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The Complete Maus 합본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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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쥐
작가 : 아트 슈피겔만
출판 : 아름드리미디어

이 만화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태인이 겪은 비참한 상황을 ‘만화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아트 슈피겔만의 아버지는 폴란드에 살던 유태인으로 그의 가족, 그의 아내와 아내의 가족이 겪은 비극에 대해 구술한다. 수십명의 가족, 친척들이 모두 죽고 결국 극소수의 형제와 부부만 살아남은 가운데 노년을 미국에서 보내는 유태인의 삶에 대해서도 현실을 말하고 있다.
작가는 이 만화를 13년 동안 꾸준히 준비하며 그렸고, 이 책으로 퓰리처상과 구겐하임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그래픽노블의 역사에서도 선구자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작가 역시 전위적이고 진보적인 만화를 그리는데 앞장 선 인물이다. 이 만화의 특징을 몇 개의 주제로 분석했다. 먼저 줄거리를 요약했다.

작가의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은 폴란드에 살던 유태인으로, 부유한 집안의 여성 안나 질버베르그를 만나 결혼한다. 이후 장인의 도움으로 직물공장을 운영하며 부유하게 살다 히틀러의 나찌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폴란드군에 징집되었고, 독일군에 잡혀 전쟁포로가 되어 포로수용소에 한동안 머물다, 독일 공장의 노동자로 자원한다. 땅을 파는 노동자로 몇 달을 보낸 다음, 갑자기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탄다. 나찌는 형식적으로 전쟁포로를 석방한 다음, 독일 영토로 끌고가 학살하고 있었다. 블라덱은 근처에 사촌이 있다고 말하고, 뇌물을 주어 무사히 수용소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살던 집으로 돌아가 부모와 아내를 만난다.
하지만 나찌의 탄압은 더 심해지고, 1939년이 되면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가스실의 정체가 유태인들에게도 알려지지만 대부분의 유태인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블라덱의 처가는 부유한 집안이어서 나찌에 협조하고 있는 유태인 위원회를 매수해 탄압의 속도를 늦추고 있었지만, 결국 살던 집에서 쫓겨나 게토로 옮겨가고, 이후 진행되는 과정은 은거, 도주, 체포, 도주, 은거를 반복하면서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이어간다. 폴란드인 가운데 선량한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유태인 가족을 숨겨주었지만, 블라덱 가족은 헝가리로 국경을 넘으려다 체포된다. 나찌의 유태인 분류에 따라 블라덱의 대가족은 뿔뿔히 흩어진다. 대부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들어가서 살아남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1944년 3월에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간 블라덱은 카포(유대인 관리자)의 개인 영어교사로 차출되어 비교적 안전하고 좋은 대우를 받으며 수용소 생활을 했다. 그 다음에는 함석공으로, 제화공으로 옮겨가며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다시 공사장 노동자로 돌아가서 극심한 고생을 하게 되고,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스실을 직접 보고 기계 설비 일부를 해체한 목격자가 된다. 이후 소련이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까이 접근하자 독일군은 유태인을 독일 국내로 끌고가기 위해 열차에 태워 오랜 시간 이동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유태인이 사망한다. 블라덱은 끝까지 살아남았고, 다카우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다 티푸스에 감염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지만, 포로교환으로 스위스까지 가는 기차를 타게 되고, 이곳에서도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마침내 독일군이 패퇴하고 미군이 들어오면서 살아남는다. 이후 블라덱은 나찌에게 잡혀갈 때 살고 있었던 소스노비에츠로 돌아가 기적처럼 아내 아냐를 만난다.

  1. 1. 쥐
작가는 유태인을 쥐로 그렸다. 유태인을 쥐로 설정한 것은 작가의 오리지널이 아니라, 이미 히틀러가 집권하던 시기, 나찌는 유태인을 쥐로 묘사하고 있었다. 나찌가 유태인을 쥐로 묘사할 때, 독일 국민을 비롯한 모든 유럽의 비유대인은 왜 반발하지 않았을까. 유태인을 차별하고, 학대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결코 모르지 않았을텐데, 극우 나찌가 권력을 잡고, 유태인을 열등한 민족으로 폄하하고, 절멸해야 할 대상으로 찍었을 때, 비유태인들이 눈감고, 외면하고, 모른 척 한 까닭은 무엇일까.
작가는 1938년 상황부터 시작한다. 작가의 아버지가 결혼을 앞두고 만났던 여성과의 갈등과 새로운 여성과의 만남, 결혼부터. 작가의 부모는 첫째 아이를 출산하고 겪는 산후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체코로 휴양을 떠나지만, 그곳에서 나찌의 철십자 깃발을 본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이미 유태인들이 재산을 빼앗기고, 학살당하거나 추방되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히틀러는 극렬한 반공주의자이자 반유태주의자였다. 히틀러의 가계에서 유태인의 피가 흐른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거나 히틀러는 아리안 인종의 우수성을 드러내려 했고, 유태인이 열등한 인종이며, 절멸시켜야 할 인종이라며 혐오했다. 이런 극단적 혐오의 감정이 유태인을 쥐로 표현하게 된 배경이다.
그렇다면, 유태인은 왜 히틀러에게 혐오의 대상이 된 걸까. 히틀러는 권력을 차지하고, 권력을 최대로 활용하기 위해 유태인을 혐오의 대상으로 점찍었을 뿐이다. 이미 유태인은 유럽 전체에서 다른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다.
작가가 유태인을 쥐로 묘사한 것은 히틀러의 나찌가 유태인을 묘사한 것에 대한 반발의도와 자기비하를 통한 동정얻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아니, 작가가 의도적이지 않았다 해도 독일군을 고양이로 그린 것에서 그런 의도는 분명해진다. 애초 쥐와 고양이를 비롯해 동물의 의인화 작업은 진보적 만화가들의 주제 가운데 하나였고, 아트 슈피겔만은 흑인과 백인의 관계를 먼저 염두에 두었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흑인도, 백인도 아니어서 흑백 인종차별에 관해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를 깨닫고, 자신의 정체성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유태인이고, 부모가 아우슈비츠 생존자라는 것은 곧바로 유태인과 독일군의 관계로 이어졌고, 처음 몇 페이지짜리 만화로 시작해 장편 그래픽노블이 될 때까지 무려 13년의 시간을 이 만화에 투자했다. 쥐와 고양이는 그 자체로 천적이며, 약한 자와 강한 자를 상징하고, 전복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톰과 제리'에서 고양이 톰은 분명 강자이면서도 늘 약자인 쥐 제리에게 당한다. '심슨 가족'에서 호머의 가족이 보는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이치와 스크래치는 '톰과 제리'의 패러디이면서, 더 과장하고 왜곡된 형태의 '톰과 제리'를 보여준다. 이것은 단순한 '톰과 제리'의 패러디가 아니라, 기존의 질서에서 유통되고 있는 '톰과 제리'의 상징과 이미지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짓인가를 비트는 패러디다.
유태인을 쥐로 표현하고, 독일군은 고양이, 폴란드인은 돼지, 쏘련은 곰 등 민족마다 다른 동물의 모습으로 표현하는데, 쥐는 인간이 혐오하는 동물이라는 점에서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유태인이 유럽(은 물론 아시아에서도)에서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 찍혀 탄압을 받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인간에게 백해무익하다는 쥐를 유태인의 상징으로 그린 것은 작가의 탁월하면서 필연적 선택이었다.
하지만 유태인이 쥐로 그려진 것은 전쟁(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의 상황이었고, 이후 유태인은 다른 민족인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상황이 역전되어 고양이로 변한다.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 유태인의 이중성과 아이러니를 드러낼 수 없다.

2.유태인
유태인의 존재는 역사적으로 아이러니다. 그들이 믿는 신이 세계의 절반 가까이 지배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그들은 그 신의 아들이라는 인물을 부정한다. 유태인이 믿는 신과 기독교의 구교, 신교, 이슬람교의 신은 동일하지만, 신의 아들인 예수를 부정하는 것은 오로지 유태교 뿐이다. 유태인들은 유일신 야훼를 믿으며, 자기 민족만이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믿는 선민사상으로 똘똘 뭉쳐 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이 자신과 다른 모든 민족과 인종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기초가 된다.
2천년 전부터 기독교가 로마에서 국교로 인정받고, 로마의 힘을 따라 유럽 전체로 퍼져나갈 때도 유태인은 자신이 믿는 신과 구분했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신'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예수를 성삼위일체로 받아들인 기독교는 유태인들의 배타적 태도와 행위가 거슬렸고, 그들의 선민의식이 아니꼬왔다. 유태인은 역사 속에서 소수집단이었으며, 한때 자신의 국가를 세우기도 했으나 외세의 침략으로 뿔뿔이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이들의 디아스포라가 끝난 것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였으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나라를 이뤄 살고 있던 지역을 침탈해 '이스라엘'을 세웠다. 
종교적으로 유일신을 숭배하고,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고, 강한 선민의식을 가진 집단이었던 유태인은 수천 년에 걸친 디아스포라를 통해 유럽 전역은 물론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이들은 소수민족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살며, 정상적인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금융업을 개발하고, 유통업 등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유태인이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민족이라는 말은, 그들이 대대로 교육-집단윤리와 종교-을 통해 자녀를 훈육하고, 소수민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방법을 어릴 때부터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들이 혹독한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유일신 야훼의 존재와 선민의식이 바탕에 있기 때문이고, 그런 자기중심의 세계관이 또한 다른 민족들에게 탄압당하는 원인으로 작용했으니, 유태인의 존재 자체가 아이러니인 것이다.
봉건시대 이전까지의 유태인은 다른 인종-영국, 독일, 프랑스 등을 만드는 앵글로색슨, 게르만, 노르만, 이베리안, 켈트, 스코트 등 유럽의 주류 인종-에 비해 소수인종이었으며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디아스포라 민족이어서 여러 지역에 흩어져 생존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류 인종들에게 혐오와 조롱의 대상이었으며, 차별당하고 억압당하는 존재들이었다. 유태인 뿐아니라 '집시'를 비롯해 소수 유랑민족들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존재하고, 이들 소수민족, 인종은 늘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경제체제가 봉건제에서 자본제로 이행하고, 정치적으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하는 17세기 이후 유태인은 소수민족이지만 부와 권력을 획득할 기회가 많아졌고,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갖는 다수민족, 인종은 이런 유태인을 보며 시기, 질투를 하게 된다. 
이념적으로도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유태인 가운데 뚜렷하게 드러나는 인물이 있어 유태인을 탄압하는 근거로 작용했다. 유럽의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유태인이었던 것은 분명하고, 특히 러시아 혁명에서 공산주의자 그룹의 지도자들 가운데 많은 수-약4%-가 유태인이었다고 추정한다. 
히틀러가 유태인을 극렬하게 혐오하고, 그들을 절멸하려했던 가장 큰 이유로 이념 전쟁을 들기도 한다. 히틀러는 국가사회주의자로, 공산주의와 대척점에 서 있었고, 독일에서 공산주의자는 가장 먼저 제거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고, 레닌이 권력을 잡았을 때, 볼쉐비키 그룹에는 유태인 공산주의자들이 많았고,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전쟁 중에 러시아 혁명 소식을 듣는다. 전쟁에서 진 독일은 승전국들이 요구하는 과도한 전쟁비용에 고통당하고 있었고, 히틀러는 전후 불안과 경제적 빈곤, 강대국의 억압 등을 극복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내세웠고, 이것은 곧 파시즘의 대두와 소수인종의 탄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받아들여, 반공, 순혈주의 정책을 강하게 밀고 나갔고, 소수인종, 민족인 유태인과 집시 등은 절멸의 위기를 맞게 된다.

3.생존자
히틀러가 유태인을 절멸하려는 이유로 '인종'을 언급했지만, 그것은 겉으로 내세운 명분일 뿐이고, 실제로는 독일이 점령한 지역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성공한 부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유태인 절멸을 통해 세 가지 이익을 보게 되는데, 하나는 아리안 인종의 우수성을 내세워 독일국민을 단일하게 통합할 수 있는 명분을 세우고, 유태인을 공격함으로써 파시즘의 정당성을 획득하며, 히틀러에 대한 지지, 충성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유태인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다. 유태인은 공장, 상가, 기업을 소유하고, 보석 유통 등 부가가치가 높은 상업을 하고 있었다. 유태인은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자신이 살던 집에서 쫓겨났고, 그들의 재산을 독일정부가 몰수했다. 그들이 게토로 이동하거나, 수용소에 갇힐 때까지 가지고 있던 짐은 대부분 압수되었고, 몸에 지닌 모든 장신구, 시계, 반지, 목걸이, 보석 등도 몰수당했다. 유태인의 집에는 값비싼 미술작품을 비롯해 금고에는 돈, 금괴 등도 많았기에 나찌는 유태인의 집에서 압수한 이런 물건을 극소수만 아는 창고를 마련해 숨겨두었다. 전쟁 막바지에 미군이 히틀러의 요새를 점령해서 발견한 물건들 가운데 미국으로 반출된 것이 매우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히틀러가 유태인을 절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학살을 멈추지 않은 것은, 전쟁 막바지로 가면서 자포자기한 측면도 있고, 학살의 과정이 시스템으로 정착했기 때문이다. 유태인을 죽여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많았다. 부자 유태인 가족이 사라지면 그들의 재산이 모두 누군가에게로 옮겨갔고, 그렇게 부자가 된 사람도 많았다. 비유태인이 유태인을 증오할 이유는 수백, 수천가지도 더 되었고, 유태인은 결코 정직하거나 선한 사마리아인도 아니었으며, 그들의 존재, 말과 행동, 신념, 종교가 증오를 부르는 원인의 일부였다. 그리고 시대상황은 유태인에게 매우 불리하게 움직였고, 많은 유태인이 가스실로 들어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유태인은 말한다. 왜 우리가 증오의 대상이 되고, 학살당해야 하는가라고. 아우슈비츠에서 죽었거나, 살아남은 유태인은 범죄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시대의 광기에 희생된 사람들일 뿐이다. 지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이후 어떤 삶을 살아갈까.
이 작품에서도 드러나지만, 작가의 어머니는 1968년에 자살한다. 작가의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지만, 살아 있을 때는 주위 사람들이 참기 어려울 정도의 강박증세를 보인다. 작가의 아버지처럼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수용소의 경험을 책으로 남긴 프리모 레비의 증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수용소에서는 인간의 존엄을 유지할 수 없었다. 프리모 레비도 결국 자살하는데, 불과(?) 10개월의 수용소 경험이 한 인간의 존재 전체를 뒤흔들고, 다시는 과거의 '존엄성을 유지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유태인 개개인이 겪은 학살의 트라우마는 집단화한다. 융이 말한 것처럼, 집단무의식은 민족의 염원으로 드러나고, 다시는 같은 참혹함을 당할 수 없다는 두려움과 공포와 강렬한 의지가 시오니즘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유태인의 선민의식이 결합한 시오니즘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고, 물리적으로 소수그룹인 유태인은 가장 강력한 집단인 미국을 등에 업기로 결정한다.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자에게 자신을 투사하면, 자신도 가장 강하다는 착각을 하게 되고, 약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한다. 우리가 약했기 때문에 당했으니, 약한 자는 당해도 싸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가하는 폭력은 아우슈비츠에서의 트라우마가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며, 집단무의식의 발현이다. 이스라엘은 제국주의 미국을 등에 업고 자신이 유럽에서 당한 따돌림과 폭력을 같은 소수민족인 팔레스타인을 향해 퍼붓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만화의 형식
이 작품은 한 페이지에 여덟 칸을 기본으로 하고, 칸의 변형을 통해 이야기의 흐름을 긴장감 있게 전달하고 있다. 칸 하나의 밀도는 매우 높아서, 그림과 글이 꽉 차 있다. 만화에 여백이 없거나 드문 것은 작가가 하고픈 이야기가 많거나, 스토리에서 여유를 부릴 만한 심리적 편안함이 없다는 걸 반증하고 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칸에 글과 그림이 빼곡하다. 대사와 지문은 너무 많아서 만화를 읽는 것이 아니라, 두꺼운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든다. 작가가 선택한 주제와 아버지의 과거 경험, 현재 아버지와의 관계 등이 작가의 작품에 생생하게 녹아들기 때문에 그만큼 해야 할 말, 하고픈 말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아버지의 증언을 토대로 그림 작업을 했지만, 그림으로 묘사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증언이나 적은 기록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작가가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13년간 작업했다는 말은 결코 과장도 아니고, 엄살도 아니다. 작가는 사실에 가까운 묘사를 위해 수많은 자료를 수집해 분석하고, 확인했다. 그 과정에서 동물의 의인화를 제외하고 시대 배경-건축, 의상 등-을 최대한 당대에 가깝게 재현했다. 책 1권 90쪽에 유태인들이 디엔스트 스타디움에 모이는 장면이 있는데, 반페이지 칸에 수백 명의 유태인을 꼼꼼하게 그리고 있다. 스타디움 앞 광장에 동상과 전차, 자동차까지 배치해 현실감을 높였고, 계속 진행하는 장면들에서도 군중 씬에서 유태인들이 입은 옷과 게쉬타포가 입은 군복에서도 작가의 고증은 꼼꼼하게 드러난다.
무엇보다 작가는 스크린톤을 쓰지 않고 모든 선을 직접 펜으로 그렸는데, 당연하면서도 신선하다. 스크린톤은 일본과 한국만화에서 쓰이는 특징인데, 그래픽노블에서는 스크린톤이 거의 쓰이지 않는다. 스크린톤은 일본에서 개발되어 주로 '공장만화'에 쓰이다 한국으로 넘어왔고, 한국에서도 만화가가 여러 명의 보조 인력을 데리고 일하면서 대량으로 만화를 생산하는 체제를 갖춘 곳에서 주로 쓰였다. 
작가가 인종에 따라 동물로 형상화하면서 발생한 문제(?) - 작가가 분명 의도한 것이라고 보는데 - 는 '개인'보다는 집단의 문제를 드러내려는 의도로 보인다. 유태인을 '쥐'로 표현하면서, 모든 유태인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즉, 개인의 '퍼스낼리티'는 이 만화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돼지로 표현한 폴란드인이나, 고양이로 표현한 독일인처럼, 그들이 인종대 인종으로써 학살하고, 학살당하는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려 했다. 집단 학살 앞에서 개인의 존재는 무의미하며, 생존자는 오로지 '우연'과 '행운'에 의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작가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현재의 아버지와 과거의 아버지를 번갈아 만나는 방식이다. 여든이 넘어 건강이 좋지 않은 아버지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수용소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고,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아도, 아내의 자살이 자기로 인해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아들인 작가에게도 털어놓지 않는 민감한 문제인데, 현재의 아버지가 함께 살고 있는 말라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말라 역시 아우슈비츠 생존자로, 오래 전부터 잘 알던 사이였다. 블라덱의 아내(작가의 어머니) 안나가 자살하면서 아무런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묵시적으로 남편을 비난하는 것으로 읽힌다. 안나 역시 수용소에서의 트라우마가 극심해서, 그 결과 자살을 결심한 것으로 보이지만, 남편 블라덱의 행동이 수용소 이전과 이후에 완전히 달라진 것을 볼 때, 안나는 달라진 남편의 말과 행동을 견디기 어려웠고,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의 남편의 달라진 행동으로 인한 불안과 실망, 좌절이 겹쳐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아버지를 만나며 작가는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이야기는 아버지의 발화로 과거로 돌아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오다가 작가가 개입하면서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현재에서 발생하는 사고, 사건은 과거의 사건과 연결되고, 현재의 '괴팍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과거에서 찾는다. 이 작품 속에서 아버지는 이야기를 끝내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사망하는데, 작가는 아버지가 회상한 과거를 녹음했고, 녹음을 들으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과거는 아버지의 기억에서 소환되거나, 아버지의 발화를 통해 기록되어 작가의 작품으로 옮겨간다. 

이 만화는 무엇을 주장하려고 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지만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충분하게 전하고 있다.
독일군-나찌-의 잔학함에 대해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공분을 느끼게 하고, 유태인들의 무저항에 대해서도 어리석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문제는, 아트 슈피겔만처럼 별 ‘악의없이’ 자신의 가족사를 그리는 사람마져도 유태인의 전략에 일조를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태인들은 조직적으로 ‘유태인 학살’에 대해 끊임없이 여론을 환기하고 재생산하고 있다. 그 자신이 유태인의 피가 흐르는 스티븐 스필버그는 유태인의 수난사에 대해 흥행에 성공하는 영화를 만듦으로써 돕고 있고,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분야에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제기하는 예술가를 지원하면서 재생산하고 있다.
유태인 학살을 거론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역사는 잊어서는 안된다. 인종을 말살하려는 인종우월주의자가 다시 나타난다면 인류는 존재의 의의마져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해도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뭔가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유태인은 소수라고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실제의 힘은 매우 강력하다. 그것은 그들이 2천년동안 떠돌아 다니면서 배운 지혜의 결과겠지만, 그들의 생존을 위해 예전의 자신들과 같은 다른 민족을 말살하는 행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찌들에 의해 독가스 등으로 학살 당한 유태인의 고통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면서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그보다 더 잔학한 방법으로 살해하는 것은 어떻게 변명할 것인지 궁금하다.
‘유태인’의 문제는 한 종족의 문제가 아닌, 세계 평화와 연결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우익 강경파에 의해 주도되고 있고, 미국의 이해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방향으로 중동의 중심에서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유태인이 자기 스스로를 불쌍하다고 소리치는 것도 이제 귀가 아플 정도가 되었고,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유태인 학살에 대한 고발 장면-영화, 소설, 만화, 다큐멘터리 등-도 신물이 날 지경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촘스키와 같은 동족-유태인-이 이스라엘의 파시즘화를 노골적으로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진정한 지성인이라면 자기 종족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도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유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 내부에서도 ‘친일매국노’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오히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핍박받은 상황을 충분히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유태인들처럼 집요하면서도 사실적인 증언과 복원의 결과물들이 훨씬 더 많이 나와야 한다.
고통받은 사람들의 증언이 영화, 만화, 소설,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져야 하고, 그런 목소리가 사회에 크게 울려야 한다. 아직도 친일매국노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반민족행위자들이 출세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소위 진보를 말하는 자들이거나, 양심있는 자들은 ‘유태인’처럼 우리가 당한 수난의 역사를 우물처럼 자꾸 퍼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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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슬 - 제주4·3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
김금숙, 오멸 원작 / 서해문집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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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지슬
작가 : 김금숙
출판 : 서해문집

이 작품은 오멸 감독의 작품인 영화 '지슬 2'의 내용을 그래픽노블로 창작한 것이다. 이미 영화를 봤기 때문에 줄거리는 알고 있지만, 영화와 만화는 느낌이 다르다.
먼저, 김금숙의 그림은 거친 붓을 사용한 형식미에서 영화의 분위기를 강렬하게 강조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투쟁 가운데서 죄 없는 제주의 가난한 백성들이 총칼로 잔인하게 학살당하는 과정이 김금숙의 그림을 통해 필연적으로 융합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라 하기 어렵다.
예전에 어린이 잡지 월간 '개똥이네 놀이터'에 '꼬갱이'를 연재하는 것을 보긴 했지만, 그 그림과 이 작품의 그림이 같은 작가의 것인줄은 몰랐다.
김금숙과 같은 작가가 한국 만화계에 등장한 것은 만화계의 축복이자, 독자에게는 가뭄의 단비처럼 반갑고도 즐거운 소식이다.
작가 김금숙은 전라남도 고흥 출생인데, '지슬'의 '작가의 말'에서도 언급했듯이 그의 집안 역시 한국 전쟁의 발톱이 할퀴고 지나간 상처가 깊은 듯 하다. 아직까지는 작가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내진 않고 있는 듯 한데, 그의 작품 가운데 '아버지의 노래'가 자전적 이야기지만, 한국전쟁의 참담함을 본격 다루고 있지는 않은 듯 하다.
앞으로 작가의 집안 이야기가 창작 과정을 거쳐 나오게 되면, 아마도 '지슬'과 같은 무겁지만 아름다운 작품이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지슬은 제주도 방언으로 '감자'를 뜻한다. 1947년 4.3항쟁이 시작되자 이승만 정권은 군대와 서북청년단을 제주도로 보내 이승만 정권에 저항하는 제주도민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 만화(원작 영화)는 정부군과 서북청년단이 토벌대로 나서면서 벌어지는 학살을 다루고 있다. 해안에서 5km 안쪽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빨갱이'로 단정하고 사살하겠다는 것이 이승만 정권의 군대와 서북청년단의 포고 내용이었다.
중산간에 사는 주민들은 군대와 서북청년단을 피해 산간 깊숙이 숨어든다. 마을에 주둔한 토벌대는 주민들이 남기고 떠난 돼지를 잡고, 산으로 올라가던 젊은 여성을 잡아서 끌고온다. 토벌대 내부에서도 계급에 따라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르다. 나이어린 신병들은 토벌대의 잔혹함에 진저리를 치지만, 제주도민을 살육하는데 재미를 붙인 자들도 있다. 토벌대에 속한 두 명의 어린 병사들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들은 고참들에게 폭행을 당하면서도 자신들이 괴물이 되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주민을 학살하는 토벌대에서 탈영한 군인은 주민과 함께 마을주민들이 숨어 있는 동굴로 들어온다. 탈영하면서 총을 맞은 군인을 치료하는 주민들.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이 토벌대에 잡히고, 그는 주민들이 숨어 있는 동굴 위치를 알려준다. 자기가 살려고 주민들을 팔아넘기는데, 결국 주민의 손에 죽는다.
토벌대는 동굴을 찾아 주민들을 죽이려는데, 주민들은 말린 고추를 태워 연기를 피우지만 토벌대는 동굴 안을 향해 총을 난사한다. 그래도 주민들 일부는 살아서 동굴을 탈출하고, 토벌대 내부에서는 살육을 즐기던 김상사를 신병이 가마솥에 가둬 태워죽인다. 동굴 안에서는 임신을 한 애기엄마가 혼자 남아 아기를 출산한다. 탈출했던 주민들도 결국 나중에 체포되어 모두 토벌대에게 사살당한다.
이 만화는 영화 '지슬'과 깊은 관련이 있으니 가능하면 영화를 꼭 보기를 추천한다. 영화와 이 그래픽노블의 다른 점은, 그래픽노블이 가진 힘이기도 하지만, 상상과 이미지의 확산에 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상상의 장면들과 이미지는 제주4.3의 고통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원작 소설이나 원작 영화를 그래픽노블로 재창작하는 것은 어떤 장점과 단점이 있을까. 소설을 만화로 재창작하는 것은 활자의 상상력을 구체화, 사실화한다는 점에서 현실성을 높이고, 캐릭터와 배경, 사물을 익숙한 이미지로 만나게 되어, 독자는 활자를 읽고 상상하던 것을 시각으로 확인하게 된다. 이는 활자만으로 된 내용을 보다 쉽고, 재미있게 접근한다는 점에서 장점이지만, 독자와 그래픽노블 작가의 해석이 다를 때는 오히려 독자의 상상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에 실망할 가능성도 있다.
영화는 약 2시간 동안, 초당 24프레임으로 끊임 없이 상영된다. 이것을 5초당 1프레임으로만 바꿔도 1분이면 12프레임, 1시간이면 720프레임, 2시간이면 1440프레임이 된다. 만화는 한 페이지에 1-8컷 정도를 나누는데, 평균 5컷으로 계산하면 300쪽 만화는 1500컷으로 연출할 수 있다. 영화의 프레임과 만화의 컷을 이렇게 비슷하게 만들어 놓고 보면, 영화의 내용은 거의 다 담을 수 있겠지만, 만화는 정지된 장면들의 모음이기 때문에 영화보다는 세부 묘사와 동작의 섬세함을 표현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그래픽노블이 영화보다 좋은 점 몇 가지가 있다. 만화는 영화에서 중요하게 보이는 장면을 이미지화 할 수 있다. 영화는 끊임 없이 장면이 흘러가지만, 만화는 수 많은 장면들 가운데, 중요한 장면을 이미지화하면서, 한컷, 한컷의 상징성을 만들어간다. 
이 작품의 표지는 영화포스터와 같은 이미지로 보이지만, 영화포스터의 사실적 이미지와는 또다른 울림을 준다. 군인이 아무 죄 없는 주민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상황은 민족의 분단과 분열, 이념으로 갈린 내전과 학살을 상징한다.
영화는 사실에 가까운 표현을 통해 그때의 비극 상황을 재연하지만, 만화는 생략과 과장을 통해 영화에서 볼 수 없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픽노블 작가의 그림은 그 자체로 회화 작품이고, 폭력과 공포, 죽음을 드러내는 거친 붓선과 먹의 농담으로 제주도 민중이 겪는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다. 제주4.3을 펜선이 아닌, 붓과 먹으로 그렸다는 것도 이 작품이 주목받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수묵화는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회화였으며, 그림은 물론 글도 붓과 먹으로 썼다. 화가들은 일상의 풍경을 담은 세속화를 많이 남겼고, 조선의 민중은 수묵화를 퍽 친근하게 여기고 있다. 수묵화는 조선(한국) 민중에게 친숙하고 낯익은 표현도구이며, 우리의 정서와 감성을 오롯이 드러내는 수단이기도 하다. 
제주4.3의 희생자 대부분은 제주 민중이고, 이들은 이념 전쟁에서 억울하고 참혹하게 죽는다. 제주 민중을 수만 명 학살한 서북청년단과 경찰, 군인은 공산주의자를 제거한다는 명분이었지만, 북한에서 쫓겨내려 온 기독교도들 가운데 극우주의자들이 복수를 위해 결성한 단체-서북청년단-를 통해 이념적 복수를 제주 민중을 향해 저지른 것이다.
작가 김금숙은 이들 우익이 저지른 학살 만행의 참혹함을 수묵화로 표현하고, 그 표현 기법은 그래픽노블에서 사례를 찾기 어려운 뛰어난 방식이다. 수묵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중국에서도 역사적 사건을 그린 그래픽노블이 많겠지만, 이렇게 내용은 참혹해도 형식은 아름다운 수묵화 그래픽노블은 찾아보기 어렵다.
참혹한 내용을 아름다운 형식으로 담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희생자와 그 가족인 제주민중의 처지에서 보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고, 그것을 그래픽노블이라는 이미지 작업을 통해 기억하는 것을 기껍게 생각할 것이다. 
참혹한 짓을 저지른 것은 가해자인 서북청년단, 경찰, 군인이고, 제주민중은 피해자였다. 참혹함과 반인륜, 반지성의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무엇보다 희생자와 그 가족의 아픔을 절절하게 묘사하고 기록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면, 작가 김금숙의 작품은 형식미에 있어 가장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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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도 한때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심흥아 외 지음 / 미메시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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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봄꽃도 한 때
작가 : 심흥아, 서윤아, 박문영, 이지나, 노영미
출판 : 미메시스

심흥아 작가를 비롯해 여러 명의 작가들이 한국 단편소설을 만화로 재해석한 작품집이다. 이 책의 소개 내용을 보자.

인간의 청춘의 면면들은 여전히 다른 모습으로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 반복된다는 것을 나타내 보자는 것이 이 작품집의 최초의 아이디어이다. 손창섭의 「비오는 날」,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동인의 「배따라기」, 박태원의 「피로」 그리고 윤동주의 「병원」, 현대 문학의 기점이 되었던 이 작품들의 심상을 다섯 명의 만화가들이 현재의 시점에 맞춰 단편 만화로 엮었다.

원작을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현대적 시점에서 재해석 한 것이다. 즉 만화 작가의 독창적인 창작과 상상력이 최대한 동원되었다는 뜻이다.
이 작품집의 작가들은 모두 좋은 작품을 보여주고 있지만, 역시 심흥아 작가의 작품이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전작인 '우리, 선화'와 '카페 그램' 등에서 보여 준 그림이 주로 펜선 위주였다면, 이 작품에서는 붓선으로 그림의 선을 바꿨다.
붓선이 보여주는 부드러운 질감은 예전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멋과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림이 한층 성숙한 느낌이 들고, 작품을 재해석해서 풀어나가는 이야기 역시 담담하면서도 깔끔하고, 차가우면서도 여운이 있는 느낌을 준다.

나는 미혼 여성이고, 직장에 다닌다. 엄마는 전화해서 선을 보라고 재촉하지만, 나는 결혼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연립주택 이층에 사는 나는, 비 오는 날, 바로 앞 구멍가게에 생수를 사러 들렀다가 가게를 보는 남자를 본다. 그 남자는 남루하고 굽은 어깨를 하고 있고, 늙은 어머니와 둘이 살고 있다. 늘 무언가 노트에 쓰고 있는 남자는 우울해 보인다.
여자는 대기업 다니는 남자를 소개받아 데이트를 하고, 구멍가게 할머니와 친해져 김치도 얻어 먹고, 자연스럽게 우울해 보이는 남자와 인사를 나눈다. 할머니가 혼자 하는 넋두리를 들으며, 남자가 결혼할 생각 없이 글만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데이트 한 남자와 자신의 빌라에서 섹스를 한 나는 이사를 하면서 부산으로 간다고 거짓말 한다. 나는 사랑하지는 않지만 조건이 좋은, 소개 받은 남자와 결혼하고, 구멍가게 남자는 그해 겨울이 지나도록 무언가를 쓴다.
우연히 서점에서 구멍가게 남자의 이름이 적힌 소설책을 발견한 나는 오랜만에 구멍가게를 찾아가지만 가게는 비어 있고, 할머니와 남자는 어디로 갔는지 이웃도 모른다고 한다. 나는 가게를 떠나면서, 지난 여름, 할머니와 남자와 셋이 가게 앞 평상에 앉아 수박 먹던 추억을 떠올린다.

손창섭의 단편 '비 오는 날'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6. 25 당시, 임시 수도 부산에 피난 온 대학생 원구는 친구 동욱의 집에 가 본 뒤부터, 비가 내리는 날이면 그들 남매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무겁다.
동욱은 누이동생 동옥과 1. 4 후퇴 때 월남하여 살고 있다. 동욱은 밥보다 술을 더 좋아한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형편으로 동옥이가 초상화를 그려서 그나마 해결하고 있는 형편이다. 동옥은 감수성이 예민한 여자로 소아마비로 왼쪽 다리를 절고 있다. 동욱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착실한 교인이며 목사 지망생이었다. 그러나 6. 25 전쟁이 그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고 말았다.
원구를 처음 만났을 때 적대감을 보이던 동옥은 만남이 거듭될수록 점차 태도가 부드러워진다. 동욱은 원구에게 동옥과 결혼하기를 권유한다. 동욱 남매가 살고 있는 집은 그들의 비참한 생활만큼 황폐한 판잣집이었다. 비가 갠 어느 날 리어카에 잡화를 벌여 놓은 원구에게 동욱이 찾아와서, 통역 장교 모집에 응시하려다 수속이 복잡하여 그만두었다고 한다. 며칠 후, 원구가 동욱의 집에 찾아갔으나 동옥은 주인 노파에게 빌려준 돈을 떼여 그녀의 얼굴에서 자조적인 웃음밖엔 발견할 수 없었다.
다시 며칠 후, 동욱의 집을 찾아간 원구를 맞는 사람은 동욱 남매가 아닌 낯선 사내였다. 그 사내는 동욱은 외출한 채 소식이 없고, 세 들어 살던 집마저 주인이 몰래 팔고 도망가고 동옥이도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동옥이는 얼굴이 반반하여 어디 가 몸을 판들 굶기야 하겠느냐는 사내의 말소리를 등지며, 원구는 자기가 동옥을 팔아먹었다는 자책감에 빠진다.

원작에서 주인공 원구가 느끼는 감정은 죄책감이다. 친구 동욱이 자기 동생 동옥과 결혼하기를 권유했을 때, 원구는 탐탁치 않았다. 동욱과 동옥은 말하자면 '삼팔따라지'였고, 뿌리가 없는 남매와 엮이면, 자신의 처지도 지금 한심한데, 더 희망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더구나 동옥은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절고 있으니, 몸까지 성치 않은 여자와 혼인하는 것은 여러모로 삶이 고단하고 힘들 거라고 미루어 짐작한 것이다.
심흥아의 만화에서 주인공 '나' 역시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다. 집앞 구멍가게의 남자는 허우대가 멀쩡하지만 백수로 지내며 희망 없는 글쓰기나 하고 있고, 늙은 어머니를 모시며 산다. 허름한 구멍가게는 손님도 적고, 남자에게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구멍가게 남자에게 마음이 있지만, 현실의 삶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이어서, '나'는 소개로 만난 남자와 길게 사귀지도 않고 결혼한다. 그 남자의 '조건'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원구'는 동옥이와 혼인을 할 생각이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여자가 있거나, 뚜렷한 미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처지도 동욱 남매와 그리 다를 것이 없지만, 원구의 내면에는 동욱 남매를 깔보는 이기심이 있고, 이것이 동옥의 비참한 삶을 떠올리면서 자책감, 죄책감을 만들게 된다.
원작의 '원구'나 심흥아 작가의 작품에서 '나'와 같은 인물을 비난할 수는 없다. 세상은 냉정하고, 자신의 삶은 스스로 책임져야 하며, 지금의 처지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는 것은 본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주위 사람의 비판이나 비난에 앞서, 자신의 내면에서 양심의 가책, 죄책감, 부끄러운 감정 등이 먼저 올라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 아닐까.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과 태도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을테니까.
대개의 경우, 자신의 불편한 마음, 죄책감을 외면하고 합리화하는 방법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스스로를 비난하는 것은 괴롭기 때문에, 상대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원작의 주인공이나 심흥아의 작품 속 '나'는 그런 불편한 마음을 감수한다. 그것까지 자신의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심흥아 작가의 작품을 제외하고, 다른 작품들도 나쁘진 않았지만 '형식미'에서 아쉬움이 많았다. 작가주의 작품들이 빼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형식미'라고 생각하는데, 스토리나 구성, 내용 등이 아무리 좋아도, 그림 자체, 그림이 보여주는 형식성, 그림으로 표현되는 구성, 만화 한 컷, 한 컷이 드러내는 뚜렷한 상징성 등이 부족하다면, 작가주의 작품으로는 격이 떨어진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 책 '봄꽃도 한 때'를 구입한 동기는 심흥아 작가의 작품 때문이었다. 그만큼, 한 작가의 작품성은, 다른 여러 요소들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심흥아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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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1
마영신 지음 / 송송책방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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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펜 프롤레타리아, 욕망의 리얼리즘
개인의 욕망이 어떻게 발현하는가를 들여다보면, 좁게는 개인을 둘러싼 좁은 영역에서 발생하는 낮은 차원에서 사회의 구조를 아우르는 거대한 관계망까지 영향을 끼치는 폭넓은 스펙트럼이 있다. 권력을 추구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사회의 구조를 바꾸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사회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과 개인의 욕망이 일치할 때, 그것을 ‘사회적 성공’과 ‘개인의 입신양명’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보편적 욕망은 자신이 놓인 삶의 물적 토대에 근거하며, 욕망의 크기도 개인의 환경에 비례한다. 욕망의 진화 역시 사회의 구조적 선택압을 받게 되며, 구조는 마치 거대한 계단처럼 개인의 욕망을 가로막는다. 욕망은 변증법적으로 진화하며, 질적 변화를 일으킬 때, 계단을 뛰어넘는다.
사람은 저마다 욕망을 지닌 채 살아간다. 대개는 ‘욕망’과 ‘희망’ 또는 ‘욕구’를 구분하지 않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객관적 조건과 거리가 먼 황당한 기대를 당연한 듯 품고 살기도 한다. 마영신의 ‘아티스트’에 등장하는 세 명의 주인공, 신득녕, 곽경수, 천종섭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중년의 남성이자 예술가로 자처하는 인물이다. 작가는 이들이 가진 욕망의 발현을 ‘권력’이라는 배경에 투사해 해부한다.
한국사회에서 40대 남성은 그 자체로 권력을 가진 존재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이 작품의 주인공들처럼 인정받지 못했거나, 중심에서 멀어져 소외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들의 존재가 ‘기득권’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주인공들은 자신이 한국사회의 기득권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가난한 예술가이며, 주변부에서 소외된 존재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계급으로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이며, 본질에서 기회주의적 속성을 가진 집단에 속해 있다. 이들이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 (한국)사회의 계급구조와 집단의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풍자와 해학을 통해 개인의 욕망을 비판하지만, 표현은 결코 말랑하지않다. 작품에서 ‘계급’, ‘모순’, ‘갈등’, ‘대립’, ‘억압’ 같은 사회과학 용어가 등장하지 않을 뿐, 개인의 욕망을 드러내는 방식과 과정, 몰락에 이르기까지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숨 쉬는 (자본주의)체제의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이루지 못한 꿈(천종섭, 곽경수)을 지닌 채 살아가는 인물과 더 높은 곳으로 오르지 못하는(신득녕) 인물이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내면에서 인지부조화의 갈등을 일으키는 초반은 이들의 본성이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난다.
지식인(인텔리겐챠)은 자신이 구축한 세계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이건 하나의 명제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확실한 것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식인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한다. 그리고 그들은 학연과 스승, 동료, 제자로 이어지는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지식을 자본화한다.
지식 자본은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의 세 가지 요소-토지, 공장, 노동력-처럼 토대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들-인텔리겐챠-의 발밑은 단단하지 않다. 지식 자본은 원래의 ‘자본’에서 파생한 것이므로, ‘자본’에 의해 운명이 결정된다. 많은 경우, 지식 자본은 ‘자본’에 복종하며, 자본의 용병으로 복무한다. 따라서 지식 자본을 보유한 인텔리겐챠는 본질적으로 기회주의적 속성을 내재하고 있기에, 이 작품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행동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경수, 득녕, 종섭은 남성 예술가 모임 ‘오락실’에서 만난 또래들이다. 각자 두 살 터울이지만 형, 동생의 위계를 지키는데, 이건 특히 한국의 병영 문화가 낳은 폐해를 드러낸다. 이들이 형, 동생으로 부르지만, 실제로 나이 먹은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이 먹어서 한심하다고 경멸할 때, 이들의 위계는 본질을 드러낸다.
세 명의 주인공이 모두 남성인 것은 작가가 남성이기 때문도 아니고, 남성 우월주의를 드러내려는 의도는 더더욱 아니다.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가의 의도는, 한국사회에서 허리에 해당하는 40대 남성 가운데서도 노동자가 아닌, 인텔리겐챠이면서 룸펜 프롤레타리아인 이들이 ‘예술가’로 자처하지만, 실제 ‘예술가’의 정체성이 있는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들은 술자리에서 요절한 젊은 가수의 작품성을 폄하하고, 인간성까지 비난하며, 죽어서 대중에게 스타 대접을 받는 것까지 질투한다. 뮤지션 천종섭은 저작권을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아무렇지 않게 신득녕에게 다른 가수의 음원을 불법으로 복사해 달라고 말한다. 이들이 보여주는 이중성은 기득권 남성의 멘탈리티를 본능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같은 ‘오락실’ 멤버 가운데 가수로 성공한 사람, 영화로 성공한 사람을 두고 실력도 없으면서 어쩌다 성공했다고 폄하하며, 조금 유명해졌다고 사람이 달라졌다고 비난한다. 이들의 비난은 근거가 없다. 그들의 일방 주장일 뿐이다. 그러면서 곽경수는 말한다. ‘우리 세 사람은 누가 잘 되면 무시하지 말고, 서로 진심으로 위하면서 살자’고. 이 대사는 이미 자기들이 무시당하는 걸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고, 누군가 성공했을 때, 서로 진심으로 위하지 않을 거라는 불안을 드러낸다. 작품의 초반에 나오는 이 대사는 세 사람의 운명이 달라질 것임을 예고한다.
작품의 발단에서 이들이 보이는 태도는 전형적인 룸펜 프롤레타리아다. 세 명 모두 일정한 수준의 고등교육을 받았고, 지식 자본을 갖추었으나 그것을 상품으로 판매하지 못하는 소외된 상태에 있으며, 그렇다고 노동시장으로 편입하려는 의지도 드러내지 않는다.
세 명 모두 가족과의 유대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득녕은 34세에 소설집을 출간한 작가지만, 집안에서 모두 득녕이 작가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가족들과 멀어졌다. 득녕이 종섭의 에세이집 출간을 적극 돕는 이유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 명이 우연히 만나 어울리며 가깝게 지내게 된 배경에는 ‘예술’을 향한 그들의 고집이 집안의 반대로 현실의 벽에 부닥쳤기 때문이며, 그 과정에서 세 명은 자발적으로 가족 단위에서 스스로를 해체한다.
가족의 범위를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면, 혈연 중심의 전통적 가족 개념에서 벗어난 이들은 ‘오락실’이라는 남성 예술가 모임에서 만나 유사 가족을 구성한다. 이들은 각자 독립 공간을 가지고 있지만, 자주 함께 모여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공통의 화제를 찾아 이야기한다. 보통의 가족도 각자의 방에서 생활하며, 밥을 먹을 때는 주방에, 텔레비전을 볼 때는 거실에 함께 모인다. 이런 생활 방식은 약간의 물리적 거리만 있을 뿐, ‘오락실’의 남성 예술가들이나 기존의 가족 형태나 크게 다르지 않다. 세 명이 나이에 따라 위계를 갖추는 것 또한 한국 병영 문화의 하나이면서, 유교 전통에 따르는 보수적 가치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보수적 위계와 유사 가족의 결합이 긍정적으로 작동한 경우가 바로 득녕이 종섭을 위해 책 출간을 적극 돕는 것으로 나타난다. 득녕은 어려서 부모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다. 아버지는 득녕을 폭행했고, 엄마는 득녕을 이기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다. 득녕은 부모와 가족의 부정적 교육에서 벗어나려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그는 종섭이 뮤지션이면서 글도 잘 쓴다는 것을 발견하고, 종섭이 글을 꾸준히 쓰도록 지원하며, 출판사를 섭외하는 등 자발적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욕망의 발현은 구체적인 물적 토대가 있을 때 가능하다. 이들이 드러내는 욕망의 크기는 자신이 이룩한 사회적 성공만큼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거대한 세계라고 그들은 착각한다. 득녕의 도움으로 책을 출판한 종섭은, 예상치 않은 성공으로 어리둥절한다. 인세나 받아서 생활비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정도였던 에세이집은 크게 성공하고, 종섭은 하루아침에 스타 작가가 된다.
종섭이 자신의 전공분야로 생각하는 음악이 아닌, 글을 써서 사회적 성공을 이루는 것은, 이들의 사회적 성공이 개인의 재능이나 철학과는 깊은 관련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 장치다. 즉, 자신을 ‘예술가’라고 말하지만, 추구하는 예술을 향한 치열한 노력이나 열정은 보이지 않고, ‘예술’을 도구나 지렛대로 활용해 사회적 욕망의 크기를 키우려는 주인공의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
종섭과 마찬가지로 경수 또한 자신이 추구하는 미술 작품으로 사회적 욕망을 발현하는 것이 아닌, ‘통합예술진흥원’에서 중간 관리자가 되어 권력과 금력을 추구하는 것에 만족한다. 득녕 역시 문학작품으로 상을 받은 이후, 잡지사를 만들어 문학계에 영향력을 키운다는 점에서 ‘작가’의 정체성을 잃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원하던 돈과 명예, 권력을 누리지만, 그들의 본질인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저급한 인식에서 질적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필연적으로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 추락하게 된다. 여기서 필연적 배경은, 주인공들이 사회적 욕망에서 배제(소외)된 상태였을 때 스스로 성찰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았던 요소들 즉, 남성 우월주의 사회, 남성가부장제의 한계, 남성 기득권의 문제, 인텔리겐챠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한계, 자신이 속한 예술 분야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인식, 성 감수성과 페미니즘의 몰이해 등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거나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자기 세계를 만들기도 전에 사회적 욕망의 토대에 올라 돈과 권력을 휘두르면서, 이들이 착각하는 것은 자신의 재능으로 이룬 성공이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 결과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들은 자기 전공이라고 여기는 예술 분야에 관해서는 지나치게 민감하고 전투적인 태도를 보인다. 종섭이 음악하는 누나의 앨범 발매 축하연에서 만난 래퍼 ‘빅 라이스’와 자존심 대결을 하는 장면이나, 경수가 미술하는 선후배 모임에서 자격지심을 드러내는 장면은 아집과 열등감이 폭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들이 생각하는 ‘전공 분야’라는 것도 처음에는 구체적 꿈으로 열정을 갖고 만들었지만, 어느 순간, 이들이 쌓아 올린 탑이 아니라, 상상의 세계에서 구축한 이미지라는 점에서, 이들은 구체적으로 실천하거나 다다를 수 없는 이상을 좇는 관념적 인간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세 명의 주인공은 두 가지 성공을 거둔다. 하나는 사회적으로 드러난 ‘명예’로 종섭은 수필집을 출간하면서 스타 작가로 대접받으며 돈과 인기를 끌어모은다. 경수는 ‘통합예술진흥원’의 중간 관리자로 일하기 위해 원장 후보자의 약점을 잡아 협박하고, 새로운 원장을 위해 개처럼 충성한다. 득녕은 마침내 문학상을 받는다.
다른 하나는, 이들이 가지고 있던 내면의 열등감과 과잉 자의식이 해소되는 것이다. 사실 이들에게는 사회적 성공보다 내적 갈등의 해소가 더 중요하지만,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 한다.
라캉은,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고 했다. 사람은 대개 상징계-이미 구성되어 있는 세계-에서 머물며, 실재계-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상징의 세계-는 다다를 수 없는 ‘균열 없는 충만한 세계’이자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한다고 했는데, 세 명의 주인공이 머물고 있는 상징계가 곧 그들의 한계이기도 하다. 즉, 이들은 룸펜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적 존재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예술’이라는 다다를 수 없는 차원을 꿈꾸다 파멸한다. 이들이 얻는 것은 지극히 작은 권력이었지만, 그것마저도 지킬 수 있는 훈련된 내면의 철학이 부재하기 때문에 주어진 권력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낯설어한다.
이들은 유사 가족이지만, 모두 자아가 성숙하지 못한 유아적 단계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보여주는 유치하고 치졸한 말과 행동은 세 명이 서로 상대방을 거울로 인식하고, 그 거울에 자신을 투영하기 때문이다. 즉, 거울에 비친 모습이 유아적이고 퇴행적인 모습일 때, 그것을 모방함으로써 불안에서 벗어난다.
세 명의 주인공은 누군가 한 사람이 우연이든, 노력에 의해서든 세속적 성공을 이루자 그것을 모방하려 한다. 이들의 모방은 질투와 시기의 모습으로도 나타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려는 욕망의 실현이다. 따라서 본능에 가까운 욕망 즉 불안을 해소하려는 의지는 이성의 세계인 도덕과 윤리의 의지보다 강렬하다. 종섭이나 경수가 보이는 타락은 이성보다 강한 의지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종섭은 득녕의 도움을 받아 출판을 하고, 스타 작가가 되지만, 인터뷰에서 득녕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득녕이라는 거울을 모방했지만, 그것을 인정하면 자신의 존재가 여전히 유아적이라는 걸 인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종섭이 획득한 권력-명예, 돈, 호감-을 주로 여성의 육체를 탐닉하는데 소모한다. 종섭은 스타 작가가 되자 곧바로 12살 차이 나는 여성을 선택하고, 음원저작권 협상을 주도하는 권력을 위임받은 다음, 어린 신인가수에게 접근해 육체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다시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을 성추행하다 발각되고, 무릎을 꿇고 사과할 때조차 권위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결정적으로, 강남에서 치과병원을 하는 의사의 딸이었던 애인에게도 결별 선언을 듣고, 종섭은 자신의 졸렬함과 비열함을 드러낸다.
경수는 추잡한 스캔들을 터뜨리겠다고 협박해 문화단체의 중간 관리자가 되지만, 방탕한 생활과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남용해 결국 자리에서 쫓겨난다. 종섭과 경수는 자신이 획득한 욕망을 지키지 못했다. 욕망은 어차피 다른 사람의 욕망이었으며, 자신이 추구하던 욕망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른 채, 욕망의 결과만을 누리려 했던 두 사람은 자신도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추락한 것이다.
득녕은 종섭과 경수와는 다른 세계를 구축한다. 그는 처음-룸펜 프롤레타리아 시절-부터 자신의 욕망을 제어할 정도의 의지를 가진 인물이었고,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필요한 도움을 주는 공동체 의식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득녕은 소설로 데뷔해 문학상을 받고 성공의 문턱에 오르지만, 그는 오히려 창작보다는 여러 사람과 함께 일을 기획하고, 추진하고,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프로듀서의 능력이 돋보이는 인물이다. 득녕은 자기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하기 때문에, 애인인 성희와 문학잡지를 만들 때부터 더 이상 창작-소설쓰기-은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기존의 시스템과는 완전히 다른, 협동조합 체제로 잡지 출판을 시작하고, 이 시도는 좋은 작품을 발굴하면서 사업으로도 성공한다. 이타적이고, 자기객관화가 뛰어나며, 헌신적인 데다 머리까지 좋은 득녕은 마침내 자기가 원하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
종섭이 인기 작가의 명맥을 유지하지만, 글쓰기나 음악 모두 아무런 결과물을 만들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면, 경수는 조직에서 쫓겨난 이후 처음 등장했던 바로 그 위치-룸펜 프롤레타리아-로 돌아가 의미 없는 나날을 보내다 미국 만화 캐릭터를 그려 인터넷으로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한다. 저작권을 위반하는 것도 알지만, 경수는 영세사업자는 건드리지 않는다면서 고집을 부린다.
이들과 다르게 득녕은 잡지사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잡지는 문학계에서 힘을 갖게 된다. 득녕이 종섭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것은 아내 성희와 나누는 대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성희는 종섭의 인터뷰에서 ‘천재작가’라는 타이틀은 지나친 표현이며, 그런 표현으로 종섭이 오히려 위축되어 작품 활동이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득녕은 성희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 말해야 하며, 외부의 규정에 얽매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말은 모두 합리적이다. 그러나 득녕이 노린 것은 과연 ‘합리적’ 선택일까. 종섭의 인터뷰가 실린 잡지는 독자들이 종섭을 대중 작가에서 ‘예술가’로 격상하는 상찬을 하기 때문에, 당장 종섭에게 유리하고 이로운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 보이지만, 정작 종섭은 ‘천재작가’라는 타이틀이 자신을 옭아매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경수에게도 잡지 표지 그림을 그려달라고 청탁하지만, 정작 경수가 그린 그림은 표지로 사용하지 않는다. 경수의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가 그린 ‘겨울비’를 표절했고, 표절이 이유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경수의 그림을 실을 의도가 없었는지 알 수 없지만, 경수는 자신의 그림으로 실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득녕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보복과 파괴의 욕망은, 자신이 어려웠던 시절, 조건 없이 헌신해서 성공의 디딤돌이 되었던 노력을 종섭이 무시했다는 기억이 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종섭이 성공한 상업 작가지만, 진정한 ‘예술가’는 될 수 없다는 것을 득녕은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고, 종섭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해서는 종섭을 오히려 ‘예술가’의 반열로 올려야 한다는 것을 득녕은 계산하고 있었다.
득녕이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하던 잡지사는 내부 반발이 발생하고, 득녕을 ‘문화권력’으로 규정한다. 득녕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자신이 권력 지향적인가, 예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나, 욕망이 자신을 삼키지는 않았나. 득녕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지만, 그는 대학교 정교수 자리를 거절한다. 그리고 10년 뒤에 문화부장관이 되어 있을 거라고 아내 성희에게 상상을 주입한다.
득녕은 자신이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그 말은 이미 거짓말이다. 득녕은 스스로를 기만한다. 자기가 정당하고 올바르다고 합리화하지 않으면, 이미 인연이 끊긴 종섭과 경수처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때 비슷한 처지에서 서로 자기를 합리화하는 거울의 역할을 했다. 그러다 우연이든, 실력이든 세속적 성공-욕망의 현현-을 이루자 곧바로 타락한다. 종섭과 경수의 몰락은 성공의 근원이 외부에 있었다는 것, 자신의 욕망을 직접 투사하지 못하고, 타자의 욕망을 욕망했다는 것, 욕망의 부피를 다룰 역량이 없었다는 것 등의 이유를 들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종섭과 경수는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극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로 인한 불안이 욕망을 잠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 득녕은 두 사람과 달리 성공의 근원이 내부에서 추동한 것으로, 득녕 자신의 주체적 욕망의 발현이라는 점에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무엇보다 유일하게 자신을 성찰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종섭과 경수와는 다른 존재다.
세 사람은 유사 가족으로 묶여 있었지만, 욕망의 발현-세속적 성공-추락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자아를 깨닫는다. 이들의 존재는 여전히 룸펜 프롤레타리아지만, 그들의 정신세계는 거울을 모방하는 유아기에서 벗어나 스스로 발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들은 느슨한 인연을 유지하겠지만, 과거의 가부장적 질서, 유교적 위계 관계, 남성 중심의 기득권 유지는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한다. 세 사람이 겪는 사건들 가운데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거나 성추행, 성희롱, 위계에 의한 성폭력 등 범죄에 가까운 행위가 있었고, 종섭과 경수가 몰락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더 이상 남성 기득권을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호흡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그들의 ‘예술’과 ‘아티스트’라는 존재 의의는 사회적 몰락과 함께 잊혀지게 된다. 이런 일련의 변화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이자 나약한 인텔리겐챠의 한계를 드러내는 필연적 결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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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친구
앙꼬 지음 / 창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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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쁜 친구
작가 : 앙꼬
출판 : 창비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같지만, 그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마다 삶의 밀도는 다르다. 얼마나 핍진하게 시간의 결을 살아왔는가 가늠하는건 쉽지 않지만, 밀도가 높을수록 시간이 지나면서 삶의 순도 또한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삶을 구성하는 ‘밀도’와 ‘순도’는 무엇이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도스또예프스키는 아버지가 농노들에게 살해당하고, 청년일 때 혁명가였지만, 그는 사형 직전에 황제의 명령으로 목숨을 건졌고, 나이 들어 도박중독자가 되었다. 빚더미에 앉아 평생 빚독촉을 받으며 써내려간 소설은 세계 문학의 걸작으로 남았다. 그가 사형 직전 살아남았을 때, 그의 삶은 강한 밀도를 만들기 시작한다.
고흐, 카프카, 천재 이상을 비롯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예술가들의 삶은 짧지만 강렬하다. 그들의 삶은 고통스러운 외부 환경과 내면의 욕망이 갈등을 빚으며 천재성을 드러냈다. 백살을 살아도 평범하게 살다 죽는 사람과, 30년을 살아도 역사에 남는 예술작품을 남기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단지 천재적 재능의 차이는 아닐 것이다. 어떤 삶을 살든 자신의 내면에서 발산하고픈 강렬한 욕망을 표출하고, 여러 삶의 방식을 포기하며,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찾고 싶거나, 만들고 싶은 모습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스스로에게 묻을 때, 자신의 존재는 구체적 모습을 갖춰갈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앙꼬의 ‘나쁜 친구’는 청소년 시기 짧은 몇 년을 남다르게 보낸 자전적 이야기를 그리면서, 과거 자신의 삶이 어떠한가를 객관의 눈으로 담담하게 바라본다. 그 과거의 시간은 평범하지 않았고, 짧지만 강렬하게 기억에 새겨졌다. 그 시간은 돌아갈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지나간 삶이지만, 그 짧은 시간이 주인공 진주에게는 미래의 자신을 만들어 갈 자양분이 되었다.
앙꼬는 그의 책 ‘열아홉’의 표제작 ‘열아홉’에서 자전적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고등학생 경진이는 기성세대가 규정하는 표현으로 말하자면 ‘비행청소년’이다. 이 단어로 한 사람을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폭력인가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우리 사회에서 진짜 문제 집단이 누구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기성세대는 자신의 관습과 이해의 틀 안에서 청소년을 규정한다. 분류하고, 꼬리표를 달고, 인격을 재단하고, 품성을 평가하고, 가치를 부여한다. 기성세대가 정상 또는 합격으로 평가한 청소년은 시험성적이 좋고, 부모와 교사의 말을 잘 듣고, 대학에 진학하고, 사회(기성세대)가 요구하는 관습과 제도를 내면화한 사람들이다.
[나쁜 친구]는 세 편의 단편으로 묶은 옴니버스 연작만화다. ‘열아홉’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로, 20대가 된 주인공 진주는 새벽 고요한 어둠 속에서 과거를 들여다본다. 진주(‘열아홉’에서는 경진)는 중학생 때 ‘노는 아이들’ 가운데 하나인 정애와 친구가 된다. 정애는 여학교에서 ‘일진’이었으며, 술과 담배, 고등학생 남자 친구를 사귀는 ‘날라리’, ‘양아치’였다. 그들은 평범한 학생들을 괴롭히고, 때리고, 돈을 뜯고, 밤에는 빈집에 모여 술을 마시며 논다. 그들은 자기의 행동에 죄책감이 없다.
진주와 정애에게 ‘왜?’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왜 그런 행동을 하느냐고 묻는 건, 왜 숨을 쉬고, 왜 밥을 먹으며, 왜 화장실에 가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자신의 삶을 방기한 진주, 정애 같은 청소년을 올바로 이끌지 못한 사회와 구조와 기성세대에게 있는 데, (그 안에 가정과 부모도 있다) 정작 기성세대는 자신의 무능과 가부장적, 제도적 폭력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모든 책임을 진주나 정애에게 뒤집어씌운다. (진주와 정애가 후배들에게 휘두른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알 수 없는 일들’은 진주와 정애가 만나고, 술, 담배를 하며 학교생활에 관심이 없던 두 소녀가 가출해 술집에 다니는 친구를 만나 나이를 속이고 술집에 취직하는 이야기다. 진주는 아버지에게 맞아서 머리가 찢어지고, 몸에 멍이 들고, 팔다리도 상처투성이다. 정애는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에게 시달리고, 엄마는 가출했다. 불우한 가정에서 부모의 보살핌 없이 살아가는 청소년이 모두 그렇지 않지만, 정애는 나이보다 일찍 세상에 눈뜬다. 두 소녀는 가출해 여관을 숙소로 삼고, 술집에 취직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잔인하고 가혹했으며 난폭했다. 술집에 오는 남자들은 어린 여자를 성적으로 소비했으며, 미성년자라는 걸 알면서도 술집 주인은 소녀들을 돈벌이에 써먹었다.
학교에서는 ‘일진’이었지만, 세상에 나오자 그들은 힘없는 미성년 여자아이들이었고, 돈과 권력 아래 놓인 희생양이었다. 그걸 깨닫는 건 금방이었고, 아버지의 폭력을 감수하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은, 그들이 학교의 담장 안쪽과 바깥쪽의 공기가 질적으로 다르다는 걸 심각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애’에서는 학교로 돌아온 진주와는 다르게 정애는 어딘가로 사라진다. 중학교 졸업식 사진에 얼굴이 없는 정애의 삶과 진주의 삶을 돌아보며, 똑같이 자기를 때리는 아버지가 있어도, 진주의 아버지는 아버지의 의무와 책임감 때문에 엇나간 자식을 체벌하는 것이고, 정애의 아버지는 이유 없는 폭력을 휘둘렀다는 점이 달랐다고 말한다.
진주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여전히, 아니 더 심하게 학교생활을 방기하고, ‘비행청소년’이 되었다. 더 많이 아버지에게 맞고, 학교에서도 선생에게 맞는다. 그러면서도 진주는 자기가 마음 내키는대로 살았다.
‘정애와 나’는 돌아오지 못한 정애를 기억하며, 진주가 정애에게 갖는 죄책감을 그리고 있다. 우연히 버스에서 마주친 정애를 발견하고 말을 건네지 못하는 진주는 친구를 두고 자기 혼자만 어둠에서 빠져나왔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작가는 청소년 시기의 모습을 돌아보며 변명하거나 합리화하지 않는다. 과거에 자신이 했던 행동과 그 결과까지가 모두 자신의 온전한 모습이라는 걸 인정한다. 작가도 고백하듯이, 자신을 긍정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똑같은 처지에 놓였던 정애와 달리 자신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고, 자기를 믿고 기다려준 부모와 형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작가는 직간접 경험과 상상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대중이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조합해서 보여줄 때 설득력을 갖는다. 앙꼬의 만화 ‘나쁜 친구’는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상상력으로 창작한 것보다 더 묵직하고 깊이 공감할 수 있는 건, 이 이야기가 과거를 미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주는 자신이 한 행동에 대가를 치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대가의 크기에 대해 평가하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맞아서 머리가 찢어지고, 선생에게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어 학교에 경찰이 출동할 정도가 되어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런 덤덤함은 그가 일부러 가지려는 태도가 아니라, 그의 내면 세계가 그렇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작가 ‘앙꼬’는 작품 속에서 드러내지 않지만, 학교 생활에서는 일탈하면서도 그가 진짜 좋아했던 그림 그리기는 숨 쉬는 것처럼 했다고 말한다. 그만큼 손에서 연필을 놓지 않고, 청소년 시기를 거치면서 매우 높은 밀도로 그림을 그렸다. 20대의 ‘앙꼬’가 그린 그림은 긴 시간 그림을 그린 노인의 선처럼 노련하고, 깊이가 느껴진다. ‘앙꼬’는 친구들에게 그림을 그려 보여주고, 자신이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잘 그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혼란하고 불투명한 청소년 시기를 겪으면서 ‘앙꼬’가 손에서 놓지 않았던 연필과 노트는 그의 삶을 지탱한 유일한 희망이자 힘이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이 작품으로 앙굴렘에서 ‘새로운 발견상’을 받은 것은 이야기의 보편성을 획득한 것이다. 작가주의 만화, 그래픽 노블로 분류할 수 있는 하나의 장르에서도 리얼리즘의 세계를 깊이 있게 보여준 앙꼬의 만화는 작가의 경험과 세계관을 세계의 독자가 공감했음을 확인했다. 형식과 내용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는 젊은 작가가 진화하는 모습을 보는 건 독자로서 행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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