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1
마영신 지음 / 송송책방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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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펜 프롤레타리아, 욕망의 리얼리즘
개인의 욕망이 어떻게 발현하는가를 들여다보면, 좁게는 개인을 둘러싼 좁은 영역에서 발생하는 낮은 차원에서 사회의 구조를 아우르는 거대한 관계망까지 영향을 끼치는 폭넓은 스펙트럼이 있다. 권력을 추구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사회의 구조를 바꾸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사회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과 개인의 욕망이 일치할 때, 그것을 ‘사회적 성공’과 ‘개인의 입신양명’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보편적 욕망은 자신이 놓인 삶의 물적 토대에 근거하며, 욕망의 크기도 개인의 환경에 비례한다. 욕망의 진화 역시 사회의 구조적 선택압을 받게 되며, 구조는 마치 거대한 계단처럼 개인의 욕망을 가로막는다. 욕망은 변증법적으로 진화하며, 질적 변화를 일으킬 때, 계단을 뛰어넘는다.
사람은 저마다 욕망을 지닌 채 살아간다. 대개는 ‘욕망’과 ‘희망’ 또는 ‘욕구’를 구분하지 않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객관적 조건과 거리가 먼 황당한 기대를 당연한 듯 품고 살기도 한다. 마영신의 ‘아티스트’에 등장하는 세 명의 주인공, 신득녕, 곽경수, 천종섭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중년의 남성이자 예술가로 자처하는 인물이다. 작가는 이들이 가진 욕망의 발현을 ‘권력’이라는 배경에 투사해 해부한다.
한국사회에서 40대 남성은 그 자체로 권력을 가진 존재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이 작품의 주인공들처럼 인정받지 못했거나, 중심에서 멀어져 소외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들의 존재가 ‘기득권’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주인공들은 자신이 한국사회의 기득권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가난한 예술가이며, 주변부에서 소외된 존재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계급으로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이며, 본질에서 기회주의적 속성을 가진 집단에 속해 있다. 이들이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 (한국)사회의 계급구조와 집단의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풍자와 해학을 통해 개인의 욕망을 비판하지만, 표현은 결코 말랑하지않다. 작품에서 ‘계급’, ‘모순’, ‘갈등’, ‘대립’, ‘억압’ 같은 사회과학 용어가 등장하지 않을 뿐, 개인의 욕망을 드러내는 방식과 과정, 몰락에 이르기까지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숨 쉬는 (자본주의)체제의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이루지 못한 꿈(천종섭, 곽경수)을 지닌 채 살아가는 인물과 더 높은 곳으로 오르지 못하는(신득녕) 인물이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내면에서 인지부조화의 갈등을 일으키는 초반은 이들의 본성이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난다.
지식인(인텔리겐챠)은 자신이 구축한 세계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이건 하나의 명제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확실한 것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식인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한다. 그리고 그들은 학연과 스승, 동료, 제자로 이어지는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지식을 자본화한다.
지식 자본은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의 세 가지 요소-토지, 공장, 노동력-처럼 토대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들-인텔리겐챠-의 발밑은 단단하지 않다. 지식 자본은 원래의 ‘자본’에서 파생한 것이므로, ‘자본’에 의해 운명이 결정된다. 많은 경우, 지식 자본은 ‘자본’에 복종하며, 자본의 용병으로 복무한다. 따라서 지식 자본을 보유한 인텔리겐챠는 본질적으로 기회주의적 속성을 내재하고 있기에, 이 작품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행동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경수, 득녕, 종섭은 남성 예술가 모임 ‘오락실’에서 만난 또래들이다. 각자 두 살 터울이지만 형, 동생의 위계를 지키는데, 이건 특히 한국의 병영 문화가 낳은 폐해를 드러낸다. 이들이 형, 동생으로 부르지만, 실제로 나이 먹은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이 먹어서 한심하다고 경멸할 때, 이들의 위계는 본질을 드러낸다.
세 명의 주인공이 모두 남성인 것은 작가가 남성이기 때문도 아니고, 남성 우월주의를 드러내려는 의도는 더더욱 아니다.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가의 의도는, 한국사회에서 허리에 해당하는 40대 남성 가운데서도 노동자가 아닌, 인텔리겐챠이면서 룸펜 프롤레타리아인 이들이 ‘예술가’로 자처하지만, 실제 ‘예술가’의 정체성이 있는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들은 술자리에서 요절한 젊은 가수의 작품성을 폄하하고, 인간성까지 비난하며, 죽어서 대중에게 스타 대접을 받는 것까지 질투한다. 뮤지션 천종섭은 저작권을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아무렇지 않게 신득녕에게 다른 가수의 음원을 불법으로 복사해 달라고 말한다. 이들이 보여주는 이중성은 기득권 남성의 멘탈리티를 본능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같은 ‘오락실’ 멤버 가운데 가수로 성공한 사람, 영화로 성공한 사람을 두고 실력도 없으면서 어쩌다 성공했다고 폄하하며, 조금 유명해졌다고 사람이 달라졌다고 비난한다. 이들의 비난은 근거가 없다. 그들의 일방 주장일 뿐이다. 그러면서 곽경수는 말한다. ‘우리 세 사람은 누가 잘 되면 무시하지 말고, 서로 진심으로 위하면서 살자’고. 이 대사는 이미 자기들이 무시당하는 걸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고, 누군가 성공했을 때, 서로 진심으로 위하지 않을 거라는 불안을 드러낸다. 작품의 초반에 나오는 이 대사는 세 사람의 운명이 달라질 것임을 예고한다.
작품의 발단에서 이들이 보이는 태도는 전형적인 룸펜 프롤레타리아다. 세 명 모두 일정한 수준의 고등교육을 받았고, 지식 자본을 갖추었으나 그것을 상품으로 판매하지 못하는 소외된 상태에 있으며, 그렇다고 노동시장으로 편입하려는 의지도 드러내지 않는다.
세 명 모두 가족과의 유대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득녕은 34세에 소설집을 출간한 작가지만, 집안에서 모두 득녕이 작가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가족들과 멀어졌다. 득녕이 종섭의 에세이집 출간을 적극 돕는 이유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 명이 우연히 만나 어울리며 가깝게 지내게 된 배경에는 ‘예술’을 향한 그들의 고집이 집안의 반대로 현실의 벽에 부닥쳤기 때문이며, 그 과정에서 세 명은 자발적으로 가족 단위에서 스스로를 해체한다.
가족의 범위를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면, 혈연 중심의 전통적 가족 개념에서 벗어난 이들은 ‘오락실’이라는 남성 예술가 모임에서 만나 유사 가족을 구성한다. 이들은 각자 독립 공간을 가지고 있지만, 자주 함께 모여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공통의 화제를 찾아 이야기한다. 보통의 가족도 각자의 방에서 생활하며, 밥을 먹을 때는 주방에, 텔레비전을 볼 때는 거실에 함께 모인다. 이런 생활 방식은 약간의 물리적 거리만 있을 뿐, ‘오락실’의 남성 예술가들이나 기존의 가족 형태나 크게 다르지 않다. 세 명이 나이에 따라 위계를 갖추는 것 또한 한국 병영 문화의 하나이면서, 유교 전통에 따르는 보수적 가치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보수적 위계와 유사 가족의 결합이 긍정적으로 작동한 경우가 바로 득녕이 종섭을 위해 책 출간을 적극 돕는 것으로 나타난다. 득녕은 어려서 부모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다. 아버지는 득녕을 폭행했고, 엄마는 득녕을 이기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다. 득녕은 부모와 가족의 부정적 교육에서 벗어나려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그는 종섭이 뮤지션이면서 글도 잘 쓴다는 것을 발견하고, 종섭이 글을 꾸준히 쓰도록 지원하며, 출판사를 섭외하는 등 자발적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욕망의 발현은 구체적인 물적 토대가 있을 때 가능하다. 이들이 드러내는 욕망의 크기는 자신이 이룩한 사회적 성공만큼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거대한 세계라고 그들은 착각한다. 득녕의 도움으로 책을 출판한 종섭은, 예상치 않은 성공으로 어리둥절한다. 인세나 받아서 생활비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정도였던 에세이집은 크게 성공하고, 종섭은 하루아침에 스타 작가가 된다.
종섭이 자신의 전공분야로 생각하는 음악이 아닌, 글을 써서 사회적 성공을 이루는 것은, 이들의 사회적 성공이 개인의 재능이나 철학과는 깊은 관련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 장치다. 즉, 자신을 ‘예술가’라고 말하지만, 추구하는 예술을 향한 치열한 노력이나 열정은 보이지 않고, ‘예술’을 도구나 지렛대로 활용해 사회적 욕망의 크기를 키우려는 주인공의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
종섭과 마찬가지로 경수 또한 자신이 추구하는 미술 작품으로 사회적 욕망을 발현하는 것이 아닌, ‘통합예술진흥원’에서 중간 관리자가 되어 권력과 금력을 추구하는 것에 만족한다. 득녕 역시 문학작품으로 상을 받은 이후, 잡지사를 만들어 문학계에 영향력을 키운다는 점에서 ‘작가’의 정체성을 잃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원하던 돈과 명예, 권력을 누리지만, 그들의 본질인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저급한 인식에서 질적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필연적으로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 추락하게 된다. 여기서 필연적 배경은, 주인공들이 사회적 욕망에서 배제(소외)된 상태였을 때 스스로 성찰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았던 요소들 즉, 남성 우월주의 사회, 남성가부장제의 한계, 남성 기득권의 문제, 인텔리겐챠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한계, 자신이 속한 예술 분야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인식, 성 감수성과 페미니즘의 몰이해 등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거나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자기 세계를 만들기도 전에 사회적 욕망의 토대에 올라 돈과 권력을 휘두르면서, 이들이 착각하는 것은 자신의 재능으로 이룬 성공이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 결과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들은 자기 전공이라고 여기는 예술 분야에 관해서는 지나치게 민감하고 전투적인 태도를 보인다. 종섭이 음악하는 누나의 앨범 발매 축하연에서 만난 래퍼 ‘빅 라이스’와 자존심 대결을 하는 장면이나, 경수가 미술하는 선후배 모임에서 자격지심을 드러내는 장면은 아집과 열등감이 폭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들이 생각하는 ‘전공 분야’라는 것도 처음에는 구체적 꿈으로 열정을 갖고 만들었지만, 어느 순간, 이들이 쌓아 올린 탑이 아니라, 상상의 세계에서 구축한 이미지라는 점에서, 이들은 구체적으로 실천하거나 다다를 수 없는 이상을 좇는 관념적 인간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세 명의 주인공은 두 가지 성공을 거둔다. 하나는 사회적으로 드러난 ‘명예’로 종섭은 수필집을 출간하면서 스타 작가로 대접받으며 돈과 인기를 끌어모은다. 경수는 ‘통합예술진흥원’의 중간 관리자로 일하기 위해 원장 후보자의 약점을 잡아 협박하고, 새로운 원장을 위해 개처럼 충성한다. 득녕은 마침내 문학상을 받는다.
다른 하나는, 이들이 가지고 있던 내면의 열등감과 과잉 자의식이 해소되는 것이다. 사실 이들에게는 사회적 성공보다 내적 갈등의 해소가 더 중요하지만,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 한다.
라캉은,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고 했다. 사람은 대개 상징계-이미 구성되어 있는 세계-에서 머물며, 실재계-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상징의 세계-는 다다를 수 없는 ‘균열 없는 충만한 세계’이자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한다고 했는데, 세 명의 주인공이 머물고 있는 상징계가 곧 그들의 한계이기도 하다. 즉, 이들은 룸펜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적 존재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예술’이라는 다다를 수 없는 차원을 꿈꾸다 파멸한다. 이들이 얻는 것은 지극히 작은 권력이었지만, 그것마저도 지킬 수 있는 훈련된 내면의 철학이 부재하기 때문에 주어진 권력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낯설어한다.
이들은 유사 가족이지만, 모두 자아가 성숙하지 못한 유아적 단계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보여주는 유치하고 치졸한 말과 행동은 세 명이 서로 상대방을 거울로 인식하고, 그 거울에 자신을 투영하기 때문이다. 즉, 거울에 비친 모습이 유아적이고 퇴행적인 모습일 때, 그것을 모방함으로써 불안에서 벗어난다.
세 명의 주인공은 누군가 한 사람이 우연이든, 노력에 의해서든 세속적 성공을 이루자 그것을 모방하려 한다. 이들의 모방은 질투와 시기의 모습으로도 나타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려는 욕망의 실현이다. 따라서 본능에 가까운 욕망 즉 불안을 해소하려는 의지는 이성의 세계인 도덕과 윤리의 의지보다 강렬하다. 종섭이나 경수가 보이는 타락은 이성보다 강한 의지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종섭은 득녕의 도움을 받아 출판을 하고, 스타 작가가 되지만, 인터뷰에서 득녕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득녕이라는 거울을 모방했지만, 그것을 인정하면 자신의 존재가 여전히 유아적이라는 걸 인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종섭이 획득한 권력-명예, 돈, 호감-을 주로 여성의 육체를 탐닉하는데 소모한다. 종섭은 스타 작가가 되자 곧바로 12살 차이 나는 여성을 선택하고, 음원저작권 협상을 주도하는 권력을 위임받은 다음, 어린 신인가수에게 접근해 육체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다시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을 성추행하다 발각되고, 무릎을 꿇고 사과할 때조차 권위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결정적으로, 강남에서 치과병원을 하는 의사의 딸이었던 애인에게도 결별 선언을 듣고, 종섭은 자신의 졸렬함과 비열함을 드러낸다.
경수는 추잡한 스캔들을 터뜨리겠다고 협박해 문화단체의 중간 관리자가 되지만, 방탕한 생활과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남용해 결국 자리에서 쫓겨난다. 종섭과 경수는 자신이 획득한 욕망을 지키지 못했다. 욕망은 어차피 다른 사람의 욕망이었으며, 자신이 추구하던 욕망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른 채, 욕망의 결과만을 누리려 했던 두 사람은 자신도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추락한 것이다.
득녕은 종섭과 경수와는 다른 세계를 구축한다. 그는 처음-룸펜 프롤레타리아 시절-부터 자신의 욕망을 제어할 정도의 의지를 가진 인물이었고,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필요한 도움을 주는 공동체 의식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득녕은 소설로 데뷔해 문학상을 받고 성공의 문턱에 오르지만, 그는 오히려 창작보다는 여러 사람과 함께 일을 기획하고, 추진하고,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프로듀서의 능력이 돋보이는 인물이다. 득녕은 자기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하기 때문에, 애인인 성희와 문학잡지를 만들 때부터 더 이상 창작-소설쓰기-은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기존의 시스템과는 완전히 다른, 협동조합 체제로 잡지 출판을 시작하고, 이 시도는 좋은 작품을 발굴하면서 사업으로도 성공한다. 이타적이고, 자기객관화가 뛰어나며, 헌신적인 데다 머리까지 좋은 득녕은 마침내 자기가 원하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
종섭이 인기 작가의 명맥을 유지하지만, 글쓰기나 음악 모두 아무런 결과물을 만들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면, 경수는 조직에서 쫓겨난 이후 처음 등장했던 바로 그 위치-룸펜 프롤레타리아-로 돌아가 의미 없는 나날을 보내다 미국 만화 캐릭터를 그려 인터넷으로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한다. 저작권을 위반하는 것도 알지만, 경수는 영세사업자는 건드리지 않는다면서 고집을 부린다.
이들과 다르게 득녕은 잡지사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잡지는 문학계에서 힘을 갖게 된다. 득녕이 종섭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것은 아내 성희와 나누는 대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성희는 종섭의 인터뷰에서 ‘천재작가’라는 타이틀은 지나친 표현이며, 그런 표현으로 종섭이 오히려 위축되어 작품 활동이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득녕은 성희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 말해야 하며, 외부의 규정에 얽매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말은 모두 합리적이다. 그러나 득녕이 노린 것은 과연 ‘합리적’ 선택일까. 종섭의 인터뷰가 실린 잡지는 독자들이 종섭을 대중 작가에서 ‘예술가’로 격상하는 상찬을 하기 때문에, 당장 종섭에게 유리하고 이로운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 보이지만, 정작 종섭은 ‘천재작가’라는 타이틀이 자신을 옭아매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경수에게도 잡지 표지 그림을 그려달라고 청탁하지만, 정작 경수가 그린 그림은 표지로 사용하지 않는다. 경수의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가 그린 ‘겨울비’를 표절했고, 표절이 이유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경수의 그림을 실을 의도가 없었는지 알 수 없지만, 경수는 자신의 그림으로 실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득녕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보복과 파괴의 욕망은, 자신이 어려웠던 시절, 조건 없이 헌신해서 성공의 디딤돌이 되었던 노력을 종섭이 무시했다는 기억이 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종섭이 성공한 상업 작가지만, 진정한 ‘예술가’는 될 수 없다는 것을 득녕은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고, 종섭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해서는 종섭을 오히려 ‘예술가’의 반열로 올려야 한다는 것을 득녕은 계산하고 있었다.
득녕이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하던 잡지사는 내부 반발이 발생하고, 득녕을 ‘문화권력’으로 규정한다. 득녕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자신이 권력 지향적인가, 예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나, 욕망이 자신을 삼키지는 않았나. 득녕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지만, 그는 대학교 정교수 자리를 거절한다. 그리고 10년 뒤에 문화부장관이 되어 있을 거라고 아내 성희에게 상상을 주입한다.
득녕은 자신이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그 말은 이미 거짓말이다. 득녕은 스스로를 기만한다. 자기가 정당하고 올바르다고 합리화하지 않으면, 이미 인연이 끊긴 종섭과 경수처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때 비슷한 처지에서 서로 자기를 합리화하는 거울의 역할을 했다. 그러다 우연이든, 실력이든 세속적 성공-욕망의 현현-을 이루자 곧바로 타락한다. 종섭과 경수의 몰락은 성공의 근원이 외부에 있었다는 것, 자신의 욕망을 직접 투사하지 못하고, 타자의 욕망을 욕망했다는 것, 욕망의 부피를 다룰 역량이 없었다는 것 등의 이유를 들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종섭과 경수는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극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로 인한 불안이 욕망을 잠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 득녕은 두 사람과 달리 성공의 근원이 내부에서 추동한 것으로, 득녕 자신의 주체적 욕망의 발현이라는 점에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무엇보다 유일하게 자신을 성찰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종섭과 경수와는 다른 존재다.
세 사람은 유사 가족으로 묶여 있었지만, 욕망의 발현-세속적 성공-추락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자아를 깨닫는다. 이들의 존재는 여전히 룸펜 프롤레타리아지만, 그들의 정신세계는 거울을 모방하는 유아기에서 벗어나 스스로 발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들은 느슨한 인연을 유지하겠지만, 과거의 가부장적 질서, 유교적 위계 관계, 남성 중심의 기득권 유지는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한다. 세 사람이 겪는 사건들 가운데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거나 성추행, 성희롱, 위계에 의한 성폭력 등 범죄에 가까운 행위가 있었고, 종섭과 경수가 몰락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더 이상 남성 기득권을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호흡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그들의 ‘예술’과 ‘아티스트’라는 존재 의의는 사회적 몰락과 함께 잊혀지게 된다. 이런 일련의 변화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이자 나약한 인텔리겐챠의 한계를 드러내는 필연적 결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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