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세미콜론 툰
루드비코 글.그림 / 세미콜론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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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제목 : 인터뷰
작가 : 루드비코
출판 : 세미콜론


놀라운 책이다. 한국의 그래픽 노블 수준은 누가 뭐래도 세계 최고 수준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처럼 만화가가 열악한 상황에 놓인 나라도 드물지만, 그런 척박한 환경에서 이런 놀라운 작품을 만들어 내는 만화작가들의 뛰어난 역량에 대해서 감탄과 존경의 마음을 갖는다.
작가(루드비코) 자신도 말하지만, 그는 자신의 작품이 '뛰어난 작품'이기 보다는 '새로운 작품'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이 만화는 새로우면서도 뛰어난 작품이다.
작품 속의 작품으로, 흔히 '액자 소설' 또는 '액자 만화'라고 하는 형식을 빌어 이야기 속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펼치는 방식인데, 이런 형식은 물론 이전에도 많았지만, 이 작품의 놀라운 점은 액자 속 이야기와 (만화 속) 현실이 다시 만나고, 에피소드들이 결합하면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는 것이다.
또한 가장 핵심인 '그림'도 기존의 '한국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서양에서 일어난 일처럼 보이도록 인물과 배경을 '외국화' 했다. 이런 장치들은 물론 작가의 의도였으며, 이 정도 작품이 외국에서 출판되었다면 적어도 여러 개의 상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그의 첫번째 작품집이라는 것이 놀랍고, 앞으로 그의 작품이 충분히 기대된다.

프롤로그는 바닷가에서 자기 입에 총구를 밀어 넣고,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의 남자가 등장한다.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 하늘과 같은 색깔의 바다와 밀려오는 파도, 부드러운 모래밭. 자살하기에는 너무도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중년 남자의 모습은 퍽 이질적이다.
사내는 심호흡을 하고 방아쇠를 당기지만,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다. 사내가 들고 있는 총은 6연발 리볼버로, 여기에 총알을 한 개만 넣은 것으로 보인다. 사내가 다시 방아쇠를 당겼지만 역시 불발이었다. 죽고 싶었지만 총알이 발사되지 않아 살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계속되었고, 사내는 살고 싶다는 욕망과 죽어야 하는 현실의 중압감 속에서 갈등한다. 결국 마지막 총알이 남았을 때, 사내는 방아쇠를 당기고, '탕' 소리는 곧바로 타이프라이터의 타자기 소리로 바뀐다. 한 남자(작가)가 작품을 쓰고 있었다.

파일 1
[주황색 스카프]로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된 작가는 출판사로부터 인터뷰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지만 거절한다. 평론가들은 이 작가의 작품 '주황색 스카프'가 걸작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전작들은 모두 쓰레기라고 폄하한다. 작가는 '주황색 스카프'를 능가하는 작품을 써야한다는 강박으로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인데, 갑자기 한 남자가 작가의 서재로 뛰어들어와 작가만 알고 있는 미발표 작품 '헝가리 사진사'를 알고 있다고 말하자, 그 남자와 인터뷰를 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리고 미발표 작품인 '헝가리 사진자'에 관해 이야기한다.

헝가리 사진사
작은 사진관을 운영하는 남자는 사진에 미쳐서 늘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집안을 돌보지 않아서 아내는 집을 나갔고, 생활도 궁핍했다. 그런 어느 날, 사진관에 한 남자가 찾아왔다. 필름을 현상해달라는 남자. 암실에서 현상을 하던 사진관 남자는 필름에 담긴 여자가 바로 집을 나간 아내인걸 알아보고 놀란다. 그 필름에서 아내는 잔혹하게 살해당한 모습이었다. 남자는 총을 가지고 나가 필름을 맡긴 남자를 죽인다. 그리고 아내가 살해된 같은 방법으로 남자를 없애고 사진관을 떠나려 할 때, 경찰이 찾아온다. 경찰은 조금 전 맡긴 증거물 사진을 달라고 말한다. 사진관 남자가 죽인 남자는 형사였고, 오해한 사진관 남자는 자살한다.

파일 2
작가와 남자가 인터뷰를 시작한다. '주황색 스카프' 이후 슬럼프인가, 왜 인터뷰를 하지 않는가, 작가는 현재 슬럼프가 맞고, 인터뷰할 시간에 작품을 생각한다고 답한다. 하지만 남자는 작가의 최대 걸작이라는 '주황색 스카프'도 쓰레기라고 비난한다. 작가가 자신의 미발표 작품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묻자, 남자는 '주황색 스카프'의 표지 날개에 써 있는 걸 보여준다.
남자는 자기가 도박을 하다 집에서 쫓겨나 궁여지책으로 유명 작가를 인터뷰해 잡지에 실으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해서 왔다고 말한다. 작가는 남자를 내쫓으려다 제안을 한다. 작가가 생각하고 있는 작품의 줄거리를 듣고 감상을 들려주는 조건으로 인터뷰를 하겠다고. 그렇게 다음 작품 '작은 마을의 요괴'를 시작한다.

작은 마을의 요괴
어느 마을에 요괴가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요괴를 무서워했지만, 요괴는 나쁜 짓 하는 인간만 잡아 먹었다. 요괴도 신이 자기를 만든 목적이 나쁜 놈을 잡아먹으라고 생각했고, 자부심을 가졌다.
그러다 어린이를 성추행하는 남자를 잡아 먹었는데, 우연히 그 남자가 가지고 있던 일기장을 보게 되었다. 요괴가 삼킨 남자도 어릴 때 자기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게다가 자기가 삼킨 어느 도둑의 집을 보게 되었는데, 도둑의 가족은 스무 명이었고, 찢어지게 가난해서 아이들은 굶고 있었다. 그 도둑은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둑질을 한 것이었다.
또한, 자기가 삼킨 살인자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강도를 죽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요괴는 누가 나쁜 놈이고, 누가 좋은 사람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졌고, 자기가 삼킨 사람들이 어쩌면 좋은 사람들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요괴는 슬픔에 빠져 호숫가에서 울었고, 호수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았다. 요괴가 자기 모습을 보면 심장이 멎는다고 했지만, 죽지는 않았고, 물에 비친 모습은 요괴가 아닌, 병에 걸린 인간의 모습이었다. 요괴는 자기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기뻐하며, 한편으로는 자기가 좋은 사람들을 잡아 먹었다는 죄책감으로 슬피 울면서 호수 깊은 곳으로 걸어들어갔다. 

파일 3
작가가 '작은 마을의 요괴' 이야기를 마쳤을 때, 남자는 잠을 자고 있었고, 작가는 화가 나서 공포탄을 쏜다. 남자는 작가의 이야기가 쓰레기 같다고 말한다. 작가의 작품에서 늘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그의 대표작 '주황색 스카프'에서 주인공이 어떻게 자살하는가를 묻는다.

파일 4
작가는 자신의 과거를 솔직하게 말한다. 작가의 어머니는 동화작가였고, 자신이 작가가 된 것도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고, 어머니는 아름다운 동화를 썼지만, 어머니는 우울증을 겪다 자살했다고. 그것도 기르던 토끼가 죽은 것을 보고.
장례식에서 본 모르는 남자가 자기 아버지였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었다고 했지만, 사실은 아버지는 어머니와 작가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살고 있었다고. 그러면서 마지막 이야기 '양 목장의 살인자'를 말한다.

양 목장의 살인자
능력은 뛰어나지만 성격이 나빠 시골로 좌천된 형사가 양목장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신고를 받고 현장으로 나간다. 그리고 며칠 뒤, 마을에서 어떤 남자가 투신 자살한다. 죽은 남자의 몸에서는 숫자가 발견되었고, 몸은 이미 총탄을 여러 발 맞은 상태였다. 이후 날마다 사체가 발견되었고, 몸에는 숫자가 써 있었다. 그러다 죽은 사람의 옷에서 범인이 쓴 것으로 보이는 메모가 발견되었고, 그 메모에는 자기가 40명을 죽일 거라고 예고하고 있었다. 메모에 써 있는 '도살장'에 가 보니 이미 10명의 사체가 있었고, 여러 곳에서 발견된 사체를 합하니 모두 40명이었다. 사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실종된 사람들이었고, 지역도 한 곳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실종되었기에, 이 사건은 오래 전부터 계획된 범행으로 드러났다.
형사는 다시 처음 시체를 발견했다고 신고한 양 목장으로 찾아갔고, 신고를 했던 양 목장의 주인이 기다리고 있다 자신이 연쇄살인범이라며 순순히 자수했다. 자신이 싸이코패스이며, 정신병자로 주장해 무죄를 받아낼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형사는 목장 주인을 총으로 쏘고, 남자의 목에 숫자를 적어 넣었다. 목장 주인은 죽어가면서, 자기처럼 싸이코패스가 있다는 걸 알면서 죽어간다.
형사는 이미 27건의 살인 사건을 해결하면서 범인을 모두 사살했는데, 그가 연쇄살인범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정당방위를 주장해서 징계를 받지 않았고, 이제 28번째 살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형사가 사진으로 찍은 필름을 사진관으로 가져갔고, 형사는 사진관 주인의 총에 맞아 죽는다.

파일 5
'헝가리 사진사'의 아내는 '양 목장의 살인자'의 28번째 기록물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남자는 재미있었다고 말하고, 마지막 질문을 한다. 작가의 작품을 따라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아느냐고. 작가는 '표절'을 말하지만, 남자는 표절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 총으로 사람을 난사해 과다출혈로 죽이는 살인자가 나타났다는 걸 모르냐고 묻는다.
작가는 놀라 언제 일어난 사건이냐고 묻고, 남자는 '지금'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총을 꺼내 작가를 쏜다. 남자는 이제 자기가 이야기를 하고, 작가가 들을 차례라고 말한다. 남자는 아내에게 맞아서 코뼈가 부러졌고, 집을 나와 생각해보니 아내의 말이 맞는 것 같아서 선물을 하기로 생각했으며, 작가가 쓴 '주황색 스카프'를 보냈다. 이 책에서 우울증을 겪던 어머니가 자살하는 내용을 보고, 남자의 아내도 자살했다며 남자는 왜 이따위 소설을 썼느냐고 울부짖는다.
남자는 작가를 죽여 토막낼 거라고 했다. 작가의 작품에 나오는 내용처럼. 그러자 작가는 남자를 보고, '헝가리 사진사'의 사진관 주인과 같다고 말한다. 사진관 주인이 형사를 죽인 것은 죄책감 때문이었다고. 남자의 아내가 우울증으로 자살한 것이라면, 그 우울증을 만든 사람은 누구냐고.
남자가 작가의 팔을 자르려하자 작가는 공포탄을 남자의 귀에 발사하고, 이후 두 사람은 서로 총을 쏘며 서로 벌집이 된 몸으로 쓰러진다.

에필로그
서로 총질을 하고 작가는 죽고, 남자는 살았다. 남자는 현장에서 주황색 스카프를 발견하고, 우연히 반지도 발견한다. 그 반지는 작품 '헝가리 사진사'에서 죽은 아내가 끼고 있던 반지였다. 그 반지를 본 순간, 남자는 작품 '주황색 스카프'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이 실제 있었던 사건이고, 작가가 말한 '헝가리 사진사'의 내용도 실제 일어난 사건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때 경호원이 들어오고, 남자는 경호원의 얼굴을 보고 '작은 마을의 요괴'의 주인공 '요괴'가 실존하는 인물인 것을 확인하면서 비틀거리며 집을 나온다.

이 작품은 액자 만화로 구성하고 있다. 작품 속 인물은 두 명이고, 소설가는 '주홍색 스카프'라는 소설로 인기 작가가 되었다. 그가 썼던 과거의 작품들은 졸작으로 평가받았지만, 이 소설만큼은 평론가들도 높게 평가하는 뛰어난 작품이지만, 정작 작가는 비평가, 언론의 관심에 관심이 없다. 그는 어떤 언론과도 인터뷰를 하지 않는데, 집요한 기자 한 명이 그의 집을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한다. 작가는 특별히 그 기자와 인터뷰를 하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기자가 자신의 미발표 단편소설 '헝가리 사진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액자 소설은 '헝가리 사진사', '작은 마을의 요괴이야기', '양목장의 살인자'로 세 편이 들어 있다. '헝가리 사진사'는 한 사진관을 운영하는 남자의 이야기인데, 사진관을 찾아온 한 남자가 필름을 건네 현상을 부탁한다. 필름에는 집을 나간 사진관 남자의 아내가 담겨 있고, 여자는 잔인하게 살해당한 모습이었다. 사진사는 필름을 가져온 남자를 총으로 쏴죽인다.
'작은 마을의 요괴이야기'는 외모가 흉칙한 한 남자의 이야기로,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의 외모를 보고 괴물이라고 말하며 무서워하자 그 사람은 자신이 괴물인줄 알고 살아가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양목장의 살인자'는 연쇄살인범을 쫓는 형사의 이야기로, 형사는 연쇄살인범을 결국 잡지 못하고, 연쇄살인범이 스스로 자수할 때 그가 최초 살인 피해자를 신고한 양 목장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형사는 그 연쇄살인범을 사살하고,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번호를 시신에 새긴다. 그리고 그 형사는 필름을 가지고 사진관으로 가서 현상을 부탁한다. 바로 그 아내가 가출한 사진관의 남자에게로.
이렇게 소설은 놀라운 반전을 보인다. 그리고 작가를 인터뷰하러 온 기자라는 남자는 자신의 아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데, 자기가 소설 '주홍색 스카프'를 선물했고, 그 소설을 읽은 아내가 자살했다는 이유로 작가를 죽이러 온 것이다. 작가는 소설 '주홍색 스카프'가 실제 있었던 사실이라고 말한다. 기자라고 말했던 남자는 작가에게 총을 쏘고, 작가도 가지고 있던 총으로 남자를 쏜다. 작가가 죽고, 기자라고 말한 남자는 작가의 서랍에서 '주홍색 스카프'의 내용에 나오는 스카프를 비롯해 앞서 말한 소설들이 모두 실제 일어났던 사실임을 알 수 있는 증거들을 발견하고, 복도에서 숨을 거둔다.
루드비코의 이 작품(인터뷰)가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살인자의 건강법'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독자들이 있는 모양인데, 루드비코는 이전에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을 읽은 적이 없으므로 그것을 두고 표절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창작의 세계에서 우연히 소재나 아이디어가 비슷한 경우는 발견되고 있으니, 그런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한국에 이렇게 멋진 그래픽노블 작가가 있다는 것이 대단한 일인데,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물론, 일반 소설 독자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어서 안타깝다. 루드비코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열렬히 좋아하는데, 다른 나라에도 수출되어 더 많은 독자가 이 작품을 읽기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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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즈 예게른 -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915-1916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파올로 코시 지음, 이현경 옮김 / 미메시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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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메즈 예게른
작가 : 파울로 코시
출판 : 미메시스

오스만 투르크(터키)가 아르메니아인 약 150만 명을 학살한 사건은 의외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915년에 일어난 이 학살은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한 사건보다 훨씬 더 심각한 세계사적 범죄였음에도 그동안 조직적으로 은폐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터키는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그런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터키가 '한국전쟁' 때 한국에 참전해서 함께 싸웠기 때문에, 우리의 우방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자. 터키는 아르메니아인을 무려 150만 명이나 학살한 이후, 어떠한 사과나 잘못을 인정한 적이 없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한국군은 베트남 인민을 학살했다. 학살한 증거는 너무 많아서 말이 필요 없을 정도지만, 한국정부는 여전히 '공식 사과'와 그에 따르는 보상을 하지 않고 있다.
약소 민족이나 인종을 차별하고 학살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국제사회의 관례'라면,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미개하다는 것은 반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휴머니즘이나 도덕성, 양심 등에 관해 더 이상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광주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과 그 일당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저지른 범죄에 대해 진심어린 사과를 했던가? 아니, 결코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로 터키 정부도, 시간이 얼마가 지났던-올해가 터키가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다-자신들이 저지른 학살 범죄를 공식 인정하고, 아르메니아인에게 사죄하고 보상해야 한다.
시간이 흘렀다고, 범죄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나 터키라는 나라가 소멸되고, 민족이 뿔뿔이 흩어지거나, 다른 민족, 국가의 노예로 전락한 상태라면 모를까, 주권을 가진 나라라면 영원히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터키를 전혀 '형제'로 인정하지 않을 뿐더러, 독일보다 더 질이 나쁜 학살국가로 인식하고, 터키에 대한 태도를 부정적으로 견지할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한국현대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한국의 베트남에 대한 사죄가 없는 이상, 한국 역시 학살국가로 인정하는 것처럼.

이 학살 만행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방아쇠가 된 사건과 관련 있다.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항제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소피아가 세르비아 학생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한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가혹한 요구조건으로 최후 통첩을 보낸다. 그 요구조건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모든 반(反)오스트리아 단체를 해산할 것.
  2. 암살에 관련된 모든 자를 처벌할 것.
  3. 반(反)오스트리아 단체에 관련된 모든 관리를 파면할 것.
  4. 여기에 관련된 당사자를 조사하는 데 오스트리아 관리가 세르비아로 들어가 도울 것을 허용할 것.

오스트리아로서는 보스니아가 이 조건을 다 들어준다해도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다. 분리 독립을 원하는 보스니아의 주장을 오스트리아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고, 황태자 암살사건을 계기로 보스니아를 침공해 본때를 보여줄 작정이었다.
문제는, 이 사건이 단순히 오스트리아와 보스니아의 국지전에 머물지 않고, 독일이 러시아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면서 유럽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은 것은 독일과 이탈리아, 오스만 트루크(나중에 터키공화국)였다. 이때 아르메니아인은 터키 남동부와 러시아 영토에 걸쳐 살아가고 있었으며, 오스만 제국령과 러시아 제국령에 걸쳐 살아가던 아르메니아 사람들 가운데 오스만 제국령에 있었던 아르메니아인 약 150만 명이 학살당하게 된다. 
이유는 단순했다. 오스만 제국이 독일,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으면서 러시아는 적대국이 되었고, 러시아 령과 오스만 령에 걸쳐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이 독립을 위해 러시아를 도울 수 있다는 가정 때문이었다. 이런 판단을 내린 것은 오스만의 지배자들이었고, 가뜩이나 자국의 영토에서 살아가던 아르메니아인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일어나자 그 핑계로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한국에서도 전쟁 기간에 양민학살이 많았지만, 특히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은 극우 권력이 진보 성향의 인민을 적게는 10만 명에서 많게는 30만 명을 학살한 사건으로 지금도 진상규명이 진행되고 있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곧바로 진보 성향의 시민을 체포해 학살했다. 그들이 잠재적 적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은 민족대 민족이었지만, 한국의 보도연맹 학살은 같은 민족이 단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저지른 만행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광기가 민족이나 이념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터키가 저지른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을 두고, 히틀러도 지적했다. 세계의 누가 아르메니아 학살 사건을 기억하고 있느냐고. 그것은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하는 동기와 합리화를 제공했으며, 소위 민주주의 국가라고 주장하는 유럽과 미국 등의 백인 중심국가에서도 소수민족이자 약자인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에 관해 어떠한 발언도 하지 않고 있다.
이 작품은 학살 장면을 재현하지 않는다. 물론 잔혹한 장면이 있지만, 참혹함을 소비하거나 관음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학살의 배경을 들여다본다. 터키의 '청년 쿠르드당'은 쿠데타에 성공한 이후, 세 명에게 권력을 몰아준다. 이들이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지휘했고, 동맹국인 독일마져도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항의할 정도였으나, 터키의 권력자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아르메니아인 여성, 아이까지 모두 사막으로 내몰아 잔악하게 학살하고 강간 살해한다.
인류의 집단 학살은 인류 초기부터 있었던 현상이다. 처음에는 식량을 약탈하기 위해 살육을 저질렀지만, 이후 전투에서 이긴 부족은 진 부족을 노예로 삼았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종교적 이유, 이념의 이유, 인종의 이유만으로 대량 학살이 벌어졌다. 인류는 동족을 대량 학살하는 잔혹한 동물이다. 인류가 이성과 지능을 가진 고등동물이라고 말하지만, 맹목으로 기울어진 광기와 편집증은 동족을 잔혹하게 살해하면서도 죄의식을 갖지 않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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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클어진 기억 - 알츠하이머와 엄마 그리고 나
사라 레빗 지음, 알리사 김 옮김 / 우리나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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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엉클어진 기억
작가 : 사라 레빗
출판 : 우리나비

가족 가운데 누군가 치매(알츠하이머)를 앓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많은 사람들은 부모가 치매를 앓아도 그 고통과 괴로움을 기록으로 남기는 경우가 드물다. 그런 점에서 사라 레빗은 조금 특별하다. 그는 그림과 글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래픽노블에서 작가가 자기와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건 흔하다. 작가는 개인적 체험과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지만, 그 경험은 재해석되고, 보편화한다. 
작가는 엄마가 알츠하이머라는 사실을 알고나서 기록을 시작한다. 작가의 엄마는 불과 52세에 치매가 진행되는데, 모든 검사를 하고도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놀라웠다. 보통 알츠하이머는 뇌 속에 이상 단백질(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 타우 단백질)이 쌓이면서 뇌 신경세포가 서서히 죽어가는 퇴행성 신경질환이다.
또한 21번 염색체에 있는 아밀로이드 전구단백질(APP) 유전자에 돌연별이가 있다면, 65세 이전에 치매가 나타나며, 이것을 '조발성 가족성 알츠하이머병'이라고 한다. 작가의 엄마가 바로 이 병(조발성 가족성 알츠하이머병)일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14번 염색체에 있는 PS1, PS2 유전자의 돌연변이도 같은 병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뇌조직 검사가 있었지만, 작가의 가족은 그 검사를 포기한다. 어떻게도 엄마의 치매 진행을 막을 수 없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치매를 앓고 있는 엄마의 변화만 따라가면, 인간이 아무리 지성과 이성의 동물이라도 물리적으로 뇌가 망가지는 병에 걸리면, 지성과 이성이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인간이 '동물'로서의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날 때는 뇌의 퇴화가 진행하면서다. 이성과 의지가 사라지고 본능만 남게 될 때, 그런 사람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다.
'인간'으로 존재했던 과거는 분명하지만, 뇌의 퇴화는 과거와 (치매를 앓고 있는) 현재를 단절한다. 연속성이 사라지고, 가족의 얼굴과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면, 그는 생물학적으로 '인간'이지만, 사회적 기준으로 '인간'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건 우리가 잘 아는 '좀비'와 비슷하다. 좀비는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이성과 지성이 사라지고,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이다. 우리는 '좀비'를 '인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형체는 인간이되, 존재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치매를 앓고 있는 사람의 불행은 여기서 시작한다. 자기 의지와 다른 말과 행동을 하는 자신을 짧은 순간, 정신이 온전할 때 알아채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질병은 치매(알츠하이머)가 유일하다. 가장 가까운 가족도 알아보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습관적으로 하던 행동조차도 전혀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서, 기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작가의 엄마는 전형적인 진행을 보이는데, 처음에는 기억이 사라지고, 언어가 사라지며, 근력도 사라지고, 시력은 정상이어도 사물을 구분하지 못하며, 시공간을 구분하지 못하고, 판단력이 사라지며, 망상에 시달리고, 우울증이 나타나고, 감정의 변화가 급격하고, 밤이 되면 더욱 난폭해지고 가출한다.

치매를 앓는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이 겪는 고통 역시 만만치 않다. 사랑하는 사람이 서서히 인간성을 잃어가는 걸 지켜보는 건 어쩌면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일 수 있다. 그렇기에 '아무르'에서 주인공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아내를 자기 손으로 죽이고,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는 식물인간이 된 제자를 코치가 자기 손으로 죽이는 것이다. 
서양에서 먼저 '안락사'와 '존엄사'를 논의하기 시작한 건, 동양의 가족주의보다는 좀 더 개인주의가 발달했기 때문인데, 작가의 가족은 최대한 가족이 함께 지내며 돌보다 마지막 순간에 요양원 입원을 결정한다. 이들도 환자를 요양원에 입원시키는 것이 비인간적이고, 책임을 떠넘기는 비윤리적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족 가운데 한 명이 오래 병을 앓고 있거나, 치매로 인간성이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렇다고 요양원에 맡기는 것이 해결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작가의 가족도 정부의 지원을 받아 간병인이 도와준다. 간병인이 있어 가족은 조금이나마 숨을 쉴 수 있게 된다. 치매(알츠하이머)는 단지 뇌 질환이 아니라, 육체 전체가 기능이 떨어지고, 퇴화하면서 서서히 죽는 병이다. 작가의 엄마도 병이 발견되고 불과 6년밖에 살지 못했다. 
그 시간동안 가족들은 아내가, 엄마가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가 나빠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슬픔, 고통, 비탄, 분노, 좌절, 절망의 감정을 느낀다. 그러면서 늘 우울하거나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고, 순간, 순간 즐겁고 행복한 시간도 있었다. 이러한 모든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엄마가 운명하고 나서도 투병 기간의 기억이 가족을 더 가깝고 깊게 유대감을 갖도록 작용한다.
인간성이 파괴되는 병을 앓아야 하는 건 비극이지만, 정작 본인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고통을 주관적으로 표현하거나 객관화하지 못한다. 가족들은 병을 앓는 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환자의 고통을 객관적으로 이해하지만, 자신에게 내재화하지 못한다. 이 거리는 가족의 사랑으로 좁힐 수 있지만, 그것도 한계는 있다. 아무리 피를 나누고, 부모와 자식 사이라 해도, 개별적 존재가 갖는 자기 정체성과 독립성이 있고, 이들은 독립적 존재로 다른 환경과 생각, 가치관, 세계관을 갖고 있으며, 성인이 된 가족은 서로에게 타인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직접 경험한 시간과 사건을 그렸다. 독자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안타까운 감정과 함께 두려움을 느낀다. 내 가족 가운데 누군가 치매에 걸린다면 어떻게 할까,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미래이기에 이 작품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현실은 작품보다 훨씬 고통스럽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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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던 조선인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
김금숙 지음, 정철훈 원작 / 서해문집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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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작가 : 김금숙
출판 : 서해문집

이 작품은 정철훈이 쓴 '소설 김알렉산드라'를 바탕으로 김금숙 작가가 창작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성남문화재단'과 '성남시'에서 지원하는 웹툰 작업의 하나였으며, 한국의 독립운동가 시리즈를 '다음 웹툰'에 여러 작가가 연재하고 있다. 이 작품도 '다음 웹툰'에서 연재한 내용을 모두 볼 수 있다.
원작자인 정철훈은 1996년에 '김알렉산드라 평전(필담)'을 먼저 펴냈고, 이후 2009년 실천문학사에서 장편소설로도 발간했다. 
러시아의 하바롭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는 특별한 존재로 알려졌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하바롭스크 마르크스가 24번지에 있는 그의 기념비에 새겨진 내용은 아래와 같다.

1917~1918년 이 건물에서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이 일하였다. 그는 볼셰비키당 시위원회 사무국원이며 하바롭스키시 소비에트 외무위원이기도 하였다. 1918년 그는 영웅적으로 죽었다.

김알렉산드라는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이자 볼쉐비키였으며, 역시 한국인 최초로 레닌과 면담한 공산주의자이다. 한국에서 공산주의의 시작은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발발한 직후, 자생적-여기서 '자생적'이라는 단어는 온전히 독자적으로 조직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미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과 일본공산주의 활동의 영향을 조선의 진보지식인들도 알고 있었고,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 - 으로 공산주의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시기로 보면, 김알렉산드라는 조선에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기 전에 동북지역에서 활동한 최초의 공산주의자였으며, 그의 활동은 쏘련공산당에도 도움이 되었다. 김알렉산드라의 존재는 조선에서 최초의 공산주의자이면서도 그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당시 중국과 러시아 하바롭스크 일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상해에서 활동하는 임시정부 그룹,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그룹,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그룹인데, 임시정부에서는 공산주의자와 결별해 민족주의의 길을 걷고, 만주 지역에서도 무장투쟁으로 나아간 그룹과 민족주의 계열로 갈라진다. 무장투쟁을 선택한 그룹은 공산주의자가 되거나, 공산주의와 협력하는 것을 기꺼이 선택했다.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독립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반면 김알렉산드라는 자신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힘겹게 살아온 김알렉산드라의 아버지와 그녀 자신의 삶은 조국을 떠나 타국에서 차별과 억울함을 당하는 동포들을 보면서, 조선의 독립은 물론, 인간 해방이라는 주제에 천착하게 된다.
김알렉산드라의 운명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닮았다. 로자 역시 유대인과 여성, 장애인이라는 핸디캡을 가지고 공산주의자로 활동했으며, 그의 이론과 의지는 레닌을 능가할 정도로 위대했다고 알려졌지만, 그녀의 최후는 비참했다. 두 여성 공산주의자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두 여성이 공산주의자로서 매우 헌신적이었으며, 유능했고, 강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김알렉산드라가 나라를 잃은 조선의 가난한 노동자의 딸이었다면, 로자는 폴란드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김알렉산드라는 로자보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그녀의 삶 자체가 공산주의자로서의 삶이었고, 로자는 그가 의용대에게 암살당하기 전에 이미 세 권의 뛰어난 책을 쓸 정도로 훌륭한 지성인이었다.
두 사람 모두 공산주의자로 오래 활동하지 못했다. 김알렉산드라는 공산주의자로 활동한 기간이 불과 2년에 불과했고, 로자도 암살당할 때의 나이가 47세였다. 그럼에도 두 여성이 공산주의 역사에 남긴 족적과 의미는 훨씬 크다. 여성이 억압과 차별을 당하던 시기에, 남성보다 더 진보적이고 유능하게 활동한 여성 공산주의자들이 많겠지만, 당시 한국에서 김알렉산드라의 존재는 한국역사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기록해야 할 인물이다.
아래는 '시사저널'에 실린 내용으로, 김알렉산드라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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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인섭씨의 알렉산드라 김 전기 첫회로, 사형 장면과 유년 시절부터 10월혁명 전후 시기까지의 부분이다. 적 · 백군 내전 시기의 활동, 체포 및 재판 장면은 제217호에, 연해주 빨치산 조직표와 명단은 제218호에 싣는다<편집자>

 사형 1918년 9월(조선력으로 8월15일 추석) 피로 물든 것 같은 아무릎 강이 옆으로 흐르는 하바로프스크 공원. 높다란 모자를 쓰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외투를 입은 키 큰 칼므이크인들(칼뫼코브가 이끌던 코사크 부대의 부대원들)이 모인 가운데 백군 사형집행인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지도자들로 소비에트 · 당 간부들, 그리고 우수리 전투에서 포로가 된 적군 병사들과 전에 이 공원에서 연주를 하였던 음악인들, 이만역 준투에 가담하였던 수십명의 소비에트 애국자들을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하였다. 칼므이크인 사형집행인들은 혁명가들의 눈을 흰헝겊 조각으로 가리고 절벽에서 총살한 후 아무르 강에다 집어던졌다. 그때 총살된 치쉰, 벨로우스, 네페로프 등 동지들 속에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스탄케비치 동지도 있었다. 집행인이 알헥산드라의 눈을 가리자, 그는 눈에서 흰 천을 벗겨내고 선 다음과 같이 소리높여 이야기했다. “나는 35분간 연설할 권리가 있다. 나는 자기 조국을 훔치거나 배신한 자가 아니다. 나는 공산주의자이며 조선의 혁명이다. 내 스스로 죽을 장소를 고르겠다. ”(이 이야기는 알렉산드라의 두 번째 남편 B.B. 오가이의 큰 딸 올가바실리예비치 오가이에 의해 알려졌다). 그는 천천히 todrr에 잠겨 열세 걸음을 걸었다. 무라비요프의 동상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절벽에 멈추어 서서 사형에 대한 공포의 기색도 없이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조용히 몸을 돌렸다.
“존경하고 친애하는 동지들 남성들 여성들 노인과 젊은이들이여. 오늘 우리늬 적이 많은 우리의 애국자들과 나의 전우들과 그리고 나의 생명을 앗아가지만,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수행하던 과업은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조선의 후손들이여 ! 지금 내가 걸음은 바로 조선의 열세 개의 도입니다. 각각의 도에 공산주의의 씨앗을 뿌리고, 모든 장애 · 바람 · 폭풍을 극복하여 프롤레타리아에게 자유와 독립을 가져다 주며, 자본가들과 지주들에게는 죽음을 가져다 주는 기적의 꽃을 피워라. 조선 13도의 젊은이들이여, 그 꽃을 손에 들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성취하여라. 그것은 그대들의 자랑이 되리라. 여러분 모두는 우리의 후예들이 조선을 해방시키고 사회주의를 어떻게 건설하는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조선독립 만세 ! / 소비에트 만세 ! 볼셰비키당 만세 !/ 세계 혁명 만세 !”

총성이 울렸고,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의 시신은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투쟁을 호소하던 그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던 절벽 아래로 떨어져 아무르 강에 잠겼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은 두려움을 몰랐다. 그의 대단함은 조선 청년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 대단함은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에게강한 인상을 주었고 우리의 적들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칼므이크인 집행인 율리네스코는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조선의 영웅이자 극동위원회의 위원이며 개화된 여성이었던 그는 죽었다. 전세계 근로자들의 자유를 위한 활동 때문에 사형집행인의 총 한방에 죽었다.”(선집《극동에서의 혁명》, 모스크바, 1923,160항 참조).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전사, 소련공산당 고참당원, 우랄노동자동맹(1917)의 조직자, 재소 조선의 사회주의자 당원이었다.

유년시절 알렉산드라는 1888년 (3월1일께) 극동 연해주 수이푼의 포크롭스키 라이온(면)의 시넬니코보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나게 영리했고, 용감하고 온화한 성품이었다. 두 살 때인 1890년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그는 계모 밑에서 학대를 받다가, 다섯 살 때인 1893년 하얼빈의 아버지에게로 가 같이 살게 되었다. 아버지 페트로비치 김은 북만주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중국군사철도 건설 현장에서 한국어와 중국어 통역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자이자 그들의 성공적인 투쟁의 지도자였다. 아버지 표트르 김은 사랑하는 딸 슈라(알렉산드라의 애칭)에게 늘 다음과 같이 얘기하곤 했다.“사랑하는 딸아, 네가 커서 일을 하게 될 때 나처럼 항상 노동자 편에 서서 일을 해야 한단다.”아홀살 때인 1897년 하얼빈 시에서 소학교에 다닐 때 그에게 커다란 슬픔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죽었던 것이다. 표트프 김이 죽자, 그를 존경하던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등 수천의 노동자가 파업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어버지가 죽은 뒤 알렉산드라는 폴안드인 마르크 이오시포비치 스탄케배치의 집에서 살다가 열 살 때 블라디보스토크에 사는 오빠 추푸로프 페트로비치 김에게 갔다. 그곳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시립 학교를 마쳤다. 그는 학교 도서과에서 체르니세프스키 · 게르첸 · 도브롤류보프 · 플레하노프 그리고 다른 혁명적 작가들의 저작을 공부하였다.

젊은 시절 열여섯살 때인 1904년 알렉산드라는 동창생인 폴란드인 마르크 아오시포비치 스탄케이비치에게 시집을 갔다. 이 일은 조선인 사회에 많은 소문을 불러일으켰는데, 그것은 그가 외국인과 결혼한 최초의 조선인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편 마르크 이오시포비치는 무위도식에 술과 도박으로 인생을 허비하는 인간이었다. 결국 스무살 때인 1908년 남편과 이론한 알렉산드라는 그 행에 태어난 아들 비야체슬라프 마르코비치를 데리고 하얼빈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스물한살 때인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는 러시아어 교사였던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오가이와 재혼했다. 1910년 두 번째 아들 보리스가 태어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는 늘 혁명 활동을 꿈꾸었다. 남편 오가이는 아내를 가사에서 해방시켜 혁명 활동을 위한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정치 활동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전쟁에 가담한 제정 러시아는 노동대중을 동원하였다. 도시와마을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등 노인과 여성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징집되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김병학이라는 비열한 청부업자가 있었다. 이 자는 선금으로 1만루블을 받고 조선인 노동자 1천여 명을 고용하여 우랄 지방의 나제즈진 벌목장으로 데려갔다. 하얼빈에서도 3천~4천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바로 이 나제즈진 벌목장에 동원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알렉산드라는 오랫동안 기다렸던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고인이 된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다고판단한 것이다. 스물여섯살 때인 1914년 그는 남편과 두 아들을 남겨두고, 우랄 지역 노동자들의 통역을 자원해 벌목 현장으로 떠났다. 우랄 지역 노동자들은 아버지아 일했던 중국군사철도 노동자들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다. 도시 바깥으로 출입하거나서신 연락이 철저히 금지되었다. 중국인 용병 가운데서 뽑힌 경비병들이 노동자들을 감시했고, 파업이 일어날 경우 물자공급 중단, 심지어는 대량 학살까지 자행했다. 알렉산드라는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고, 사민당의 볼셰비키와 관계를 맺게 되어 그 당원이 되었다. 그는 볼셰비키파의 비합법적 저작물을 읽었으며, 그리하여 오로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차를 체제타도 그리고 자본가와 지주 등 착취 계급을 박멸하는 것만이 프롤레타리아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수 있다고 더욱 굳게 확신했다. 알렉산드라는 일본의지배를 증오하는 젊은 조선인 애국자들이 볼셰비키 당원이 되기는 아직 이르지만, 그들로 일단의 정치 조직을 결성하는 일은 적적하다고 판단하였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빠르게 전개되었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 때인 1917년 2월27일(신력으로 3월12일) 부르조아 민주혁명이 제정을 무너뜨렸다. 이 혁명의 결과 러시아에는 두 개의 권력이 나타났다. 하나는 자본가와 지주의 권력 확립을 지향하며 전쟁을 계속 수행하려는 멘셰비키와 사외혁명당이 이끄는 임시정부의 권력이었고, 또 하나는 전쟁을 중지하며‘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 아래 자본가와 지주의 권력을 일소하여는 노동자 · 농민 · 병사 대표자 소비에트의 프롤레타리아 권력이었다.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우랄을 비못한 각 지방에서도 2월혁명에 고무되어 대중 집회와 시위가 벌어졌다. 조선인 여성 알렉산드라는 1만여 명의 주민에게 계급투쟁과 민중해방운동을 호소하는 연설을 행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우리 5천 조선인 · 중국인 노동자들은 오늘부터 더 이상 제정러시아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노동자 · 농민 · 병사 대표자 소비에트가 권력을 쥔 국가의 국민이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청부인들과 차르 권력 사이세 밎여진 불공정한 계약의 이행을 무조건 거부합니다. …” 그의 모든 말은 노동 대중의계급적 단결을 공고하게 하였고, 기업가들과 멘셰비키에 대한 적개심를 불러일으켰다. 이 날부터 전우랄에서 권력 쟁취를 위한 볼셰비키와 멘세비키 사이에 격렬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는 저명한 볼셰비키 지도자 중 한사람으로서 가장 정력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많은 기업 · 공장 · 노동현장을 다니면서, 지하에 숨어 있었던 당의 사업을 합법화했고, 당세포들을 조직하였다. 그는 노동조합에 가입을 권유하는 사업과 노동 조합에 당 세포를 조직하는 사업을 성공적으로 부행하였다. 1917년 3월게 볼셰비키 조직인 우랄노동자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동맹에는 중국인도 가입하여싸. 노동조합이나 지방 소비에트 회의, 볼세비키 지도자 선출을 위한 투표에서, 5천여 명이나 되는 조선인 · 중국인 노동자들읜 많은 투표권을 가졌으나, 러시아어를 몰랐기 때문에 항상 알렉산드라가 찬성표를 던지면 따라서 찬성표를 던졌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우랄에서 알렉산드라 동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알렉산드라는 1917년 두 번이나 모스크바에 페테르부르그를 방문한였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무엇 때문에 그가 그곳을 다녀왔는지 관심 없었으나, 지금 추측컨대 그는 당 중앙위원회를 방문하여 레닌을 만났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또 누구를 만났으며, 어떠한 과제를 받았는지는 모른다. 1917년 7월에 알렉산드라는 옴스크로 가서 10일간 보냈다. 이 기간에 나는 그와 함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강령과 규약 그리고<동산당 선언>을 러시아어에서 조선어로 번역하였다. 그는 조선어로 불렀고 나는 받아 적었다. 알렉산드라는 우랄노동자동맹이라는 볼세비키 조직을 만들어내었고, 그후 극동으로 떠났다. 나는 그의 위임을 받아 당의 강령과 규약을 조선어로 중국어로 번역하였고 시베리라의 여러 도시에서 사회주의 조직을 만들었다.

 10월혁명 전후의 활동 당시 조선인들사이에는 포크롭스키 라이노(면)출신 조선인 여성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가 블라디보스토크의 청부인 김병학이 팔아넘긴 노동자들을 해방시켰다는 소문이 벌써 돌고 있었다. 모든 조신인들은 알렉산드라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반겼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이 조선인 마을에서 발행되던 조선인 신문 <조선인신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벌목자의 고통스러운 작업으로부터 수천명의 중국인과 조선인 노동자들을 해방시킨 수에 우랄에서 돌아온 알겍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은 우리 편집국을 내방하였다. 조선인 볼세비키인 그는 남자들보다 더 용감했으며,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이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바뀌어 나가도록 호소하고 있다.” 알렉산드라는 남편 오가이로부터 (상해) 임시정부의 저명한 조선인 혁명가 이동휘가 자유 아무르 주의 감옥에 구금되어 있으며, 사할린을 거쳐 일본으로 호송될 것이라는 사실을 들었다. 그는 남편과 함께 이동휘의 석방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알렉산드라는 오성묵과 다른 이들과 함께, 러사아와 중국 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선인 이민들과의 관계 설정에 노력하였다. 동시에 그는 볼세비키들과 긴밀히 접촉하면서 활동하였는데, 이 점에 관해서는 다음의 사실들이 증명해  주고 있다. 알겍산드라는 아무르 역(현재의 라조역)의 당조직가인 무라비요프에 의해 선출된 대표로서, 1917년 10월18일(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지구(크라이) 당협의회에 참가했다. 그해 10월 사회주의대혁명 승리 후에 하바로프스크에 극동 노동자 · 농민 · 병사 대표자 소비에트가 결성되자, 알렉산드라는 외교부장으로, 동시에 하바로프스크에 잇는 러시아사회주의노동당 한 조직의 서기로 선출되었다. 이 사실은 조선인 여성인 그가 러시아인 볼세비키들과 함께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가 소비에트 극동 집행위훤회의 외교부장에 선출된 사실은, 극동에 살고 있던 소수민족들에게는 대단한 기쁨이 되었으며, 또한 그들 사이에 커다란 정치적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알렉산드라는 조선인들에겍서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는데,이는 그가 그들을 솔직하게 대했개 때문이었으며, 그가 중국어를 자유로이 구사 할 수 있어 모든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라는 외교부장으로서 헝가리인 · 독일인 등 외국인에 대한 여권발급제도를 간소화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항상 그에게 고마워했다. 알렉산드라는 서른살 때인 1918년 2월(러시아의 구력으로는 3 · 1운동이 2월에 일어난 것으로 된다)에 일어난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에 따라 혁명가들의 회합을 열기로 결정하였다. 회합에는 이동휘 양기탁 모동열 이동녕 등 조선 민족해방운동의 저명한 지도자들과 조선과 중국과 극동에서 온 수십명의 혁명 활동가들이 참석했다. 회합에서는 조선 혁명운동의 정세와 장래 과제들을 토론하였다. 이 모임에서 알렉산드라는 마르크스 · 레닌주의의 입장에서 함렌파(이동휘, 김닙 혹은 김립), 평양그룹(유동렬, 양기탁) 그리고 경성그룹 (이동녕) 등 조선민족해방운동에 존재하는 파벌주의를 비판하였다. 그의 연설이 있은 후 사적인 간담회에서 모든 이들은 분파싸움을 중지하자고 약속하였다. 그 후 조선 민족해방운동 문제를 계속하여 토론하던 중 참석자들의 일부(이동녕과 그으 지지자)가 ‘정의당’이란ㄴ 이름의 민족해방조직을 결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글나 다른 일부는 조선해방운동을 사회주의운동으로 바꿀 것을 호소하였다. 3월28일 하바로프슼에서이동휘 유동열 이하녕 오성무(오성묵의 오기라고 여겨짐) 등이 한인사회당(조선인사회주의당)을 조직하였다.

이것은 조선혁명가들의 단결과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첫걸음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사건들은 알렉산드라가 민족해방투쟁에 관한 마르크스 이론에 얼마나 정통해 있었는가, 그리고 민족해방운동을 사회주의운동으로 전환시키겠다는 생각을 얼마나 실천적으로 훌륭하게 실현시켰는지 확고하게 말해 주고 있다. 한인사회당은 소비에트 권력으로부터 비용를 할당받았다. 조직의 할동가 등은 현금 급룔ㄹ 받았고 <자유종>이라는 신문을 발간하였다. 군사학교가 설립되었다. 위훤회의 의장은 이동휘었다. 군사학교장 겸 군사부장은 유동렬, 부위원장은 오가이, 청년부 의장은 오성묵,<자유종>의 편집인은 김 립이었다. 나는 재정담당이었다.(계속)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이번 호 알렉산드라 김 전기 2부에는 적백내전 기간의 전투에서부터 체포되어 재판 받기까지의 과정이 담겨 있다. 소련당국에 알렉산드라 김의 전기를 제출하고 난 뒤, 이인섭씨는 당시 소련 정부 당국자로부터 주요 부분에 대한 보충 질의를 받게 된다. 이에 대한 이인섭씨의 답변 문서 가운데 특히 그가 알렉산드라 김과 관련한 자료를 추적하게 된 과정이 부속 기사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 이인섭시 전기 이후 밝혀진 새로운 사실을 중심으로 알렉산드라 김의 가족과, 그의 사상이 형성되는 데 영향을 준 요인들을 작가 鄭棟柱씨가 분석했다. <편집자>

  시민전쟁 한인사회당 창설 1주일 뒤인 1918년 4월5일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국제 간섭군이 상륙했다 백위군이 봉기한 것이다. 시민전쟁이 시작됐다. 알렌산드라가 맨 먼저 무기를 들었다. 그는 영어·프랑스어·일본어·중국어·한국어 그리고 러시아어로 무장간섭군에 대한 정항을 호소하였다. 자국과 전세계 근로자들에 대한 호소와 계급 투쟁 호소, 그리고 조국을 수호하자고 외치는 전단을 썼다. 그는 선전 활동을 정력적으로 벌였고, 각 지방으로 동지들을 파견하였는데, 중국인 순취우, 러시아인 벨로우스와B.골리온코 등이었다. 알렉산드라는 주민들을 적군으로 동원하는 일과, 사람들을 전선으로 보내는 일에 특히 주의를 기울였다.
 알렉산드라는 과?성이 있었다. 그는 매우 진지하고 신중하며 용감했다. 그는 시작한 모든 일을 끝까지 해내었다. 그는 사람들을, 그리고 동지들을 존중하였다. 항상 매우 열심히 일을 하여 동지들에게 모범이 되었고 그들의 활동력을 끌어올렸다.

 한인사회당 당원들은 순서에 따라 의무적으로 전선으로 향하였다. 많은 노동자, 일용 농부, 어부들이 자원해서 러시아인 동지들과 함께 전선으로 나아갔다. 조선 청년 1백명 이상이 우수리 전선에서 전사했으며, 조선인 적군 부대는 고립되어 싸운 게 아니라 러시아인 동지들과 함께 싸웠다. 많은 조선인이 이만과 비야젬스키 역의 격렬한 전투에서 전사했다. 일본 간섭군과 벌인 여러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 중 반이상이 조선인이었다. 18년 9월초 빨치산 부대가 ‘붉은 강’의 후퇴선에 주둔했을 때 조선인들은 겨우 10명 남짓했다. 알렉산드라의 지휘아래 중국인 둥지 순취우는 중국인 독립부대를 조직하였고, 이 부대는 만주의 하오헤 지구와 비야젬스키 역 지구에서 활동하였다.

 19년 9월 하바로프스크 시는 전면 포위되었다. 붉은 강까지 이르는 우수리 전선은 일본군·백위군·체코슬로바키아군에게 점령되었다. 일본군이 스바보드느이 시와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르 시를 점령하고 있었고, 블라디보스토크는 메르쿨로프가 장악하고 있었다. 중국 군사철도와 하얼빈은 백위군 장군인 호르바트가 장악하고 있었다. 코사크 대장 세메노프는 치타를 지배하고 있었다.

 로프스크 시립공원 회의실에서 소비에트 및 당 활동가들의 회합이 열렸다. 이 회합에 소비에트의 아무르 주 집행위원회 의장인 무힌 동지가 참석하였다. 회의에서는 하바로프스크에서 전투 없이 철수할 것과 부대를 숲으로 이동해 빨치산 활동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철수하는 소비에트와 당 활동가들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 도시를 빠져나가기로 하였다. 첫번째 그룹은 육로로 아무르 주와 보도이보를 거쳐 모스크바와의 연락을 회복하기로 하였고, 두번째 그룹은 아무르 강을 따라 배로 아무르 주와 보도이보를 거쳐 모스크바와의 연락을 회복하기로 하였고, 두번째 그룹은 아무르 강을 따라 배로 아무르 중와 몽고 증부를 거쳐 중앙아시아로 나가서 모스크바와의 연락을 회복하기로 하였다. 회합 참석자들 중 일부가 백군을 화약고로 유인하여 화약고를 폭파할 것과, 우리 부대가 아무르 철교를 건넌 후에 철교를 폭파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라는 이 제안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것을 알아야만 한다.

“적을 죽이기 위해 주민에게 고통을 주면 안되다”
 알렉산드라는 연설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말하는 동안 강당은 조용했고 사람들은 줄곧 그의 연설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지들, 우리는 시를 영원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철수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시에서 펄수한 뒤에 우리 적들이 거주하게 되겠지만 인민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만약 화약고를 우리가 폭파하면 적들은 죽이겠지만, 주민들에게 고통을 줄것이며, 건물로 부서지게 됩니다. 전투 없이 시에서 퇴각한다는 우리 의 의도는 무익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아무르 강의 철교는 극동의 장대한 건설물이자 우리들의 자랑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그것을 파괴하면 내일 우리가 다시 건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폭파해야 합니까.”

 알렉산드라의 제안에 따라 철교와 화약고는 파괴하지 않았다.  두번째 남편인 B.B. 오가이의 큰 딸 올가 바실리예브나의 말에 따르면, 오가이는 알렉산드라 김이 시를 떠나기 전에 아내에게 조선 여자 옷으로 갈아입고 가발로 조선 여자들의 머리 모양을 하여, 멀리 떨어진 조선인 마을에서 온 여자처럼 위장하라고 권하였다. 알렉산드라 김은 그 충고를 거절하였다. “소비에트 극동 집행위원회의 책임 간부로서 어떻게 그렇게 대중들로부터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 알렌산드라 김은 오가이와 자식들을 남겨두고 떠났다.
 알렉산드라는 3백~4백명이나 되는 적국과 함께 ‘바론 코르프’호를 타고 하바로프스크를 떠났다. 이튿날 블라고베첸스크를 지나 거류지 예카테리노-니콜스크에 이르렀을 무렵 혁명을 배반한 아무르 소함대의 군함 두 척이 바론 코르프를 정지시키고 부장해제했다. 정박 통보가 없었다는 것이 구실이었다. 매수당한 바론 코르프흐 선장은 예카테리노-니콜스크측에 배를 넘기고 밤중에 도망하였다. 혁명의 배신자들에게 속은 승무원과 승객 들은 백군 코사크들에게 체포되었다.
 조선인들과 함께 체포된 알렉산드라는 학교 건물에 구금되었다. 내가 이 학교를 지나가게 되었을 때, 체포된 조선인 중 한 사람이 내게 소리질렀다. “인섭아, 자네 어딜 가는가? 우리는 모두 여기 있네.” 이 말 때문에 나도 체포되었다. 나도 잡혀서 모두 함께 마당에 앉아 있었다. 김 립과 유돌렬이가 낙담하여 “우리는 보기 드문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알렉산드라는 “당신들은 정말 맹렬하게 일하지 않았는가. 직접 조선의 혁명을 보고 싶다. 괜찮지 않은가. 우리의 사업은 발각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조선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이룰 수 없다면 우리의 아들 딸들이 이룰 것이며, 그들이 못해낸다면 손자 손녀들이 해낼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 후손들의 힘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우리는 커다란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나, 인섭은 그 때 장래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논의해 볼 것을 제안하였다. 나는 연해주와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알렉산드라는 잠시 생각한 뒤에 말했다. “…나는 그것을 말릴 수 없지만, 당신에게 더 큰 규모의 일, 동반구에서의 넓은 활동 영역을 맡기겠다. …총알 하나는 단 한 사람을 죽이지만 한장의 삐라는 적의 모든 군사력을 무너뜨릴 수 있다. …나는 선전 삐라와 조선어로 번역한 정치문서를 조선으로 보내는 것이 훈련되지 못한 활동가들을 지휘하는 것보다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사흘간 우리들은 그와 함께 창고에 있으면서 파업을 하달받았다. 나는 그에게 맡겨준 일을 꼭 수행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체포된 지 나흘째 되던 날 알렉산드라는 다른 장소에 따로 구금되었다. 우리는 그 마음에 14일간 감금되어 있었다. 그 후 하바로프스크로 이송되었다. 알렉산드라·타쉰·네페도프 등은 각각 따로 호송되었다. 우리를 호송해온 배는 3일간 하바로프스크 부두에 정박해 있었는데 그곳으로 주민 수천명이 몰려들었다. 부두는 일본군 소대가 지키고 있었다. 체포된 러시아인 둥지들은 칼므이크인 백군 부대로 인도되어 시내로 호송되었다. 체포된 조선인 12명은 부두에 남았다. 코사크들은 우리 12명을 어떤 보상금이나 사례를 받고 일본군 손에 넘기려 하였다.

 이 12명 가운데 조선에서 일본 군국주의와 싸우던 세 사람의 정치적 망명자가 있었다. 김 립, 이단열 그리고 나였는데 우리에게는 심각한 위험이 닥쳤다.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비상 사태가 벌어졌다. 백군들이 일본군 소대장에게 우리 12명을 접수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 때 일본군 소대장은 부두의 질서를 안정시키라는 명령을 수행하기에 바빠 백군의 제의는 예기치 못한 것이었고 불쾌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는 여권을 검사해 일본이 발급한 것이 아니면 체포된 이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증명서를 제출하였다. 그것은 중국 여권이었다. 그러자 일본 소대장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렇지, 우리 여권을 발급받은 자가 어떻게 볼셰비키가 되겠는가.” 그리고 일본어로 백군들을 욕하였다. “바카 ! ” 백군들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나는 일본말로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슬그머니 해안으로 내려가 중국인들 사이에 숨어버렸다. 남은 두 조선인은 러시아인 동지들이 감금된 곳으로 보내졌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러시아인 동지들과 함께 나중에 석방되었다.

 재판, 그리고 총살 백군들은 감옥에 격리수용되어 있던 알렉산드라 · 타쉰 · 네페도프 동지와, 당과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다른 지도자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알렉산드라는 법정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고, 군사재판정을 공산주의 선전장으로, 적들을 고발하는 무대로 바꾸어 버렸다.
 군사재판장은 알렉산드라에게 “당신은 조선인이므로 러시아의 국사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 그러니 모든 것을 인정하고 뉘우친다면 당신을 석방하겠다”라고 말했다.

 알렉산드라는 분개하여 “인정하고 뉘우치라고? 나는 조선인 혁명가로서, 만약 조선 인민이 러시아 불셰비키와 함께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달성한다면 조선 민족도 자유와 독립을 얻을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한다. 당신은 내가 조선 출신으로서 이 전쟁에 참가한 것으로 여기는가 본데, 나는 러시아 영내에서 태어나 자랐다. 적군 병사들과 함께 이 전쟁에 참가한 수백명의 조선인은 모두 노동자·농민, 조선 애국자들이다. 그들은 소비에트 권력을 방어하는 것이 조선 민족을 해방에 이르게 해줄 것임을 잘 알기 때문에 열성적으로 이 전쟁에 참가한 것이다. 몇 달 후면 당신들은 만주에서, 조선에서, 극동 전역에서 손에 무기를 든 조선인들을 틀림없이 보게 될 것이다. 나는 당신들에게 체포되었지만 내가 해온 혁명 사업은 어디서나 언제나 전개되고 있다. 만약 내가 여기서 당신이 말하는 대로 ‘인정하고 뉘우친다’면, 나는 혁명을 배신하고 2천만 조선 민족 앞에 범죄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한 재판관이 “만약 여성으로서 당신이 재판관들에게 자기 범죄를 뉘우친다고 호소한다면 당신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여성으로서? 당신의 표현은 나뿐만 아니라 이 세계 인구의 반을 점하는 모든 여성을 모독하고 있다. 당신은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계급 투쟁에 나뿐만 아니라 수만 명의 여성이 참여하고 있다. 당신은 그 모든 여성에게 자기의 활동을 뉘우치라고 얘기할 수 없다. …몇년 뒤에 극동에서 조선에서 중국에서 전세계에서 여성들이 남자들과 나란히 인간 사회의 모든 생활에 걸쳐 사회주의 혁명 운동에 참가할 것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해오던 일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만의 여성 가운데서 전개되어 나갈 것이다. 만약 이 세계의 억압받는 여성과 남성들이 자유를 위해서 봉기하여 승리를 거둔다면 전세계는 통일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평화롭고 자유롭게, 그리고 사이 좋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당신의 말대로 여성으로서 자기의 범죄를 뉘우친다면,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배신하고 전세계 여성 앞에 죄를 범하는 게 될 것이다.”

 재판관들은 모두 알렉산드라가 인정하고 뉘우치도록 강요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알렉산드라는 짐승 같은 고문을 당하고 가슴과 얼굴에 흉측한 상처를 입었다. 사형 집행후 일본 영사 다쿠치는 사법기관에 알렉산드라의 총살에 관한 정보를 요청하였다. 이 일은, 적국인 일본 당국도 알렉산드라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으며, 그의 활동에 대하여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사건 이후에 하바로프스크 주민들은 그 지역의 아무르 강에서 고기를 낚지 않았다고 한다(이 부분은 올가 바실리예비치 오가이가 이야기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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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 평화 발자국 25
박건웅 지음 / 보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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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괴물들
작가 : 박건웅
출판 : 보리

박건웅 작가의 신작이다. 그가 오랜 시간 그렸던 단편을 모았다. 한국의 그래픽노블 작가들은 외국의 작가들보다 일반적으로 사회성이 강한 작품을 창작하는 경향이 높다. 그건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데, 한국현대사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격동적이고, 드라마틱하며, 격렬한 과정을 겪었던 것도 한 원인이 될 것이다. 
그래픽노블 작가들은 대개 70년대, 80년대에 태어나 민주주의를 학습할 기회가 있었으며, 한국사회의 부조리와 부패, 권력자의 오만과 폭력을 눈으로 보며 자랐다. 여기에 대학시절의 학생운동, 사회에 나와 시민운동을 경험하면서 정치의식이 발달하고, 민주주의 학습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작가의 작품에 스며들었다.
작가의 경험은 작품세계에 직접 영향을 준다. 특히 그래픽노블이 갖는 장르적 특성은 작가의 자기 서사가 강하고 깊다는 데 있는데, 박건웅을 비롯해 한국의 그래픽노블 작가들은 한국현대사와 자기 서사를 일치하는 경향이 많다. 이건 퍽 우연이지만 작가에게나 독자에게 모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픽노블 작가는 강하고 깊은 자기 서사와 함께 개성 있는 그림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자나 기호보다는 이미지가 그래픽노블의 주제를 더 잘 드러내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지가 핵심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박건웅 작가의 그림은 다른 그래픽노블 작가들과 분명한 변별을 보여준다. 강렬한 흑백의 이미지와 판화 같은 날카로운 선이 있는가 하면, '바람이 불 때'처럼 무채색 유화의 분위기가 나는 그림도 있다. 전체적으로 흑백의 강렬함 속에서 날카로운 풍자를 드러내는 작가의 작품은, 작품의 주제와 이미지의 형식이 완벽하게 결합한 보기 드문 경우에 속한다.
박건웅 작가가 소재로 삼는 작품들 가운데는 읽기 불편하고, 힘든 작품이 꽤 많다. 이건 물론 작가의 책임이 아니라, 한국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아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현대사의 끔찍한 비극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참혹하고, 잔악하며, 끔찍하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럽다. 
작가는 그런 역사의 비극을 이미지로 그려야 하므로, 독자보다 오히려 더 큰 트라우마를 겪을 것으로 보는데, 그래서 독자는 박건웅의 작품을 쉽게 읽어나가지 못하게 된다. 작품 '문신'은 단편이지만,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고통스럽다. 한 칸, 한 칸의 이미지가 마치 칼날처럼 몸을 저미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일본 제국주의에서 일본군이 조선의 여성에게 저지른 만행은 인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가장 참혹하고 끔찍한 범죄였다. 이런 내용을 심각한 논문이 아닌, 그래픽노블로 본다는 것은 올바른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 작품집은 작가가 지난 10년 동안 자신의 작품과 관련해 그린 것과, 당시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 보면서 만든 작품을 모았다. 단편이지만, 마치 연작처럼 작품의 내용과 수준이 일관되고, 한국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죽은 자가 돌아왔다
보름달이 뜨던 날 오래전에 죽었던 사람들이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죽은 사람들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놀라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을 사람들은 죽은 자들에게 자기 피를 주고 달콤한 빵을 얻어먹다 보니, 점차 피가 모자라게 된다.

죽은 자는 썩어서 흙이 되어야 하지만, 살아 돌아왔다는 것으로 이미 역사의 퇴행을 의미한다. 죽은 자가 산 자의 피를 마시고 생기를 찾을 때, 산 자들은 과거의 역사, 과거의 흔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죽은 자가 내미는 빵은 과거의 유산이다. 빵을 먹는 것은, 미래로 나가지 못하는, 미래로 나가기를 거부하는 퇴행의 의지를 드러낸다. 과거의 유산이 달콤할수록 불투명한 미래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거부한다. 
죽은 자들이 살아오고, 죽은 자가 마을의 대표가 되고, 산 자들은 죽은 자들이 공급하는 달콤한 빵에 만족할 때, 마을은 쇠퇴하고 사람들은 유령처럼 변한다. 그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죽은 자들이 마을을 점령한다. 죽은 자와 타협하는 것은 곧 과거로의 퇴행이자 소멸의 시작이라는 걸, 작가는 우화처럼 말한다. 전해 내려오는 모든 우화는 시대의 본질을 담고 있으며,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후대의 몫이며, 우화는 항상 새롭게 해석된다. 

사람들이 쌍굴다리 밑에서 모여 있다. 목이 마르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계속되는데 동굴 입구에 미군들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이 굴에서 나갈 수 있는지 물어본다. 노근리 쌍굴다리 현장을 답사하고 그린 작품이다.

한 두 페이지를 넘겼을 때, 노근리 사건 이야기임을 알았다. 작가는 이미 '노근리 이야기'를 두 권으로 펴냈고, 이 단편은 노근리 학살 현장으로 답사를 다녀와서 그린 작품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노근리 철길 아래는 여전히 미군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들의 영혼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고, 죽은 넋은 자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삶과 죽음을 알지 못하는 것, 살았어도, 죽었어도 끊임없이 고통을 느껴야 하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들은 목이 마르고, 잘려나간 팔다리를 보면서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을 탓한다. 어둡고, 춥고, 고통스러운 이 시간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절망 속에서 이들은 누군가 나타나 자신들을 구해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마침내 누군가 나타난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낯선 말소리가 들린다. 어둠 속에서 그들이 나타나고, 고통과 절망으로 떨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웃는 그들은 군복을 입은 해골이다. 자신들을 죽인 그 미군들이 죽어서 해골이 되어 나타나 다시 그들을 죽이려 한다. 그들은 페인트를 가져와 벽을 지운다. 그들이 쏜 총알이 벽에 무수히 박혀 있는 자국을 감추려 했던 것처럼, 죽은 사람들의 영혼까지도 지우려 하는 것이다. 미군은 죽은 자들을 다시 죽이고, 그들이 남긴 흔적을 지우고, 역사에서도 지우려 한다.

바람이 불 때
1980년 봄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친구로 헤어진다. 그 뒤 한 사람은 버스에 탄 시민으로, 다른 한 사람은 버스에 총을 쏘는 군인으로 만난다. 5.18 광주에 투입됐던 어느 공수부대원의 증언을 모티브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5.18 광주민중항쟁 시기에 있었던 비극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 광주에 살던 청춘 남녀는 서로에게 마음이 있지만, 남자는 군에 입대한다. 공수부대에 배치된 남자는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되었고, 부대원들이 광주 외곽을 지나가는 버스에 집단 난사를 해 버스에 타고 있던 시민 모두를 학살한다. 
버스를 타면 멀미를 한다는 연인은 버스를 타보라는 남자의 말을 듣고, 남자를 면회가기 위해 멀미를 참으며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리고 마침, 그날, 그 버스에 남자의 연인이 타고 있었다. 이 사건이 실제 있었던 일이었을까. 작가는 공수부대원의 증언으로 재구성했다. 연인들이 시민과 군인으로 만났다면, 그 군인은 광주에 폭동이 일어났고,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상관의 말을 믿었다면, 총을 쏜 군인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까. 모르고 저지른 학살이라도 학살자의 죄를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현대사사의 비극 가운데 가장 큰 비극은 대부분 해방 이후에 국내에서 군부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이 많다. 그 군부의 상급자들은 거의 대부분 일제시대에도 군인이었으며, 친일파들이었다. 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차지하고, 국민을 학살했으며, 독립운동가,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을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고, 학살했다.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

거인
캄캄한 굴 속에서 살아가는 할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어린 시절 만났던 귀족과 거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을 사람들은 거인이 모든 것을 다 해 줄 것이라는 귀족의 유혹에 속아 넘어가고, 마을의 강은 점차 죽음의 강으로 변해 간다.

소박하게 살아가던 마을 주민에게 귀족이 찾아온다. 귀족은 외부에서 들어온 자본(가)이다. 다르게 해석할 여지는 많다. 귀족은 지배자일 수도 있고, 엘리트일 수도 있으며, 이명박일 수도 있다. 그것들이 순박한 마을 주민을 꼬드기고, 욕망을 부추킬 때, 사람들은 그 욕망을 좇는다. 어리석고 무지한 대중은 그 자체로 죄악이다. 사기 치는 놈은 당연히 나쁘지만, 멍청하게 그 사기에 동조하고, 보이지 않는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 역시 사기꾼의 범죄에 가담하는 것이다.
민중이 언제나 옳거나 지혜롭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거의 대부분 어리석고 멍청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어리석은 민중은 조금씩 깨어났고, 지혜로워졌다. 욕망의 부추김에 수없이 속고, 실패를 거듭하면서 무지를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귀족이 데려온 거인은 탐욕과 욕망의 현현이다. 탐욕과 욕망은 추구할수록 커진다. 그것은 끝도 없이 자라며, 더 많은 것을 삼키고, 더 많은 인간을 잡아먹는다. 그리고 그 거인은 어리석은 인간들이 사는 마을 가까이에서 잠들어 있다. 언제든 어리석은 인간이 깨울 날을 기다리며.

거인과 소인
오래전부터 소인들은 거인에게 음식과 재물을 바치며 평생 살아왔다. 어느 날 더 바칠 것이 없어지자 거인은 소인들의 자식도 바치라고 요구한다. 결국 소인들은 모두가 힘을 합쳐 거인을 물리치고 새로운 왕을 뽑아 새로운 왕국을 만들지만, 왕은 또다시 거인이 되어 나타난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순간부터 존재는 스스로 작아진다. 거인과 소인은 물리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 존재다. 그것은 상대적이며, 존재론적 의미를 갖는다. 거인은 권력자다. 아니, 권력자를 거인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심리가 스스로 소인으로 만든다. 
권력의 유무에 따라 인간의 존재가 거인과 소인으로 나뉘는 것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걸 의미하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이 규정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권력을 준 것은 다수의 인민이지만, 권력을 가진 자는 자신의 권력과 '자기'를 일체화한다. 권력과 존재의 일체화는 개인을 권력의 화신으로 만든다. '개인'이 작아지지 않는 방법, 권력을 가진 자가 거인으로 보이지 않는 방법은 올바른 투표 뿐이라는 걸 작가는 우화로 말한다.

괴물들
아버지는 사막 너머에 괴물들이 살고 있으며 호시탐탐 마을을 위협하기 때문에 괴물들을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괴물을 잡으러 사막 너머로 가, 괴물들을 처참하게 죽이고 그 자식을 인질로 데려온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괴물을 잡으러 가자고 말한다. 괴물들은 작고 약했지만, 거대한 아버지는 그 괴물을 죽이고, 사로 잡아 마을로 데려온다. 그런데, 마을의 주민들과 잡아 온 괴물의 모습은 같다. 마을 주민들은 괴물을 잡아온 거인을 '나리', '아버지'라고 부른다. 
나리가 잡아온 괴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배자는, 권력자는 자기가 다스리는 마을 사람과 똑같은 사람을 두고 '괴물'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때로 '빨갱이'이며, '종북'이며, '반미'이며, '친북'이며, '친중국'이며, '장애인'이며, '여성'이며, '페미니스트'이며, '성소수자'이며, '사회적 약자'들이다.
나리는 이런 소수자들을 '괴물'이라고 말하고, 이들을 혐오하도록 부추기고, 이들을 때려잡고, 이들을 잡아먹는다. 그러나 정작, 평범한 사람을 '괴물'이라고 말하는 '나리'는 눈이 하나인 진짜 '괴물'이다.

봄섬
태준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어려운 집안 환경 속 고민을 친구들에게 털어놓는다. 밤하늘의 별은 반짝이는데 그 순간, 태준이는 어떻게 이 섬에 올 수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세월호 생존학생과 형제자매 이야기를 기록한 《다시 봄이 올 거예요》(창비, 2016)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지금도 진행하고 있는 세월호 참사에서 살아남은 학생의 이야기는, 한국현대사에서 발생한 모든 학살과 맥이 닿아 있다. 제주4.3, 노근리, 광주5.18로 이어지는 학살의 주범은 늘 권력이었고, 동족을 참혹하게 살해했다. 노근리는 외국군(미군)이 피난하는 민중을 학살한 사건이었지만, 그것 역시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 탓이었으니, 이 땅의 민중은 늘 그렇게 죄없이 죽임을 당하는 존재였다.
세월호 참사는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에서 벌어진 그 모든 학살 사건의 정점이자, 마지막 사건이다. 이 사건을 만든 박근혜 정권의 뿌리는 저 멀리 일제강점기의 일본 관동군 소좌 박정희로 거슬러 올라가고, 독립군을 때려잡았던 조선일본군 박정희와 백선엽으로 시작해서, 해방 이후 조선의 민주주의자들을 암살하고, 때려잡던 일제 앞잡이 군인과 경찰로 이어지며, 친일파를 앞세워 나라를 망가뜨린 이승만을 거쳐 제주4.3에서 제주도 민중을 '어린아이도 모두 학살하라'고 명령한 이승만과 조병옥이를 비롯해 학살의 주범들이 권력을 쥐고,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좌우의 이념을 선택한 박정희는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이후, 수없이 많은 민주주의 시민과 학생을 학살했다.
세월호 참사가 박근혜 정권에서 일어난 것은 필연이었다. 학살자를 아버지로 둔 박근혜는 대를 이어 권력을 잡았지만, 무능의 극치를 달리는 인간 허수아비였고, 최순실의 노리개가 되어 나라를 망가뜨렸다. 국민은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권력은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해경은 학살 현장을 방조, 동조했다. 이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오로지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진실은 아직도 드러나지 않았고, 학살자들은 여전히 떵떵거리며 살아간다.

아파트
새로 지은 아파트 벽에서 시신이 발견된다. 주민들은 누가, 왜, 어떻게 시체로 발견되었는지보다 당장 아파트 값이 떨어질까 걱정부터 하는데…. 그 비밀을 추적하던 9층 남자는 마침내 아파트의 비밀을 알게 된다.

아파트공화국에 대한 통렬한 풍자. 아파트를 세우는 사람들은 노동자다. 저임금에 강도 높은 노동으로 공사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사고로 죽는다. 이렇게 죽는 노동자들은 거푸집에 버려져 콘크리트와 함께 묻히고, 비싸고 화려한 아파트가 준공되어, 은행빚을 왕창 얻은 중산층은 아파트를 사면 곧바로 2배, 3배 아파트 값이 뛸 것을 기대한다.
아파트에 대한 욕망은 사람의 생명보다 훨씬 강렬하다. 아파트 벽에 사람의 시체가 드러나도 '예술작품'이라고 견강부회하며 오히려 아파트의 가치를 높인다고 말하는 목사의 말은, 아파트 가격이 지상 최고의 가치이자, 욕망의 절정이라는 걸 잘 드러낸다. 아파트에 입주한 사람들은 시체를 꺼내 국을 끓여 먹고, 살아 있는 사람도 잡아 먹는 지경에 이른다. 루쉰의 소설 '광인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이 사람을 잡아 먹는 사회는 인간의 윤리, 도덕, 염치, 사랑이 사라진 사회다. 오로지 돈, 물질, 가치, 욕망이 전부인 사회에서는 인간의 생명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일반 평범한 국민이 가지고 있는 자산의 70%가 아파트라고 하니, 아파트 가격의 오르내림은 이들에게 목줄을 쥐고 있는 것과 같다. 아파트 가격의 80%까지 은행에서 빚을 얻어 매입하고, 매달 이자를 내고 있으니, 아파트 가격이 내려가면 이들은 빚더미에 앉게 되는 것이다. 이들, 평범한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고, 욕망에 매달리도록 만든 것은 권력과 자본이다. 
인간의 이기와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는 사람의 생명보다 아파트 가격이 더 중요하도록 만들었다. 서로를 잡아 먹어야 살아남는 자본주의의 잔혹함은 주민들이 또 다른 주민을 잡아 먹는 장면으로 드러난다. '식인'은 단지 오래된 관습이 아니라, 경쟁을 부추기고, 경쟁을 통해서만 살아남아야 하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드러낸다.

천국과 지옥 1
죽은 자들은 천국의 문 앞에서 천국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 결정된다. 하나님을 믿고 십일조를 해야만 천국으로 갈 수 있고, 돈 없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지옥으로 떨어진다. 시간이 흘러 천국은 부패한 사람들로 가득해 살기 힘들어지고, 이를 견디지 못한 천국 사람들은 결국 지옥으로 향한다.

한국 개신교를 신랄하게 풍자한 내용. 천국과 지옥은 흑과 백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개신교의 맹점을 드러낸다. 세상이 오로지 천국과 지옥으로만 존재한다는 이 멍청하고 한심한 생각은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지게 만든다. 조 아무개를 닮은 천사는 죽은 사람이 천국으로 갈 지, 지옥으로 갈 지 선별한다. 예수를 믿은 사람,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스스로 회개했다는 사람, 돈이 많아서 뇌물을 바치는 사람은 천국으로 가고, 가난하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으로 간다.
천국은 범죄자들, 사기꾼들, 예수를 믿는 사람들로 가득 차고, 지옥은 가난한 사람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산다. 천국에서는 온갖 범죄가 일어나고, 서로를 죽이고, 악행이 벌어지면서 천국에 살던 사람들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지옥으로 탈출한다. 차라리 지옥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천국은 타락하고, 멸망한다. 그렇게 지옥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지옥이 너무 평화롭고, 살기 좋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지옥은 화염이 불타고, 악마가 창과 칼로 사람들을 난도질 하는 것이었지만, 이 지옥은 가난하지만 오손도손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타락하고 멸망한 천국을 버리고 지옥으로 내려 온 조 아무개 천사는 지옥에 다시 거대한-천국을 찌를 만한-교회를 짓고 신도를 모으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교회에 관심이 없다. 교회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지옥은 평화롭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진짜 '예수'가 살고 있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지옥으로 내려 온 예수가 그곳에 있는 것이다.

유령
학교에서 청소를 하는 청소 노동자들은 유령이다.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교수, 학생, 노동자가 계급으로 인식되는 학원 풍경 속에서, 청소 노동자들은 유령이 아닌 사람으로서 권리를 되찾으려 한다.

청소노동자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 불안정한 고용으로 고통당하는 청소노동자는 현장에서도 유령 취급을 받는다. 누구도 아는 척 하지 않고, 무시하는 하찮은 존재. 그들이 누구건, 교수, 대학생, 사무직 노동자들 모두, 청소노동자를 인간 이하로 취급한다. 자신도 노동자이면서 청소노동자를 마치 벌레처럼, 노예처럼 여기는 그들의 시선은 천박하게 비뚤어져 있다.
신분제 사회는 인간을 차별하고, 등급화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주인이고, 노동을 하는 사람은 모두 노동자인 것이 당연하지만, 여기에 다시 신분제가 자리 잡는다. 교수는 월급을 받는 노동자가 분명하지만, 자신을 노동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학생은 대부분 미래의 노동자가 되지만, 청소노동자를 외면한다. 노동자도 대기업 정규직, 대기업 비정규직, 중소기업 정규직, 중소기업 비정규직, 하청업체 비정규직 등등 무수히 많은 차별과 차등으로 서로를 구분하고, 혐오한다. 청소노동자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신분의 노동자다.
그런 그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순간, 유령이었던 청소노동자는 존재를 찾게 되고, 다른 노동자와 동등하게 노동자의 위치를 갖게 된다. 노동자는 단결하고, 노동조합을 결성할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찾고, 실존의 인격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죄와 벌
술을 먹고 성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는 떳떳하게 살아가고, 성범죄 피해자는 사람들의 눈총과 속앓이로 더 움츠리고 숨어 지내야 하는 현실을 대비하여 보여 준다.

한국에서 성범죄는 매우 가볍게 처벌한다. 성범죄자의 95% 이상이 남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법부는 성범죄를 남성 범죄로 규정해도 좋은데, 남성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성범죄에 관대한 한국의 법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성범죄를 부추기고, 남성의 성범죄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것은 결국 사법부가 성범죄자인 남성들을 옹호하고 보호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일에는 소홀하다고 말할 수 있다. 뒤집어 보면, 성범죄 피해자의 95% 이상이 여성이라는 점,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한국사회에서 사법부까지 피해자인 여성을 보호하지 않는 현실은, 한국사회가 얼마나 남성가부장제, 남성우월주의 사회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천국과 지옥 2
지옥에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아가던 예수가 지상이 살기 힘들다는 기도를 듣고 지상으로 향한다. 대형 교회와 작은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를 팔아 장사하는 교회의 부조리함을 알게 된다.

지옥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예수는 자기를 팔아서 먹고 사는 목사와 대형교회를 보면서 절망한다. 특히 한국의 개신교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직전과 같은 상태에 놓여 있다. 예수를 팔아서 무지한 신도들의 등을 처먹는 목사와 교회가 매우 많고, 어리석은 신도들은 그런 목사와 교회를 아무 생각없이 추종한다. 신도들은 '신' 또는 '하나님' 또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믿고, 목사의 말을 진리로 믿는다. 어리석은 신도와 탐욕에 찌든 목사가 만나서 소돔과 고모라의 막장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살아서 한국에 오면 노숙자 소리를 듣고, 사기꾼 소리를 듣게 된다. 예수를 등처먹는 목사가 나타나고, 예수는 목사에게 이용당하고 별 볼일 없는 인간으로 전락한다. '신'이라는 예수마져도 하찮게 만드는 한국 개신교의 탐욕과 욕망의 크기는 초대형 크기의 교회로 등장한다. 세계 최고 크기의 교회를 짓는 한국의 개신교는, 목사가 대를 이어가며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주고, 교회를 부동산 가치로 계산하는 철저한 물신주의를 따른다.

문신
열세 살 소녀는 어느 날 일본군에게 끌려가, 혜산시 군부대 막사에서 다른 소녀들과 함께 성노예로 지내야 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 이토 다카시가 40년 동안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흑백의 단순한 형태로 그린 만화지만, 차마 바라보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하다. 일본군이 저지른 이 참혹한 만행은 필설로 표현하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잔혹하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인 주인공은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살아남아서 온몸으로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했다. 일제의 만행은 지금도 진행중이고, 일본은 한국의 성노예 피해자에게 사과를 하지 않는다.
일본은 자기 나라 국민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일본군이 저지른 이 잔혹하고 악귀의 행위를 은폐하는 것만으로도 일본이라는 나라는 천벌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대로 일본의 만행을 더 널리 알리고, 성노예 피해자를 보호하고, 보살펴야 한다. 

세균
지구에서 가장 하등한 동물로 취급되는 세균. 어느 날 이 세균을 믿기 힘들 정도 귀하게 대접하는 이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세균을 통나무에 넣고 이런저런 실험을 자행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잊히지 않는 실험이 있다.

일본군 731부대의 만행을 그린 내용. 일본군은 세균전을 준비하기 위해 세균실험을 하는 특수부대를 만들어 조선인과 중국인을 잡아와 생체실험을 했다. 그 내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하고 참혹해서 필설로 말하기 어려울 정도다. 731부대에서만 일본군의 실험대상으로 약 1만 명의 중국인, 조선인, 러시아인, 몽골인이 죽었고, 731부대가 개발한 세균을 중국에 투하해 약 40만 명의 중국인이 세균 감염으로 죽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실험 대상으로 쓴다는 것부터, 그들이 저지른 악행은 나찌가 저지른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가스 학살보다 훨씬 더 잔혹한 행위였다. 일본은 끝내 이 전쟁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여기서 만들어진 자료는 미군이 가져갔다. 미군 역시 731부대의 만행을 알았지만, 자료를 넘겨 받는 조건으로 전쟁범죄를 문제 삼지 않았으므로, 강대국의 논리는 정의보다는 자국의 이익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도 남지 않았다
앞으로 10년 동안 긴 밤이 올 것이라는 예보가 나왔다. 밤이 상당히 길기 때문에 대통령은 모두가 긴 잠을 자야 한다고 대국민연설을 한다. 어느 날 모두가 잠든 피난소에 괴물이 나타나 사람 피를 빨아 먹는데, 그 모습을 잠들지 못한 소녀가 보게 된다.

침묵하는 대중은 권력에 잡혀 먹힌다. 권력은 낮은 밤으로 만들 정도로 강력한 힘이 있으며, 밤이 되면 모습을 바꿔 괴물이 된다. 그들은 대중의 피 - 재산은 물론 가족, 이웃, 친구, 우정, 정의, 민주주의, 연대, 우애, 윤리, 도덕, 사랑 - 를 먹고 사는 존재다. 괴물을 막으려면 대중이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서 행동하는 시민, 단결하고, 힘을 모으고, 합심해 괴물을 막겠다는 의지를 가진 대중은 괴물(권력)에 잡혀 먹히지 않는다.
우리는 여러 번 괴물에게 잡혀 먹혔던 기억이 있다. 일본 제국주의, 이승만 독재, 박정희 독재, 전두환 독재, 이명박 사기꾼, 박근혜 등 사악하거나 멍청한 권력에게 빛을 빼앗기고, 오랜 시간 잡아먹혔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대중은 깨어났고, 서로 힘을 모아 괴물을 물리쳤다. 촛불 집회가 그 생생한 기록이자 증거다. 우리는 촛불을 들어 어둠을 밝혔고, 괴물(권력)을 쫓아냈으며, 마침내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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