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의 찬미]를 보고


 영화 [사의 찬미]를 보았다. 최근에 만들어지는 우리 영화의 수준이  많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꼼꼼하고 성의있게 보고자 노력했다. 금년 여름에  발표된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은 흥행에서 크게 성공한 작품이었다. 우리나라의 작품 수준이 대중들에게 관심을  끌  수 있을 정도로  일정한 수준에 올랐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나의 기대는 영화를 보면서 점차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사실 [사의 찬미]라는 제목이 상징하듯이 내 기대에  만족을 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어느정도 내용과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리라 믿었다. 그것은 출연한 배우들을 보면 안다. 윤심덕으로 나오는 장미희,  김우진으로  나오는  임성민,  홍난파로 나오는 이경영, 이들 세 사람은 우리 영화계에서  인정받는 연기자들이다. 
 이렇듯 호화 연기자들이 출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졸작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왜일까? 부족하나마 그 이유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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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로 - [초특가판]
영상프라자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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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로]는 살바도르의 대주교이다. 그는 1980년 3월 24일   암살  당했다. 바로 광주에서 대학살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군사독재정권이  극악무도하게 행동한 시기가 어쩌면 우리와 그렇게 일치할 수 있을까.  당시 남미는 '해방신학'이 카톨릭과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와 호응을 얻으며 솟아 오르기  시작한 때였다. 이것은 바로  남미의  열악하고 참담한 정치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극우 군사독재정권이 얼마나  악랄하고  잔인한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쿠바의 혁명이 성공하자 남미의 여러 나라 민중들은 새로운  세계를 그리며 민족해방투쟁을 벌여 나갔다. 미제국주의의  착취와 탄압으로 허덕이던 민중들은 평등한 세상과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투쟁한다. 그러나  미제국주의의 지원을 받는 군사독재정권들은 미국에서 수입한 무기로 자기 나라의  민중들을 대량  학살하며 집권을 한다. 이런 가운데 남미에서 깊은 뿌리를  내린  카톨릭이 어떠한 태도로 나오는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점이었다. 
 남미에서는 종교, 특히 카톨릭은 생활이다.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종교와 하나가 되어 있으며 사제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제들의 행동은 민중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살바도르에서 평범한 주교 가운데 한  사람인 로메로 역시 그가 살고  있는 조국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히 따르고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바라는 보통의  사제였다. 그런  그가 로마 교황청에서 대주교로 임명되면서부터 변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 전부터 주위의 진보적인 사제들의 영향을  조금씩  받기는 하지만 그것을 쉽게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민중들의 삶이  척박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군사독재정권이  폭력적  탄압을 하고 있는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깨닫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는 대주교로 임명되어 활동을 시작하면서 갑자기 밀어닥친 현실에  어쩔 줄을 모른다. 민중들은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고 실종된 사람은  수  만명에 이른다. 평화로운 미사 집회에 총을 쏘아 수 십명이 살해 당하는 현실을 보면서 조금씩 현실을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군사독재정권은 종교의 비판마져도 받아들이지 않고   탄압하기에  이른다. 민중들과 가까이 지내는 사제를 학살하고  체포하여 고문한다. 마침내는  대주교인 로메로 자신마져 체포 당해  유치장에 구금된다.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은 대주교를 만나주지 않고 정치범 석방 탄원에 '정치범은 없다'고  거짓말을 한다. 모순과 비리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로메로는 마침내 종교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를 깨닫고 그것을 민중들에게 설교한다. 강도 높은 비판은 민중들을 일깨우고 군사정권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그는 말한다. "미국은 더 이상 살바도르를 지원하지 말라. 미국이 지원하는 무기가 우리 민중들을  학살하는데  쓰이고  있다." "종교는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위해 있어야 한다." "고통받는 민중들이여, 그대들은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이렇게 민중의 편에 서서 독재와 불의에 맞서 싸우던  로메로는 마침내  암살 당한다. 군사독재정권이 그를 암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생전에 그는 암살의 위협을 받고도 태연히  말했다. 
 "나를 죽이는 것은 쉽다. 그러나 나는 죽어서 살바도르  민중의 가슴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언제나 사라지지 않는 불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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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올리버 스톤 감독, 제임스 벨루시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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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살바도르]와 [로메로]를 보았다. 이 영화를 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혼란과 두려움,공포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아니,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의 현실과 너무 비슷한 느낌이 들어 숨조차 쉬기  힘든 고통을 느끼면서 이 시대에 살아있음이 부끄럽고 참담했다. 
 이것이 나만의 생각일까. 살바도르의 민중들만이  겪는  고통일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라져 죽음으로 발견될지  모르는  이 공포의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이 영화는 다시 한번 나의 내면을 고통스럽게  휘젓고 말았다. 
 [살바도르]는 한 미국인 사이비 기자--그러나 그는 진정한 기자였다--  로이가 특종을 얻기 위해 살바도르로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미국에서  만든 이 영화는 헐리우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미국의 일상적인 생활에 찌든  로이는 현실에서 도피하듯이 미국을 떠난다. 친구와 함께. 비록 사이비 기자이기는 하지만 로이의 양심은 남아 있다. 그에게는  살바도르에 애인이 있다. 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살바도르는 마치 전쟁터처럼 모든 것이 파괴되고 어지러웠다. 군부에  의해 자행되는 살육으로 민중들은 공포에 떨고 있다. 게릴라  반군과의 접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미국의 지원으로 겨우 버티는 극우 군사독재정권은 공포정치로 일관한다. 
 이런 가운데 로이는 특종이 될만한 사진을 찍기 위해  정부군과 반군의  전투 속으로 뛰어들어가기도 하고 게릴라 본부를 찾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극우 군사독재정권은 미국을 등에 업고  전례를 볼 수 없는 탄압을  자행한다. 평화집회를 열고 있는  민중들에게 총을 발사하여수 십명이 죽어가는  것은 예사이고  반정부 활동이나 데모대의 앞장을 선 사람들을 추적하여 납치, 살해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 있을 정도이다. 심지어는 로이의  친구이기도 한 미국인 수녀들을 납치하여 강간한 다음 처참하게 죽여 땅 속에  묻어버린 일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렇게 죽어가거나 실종된 사람들은 수 만명에 이르고 군사독재정권을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무조건  좌익,빨갱이,공산주의자로 몰아 정식 재판도  없이 살해하는 것이 살바도르이다. 
 미국인 기자 로이는 점차 자신이 어디에 들어와 있는지깨닫게 된다. 그는 어떤 정치적 이념이나 사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월남이나 캄보디아에서 취재한 경험으로 미국이 살바도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게 된다. 
 이런 가운데 로이 애인의 남동생과 친구가 경찰에 잡혀가자  뇌물을  써서 친구는 겨우 빼내오지만 남동생은 그대로 남는다. 미국 대사에게 부탁을 하였으나 행방을 알 수가 없고 로이의  비판적인 행동은 점차  군사독재정권의 미움을 받는다. 
 다른 신문사 기자이며 친구이기도 한 죤과 함께 정부군과  반군의  전투를 취재하러 나갔으나 미국이 지원한 비행기의 총격으로 죤이 사망하고 로이는 살바도르를 떠날 결심을 한다. 지난번  게릴라 쪽의 취재를 빌미로 군사독재정권은  로이를  체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애인의 남동생은 시체로  발견되고 로이는  애인과 함께 살바도르를 떠난다. 증명서 발급을 위해 미국  대사관의 직원들과 만나지만 미국의 이익을 위해  군사독재정권을  지원하는 그들의 논리에 맞서 말다툼이 벌어지고 증명서를 위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그러나 국경선에서 검문에 걸린 로이는 그를  살해하라는  군사독재정권의 명령을 받은 일단의 테러리스트들에게 죽음을 당하기 직전에  미국  대사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살아난다. 죽음의 늪에서 살아난 듯 안심을 하고 버스를 속에 앉아 있던  로이  일행은 그러나 다시 그 죽음의 늪이 기다리고 있었다. 
 살바도르 사람인 애인을 군사독재정권이 체포하는 것이다. 이에  항의하는 로이까지 체포하여 다시 살바도르로 끌고 간다. 
 이것은 아주 간략하게 줄인 줄거리이다. 이 속에 담긴 많은  것들을 말하기에는 나의 글솜씨가 형편없음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극도의 흥분과 공포, 두려움,  분노, 고통스러움으로 몸이  마비되는 것같았다. 그것은 마치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는  느낌이었다. 물론 있는 그대로를 비교하자면 우리는 살바도르보다   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독재의 정도가 강하고 약하고의 차이를 두고 민주정부와 독재정부를  나눌 수 있겠는가. 민주주의가 아니면 독재라는 단순 흑백논리는 아니지만  민주주의가 양적인 문제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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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네프의 연인들 CE - [할인행사], 완전 무삭제판
레오 까낙스 감독, 줄리엣 비노쉬 외 출연 / 이지컴퍼니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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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퐁뇌프의 연인들’을 보고



  아침 일찍 중앙극장으로 갔다. 바통모회원들의 단체관람이 있을 거라는 공고와 함께 영화가 퍽 잘되었다고 꼭 보라는 권유도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었기에 오랫만에 바통모 회원들도 만날겸 중앙극장 앞으로 갔으나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 분명 오기는 했으나 얼굴을 모르니 서로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몇몇 얼굴을 아는 사람들만 만나서 들어간듯 하다. 나는 혼자서 영화를 봤다.
  「퐁뇌프의 연인들」
  사람들은, 아니, 대중매체에서는 이 영화가 매우 훌륭한 영화라고 격찬을 했다. 그러나 나는 한마디로 이 영화는 형편없는 졸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가 아무런 메세지를 담고있지 않다는 것이다. 영화가 제작비만 많이 들이고 일류배우를 쓴다고 해서 모두 훌륭한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그렇게 자랑하는 엄청난 제작비는 그야말로 과소비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먼저 이 영화가 만들어진 배경을 살펴보자.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인 ‘퐁뇌프 다리’는 오랜 전설을 간직해 오고 있다. 그것은 ‘퐁뇌프 다리’에서 만난 연인들의 사랑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만다는 전설인데, 이 영화도 바로 여기에 근거를 두고 만들어 졌다. 하지만 그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경로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본다면 절대 고운 눈길을 줄 수 만은 없을 것이다.
  이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을 이끌어가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바로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며 해결방법도 그러하다. 근본을 알 수 없는 부랑아 ‘알렉스’와 부르조아 집안에서 태어나 첫사랑에 실패하고 심한 병으로 실명해가는 한 여성 ‘미셀’이 만나서 사랑을 이룬다는 것이 뼈대인 이 영화는 그러나 위대한 프랑스 혁명의 나라에 걸맞지 않는 자본주의적 해석과 논리의 관철로 보는 이를 몹시 불쾌하게 만들고 있다.
  미셀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자신이 고통스럽고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그저 도움을 받는 정도의 친절에 지나지 않는다. 미셀이 떠나가면서 알렉스에게 남긴 낙서가 그것을 말해준다. ‘나는 단 한번도 너를 사랑한 적이 없어.’ 대령의 딸로 태어나 미술을 전공한 부자집 딸이 근본도 알 수 없는 부랑아를 사랑한다는 것부터 모순이다. 물론,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으로,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말 그런 계급적 한계를 뛰어넘어 지고지순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상식을 넘어서고 있는 발상이다. 게다가 미셀은 아버지가 자신의 눈을 치료할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광고로 알리자 아무런 미련없이 알렉스를 떠나가버리고 만다. 과연 이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쉬울 때면 사랑한다고 말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안되면 언제든지 훌쩍 떠나버리는 이런 부르조아적 사랑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미셀에게 있어서 고통과 절망이란 첫사랑에 실패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내부에서 용암처럼 녹아내리는 처절한 고뇌도 아니다. 그는 다만 자신의 눈이 보이지 않게된데서 온 절망을 그렇게 느끼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지니던 총을 강에 던져버리자 - 실제로는 알렉스가 감추었다 - 첫사랑에 대한 증오는 사라지고 만다.
  그런 면에서 알렉스의 사랑은 훨씬 진지하고 아름답다. 그는 사랑의 표현을 매우 거칠게 하지만 거짓없이 미셀을 사랑하고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첼로를 켜는 남자를 내쫓고 미셀을 찾는 포스터를 불태우다가 사람을 다치게 하는 등, 여려가지로 잘못을 저지르기는 하지만 알렉스가 미셀을 향해 사랑한다는 표현은 매우 현실적이며 진지하다. 하지만 그에게도 문제는 있다. 그는 언제나 퐁뇌프 다리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거리에서 물건을 훔치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인생을 조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그가 한 여성을 만나면서 삶의 변화를 이르키는데, 미셀이 떠나가고 나서 그는 더욱 사람다워진다. 그것은 알렉스가 포스터를 불태우다가 사람을 다치게 한 혐의로 감옥살이를 하면서 일으키는 변화이다. 실제로 그가 퐁뇌프의 다리에서 생활하던 것과 비교한다면 그는 오히려 감옥 안의 생활이 더 풍요하고 보람이 있는 듯하다. 깔끔한 외모와 기술을 배우는 모습들이 부랑자를 ‘교도’하는 매우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알렉스가 한 여성을 사랑함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물론 옳은 일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맹점이 바로 그런 곳에서 드러난다. 반드시 두 사람의 사랑을 이루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 감독은 억지로 두 사람을 만나게 하고 애매모호한 결말을 짓는다.
  삼년동안 감옥생활을 하고 나온 알렉스와 눈수술을 받아서 더욱 아름다와진 부르조아 미셀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퐁뇌프 다리에서 만난다. 그리고는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 미셀이 돌아간다고 말하고 알렉스는 가지 말라고 억지를 부린다. 이런 단편적인 흐름에도 무리가 있을 뿐더러 한번도 알렉스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훌쩍 떠나버린 미셀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만, 자꾸 떠오르는 생각때문에 감옥에 갖혀있는 알렉스를 이년만에 찾아왔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부르조아가 프롤레타리아를 동정하고 연민의 마음으로 자선을 베풀기 위해 찾아온 것같은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다.
  그리고 끝마무리는 어떤가. 강에 뛰어든 두 사람은 두 노인부부가 모는 모래운반선에 구조되어 이상한 대화를 마지막으로 영화가 끝난다.
  ‘이 배는 어디로 가고 있나요?’
  ‘파라다이스’
  ‘우리도 함께 갈 수 있나요?’
  ‘그럼 물론이지’
  모래 운반선이 갑자기 파라다이스로 간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현실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터무니 없고 황당한 대사들이 이 영화를 더욱 망치고 있다. 어차피 이 영화가 리얼리즘이라는 덕목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이지만 끝으로 갈수록 황당해지는 것은 보는 이를 완전히 기만하는 것이다.
  영상미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이 ‘영상미’인지 아니면 돈으로 치장한 세트의 아름다움인지를 판단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영화가 그런 면에서 전혀 온당한 방법으로 영상미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갈 것은, 이 영화의 언어를 프랑스어로 알아듣지 못하는 나의 무지때문에 잘 모르겠지만 번역하는 사람의 수준까지도 의심스러웠다. 대사가 그렇게 천박하고 유행에 따라야 하는 것인지 정말 이상하다. 본래 불란서 말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이 영화의 자막에 나오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속어들이 마구 튀어나온다.
  영화의 소재가 밑바닥 사람들을 그리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해도 반드시 천박한 언어를 써야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배우들의 연기는 나름대로 진지하고 열심이었다는데 동의한다. 오랫만에 본 프랑스 영화에서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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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FK - [할인행사]
올리버 스톤 감독, 케빈 코스트너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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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JFK를 보고

 역시 올리버 스톤이었다.
 그가 만든 일련의 영화들 -월남전을 주제로 한 반전과 인권을 다룬 7월 4일생, 살바도르, 버디 등등-을 보면서 그의 문제의식에 공감을 갖었던 나로서는 이 영화 역시 다른 어떤 말보다도 그의 작품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영화는 나의 예상을 넘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참으로 잘만든 영화였다. 가장 잘 만든 영화에 붙일 수 있는 다른 수식어를 찾지 못해서 ‘잘만든’이란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그리고 내가 ‘잘만든’이란 말을 사용할 정도면 그 영화는 최고 수준에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다. 올리버 스톤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 영화는 올리버 스톤의 창작이 아니다. 이미 발표된 소설을 영화로 개작한 것인데, 올리버 스톤은 소설을 영화화하는데 있어서 이미 몇 차례 경험이 있고 그 작품들이 거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번 영화도 원작 소설을 각색하고 극본을 자신이 써서 영화를 만들었다.
  사실, 케네디의 암살은 처음부터 많은 의문과 논란이 되어왔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들이 냉전이데올로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극우주의자들의 득세로 여론화되지 못하고 비밀 속에 묻혀있었을 뿐이었다. 이 영화는 케네디 암살의 객관적 사실들을 종합하여 암살의 주범이 누구이며 왜 케네디를 죽일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의문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영화적인 요소를 살펴볼때, 이 영화가 아카데미 촬영상과 편집상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쉽게 납득을 할 것이다. 이 영화는 그야말로 수준있는(?)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수준있는 영화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자화자찬이라는 비난을 받겠지만 실제로 내 뒤에 앉았던 어떤 남자는 영화를 보는 가운데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나는 영화에 완전히 빠져서 넋을 잃고 있었는데 이 극심한 정서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제 영화 속으로 들어가보자. 우리에게 최근에 알려지기 시작한 미국의 영화배우 케빈 코스트너가 주인공 짐 개리슨 검사로 나온다. 미국의 영화가 한 세대를 거치는 것이 눈에 확연히 띄는 증거로 최근에 나오는 젊은 배우들의 등장을 들 수 있다. 케빈 코스트너나 로버트 드 니로 등 젊고 개성있는 배우들은 예전에 미국배우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겉멋들린 표정은 없어서 좋다. 이 영화에서도 케빈 코스트너는 주인공이긴 하지만 영화를 끌고 나가는 역은 아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바로 죤 에프 케네디인 것이다. 그가 달라스에서 암살 당하는 필름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내용을 이룬다. 케빈 코스트너는 이 필름을 분석하고 증거를 제시하여 자본가와 극우보수주의자들이 범인임을 입증할려고 노력한다.
  영화의 전편에 흐르는 정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보편적인 인간의 자유와 지배계급의 음모를 밝히려는 불굴의 투지가 살아 숨쉬고 있어서 잠시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암살자 오스왈드의 정체에서부터 그 뒤에 숨어있는 미국 CIA,FBI,국방성,경찰,그리고 자본가들의 음모가 하나씩 벗겨질 때마다 때론 탄성으로, 때론 치떨리는 분노로 주먹을 불끈 쥐며 영화 속에 빠져들어갔다. 다큐멘타리 식으로 편집한 암살장면의 필름은 매우 극적인 효과를 발휘하여 극적 긴장감을 주기에 충분했고 대단히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암살의 진행과정과 추리과정은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오스왈드라는 젊은 청년에 의해 세 발의 총을 맞았다는 케네디의 암살 현장에는 모두 열 발의 총탄자국이 있었고 교차사격에 의해 등 뒤와 정면에서 총을 맞고 케네디는 죽었다. 이러한 증거들을 필름까지 동원하여 증명해 보였으나 배심원들의 평결 결과는 암살에 가담한 한 CIA 앞잡이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짐 개리슨의 논고는 매우 감동적이었다.
  케네디 암살 이후에 킹 목사와 케네디의 동생 에드워드 케네디도 암살 당한다. 60년대 미국의 암흑의 시기였고 극우보수주의자들과 자본가들의 결탁으로 썩어버린 미국은 오늘날까지 그 체제를 잘 유지하고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그래도 미국이 세계의 강대국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짐 개리슨과 같은 살아있는 양심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어떠한가. 케네디는 제3세계인 한국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박정희가 정권을 잡자 처음에는 의심하더니 그가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될거라고 판단되자 서슴없이 승인을 했다. 제3세계에서 일어난 온갖 폭력과 테러와 암살과 억압은 모두 은폐되었고 강대국의 이익에 따라 세계의 정세가 움직였다. 케네디의 암살은 분명 더럽고 추잡한 미국의 군부와 자본가의 음모였지만 케네디에 대한 시각은 이 영화에서 나타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당시의 세계정세와 힘의 역관계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쿠바를 비롯한 제3세계는 어떠한 상태에 있었던가. 미국에서 한 양심이 외롭게 투쟁하고 있을 때에도 제3세계에서는 무수히 많은 자유와 민주주의가 군부독재의 폭력으로 소리없이 죽어갔다.
  인간 사회에서 어떠한 불평등과 차별도 없는 자유와 평등의 시대가 오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세상이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고 투쟁할 뿐이다.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자신의 생각과 같지 않다고 암살을 하고, 권력을 폭력의 도구로 사용하는 그러한 야만적인 행위가 존재하는 한, 인간의 투쟁은 언제나 외롭고 고독한 짐 개리슨처럼, 그러나 조금도 굽히지 않는 열정과 신념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 지금 태국에서 제2의 광주사태가 벌어지고 있는듯하다. 잠롱선생이 체포되고 군부는 시민들에게 총질을 하고 있으면 이미 수 백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분통이 터지고 치가 떨린다. 왜 어느 나라나 할 것없이 군사독재 정권은 한핏줄을 가진 동족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것일까. 권력에 대한 무한한 탐욕은 과연 민족을 완전히 무시하고도 탈취해야 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가. 우리는 권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러한 무리들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고 또 앞으로도 볼지 모른다. 지금 태국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비극 앞에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의 추악함과 잔인한 피냄새를 맡는다. 군부독재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자기 동족을 살해하는 그런 짐승같은 놈들과 한 하늘에 산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태국국민들은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에게 정의의 불화살을 쏘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의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이땅의 젊은이들도 마음으로나마 태국 민중들과 함께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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