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4
제임스 미치너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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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을 읽었다.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분명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는 나의  기대는
첫장을 넘기면서 확실해졌다. 이 책의 만만찮은 부피와 무게를  느끼며
서서히 작품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작가,  편집자,  비평가,
독자들이 등장하여 그들의 삶과 문학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느낀다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특히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과 함께 문학의 성과가 책이라는 구체적인 상품으로  태어나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도 매우 흥미있었다. 진정한 독자라면 자신이 읽고 있는 책
의 내용만을 읽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출판사,  편집인과  편집
내용은 물론, 책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태어나고 있으며 보다 근본적인
문학에 대해 항상 질문하고 의문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이러한 독자를 '비판적인 독자'라고 부르고 싶다. 그러나 과연 이
러한 독자들의 수는 얼마나 될까. 극히 적을 것이다. [소설]애서도  작
가의 수준과 독자의 수준이 어디까지 일치해야 하는가에  대한  격렬한
토론과 대립이 나온다. 대게의 독자는 다만 문학을 즐기는 정도에 불과
하다. 그들이 문학시장에서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은 분명하고 무시할 수
없지만 문학의 '질'을 발전시키는 동력의 근원이 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고급스러운 독자들은 문학을 발전시킨다고 할 수 있을까.


  문학의 수준에 대한 논쟁은 옳고 그름을 단정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문학의 역할이나 기능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결론이 있다고 본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후기산업사회의 현상으로 모든 예술분야에 포스트모더니
즘을 도입하고 있다. 해체와 재구성을 통한 작품의 해석을 통해 현대사
회의 소외와 모순을 표현하자는 부르짖음이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어떤 작가 - 그를 작가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에
수치를 느끼지만 - 는 이렇게 말했다.
 "문학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시나 소설이란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
단의 하나이며 즐기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정확하게 이렇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뜻으로 얘기를 했다.  그
리고 바로 이러한 류의 작가들이 대게 젊은 작가들이고 그들의  역량이
형편없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함이 있는 것이다. 형편없는 작가들이  마
치 모든 것을 새롭게 해석하겠다는 '전의'에 불타서 기존의 형식과  이
데올로기를 무차별로 싸잡아 매도하고 있다. 그들의 머리에는 돈과  여
자의 벌거벗은 몸과 푹푹 썩어가는 몸뚱아리가 있을 뿐이고, 그들의 가
슴에는 니코틴으로 망가진 폐와 폭음으로 썩어버린 위장만이 있을 뿐이
다. 그들의 생활이 바로 그러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
려진 사실이다. 무분별한 생활과 몰가치한 세계관을 가지고 이기와  나
태의 껍질 속에서 일하지 않고 살아갈려는 기생충같은 인간들,  그들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를 말하는 자들이다.
 얘기가 약간 옆으로 빗나갔지만 좀 더 추가를 해야 할 것같다. 이렇게
내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비난하면 예술의 자유에 대한 공공연한  적
대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점잖은 분들이 충고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표현은 그래도 상당히 점잖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
론, 나의 비난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오늘날의 사조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넓게는 이른바 '순수'라고 하는 모든 관념론자들을 향한  도덕
적인 비난이다.
  나는 그들이, 이른바 순수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는 예술을 지향하
는 사람들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해
배놔라 감놔라 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것은 나의 권리가 아니며  그
만한 힘도 나에게는 없다. 하지만 보라,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짓들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썩어버린 정신의 늪으로 끌어들이고 있는가
를. 그들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문학'이라는 가면을 쓰고  가난하
고 겸손한 우리의 이웃들을 구역질나는 관념의 똥통에 빠뜨리고  있다.
종이 위에 활자를 인쇄한다고 해서 모두 문학작품이 될 수는 없다.  우
리는 진정한 예술과 '쓰레기'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하며 선량한  독자들
을 기만하는 모든 음모들을 폭로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지금  떠들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필두로 한 모든 관념론적 문학에  대한  비판이
있어야 한다.
  어떤 이는 그러한 것들이라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을 일부러  들먹
거리느냐고 하시겠지만 보수적인 언론과 대중매체 - 책, 영화,  텔레비
전, 신문 등 - 를 통해 이러한 내용들은 선량한 독자들의 가슴에  달콤
한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입에 달은 것은 이를 썩게 한다는 간단한  사
실을 잊는 우리의 독자들은 대중매체의 최면술에 이끌려 자신을 타락의
늪으로 끌고가는 것이다. 물론 다른 이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것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이다.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예술이라
는 것은 이념의 도구로서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발전시켜나갈 것이기 때
문에 우리가 보다 근본적인 것을 개혁하지 않는 한, 절대 없어지지  않
을 것이다."
  좋다. 여기에 찬성한다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근본적인 문제에 매
달려 현실의 고통을 외면한다는 것은 직무유기이다. 특히, 다른 무엇에
앞서 인간의 정신을 가름한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함이 있는 것이다. 그
러한 문학이 개인의 이기주의에 함몰하고 경쟁과 폭력과 파괴를 부추기
며 체제에 순응하는 노예같은 인간을 만드는 것임이 분명하다면 그것은
분명 가장 악랄한 이데올로기 선동이며 그 이데올로기가 바로 포스트모
더니즘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일련의 젊은 작가들이  이러
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떠들어대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그들이
누구라고 지적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세계는
무엇이며 그리고 있는 현실은 어떠한가. 후기산업사회의  모순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그럴듯한 명목으로 그들이 하는 짓이란 과연  무엇
일까? 인간에 대한 회의, 소외, 끝없는 절망, 몰가치,  이기주의와  쾌
락, 폐쇄된 자아, 현상의 나열, 등등이다. 그들은 노동을 하지않기  때
문에 일하는 사람의 건강한 몸과 마음을 알지 못한다. 즉, 그들은 병든
인간들인 것이다. 글줄이나 끄적거려서 먹고 살만하거나 인간의 믿음과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자라난 정서불안의  성격파탄자처럼  인간의
문제를 돈과 섹스와 마약으로 해결하려는 그들의 태도는  바로  그러한
자신들의 작품만큼이나 오염되고 타락하고 정신빠져있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한결같이, '이제 이데올로기는 없다. 모든 것은 해체
하고 있는 것이다.' '세기말적 경향은 인간을  정상으로  만들지  않는
다.' 물론 이러한 말을 누가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날마다  써갈기는
그 '작품' 속에 녹아있는 사상들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이데
올로기가 없다고 말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진정한 이데올로기는 시작된
다.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첨병인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이  순진무구한
어리석음을 귀여워해야 할까, 분노해야 할까. 아니다. 그들은 순진무구
한 것이 아니라 저열하고 추악하며 구역질나게 더러운  인간  속물들이
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늘 술에 취
하고 여자들 알몸이나 탐하고 까페나 레스토랑에서 문학 운운하는 그들
의 정서가 철모르는 몇몇 젊은이들을 홀릴지는 모르지만 건강한 정신과
현실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해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문학의 역사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를 가지고  자랑스럽게
떠든다. 자신이 모르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단세포적인  사고방
식이 기가 막히다 못해 헛웃음이 나오지만 그들을 용서해줄 마음은  조
금도 없다. 그들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자
신의 안락과 행복이며 다른 많은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자신의
발가락에 낀 때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인간들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적이 있는가. 그들이 역사에 대해 관심을 보인 적이 있는가. 작품
을 보라, 냉소적이고 천박하며 무지와 황당함으로 분칠한 언어를  교묘
하게 위장하고 있다.
  땀흘리고 일하는 우리의 이웃들과 가난과 고통으로 울고있는 많은 민
중들이 바로 지금 이 시간에 살아있어도 '작가'라는  자들은  침묵하고
있다. 침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은폐하고 왜곡하며 고통받는 사람들
을 모욕하고 있다. 바로 그런 인간들이 우리와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
는 것이다. 누가 이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이렇게 장황하게 얘기를 했지만 요점은 간단하다. 휴머니즘이 결여된
'예술'은 예술일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젊은 작가들의 활동이 심히 우려된다. 나는 예술의, 특히 문학의  다양
한 실험정신을 절대 찬성한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휴머니즘을  발전
시키는 전제에 있어서만 그렇다.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큰 격차가 있고
그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이 훨씬 많다. 진정한 작가라면 이러한 현실을
절대 외면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양심에 조금이라도  배치되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이미 작가로서의 자격을 잃은 사람이다. 작가도 인간인 이
상, 자신의 생각이 있을 것은 당연하지만 작가가 바로  '작가'로  불릴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시작하기  때
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내가 개인적인 일에 함몰하고  비정상적
인 정서를 노출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을 강도높게 비난한 것이다. 인간
들은 때로 절대 화해할 수 없는 길을 가기도 한다. 나는  그것을  원치
않지만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점잖은 인간이 되고 싶지만 인간됨을
포기한 '쓰레기'들과는 같이 쓰레기가 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지 않
을까. 그러나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무지에서 오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이렇게 행동한다면 그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생
각하기에 후자쪽의 혐의가 더 짙은 일련의 젊은 작가들을 보면서  그들
이 좀 더 솔직해지기를 기대한다. 자신들의 역사의식의 부재를  인정하
고 자본주의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이기적이고 쾌락적이었노라고 고
백하고 따뜻한 휴머니즘을 민중에게서 배우겠다고 약속을 한다면  그들
은 용서받을 수 있다.

 뱀의 발 --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에 대한 독후감을  쓸려다가  그만
엉뚱한 소리를 하고 말았다. 좀 건방질지 모르지만 독자의 권리로 나중
에 한 작품을 선정하여 깊이있는 얘기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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