작가’라는 인간이 몹시 미웠다.

이 산골짜기 추운 곳에서 중학생 아이가 추위와 무서움과 외로움에 오들오들 떨고 있다는 생각을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작가’인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가 났다. 그 아이를 데리고 내려와 컨테이너 도서관에 데려다 주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왜 내 발길이 그 집을 향해 갔는지 생각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아니면 어떤 ‘느낌’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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