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라이어 - 성공의 기회를 발견한 사람들
말콤 글래드웰 지음, 노정태 옮김, 최인철 감수 / 김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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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성공하는 사람만의 유전자란 존재하는가?  성공한 사람들은 이미 태어날때부터 성공하게끔 운명지워진 건 아닐까?  가끔 이런 질문을 하고픈 때가 있기 마련이다.   학창시절 공부잘하던 아이들을 생각해보면 별 노력도 하지 않는것 같은데 성적이 잘 나오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그들은 평범한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걸까?   지금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성공한 삶을 살고 있을거란 예감이 든다.   성공한 사람들의 프로필은 대개 화려하다.   학창시절엔 공부를 잘 했고,  그래서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또 충분한 교육을 받아 사회의 중요한 직책에 앉는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분명 성공하는 사람에겐 시작부터 우리와 다른 유전자를 몸속 어딘가에 품고 있었던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다.  

즉, 우린 어느 사이에 성공에 대한 고정관념을 품고 만 것이다.  성공한 사람은 머리가 좋아야 한다.  IQ가 높아야 성공한다.  왜냐하면, 성공했던 이들을 보면 수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나 빌게이츠 모두 IQ가 높았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집안 배경이 좋아야 한다.  이 전제는 과거보다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더 유용할 듯 하다.  용은 더이상 개천같은 누추한 곳에서 나지 않는다.  그들의 부모가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느냐가 한 아이의 미래 사회적 지위까지를 설정해 놓는 시대에 우린 이미 깊숙히 들어와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관념이란 언제나처럼 불완전한게 아닌가?   이 성공에 대한 고정관념도 마찬가지다.  성공과 성공인에 대한 깊이있는 문화인류학 보고서 한권을 읽었다.  말콤 글래드웰이란 <뉴요커>의 저널리스트가 쓴 <아웃라이어>란 책이다.

말콤 글래드웰은 <아웃라이어>을 통해, 이제 성공에 관한 우리들의 불편한 관념 하나씩을 파괴한다.  `아웃라이어(Outliers)란 무엇인가?  이 생소한 단어의 뜻부터 짚고 넘어가자.  사전적 의미는 `표본 중 다른 대상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통계적 관측치', 이 책에선 남다른 성취를 보여준 최고의 성공인을 뜻한다.  그들은 언제나 질시와 동경의 대상이었다.  지금도 삶의 목표를 오직 성공으로 두고 있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이정표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 아닌가 ?  무엇이 성공인가 하는 철학적인 관념은 일단 제쳐두고, 오직 피상적인 성공의 유형만을 분석한다는 치명적 오점이 이 책엔 존재한다.  그러나 성공에 관한 독창적인 견해들이 이 책엔 가득하고, 그것이 이 책의 무게감을 설정한다. 작가는 이 저서에서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이 가진 몇 가지 차이점을 설명하고, 성공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 진원지를 이렇게 기회Opportunity와 유산Legacy이란 이름으로 묶어낸다.


기회Opportunity

기회는 곧 운과 내통한다.  좋은 부모, 좋은 조건,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아이는 그러지 못한 아이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월등히 높다. 저자는 먼저 운이란 관점에서 한가지 예시를 든다. 캐나다는 하키에 미친나라다. 그 나라의 국민스포츠인 하키의 스타들을 살펴보니 특이한 현상이 발견되었다.   하키로 인생역전한 사람들의 생일이 1월에 가깝게 몰려 있다는 것이다. 과연 생일이 빠른 아이들과 하키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캐나다는 1월 1일을 기준으로 나이를 헤아리고 그에 맞춰 하키 클래스를 짠다. 1월생과 12월생이 함께 선발되더라도, 어린시절 몇개월은 기량의 월등한 차이를 가져온다.  결국 유아시절에 선발된 아이들의 시간의 갭이 성인이 되기까지 그 기량의 차이를 확장시키고,  결국 되돌릴 수 없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결국, 스포츠 스타로 하키에서 성공한 아이는 하키 선수를 선발하는 캐나다의 시스템 덕을 보는 것이다.   1월에 태어나느냐 아니면 12월에 태어나느냐가 성공을 가름하는 것은 그저, 기회이자 운일 뿐이며 그 사회속에 태어난 아이의 문화적 환경 탓이다.

"다시 말해 미래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특별한 기회를 얻어낸 사람이 성공을 거두게 된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최고의 부자들은 세금환급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다.  최고의 학생들은 최고의 강의를 듣고 피드백을 받는다.  그리고 9~10세 어린이 중 덩치가 큰 아이들은 최고의 코치로부터 훈련을 받는다.  결국 성공은 사회학자들이 `누적적 이득'이라고 부르는 것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p.45 말콤 글래드웰 <아웃라이어> 

이와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자.  이 이야기는 좀더 공감이 갈 것이다.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에게 공히 적용할 예외없는 법칙이란게 존재한다.  그것을 작가는 `1만시간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어떤 한 분야에서 대성한 사람들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1만 시간을 쏟아 부었다는 것이다.  즉, 하루도 빠짐없이 10년간 평균 3시간씩을 투자한 꼴이다.   이 정도의 시간을 투자해야만, 누구든 어느분야에서 전문가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공병호의 <10년법칙>이란 책이 있는데,  그 책의 주장은 말콤 글래드웰이 주장한 1만시간의 법칙과 일맥상통한다.  1960년대 전설적인 영국의 팝스타인 비틀즈나 마이크로 소프트의 창시자인 빌게이츠 모두 공히 1만시간, 악기와 컴퓨터로 실력을 다진후에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작곡가, 야구선수, 소설가, 스케이트 선수, 피아니스트, 어떤 분야건 연구를 거듭하면 할수록 이 수치는 예외없이 확인된다. 즉, 어느 분야에서건 이보다 적은 시간을 연습해 세계 수준의 전문가가 탄생한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고정관념 하나가 파괴된다.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란 대개 어떤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이란 본래 그 재능을 타고났다고 지레짐작하기 쉽다.    물론 재능을 무시할 순 없다.  그래서 말콤 글래드웰은 일정 정도의 재능이 필요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꼭 성공의 출발점이 확연히 다른 유전자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일정 정도의 출발선상에서는 결국, 누가 더 열심히 연습하고, 피와 땀을 흘리는가, 하는점이 성공과 실패를 가를 수 있다.  듣기에 따라 범상한 사람들에겐 희망이 되는 분석이다.  하면 된다, 라는 논리가 먹혀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분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만시간의 법칙은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성공의 또다른 요소들은 무엇인가? 

"덧붙이자면 최고 중의 최고는 그냥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훨씬, 훨씬 더 열심히 한다.  사실 연구자들은 진정한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매직넘버'에 수긍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1만 시간이다."    p.56 말콤 글래드웰 <아웃라이어>

천재와 성공의 필연적 상관관계를 부정하면서 작가는 기회라는 요소의 비중을 강조한다.  빌게이츠가 컴퓨터로 대성한 이유는 그가 천재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유한 가정 환경으로 어린 시절 세계의 어떤 아이도 접할 수 없었던 대학의 컴퓨터 시스템에 마음껏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그의 부모가 제공했다는 점을 예로 들고 있다.  천재라고 해서 무조건 전도유망할거라고 쉽게 상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천재도 비참하게 몰락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그것은 가정환경과 연계돼 있다.  중산층의 부모를 둔 천재와 그러한 잇점을 누리지 못한 천재 사이엔 성공과 실패라는 두 갈래길이 명확히 그어진다는 점을 이 책에서 밝혀준것이 주목된다.  막연히 교육열이 뜨거운 엄마들의 치맛바람을 비난하곤 하는데 아이의 미래를 위해선 무관심 보다는 적극적인 간접이 더 중요함을 저자는 강조한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과도 일치한다. 아이가 교육의 산물이란 점에선 더욱 그렇다.  


유산Legacy

우리가 전 세대로부터 받은 유전자, 즉 유산은 우리의 성공과 어떤 연계가 있을까?   이 장에서 특히 흥미로운 자료는 항공기 추락사고와 승무원의 상이한 문화적 유산간의 상관관계를 밝혀논 것과 아시아인이 서양인에 비해 수학을 잘 하는  이유를 설명한 부분이다. 이곳을 읽어내려가다보면,  이 책이 문화인류학 전문서적이 아닐까란 착각이 들 정도다.  무척 생소하면서,  성공 매커니즘의 내밀한 속살을 파고드는 저자의 분석력은 날카롭고 창조적이다. 

1997년 8월에 괌에서 추락한 대한항공 801편에 대한 블랙박스 분석 자료를 통해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미항공조사국은 기장과 부기장 사이에 오고간 대화를 통해 조종실 내의 `권력 간격 지수(Power Distance Index, PDI)'가 이 추락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결론을 도출해 낸 것이다.  한국 독자들이 읽기에는 좀 씁쓸한 내용이기도 하다.  대한항공 괌 추락 사고는 지금도 흐릿한 기억속의 악몽이기 때문이다.  이 사고로 254명의 탑승객 가운데 228명이 사망했다.   블랙박스에 기록된 기장과 부기장, 기관사 간에 오고간 대화를 들어보면, 엄격한 위계질서 속에서 승무원 사이에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함을 알게 된다.   즉, 위기의 순간에서조차 부기장은 자신의 소신대로 말하지 못하고 완곡어법을 지나치게 사용해, 기장의 잘못된 판단을 수정하지 못하고 추락을 방조한 것이다.  이 완곡어법은 동양의 오랜 전통이 깃든 상하간의 의사 소통 방법이다.  그러나 위기에 순간에 필요한 언어란 직설어법을 담고 있어야 했다.  

그날의 추락 사고는 기상이 몹시 안좋은 상태에서 항공기가 괌 공항에 착륙을 시도했고,  괌 공항 근처의 니미츠 힐의 불빛을 공항 활주로의 유도등으로 착각한 기장이 착륙을 시도하다 결국 니미츠 힐을 들이받는 처참한 결과로 종결된다. 이 사고의 원인이란 조종실 내의 엄격한 위계질서속에서 결국 피곤한 기장의 판단실수를 제대로 부기장이 수정해주지 못해 발생한 사고인 것이다.  이것이 이 사고의 모든 원인은 아닐지라도, 추락을 피할 수 있는 기회란 10초사이에 벌어진 그들의 언어속에 있었다. 동양의 문화적 전통은 윗사람을 존경해서 말할때도 직설어법보다는 완곡어법을 주로 사용하는 것이다.  때론 이같은 문화적 습성이 비참한 참사를 불러오기도 한다.  이러한 예는 비행기 내 조종실 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공히 발생되는 현상이다.   나름, 약점을 찔린것 같아 뜨끔한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의 직장문화속에서 벌어지는 아슬한 순간들이란 때론  여기에 기인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 사건후, 대한항공은 외국의 특별한 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조종실 문화를 대폭적으로 수정했고 큰 변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

동양인이 수학을 잘하는 이유를 저자는 동,서양의 숫자체계의 차이에서 설명한다.  영어의 숫자체계가 대단히 불규칙한 반면, 동양의 숫자체계는 매우 논리적이고 간결하다.  영어의 11부터 19까지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ELEVEN, TWELVE 로 시작되는 영어와 달리 동양사람에겐 11은 십일이요, 12는 그냥 십이다.  숫자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식이다.  이 작은 차이가 결국 어렸을적 아이들의 수리 능력에 영향을 미치고 아이들의 수학 실력에 큰 차이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동양의 아이들이 수학을 잘 하는 이유는 그 아이들이 더 똑똑해서가 아니라 숫차체계라는 문화적 시스템의 차이 때문이다.  쌀농사를 짓는 동양인은 무척 부지런하고, 그것이 아이들의 교육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서양에 유학온 동양의 아이들은 아침일찍 도서관을 점령해 밤 늦은 시간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습관을 자연스럽게 들인다.  서양의 학생들은 그러하지 못한다.  오래 쌀농사를 져왔던 문화권의 아이들은 그 부모나 조상으로부터 부지런함과 근면함을 보고 배웠다.  동양의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는 것은 그들이 머리가 좋아서라기 보다는 더 열심히 하기 때문일거라고 이 부분에서 저자는 말하고자 한다. 

말콤 글래드웰은 성공에 관한 귀납법적인 분석을 통해, 이 책에서 독창적인 성공 게놈지도 한 장을 완성해 낸다.  그것은 막연히 생각돼 왔던 성공 이론에 관한 낙관론을 철저히 파괴하는 것이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반드시 성공하는 것이 아니었다.  집안 배경이 좋고, 운이 따르고, 문화적 시스템이 뒷받침 해주며, 1만시간의 법칙처럼 뼈를 깎는 노력을 요한다.  성공이란 공짜가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이 일정 부분 조합되었을때 우리는 인류 역사의 위대한 성공인과 만나게 된다.  빌 게이츠를 꿈꾸는 이들이 많지만,  빌 게이츠는 운과 재능과 노력 모두가 적절한 조합을 이룬 가장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우리는 빌 게이츠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열세 살 소년도 최고의 억만장자가 될 수 있는 곳이라며 자화자찬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오직 단 한 명의 소년에게만 1968년도에 시간 공유 터미널(대학의 컴퓨터 시스템)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p.306   말콤 글래드웰 <아웃라이어>

그러나 이 책에서 눈여겨볼만한 구석이 있다.  운이나 집안 배경, 문화적 영역 등은 우리의 의지대로 선택할 수 없다.  성공하는 이들에게 하나의 공통점이 있고, 그것은 성공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고, 우리가 즉시 실천 가능하다.  1만시간의 법칙이 그렇다.  전문가로 대성한 이들은 예외없이 모두 자신의 영역에서 1만시간의 공력을 쌓았다.  그것은 하루에 3시간씩 10년을 채워야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다.  TV속 흥미거리로 전락한 직업의 달인들을 보라.  그들이 보여주는 한 영역에서의 능력이란 거의 서커스 수준이지만,  그러한 능력을 갖기까지 그가 흘렸을 땀방울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달인이란 이름보다 도인(道人)이란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그러고보면, 도(道)에 이르기란 어렵고도 쉬운 일이다.  그들을 키운건, 운도 아니고 배경도 아니다.  오직 노력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마지막 페이지에서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기회를 얻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그 기회를 움켜잡을 힘과 마음자세가 있었다." 이 결론이 특출난 천재로 태어나지 못한 선량한 사람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독자는 어떻게 성공해야 하는가?  진정한 성공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철학적인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주위에 널려 있는` 성공한 괴물'들에 대해 이제 합당한 판단력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상식과 지혜가 아니라, 삽자루 하나가 담겨 있는 무대책의 아웃라이어들은 성공신화가 키운 `괴물'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수상한 시대가 그것을 명확히 증명해 보인다

 

 

201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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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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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단순히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지각 있게 주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지각 있게 주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지각 있게 칭찬하고, 지각 있게 비판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평안하게 해 주는 것과 더불어 지각 있게 논쟁 하고, 투쟁하고,맞서고, 몰아대고 밀고 당기는 것이다. 그것은 `지도'를 필요로 하는 관계다. 지각 있다는 것은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며, 판단은 본능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심사숙고해야 하며 때로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해야할 때도 있다"   M. 스캇펙 <아직도 가야 할 길>




1. 미스터리로 엮은 한 가족의 이야기

작가 정이현의 소설을 읽기는 처음이다. 이제, 그의 산문집 2권을 읽은 것도 두 해째가 흘러간다. 글을 참 잘 쓰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감각적인 문체와 발랄한 감성이 가득한 문장들은 생기가 가득하고, 거침없이 읽힌다. 그의 산문집 <풍선>과 <작별>을 읽던 두 해 전 여름의 끝은 여전히 내 기억속에 즐거운 시간으로 자리잡았다. 그때 쓴 리뷰엔, 그 책을 통해 여름 휴가를 한 번 더 다녀온 기분이라고 적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오랫동안 정이현의 책을 읽을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매년 연초에 읽는 책엔 무언가 그 해 독서의 큰 로드맵을 그리기 마련이다. 1월의 모든 계획엔 나름의 진중함이 묻는다. 난 올 해 첫 우리 소설 읽기에 정이현을 택했다. 1월 1일 첫날, 발표되는 신춘문예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올핸 특히 문학평론에 관심이 갔다. 그 평론들을 읽으면서, 한 작가의 작품들을 깊이 읽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매년, 한해동안 집중해서 읽어볼만한 작가를 정하는것도 괜찮다는 느낌이다. 그것이 올해 내게 정이현이 될까 ?

미스터리는 내가 좋아하는 분야가 아니다. 아니, 그것보단 미스터리에 익숙하지 않다는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일부러 미스터리를 찾아읽는 독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이현은 신작 <너는 모른다>에서 가족서사에 미스터리를 첨가한다. 한 낯선 남자의 익사체에 대한 묘사로 시작되는 이 소설의 도입 부분을 읽는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작가가 심어놓은 블랙홀에 정신없이 빠져드는 모습을 한참이 지난후에야 깨닫게 된다. 글의 흡인력이란 이런 것인가?

"시체가 발견된 것은 5월의 마지막 일요일이었다.(첫문장,중략) 일요일 오전 열시, 회사원은 늦잠을 자고 교인은 기도를 하고 연인은 사랑을 속삭이며 누군가는 축구공을 찬다. 막 몽정을 시작한 사내아이들이 강가를 이유 없이 배회하는 것도, 강바닥을 흘러다니던 시체가 홀연히 떠오르는 것도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표류사체의 최초 발견자인 소년은 처음엔 그것이 설마 사람일 줄은 몰랐다고...(중략) "  정이현, <너는 모른다> 7-8p.

그러나 작가는 미스터리의 본질을 잘 파악하고 있다. 이 강렬한 블랙홀에 빠진 독자가 궁금증을 증폭하는 사이, 작가는 더이상 표류사체의 정체에 대해 입을 닫는다. 그리고 나레이터는 이제 한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사체의 정체를 알고 싶은가? 이 소설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 되도록이면 빨리 읽기를. 이 하나의 장치는 정이현의 감각적인 문체와 맞물려,소설읽기에 가독력을 높인다. 이 작품이 가족서사를 통해 단막극의 평범한 비사를 다루는 듯 하면서도, 혹은 주말 드라마의 낯익은 고민들을 풀어내는 듯 하면서도, 나름 소설의 품격을 유지하는 힘은 바로 미스터리를 감싸고 있는 정이현 문체의 즐거운 달리기에 있는 것이다.

미스터리로 시작된 독서는 가족의 이야기로 들어와 또다른 미스터리를 통해 추동력을 얻는다. 등장인물인 `유지'라는 아이의 실종 사건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죽음과 실종이라는 미스터리를 장착하고, 본 궤도에 진입해 한 가족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원껏 쏟아주는 형태를 갖고 있다. 독자는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가 가까웠을때까지, 이 두 미스터리를 풀지 못한다.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체는 누구의 것이며, 아이의 실종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시원스레 이 소설속 나레이터는 답하지 않는다. 말은 끝까지 들어야하고, 독자는 마지막 페이지에 안착해야만 한다. 다만, 여러가지로 "집안 꼴 하고는(p.346)" 이라고 혀를 찰 만한 이 느슨한 가족 집단을 통해 독자는 자주 자신의 가족에 대해 생각케 된다. 미스터리는 흡인력을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그것은 부수적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독자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독자의 삶과 독자의 가족과 독자의 관계에 대해 묻고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의 매력은 그 질문들에 있다.


2. 사랑하고 싶다. 그러나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소설을 읽으며 감정이입할 수 있는 등장인물과 조우하는 일은 무척 행복한 경험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작가와 독자에게 모두 축복된 일이다. 소설을 통해 창조된 인물은 독자를 통해 살아 있는 인격을 부여받게 되고, 독자는 그에게서 인간의 냄새를 맡는다. 그러나 때론 어떤 소설들에선 한 인물에게서도 그러한 애정을 품을 수가 없는 경우가 있다. 인물들은 교훈적이지 못하다. 닮고 싶은 인물이 없다. 왜 소설을 읽는가에 대한 답은 그 발견의 과정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정이현의 작품 <너는 모른다>의 등장인물들은 어떤 부류인가? 그들에게선 인간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서 교훈을 얻지 않는다. 대신, 거리감을 두고 싶다. 나는 저렇게 살면 안돼 하고, 혀를 차게 된다. 작가는 교훈적인 인물을 이 작품에 심지 않았다. 고의적이다. 누구에게 독자는 의지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의 인물들은 독자에게 긍정적인 면들을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어딘가 모르게 부족하고, 안쓰럽고, 불행하다. 독자는 소설속 인물들을 오히려 위로하고 싶어진다. 아니, 그렇게 사는 것은 삶이 아니라고 조언하고 싶어진다. 소설밖 독자가 소설속 인물들에게 말을 걸고 싶다. <너는 모른다>의 가족을 구성하는 일원들의 삶은 척박하다. 작가의 고의성은 여기서 빛을 낸다. 내가 소설속에서 원하는 것은 닮고 싶은 인물에게 위로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 반대의 경험을 유도한다. 소설 읽기의 새로운 체험이다.

아버지 상호, 엄마 옥영, 큰딸 은성, 아들 혜성, 옥영의 친딸 유지. 사회 중산층을 이루는 다섯 가족. 그들은 사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생활하는데 지장을 주지 않고 남들 하는것보다 조금 더 누리고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아버지 상호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상호는 가족 모두에게 핵우산만큼이나 안정적인 생의 안전감을 전해주는 인물이다. 그의 혜택을 알게 모르게 받고 있는 가족들은 그러나 아버지 상호가 어떤 일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며,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상호는 엄격하고, 신경질적인 기질이 넘친다. 돈이 되는 일은 그것이 도덕적인 결핍을 갖고 있건 상관없다. 나와 가족은 중산층이며, 그것은 유지되어야 한다. 그것이 그의 삶의 로드맵이다.  아이의 실종 앞에서도,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여 경찰에 알리지 않는 사람. 나름대로 사설탐정을 고용하였으나 그릇된 상상력으로 아이가 자신의 부도덕한 직업 집단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지레짐작하는 피해의식을 지니고 사는 사람. 무늬없는 인격을 지닌 아버지. 이 가정에서 그저 현금 인출기같은 삭막한 정확성을 갖춘 사람이 바로 그다. "아빠는 지갑에서 수표 한 장을 뽑아주었다." p.101

엄마 옥영은 어떤가? 화교로서, 재혼이었던 상호와 사랑아닌 결혼을 한 결단력을 지닌 인물. 그러나 뒤짚어 보면, 사랑했던 사람과 누추한 사랑을 이어갈 자신도 없고, 더군다나 그 사랑을 잊지도 못하는 우유부단적 성질을 동시에 지닌 사람. 아이들의 방에 깨끗이 세탁한 옷가지와 수건들을 깔끔하게 쌓아두는 일을 잊지 않았던 성실한 주부지만, 가끔은 남편에게 거짓말을 하고 친정집이 아닌 대만의 옛 연인을 만나러 비행기표를 끊고 먼 이국으로 떠나기도 하는 충동적인 기질을 지닌 여자.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이 소설의 다른 인물들처럼 내면은 엉망인체로 방치하는 여자가 바로 옥영이다. 아이가 실종되는 날 옥영은 집을 비운다. 그녀의 영혼은 이미 오래전 가출중이었다. " 그날, 집에 안 계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 p. 147

상호의 전부인에게서 얻은 첫째딸 은성은 어떤가? 이 인물은 그간 정이현이 그려온 히스테릭한 도시여성을 압축한 형태를 보여주는 듯 하다. 구체적으로 그가 `도시적 감수성'을 갖고, 중산층의 젊은 여성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알 길 없으나, 그의 원작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보면, 그건 충분한 유추가 가능하다. 언제나 사랑에 목말라 하는 여자, 언제나 사랑에 대해선 피해의식을 갖고, 연애의 실패를 인생의 실패로 과장하고 확대하는 몽상가적 기질이 넘치는 여인. 그 과격함은 그녀가 가진 상처의 근원에서 발생된 폭력성까지로 확대된다. "말리는 남자의 가슴팍을 향해 칼날을 겨눈 것도 절대로 죽거나 죽이려는 뜻이 아니었다. 그저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얼마나 상처받았는지를...중략" p.29

이 소설에서 독자의 지지를 받을만한 긍정적인 요소를 지닌 인물로서 아들 혜성을 설정할 순 있겠다. 그는 번듯한 집안에서 별 탈없이 자란 의대생이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순응적이며, 연애에 실패하는 누나를 위로하고, 계모인 옥영을 악의없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배다른 막내 동생, 유지의 실종에 가장 큰 정신적 혼란을 겪고, 모든 것에 공정한 체 하는 아이. 그러나 그 내면은 얼마나 피폐하고, 영혼은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가? 그 불균형이 외부로 표출될때, 그는 일순간 초라한 방화범으로 변신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앞에서, 사랑에 두려움을 느끼는 정신병적 퇴행을 보여준다. "누군가 자신을 이토록 사랑한다는 게 혜성에게는 몹시도 무서운 일이었다." p.179

미스터리의 중심에 있는 가족 구성원 유지. 초등학생인 아이치고는 무척 조숙하다. 이 소설속에서 아이는 실종된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가출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유지는 이 가족의 비정상성을 고발하는 단초 역할을 해낸다. 공부도 잘하고, 음악에도 특출난 재능을 보여주는 아이. 그러나 아이는 그것을 즐기는 것보다는 모든걸 의무로 받아들인다. 그저 자신이 부유한 집안의 촉망받는 수재라는 인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이는 마치 연극을 하듯 모범적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아이의 가출이 말해주는 것은, 그 모든 것이 모래성에 지나지 않다는 고백과도 같다. 아이는 소통하고자 하나,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다.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번호를 눌렀다. 집이었다.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p.408

가족 구성원에 대해 개별적인 분석을 내 놓았으나, 이것은 곁가지에 불과하다. 이것은 그 인물들에 대한 `사실적'이거나 `진실'이 담겨 있는 묘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한계를 지닌다. 한가지 예를 들자. 아버지 상호는 이 소설속에서 비도덕적인 직업에 종사한다. 도덕적으로 보자면, 절대로 해서는 안될 일이다. 장기매매를 통해, 고수익을 올리는 무역업이라? 어떻게 이러한 일을 비범한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Only One, `그만'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그가 무척 정없고, 가족간의 유대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되긴 하지만, 그게 상호의 모든 것은 아니리라. 그는 무척 여리기도 하고, 딸 유지의 실종에 가장 큰 두려움과 공포와 해결책을 내놓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때 김상호가 얼마나 처절하게 무섭고 또 외로웠는지 알았더라면 혜성은 기꺼이 우유 한 잔을 따뜻이 데워와 아버지라는 이름의 남자에게 건넸을 텐데." p. 94 아버지의 일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고, 자신들의 안락한 삶이 상호의 희생위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도 크게 느끼지 않고, 않으려는 저 가족의 이기적인 태도들을 보라. 상호는 이 가족의 위기에 대한 책임을 혼자만 질 수 없다. 그것은 공정한게 아니다. 이 가족 모두가 공범인 것이다. 죄가 있다면, 공평히 다섯 등분을 해야 한다. 이 가족에 대한 분명한 관전평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호만의 문제는 아니다. 다섯 가족 모두, "너는 모르는" "쉽게 잘라 말할 수 없는" 저만의 사정을 갖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사랑이지만,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이 사랑에 대한 비자발성이 이 가족의 근원적인 소통불능의 원인이다. 그러나 아직 독자는 모두를 알 수 없다.

"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것은 `가족'의 문제라는 것을. 원인 모를 지독하고 남루하고 축축한 냄새가 코끝에 딱 달라붙어 오후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p 271 <너는 모른다>, 정이현



3. 단자(單子)화된 가족을 통해 생의 역할을 묻다

모든 것을 가졌으나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이 소설속 인물들은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풍요로움속에서 살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행한 것은 이 두 가지 요소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행복한 삶이란 흔히 물질적인 것에 기반한다. 실로 물질적인 것의 충족은 대단히 중요하다. 정이현의 소설은 그러나 이 부분을 삭제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중산층이란 꼬리표를 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부분으로 넘어가자. 아버지는 부유하고, 어머니는 지적이고 교양이 있다. 아이들은 모두 명문대를 다니고, 막내딸은 출중한 재원으로 자라나고 있다. 상호네 가족은 완벽하다. 현대 가족의 이상(理想)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에겐 네트워크가 없다. 소통의 수단이 없다. 그들은 가족이란 이름으로만 이론적으로 묶여 있다. 실제적인 교감이 없는 가족은 타인보다 더 멀게 느껴진다. 그래서 독자는 그들에게서 가족이란 익숙한 개념을 적용시키기가 어렵다. 그들의 삶은 단자화 되어 있는 것이다. 개별성 속에서 교류 없이 존재한다. 가족 구성원은 자신만의 세계를 배회한다. 그것이 그들에겐 익숙한 삶의 형태같다.

아버지는 왜 부도덕한 직업을 가졌을까? 그는 왜 돈을 벌고자 하는가? 부유한 생활, 안락한 삶, 가장으로서의 권위, 가족의 부양. 그 모두가 작은 목적이 될 순 있겠으나, 그게 궁극적인 삶의 목표인가? 삶의 목표는 부유함이 아니라 행복이란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니 상호는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주객전도(主客顚倒)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 옥영은 왜 과거의 사랑에 집착하는가? 왜 사랑없는 결혼생활을 이어가는가? 진정 옥영은 남편 상호를 사랑하고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무의미하다. 나레이터는 분명히 이 부부의 생활이 원만치 못함을 설명한다. 그들 사이엔 관계가 없다. 한 지붕밑에서 살아가는 것, 부부라는 형식적인 자리를 유지하고 각자의 생을 버티고 있는 것만이 그들의 목표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타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있으니까. 왜냐하면, "세상은 진실의 외피를 둘러쓴 악의로 가득 차 있어서" 호시탐탐 그들의 몰락을 고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청춘을 온통 내맡긴 첫째 딸 은성은 구제불능처럼 보인다. 히스테릭한 성격과 발작은 온통 실패한 연애에 대한 반작용의 결과다. 그녀의 모습은 약간은 과장된 듯 하지만, 매번 사랑에 실패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관찰되는 병리적인 현상이다. 사랑을 갈망하지만, 사랑을 쟁취하려고만 드는 은성은 사랑에 상처받았으나, 사랑의 본질에 대한 공부가 더 필요하다. 어쩌면 그건 그녀의 책임이 아닐 것이다. 불온한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가 온전한 사랑을 피워낼 순 없다. 이러한 실패는 혜성의 자아정체성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생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품고 폭팔하는 젊음은 통제가 불가하다. 그가 명문 의대생이라는 신분을 감추고, 일개 방화범으로 변신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 소설은 묻는다. 우린 저들만큼의 생의 무게감을 견디며 살고 있는가? 때론 삶이 잘못된 길에 들어서 헤매이는 순간 그 오류를 수정할 용기는 없는가? 혹은 자신을 타인의 시선따위에 방치해 두진 않는가? 이 소설을 막장 드라마의 일화처럼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이현은 그리 간단치 않은 작가라고 생각한다. 막장 드라마를 보기 싫어, 소설책을 잡은 독자들이 한둘이겠는가? 그러므로, 평면적인 의미를 결론으로 끌어들일 순 없다. 그건 애써 이 소설의 독서에 참여한 독자에게 배당될 합당한 소득이 아니다. 우린 좀더 다른, 좀더 심오한 결론에 도달하고 싶다.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에 몰입하는 이윤 우리가 안정감을 원하기 때문이다. 평균치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은 타인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해서이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용기가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모든 평균치의 `성실한 일상'을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안이 엉망이 되어도, 밖은 멀쩡해야 한다. 매년 영혼이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지만, 예,적금 통장의 잔고는 훌륭하게 늘어나고 있다. 이 둘을 모두 다 적당히 채워넣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좀더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 모두를 충족하는 균형감을 발휘하기엔 우린 너무 약삭빠르지 못하다. 세상은 그래서 상처를 주고, 우리는 그저 묵묵히 상처를 감내한다. 이 소설속 인물들이 삶의 언저리를 배회하는 것은 그 수동성 때문이다.

이 소설속의 가족들은 물론 현실에서 흔히 보는 가족의 예시는 되지 못한다. 예시된 가족은 극단의 전형이다. 더불어, 재혼가정이라는 설정을 하나 더했다. 평범치 않은 가족인것은 분명하다. 이 소설을 읽어가면서 독자는 자신의 가족, 그 구성원의 일면을 생각할 것이다. 가족은 이 지상에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이자 따뜻한 소집단이다. 에베레스트의 정상을 정복하기 위해, 흔히 등반대는 각 고점마다 베이스캠프를 마련한다. 거대한 산과 유약한 한 인간이 대치할 수 있는 것은, 한평 남짓한 텐트안의 온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받쳐든 뜨거운 차 한 잔이 다시 정상을 오르는 사람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가족 구성원과 그 가정이란 공간은 거친 세상을 헤쳐나가는 인간이 쉬어가야할 최후의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다. 가정이 없고, 가족의 유대감이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치 베이스캠프 하나 마련하지 않고, 스트레이트로 거대한 산을 오르는 사람과 같다. 무모한 일이다. 가정, 우리는 그곳에서 태어났고, 사랑을 받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가족은 온전히 내가 믿고, 사랑할 존재들이 모여 있는 신뢰가 넘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믿음이 깨어지는 순간이 인생의 어느 순간 찾아오게 된다. 순진무구한 신뢰가 깨어질 때,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충격은 크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의 가치를 송두리째 흔들어놓기도 한다. 어린 시절 모든 것이 완벽하게 보였던 부모님과 가족 구성원들의 면면들이 커가면서 실망과 원망의 소굴로 변한다. 당신은 누구에게 위로받아야 하는가?

단자화된 가족은 관계가 없다. 상호와 옥영, 상호와 아이들은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가족이란 아름다운 이름으로 묶여 있다. 실제의 관계가 소원할지라도, 전혀 소통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상호와 옥영은 부부라는 이름으로, 상호와 아이들은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관계로,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그들은 가족을 재건해야 한다. 사랑을 받아줘야 한다. 좀더 자발적으로 사랑하기 위해 지금 이 순간 말이 아닌 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타인처럼, 관계를 끊어버릴 수 없는 가족 구성원에게 남는 길은 그러므로, `인내하는' 것이다. 서로를 참아주는 것, 한때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 자신들을 잘 알고, 사랑하고, 위해주던 관계였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인내하고, 이해하는 길을 선택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너는 모른다' 라는 명제 때문이다. 너는 모른다는 명제는 무책임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것은 사랑이며, 이해다. 그것은 엉망이 되어버린 관계를 회복시키는 마법의 주술이다. 알지 못하면, 일단 인내해야 한다. 그래야 단자화된 가족은 다시 합일될 가능성을 품는다.



4. 결론

정이현의 신작 <너는 모른다>는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으나 전혀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행복의 기원을 묻고, 가족의 정체를 묻고, 사랑의 의미를 묻고, 생의 역할을 묻는다. 이 소설은 독자에게 많은 질문을 쏟아 낸다. 미스터리를 파고들면서 독자는 끝임없이 작가의 질문을 요구받는다. 아버지로서의 역할은 무엇인가? 돈을 벌어다주는 것이 아버지의 역할은 아니다. 그러나 일과 가족의 경계에서 균형감을 잡지 못할때 흔히 아버지는 가족내의 낯선 타인으로 자리잡는 경우가 흔하다. 어머니의 역할은 무엇인가? 아이들에 대한 훈육과 가계의 경제를 지휘하는 것에 몰두하는 것인가? 가족의 범주를 뛰어넘어, 이 작품은 각자에게 짐지워진 생의 의미를 묻고 있기도 하다. 삶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그저 생의 언저리에서 배회하는 주인공들의 삶은 불안하고, 모순된다. 그러나 회복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유지의 실종은 파국의 시작이지만, 인물들이 치유되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상처를 들어내고 문제점을 파악하는 단초가 된다. 이 소설은 어떤 관계도 회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며 끝난다.

"나는 소파 뒤에 서서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조용한 세계다. 문득 내가 이들을 영원토록 알 수 없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그곳을 향해 나는 가만히 한 발을 내딛는다."  정이현, <너는 모른다> p. 486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다. 누구나 서로의 인생을 알 수 없다. 본인조차 자신의 삶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 구성원을 모두다 아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된다. 결혼이란 이름으로 두 남녀가 결합하여 하나가 되지만, 상대의 영혼까지를 소유하려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소유하려는 욕망은 언제나 사랑보다 욕심에 그친다. 독자는 이 작품을 통해, M. 스캇펙이 말하듯 `지각있게' 사랑하는 법, 사랑이란 단순히 `거저주는 것'이 아니라 `심사숙고'가 필요하며, 사랑이 때론 고통스런 결정을 내리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가족은 단지 상징에 불과하다. 사랑은 가족사이에만 있질 않다. 모든 `관계'속에 존재하고 있다.  

 



                                                                

                                                         2010.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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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 자서전
마크 트웨인.찰스 네이더 지음, 안기순 옮김 / 고즈윈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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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일까?  본격적으로 자서전을 읽기 시작한것은 이제 1년이 넘었지만 겨우 몇 권의 자서전을 완독했을 뿐이다. 러셀이나 간디의 자서전이 서재의 어느 구석에서 벌써 1년째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읽고자하나 쉽게 손이 가지 않는 것은 대하소설이나 자서전이나 매 한가지다.  읽고자하는 것은 이 책들이 독자의 도전을 기다린다는 점이다. 쉽게 손이 가지 않는 것은,  그 분량 때문이겠다.  그러나 읽는 중에, 또 읽은 후에 가장 좋은 느낌을 전해주는 것이 자서전이었다.  그만큼 자서전에는 리얼리티라는 고유한 매력이 숨쉬고 있다.  이 사실성 속에서 내가 살아보지 못한, 혹은 내가 걸어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풍경들을 볼 수 있다. 자서전은 타인의 인생 메뉴얼이다.  인생이 거기서 거기인데, 이미 겪어본 사람들의 인생에서 얻을게 많지 않겠는가?  자서전 문학이 가지고 있는 이 고유한 특성은 읽는 재미와 함께 독자에게 큰 성취감을 안겨줄 것이다. 

그렇게, 2009년 12월 한 달 동안 빼곡하게 500여 페이지와 꽤 긴 시간적 거리감이란 갑옷속에서 좀처럼, 독자의 손길이 닿지  않는 자서전한 권을 손에 잡았다.  <마크 트웨인 자서전>이다.   마크 트웨인은 1835년생이다.  까마득하다.  미국 미주리 주에서 태어났다. 19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그의 이름보다 더 유명한 작품들이 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 <톰 소여의 모험>, <왕자와 거지>.  안타깝게도 어린시절 이들 작품을 읽지 못했음에도, 나는 마크 트웨인이나 그의 작품들이 무척 눈에 익다.  유년시절 책이 아니라 티브이 만화영화를 통해 이 작품들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읽은것보단 어쩌면 더 생생했을 수도 있겠다.  왜! 유년이었으니까.   마크 트웨인이란 작가의 위치는 어디쯤 될까?   20세기의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이란 책에서 마크 트웨인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미국의 모든 현대문학은 마크 트웨인이 쓴 한 권의 책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책을 읽을 때 아이들이 검둥이 짐을 탈출시키는 장면에서 읽기를 멈추어야 해요.  그게 진짜 끝이거든요.  나머지 이야기는 그저 눈속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 책은 미국의 최고 걸작이고 미국의 모든 글은 그 작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 이후로도 그만큼 훌륭한 작품은 나오지 않았어요."  어니스트 헤밍웨이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 中

이 자서전의 특징은 한 인간의 생애 대한 무한한 솔직함과 세밀함, 거침없는 유머와 고백이 될 것이다.  내면의 풍경을 솔직하게 담아내는 것이 자서전 저자의 의무는 아니다. 또 내면을 드러내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도 아니다. 자신의 개인사를 밝히는 것은, 문학작품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돌려하는 것보단 몇 배 어려운 일이다.  일단 그것이 시가 되거나 소설이 되면, 작가에게 짐지워진 어떤 혐의는 모두 작품으로 옮겨가기 마련이다.  등장인물의 거친 입담이나 행동의 광폭함 같은건 문학작품 안에선 모두 용서가 된다. 그건 그 작품이 문학이란 옷을 입는 순간 현실세계와 거리감을 유지하는 자동적인 시스템 덕분이다.  자서전을 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면, 오직 자서전만이 그러한 방어장치를 갖지 못한다.  

마크 트웨인은 이 자서전에서 이런 위험성을 깊이 고려해, 자신의 자서전 출간을 사후로 설정했다.  그는 30대 후반부터 훗날 자서전의 일부분이 될 글들을 틈틈히 썼다.  그리고 1877년 42세때 본격적인 자서전 집필을 시작한다.  그의 자서전 원고들은 직접 타이프 되거나 구술되었다.  일정한 시간순서로 한 권의 자서전을 집필한 것이 아니라 일화 중심의 단편적인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의 자서전은 마크 트웨인의 사후에 편집인에 의해 세번 정도 다른 버전으로 출간된다.  이 책은 찰스 네이더라는 작가에 의해, 편집 출간된 찰스 네이더 판 자서전으로 1959년 출판 이후 그의 자서전으론 가장 큰 호평을 받았다.  마크 트웨인이 자서전의 사후 출판을 예고하며, 그 이유를 이 책의 서문에서 밝힌다.

"인간의 정신과 마음이 가장 솔직하고, 가장 자유롭고, 가장 사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은 연애편지다. 작가는 자신의 편지를 다른 사람이 보지 않으리라 확신하는 순간부터 무한한 표현의 자유를 느낀다. "  8p. 마크 트웨인 자서전  

무덤안에 잠자고 있는 순간,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그 다운 유머와 솔직함이 묻어난 표현이다.  그리고 그 말은 옳다.  그러나 연애편지는 진실이나 솔직함이 아니라, 목적의식과 과장됨이 더 살아 숨쉬는건 아닌가?  무한한 자유로움은 일기라는 장르에서 더 크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이 자서전을 일기처럼 썼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무덤안에 누워있으면 세상의 독자들이 그의 일기장을 훔쳐보든지 안 보든지 그건 문제될게 없기 때문이다.  참 속편하다.  그러니 글도 속편하게 썼겠다. 이 자서전이 어떤 식으로 서술되었을지 우린 여기서 감잡게 된다.  그의 공언대로 이 자서전은 삶의 원경과 근경 모두를 적절히 담아 내고 있다.  철저한 일화 중심의 서술은 자칫 너무 사소해서, 누군가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어린 시절에 대한 묘사는 자신이 살았던 미주리 주의 한니발에서의 추억을 담고 있다. 유년 시절의 동창생들에 대한 이야기나 동생을 짗궂게 놀려먹은 일 등을 이야기할때 만년의 그의 작가로서의 무게감이나 권위는 찾아볼 수 없다.  미시시피강을 배경으로 한 그의 유년의 기억은 <허클베린 핀의 모험>이란 소설의 기원을 확인해준다.  자서전의 초반에서 우린 문자로서 그린 한 편의 수채화를 보게 될 것이다. 놀랍도록 생생한 묘사들이 살아 숨쉰다.

그러나, 이 자서전 곳곳에서 그는 돈에 물들어 있는 미국을 비판하며, 종교나 국가권력, 동시대 유럽과 미국민의 오만함을 질타하기도 한다.  진중함이 균형잡힌 모습이다.   작가로서 지겨야 할 기품이란 요소를 우린 이 자서전 속에서 발견한다.  그것은 성역없는 비판의 정신이며, 자유에 대한 무한한 동경이다.  세상에 대해 생각대로 발언할 수 있는 용기다.   500여페이지란 육중한  자서전의 행간을 걸으며, 결국 독자는 마크 트웨인에게서 허리베리 핀의 환영을 보게 될 것이다.   철없는 장난 꾸러기 같지만, 자유와 우정을 위해 용감한 모험을 시도했던 그 철부지의 행동에서 노예해방과 평등이란 미국의 양심을 발견케 된다.  

19세기라는 시간적인 거리감과 전통있는 미국식 유머는 이 자서전의 몰입을 방해하는 면이 있다. 500여 페이지를 번역체의 싱거운 유머와 그 시절의 세밀한 풍경들,  가족과 친구들에 얽힌 시시한 일화를 가로지르며 읽는 일은 어쩌면 고욕이랄 수도 있었다.  인터넷 서점의 어느 구석에서 이 책에 대한 다른이의 리뷰를 구경하려 했더니,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이 자서전에 도전장을 내민이가 없단 말인가?  출판사의 화려한 광고문구인 "대가의 자유로움, 거인의 솔직함, 천재의 상상력, 그 모든 위대함으로 가득한 20세기 최고의 산문"이란 타이틀은  지나치게 과장된 면이 있다.  이러한 슬로건은 그의 작품,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란 고전에나 어울릴법 하겠지만, 이  자서전엔 부적절하다.  그것보단 자서전 장르에 하나의 개성으로서 오늘날 이 작품은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즉, 형식의 파괴다. 시간순서나 철저한 업적, 진중한 사건 위주로 서술 되어야 한다는 고정된 관념을 이 자서전이 가정 먼저 용기있게 파괴시킨 점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자서전을 읽으며 용기를 얻는다. 당신도 자서전을 쓸 수 있으며, 쓸만한 자격이 있다는 그것을 마크 트웨인은 이 책에서 손수 가르쳐 준다. 모든 평범한 이들의 삶은 독창성으로 가득찬 문학적 소재가 될 수 있음을 그는 확인시켜 준 것이다.

"엄마, 인디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믿었어요. 하지만 이제 인디언들이 틀렸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요. 이 말은 곧 우리가 틀릴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나는 신과 천국이 정말로 있으면 좋겠다고 아니면 좀 더 좋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고 기도하고 있어요." p. 299  마크 트웨인 자서전 

19세기를 주름잡았던 한 위대한 작가의 만년을 이 자서전에서 읽는 일은 지금도 쓸쓸하다.  마크 트웨인은 1910년 그가 죽기 전에 힘겨운 시절을 보낸다.  작가로서 큰 부를 얻었지만, 1894년 운영하던 출판사의 파산으로 경제적 곤경에 처한다. 빚을 갚기 위해 그는 몸이 불편한 부인과 둘째딸 클라라를 데리고 세계를 돌며 강연여행을 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이미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 그 명성으로 부를 쌓아 편안한 시절을 보내야 할 때, 그는 가족을 이끌고 돈을 벌기 위해 노년의 강연여행이란 일을 시작했던 것이다.  인생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교훈을 그는 죽을때까지 가르쳐준다.  이 시절 그가 무척 아꼈던 큰딸이자, 자신의 자서전을 어린 시절 써 내기도 했던 딸, 수지를 병으로 잃었다.  불행은 겹으로 오는가?  1904년에는 평생,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아내를 잃었고 죽기 일년전 크리스마스 이브엔 막내딸 진을 먼저 떠나보냈다.  돈을 모두 갚자, 불행이 물밀듯이 쏟아져 내려온 것이다.  자서전의 마지막을 장식한 "한때 너무도 풍요로웠던 내가 지금은 얼마나 가련한지!"라는 말의 울림은 한 세기가 훌쩍 지났지만 마크 트웨인의 상심의 깊이를 측정하게 해준다. 

큰딸 수지는 마크 트웨인을 닮아 무척 명랑하고, 사려깊은 아이였다.   20대에 요절하지만 않았다면, 훗날 작가로서 대성할 수재였다.  수지의 일곱 살을 묘사하면서 마크 트웨인이 인간의 삶에 대해 짧게 요약한 문장은 곧 이 자서전의 특징중 하나인 페이소스(연민의 감정)를  담아내고 있다. 그가 살았던 19세기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1세기나 인간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반복된 흐름은 인간이 존재하는한 계속될 것이다. 약간은 비극적이고, 염세적이긴 하지만 또한 어느정도의 진실을 담보한다.  반면, 이 자서전의 거대한 흐름을 요약하고 있는 듯한 문장이지만 가장 중요한 이 자서전의 요소 하나가 제외되어 있다. 그것은 `유머'다. 

"수지는 일곱 살 때 이미 인간의 덧없는 삶속에서 미친 듯이 반복되는 사건에 짓눌리고 상처받았다. 마치 억압받고 당혹스러워하는 성숙한 성인처럼 말이다.  수많은 사람이 태어나고 먹을 것을 위해서 일하고 땀 흘리고 고군분투한다.  언쟁을 벌이고 비난하고 싸운다.  서로 앞다투어 조그만 이권을 차지하려 한다. 그러면서 슬슬 나이를 먹기 시작하고 질병이 뒤따른다.  수치와 굴욕이 자존심과 허영에 상처를 입힌다.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기고 삶의 즐거움은 고통받는 슬픔으로 바뀐다.  고통, 근심, 비참함의 무게는 해가 거듭될수록 점점 무거워진다. 마침매 야망이 죽고 만다.  자존심이 사라진다. 허영이 무너진다. 그러고는 드디어 세상이 부여한 것 중에서 유일하게 독성이 없는 선물을 받는 순간에 도달하면서 세상에서 사라진다.  자신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는, 실수와 실패와 어리석음만을 저지른, 존재했었다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자신이 사라진 것에 대해 단 하루 애도를 표하고는 영원히 잊어 버리고 마는 그런 세상에서 말이다. 이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그들이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하면서 똑같이 무익한 길을 걷다가 똑같이 사라져간다. "  p. 298  마크 트웨이 자서전 

결국, 독자는 이 자서전을 읽으며 삶이 가진 풍요로움과 비애감을 깨닫게 된다. 극과 극이 섞여 조화로움을 이루는 것이 세상이다. 마크 트웨인은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 이 자서전을 써나가면서, 자신의 인생이 가진 다양성을 고려했다.  인생을 하나의 관점으로 서술하지 않았다.  유머와 페이소스가 함께 묻어나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이 균형감이 곧 이 자서전을 지탱하는 힘이다.  그러니 독자들은 어쩌면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 무언가에 너무 큰 기대를 하면 실망도 큰 법이다.  삶이 언제나 진중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가끔은 웃자.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욕해서도 안 된다.  이 자서전의 흐름처럼 삶은 모든 잡스러운 것들이 모여 있는 것이다.  잡스러운 것들은 사소한 법이다. 너무나 세속적인 것이어서 위대하지 않고, 가볍기조차 하다.  그것이 바로 삶이다.  잡스러움에 맞서 마크 트웨인식 유머를 인생에 초빙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마크 트웨인의 자서전은 지루하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도 가끔은 무척 지겨워진다.  그러나 지겨움은 인생의 해악이 아니라,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이 자서전의 어느 구석에서 한 줄, 문학에 대한 그의 가르침과 만났다.  "살아있는 가슴에서 나온 것이 바로 문학"이라고 그는 썼다. 이것은 문학에 대한 가장 근접한 정의같다.  이 자서전이 문학으로서 읽히는 이유는 행간에서 한 작가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다.  이 자서전이 놀랍도록 지겹지만, 기가막히게 생생한 이유가 거기에 있을까?



2010.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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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 - 김대중 잠언집
김대중 지음, 최성 엮음 / 다산책방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좋은 책은 책의 제목이나, 그 책의 지은이만 얼핏 보아도, 무한한 신뢰를 보낼 수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잠언집 <배움>은 내게 그러한 책 가운데 하나다.  민주화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지도자, 한국 최초의 노벨상을 수상한 자랑스런 한국인, 죽음의 고비를 수차례 넘기면서도 정치적 비전을 갖고, 용기있게 일평생을 살아왔던 정치인,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이끈 지도자, 김대중에 대한 빛나는 수식어는 무궁무진하다.

작년 우리는 두 명의 대통령과 영원히 작별했다.  누구의 말대로 `잃어버린 10년'을 설계하고, 리드했던 두 인물의 죽음은 아름답지 못했다.  그것은 슬펐고, 억울했다.  또 공교롭게도 그 죽음은 억지스러웠다. 마지막 그들이 남긴 족적과 행동은 유사했고, 그들의 말은 오래도록 우리들의 양심을 찔렀다.  이 두 지도자는 대통령이기전에 지식인이었다.  그들이 평가절하한 시대에 우린 살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절박한 언어를 기억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   

사람들은 이제 그들의 죽음을 잊어가고 있지만, 두 인물에 대한 출판시장의 활력은 더해간다.  이것은 아이러니다. 두 대통령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은 독자들의 욕망을 불지폈고, 출판계는 이들이 남긴 족적과 목소리를 책으로 펴내고 있다.  이 시대가 여전히 그 두분의 지혜와 언어를 필요로 함을 이 현상은 증명하는것 아닐까?

강진 여행 길,  200 여년 전 이땅의 야비한 권력으로부터 핍박받은 한 정치인이자 위대한 학자, 깨끗한 인간을 만나러 가는 길,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강진 유배지를 찾아나가서는 길에,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잠언집 <배움>을 고민없이 넣었다.  네 해 만에 찾아가는 길이다. 이번이 세번째 유배지로 가는 길이었다.  가는 길목, 차를 세우고, 김대중의 잠언집을 펴들었다.  처음부터 읽을 필요가 없다.  짧은 잠언들을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는 것은 오히려 어색하다.  잠언집은 우연히 책장을 넘기다, 우연처럼 어느 문장과 만나야 한다.  어떤 페이지에 멈춰서도, 살아 있는 그분의 언어는 예리한 칼날처럼 내 이성을 벼린다. 

"해방 후 지금까지 독재적 군사통치가 판을 칠 때 많은 사람들이 비판을 외면했다. `나는 야당도 아니고 여당도 아니다. 나는 정치와 관계없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을 봐왔다.  그러면서 그것이 중립적이고 공정한 태도인 양 점잔을 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악을 악이라고 비판하지 않고, 선을 선이라고 격려하지 않겠다는 자들이다. 스스로는 황희 정승의 처세훈을 실천하고 있다고 자기합리화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얼핏 보면 공평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은 공정한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은 비판을 함으로써 입게 될 손실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기회주의적인 태도다. 이것이 결국 악을 조장하고 지금껏 선을 좌절시켜왔다.  (중략) 그들은 또한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악한 자들을 가장 크게 도와준 사람이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란 말이 바로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   김대중 잠언집 <배움>, 185p

다산초당을 찾아가는 길목, 나는 그의 첫 유배지인 사의재에 들렀다.  이곳은 그가 강진에 유배와 첫 4년을 기거한 주막이 있던 터다.  그래도 한 시대를 풍미하고, 정조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사람이었건만, 폐족이 돼 버린 상황에서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피했다.  정약용은 강진에 와 제일 먼저 관에 들렀다. 일종의 신고식이었을 것이다.  유배온 인물이 관에 들르면 고을 사또가 기거할 곳을 정해주는게 관례였다.  그러나 그러한 상식은 무시되었다.  정약용은 한 겨울 밤, 하룻밤을 유숙할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겨우겨우 찾아들어간 주막의 나이든 여인이 그에게 거쳐를 내준다.  사람들이 천주쟁이요, 폐족이요, 쓰러진 권력이라 혹시 자신에게 해가 있을까, 멀리할때 이 나이든 여인은, 용기있게 다산의 위대한 성품을 알아보고 주막의 방 하나를 기꺼이 내준다.  이곳에 다산은 사의재란 이름을 붙였다.  사의재(四宜齋), 네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기거하는 집, 생각, 용모, 언어, 행동.  자신의 유배가 이 모든 것의 네 가지의 부족에서 왔음을 고백하는 겸손함일까?  유배지의 불안한 기운에 대한 반작용이었을까? 아니면 선비의 철저한 자기절제 일까?  중요한 것은 다산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다스리려 했다는 점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다산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옳은 길을 걸어왔다는 역사적 진실을 이제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대중을 짧은 시간 속일 수는 있지만, 오래도록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다산은 끊임없이 역사앞에 겸손하고, 역사의 거울앞에서 자신의 행동과 말씨와 언어와 용모를 비춰보려 노력했다.  그 시절 다산을 핍박하던 노론정권의 권력자들은 한시절 호사를 누렸겠으나, 오늘날 그 이름을 기억하는자 누구인가?  그 더렵혀진 이름을 또 기억한들 무엇하겠는가?   김대중의 잠언집에서 나는 다산의 삶이 가진 역사성을 발견했다.  " 내 삶의 존재양식"이란 제목의 글이다.

"나라를 사랑하고 그 겨레를 사랑한 사람은 마땅히 찬양받고 존경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들은 오히려 그로 인해서 박해를 받고 누명을 쓴다. 그러므로 의롭게 살려는 사람은 보상에서 만족을 얻으려 하지 말고 자기 삶의 존재양식 그 자체에서 만족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역사는 반드시 바른 보답을 준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받아야 한다. "  김대중 잠언집 <배움>, 63p

이 책은 김대중이란 한 인간의 인생이 녹아 있는 잠언집이다. 문장 하나하나에는 그의 삶에서 건져올린 가장 순결한 진실이 담겨 있다. 그것은 개인사와 가정, 그리고 국가의 미래와 시민의 마음가짐까지를 포괄하며 넓고 웅대하다.  이 잠언집을 곁에 두고 싶다. 생각이 날때마다, 펴들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준다.  그들이 현실의 벽에 멈춰서려 할 때마다 보다 넓고 크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칠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로 궁색해 질때마다 그들에게 보다 큰 비전을 제시할 것이다.   정치의 일선에서 물러나 조용히 독서하며 소일하고 싶어하던 노무현 대통령은 황망히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노대통령의 죽음을 애통해하던 그는 자신이 목숨을 걸고 지켜냈던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것을 지켜보며 분노하다 노환이 악화돼 그 뒤를 따랐다.  올 해 우리는 두 명의 대통령을 잃어버렸다.  역사속의 다산처럼 그들은 역사안에 잠들어 있다.   추모열기는 식은걸까?

올해 우린 경제 위기를 가장 빠르게 극복하고, 내년 4~5% 경제 성장을 예상하고 있다, 고 언론들은 호들갑이다.  금융위기에서 이렇게 발빠르게 탈출한 나라는 지구상에 없단다.   그러나 용산사태로 희생된 세입자들의 주검은 아직도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차가운 냉동고에서 이 겨울을 보내고 있다. 복지예산, 교육예산 등을 삭감하고 진행되는 일사천리의 4대강 사업을 통해, 우리는 홍수가 없는 나라, 최첨단 로봇 물고기가 오염원을 찾아내는 나라에 살게 될 것이라 한다. 그러나 최첨단 건설기법이 동원된 청계천에선 녹조류가 번성해, 물이 썩어가고 있단다.  이러고도 남은 정권 3년간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까지 4대강 공사를 마감하려면, 공기를 단축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철도 파업을 주도했던 노동자들은 파면과 해임 등의 중징계를 당했고,  노조위원장은 구속되었다.  노동자에게 파면은 곧 생존권의 박탈과도 같다.  그러한 중징계를 화살 날리는 쉽게 쏘아대는 행복한 나라, 그래서 다시는 공공재의 근로자들이 파업을 하지 않는, 아침 출퇴근길이 불편하지 않는 건강한 나라에서 우린 살게 될 것이다.  헌법에서 노동3권은 삭제되어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되는 나라.  그러나 이땅에 노동자 아닌 자가 누구인가?  아침 출퇴근길의 당신은 노동자가 아니라 귀족이며, 노동권은 당신을 보호하지 않고, 누굴 보호하는가?  그래서 남는 것은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는 행복한 아침의 나라인가?

우린 상식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그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무지가 이 시대를 조각한 것이리라. 욕망과 탐욕이 죽은 괴물을 불러낸 것이리라.   김대중 대통령은 서거 몇 개월 전, 6.15선언 9돌 강연에서 기력이 쇠한 모습이지만, 피를 토하듯 한 마디 말을 남겼다.

“과거 50년 동안 피 흘려 쟁취한 민주주의가 위태로워 매우 걱정이다. 방관하면 악의 편이고 피맺힌 심정으로 말하는데,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김대중

다산초당에서 나는 오래도록 발길을 옮길 수 없었다.  시대 권력의 비열함이 횡횡하던 시대를 살았던 정약용.  그러나 그릇된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자신의 유배생활을 조금도 덜어내려 하지 않았던 강직한 선비가 바로 그였다.  엄혹한 시절을 인내하고, 오직 독서와 집필을 통해 후대의 민족이 나아갈 길에 대한 사색을 멈추지 않았던 그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부패한 정치지도자까지도 존경하는 위인이 되었다.  그것은 목민심서에서, 그가 남긴 유배지의 편지들에서, 절절히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공감과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김대중의 잠언집 <배움>을 읽으며 나는 정약용의 위대함과 강직함을 떠올린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이 역사라는 올곧은 관점을 신뢰하고, 역사발전이 결국 바른길에 들어설 것임을 확신했다는 것에 있다.  영원한 것은 없다.  더군다나 파시즘에 가까운 불소통의 독재, 반생태와 반민중의 권력은 반드시 실패한다.  실패해야 한다.  다산 정약용의 편짓글과 김대중 대통령의 문장들은 놀라운 확신과 희망으로 가득차 있다.  그 이윤 바로 그 때문이 아닐 것인가?



 

2009.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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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것을 먼저하라 - 스티븐 코비의 제4세대 시간경영
스티븐 코비 외 지음, 김경섭 옮김 / 김영사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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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한 해가 저무는 시간이다.  올 한 해 많은 계획들을 세웠고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한 해가 마무리 되는 이 즈음에 그 모든 계획들을 돌아보면 지켜진것보단 지켜지지 못한 것들이 더 많다.  그럼에도, 새롭게 내년의 계획을 세운다.  리드하지 못하면 끌려다니게 되는 것이 시간의 본질같다.  한 해 나는 언제나 시간 부족과 싸워야 했다.  내가 이루지 못한 모든 일의 원인은 또 시간 부족이다.  혐의는 언제나 시간이란 것에 있다.  모든 이에게 공평하고 넉넉하게 주어지는 시간같지만, 그 시간안에서 사는 일은 마치 전쟁과도 같다.  시간과의 전쟁은 언제쯤 끝날 것인가 ?  

스티븐 코비의 제 4 세대 시간경영이란 부제가 붙은 <소중한 것을 먼저하라FIRST THINGS FIRST>를 읽었다. 코비 박사는 시간을 4가지로 분류한다.  긴급한것, 긴급하지 않은 것, 중요한 것, 중요하지 않은 것.  이 개념은 그의 유명한 전작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 나온 시간의 분류방법이라 눈에 익다.   이 분류방법은 크게 공감간다.  먼저 크게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1차 분류한다. 다음으로 긴급한 것과 긴급하지 않은 것으로 2차 분류한다.  이를 X와 Y의 상하 그래프로 만들어보면, 사각형 박스안에 4가지 시간의 영역이 세워진다.   

이 4가지 시간의 영역가운데, 이 책은 가장 중요한 시간영역을 `제2상한'이라 이름 붙였다.  즉, 중요하지만 긴급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의 시간 가운데 중요한데, 긴급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운동, 자기계발, 미래 계획, 영적충만의 시간, 모든 예방 활동, 인간 관계의 구축, 가족과의 교감 등이다.  운동은 당장에 긴급하지 않다.  운동은 오늘 쉬어도 크게 티가 나지 않는다.  당장의 긴급한 일, 즉 집수리나 친구와의 약속 등에 밀리기도 한다. 그러나 계속 이같이 중요한데, 긴급하지 않다는 이유로 우리가 운동을 소홀히 한다면 언젠가는 크게 후회하게 된다.  그리고 이 오류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운동은 건강의 기본 자산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긴급하지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 예를 들면 티비시청 등에 제2상한의 시간들이 침범당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원칙을 정하고 사는 일이다. 시간 관리에서 원칙들에 자신의 시간을 맡기면 우리는 평화를 얻는다.  자신의 시간을 일일, 주간, 월간, 장기(3년~10년)로 세분해 관리한다.  이같이 세분하면 우리는 시간에 끌려다니지 않고, 시간를 리드하며 시간안에서 평화를 얻을 가능성이 높다.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  목표를 성취하기 전에 목표를 그려볼 수 있게 하는 상상력의 힘, 또 모임을 가지기 전에 모임을 계획할 수 있게 하는 상상력의 힘을 이용하여,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실체를 미리 창조해 볼 수 있다."  109p

때로 사람들은 계획을 세우면 자신이 계획대로 살 것이라 착각한다.  그런데 여기에 큰 오류가 있다. 사람들이 시간을 계획했다고해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재충전의 시간이다.  재충전의 시간은 언제 필요한가?  바로 한 주가 정리되는 일요일의 오후가 적당하다.  이를 위해서는 시간을 주간 단위로 관리하는게 필요하다. 일일과 년간 계획의 중간에 위치한 주간 계획 수립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은 이 책을 통해서다. 

이 책을 읽으며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주간 시간 관리의 중요성을 발견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2년전 시간 관리에 대한 책을 읽은 후, 지금껏 플랭클린 플래너라는 시간 관리 수첩을 사용해오고 있다.  내가 가는 모든 곳에는 이 수첩이 따라다닌다.  직장에서도 이 수첩은 항상 내 책상 옆에 하루종일 자리한다.  집에서도 마찬가지로, 필기도구와 함께 이 수첩은 나를 수행한다.  이 수첩을 사용하면서, 나름 계획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지난해, 내가 이룩한 작은 성과들에 대한 공을 나는 이 수첩에 돌리곤 한다. 그 만큼 내게 이 자그마한 수첩은 시간을 관리하는데 유용한 도구로 자리잡았다.  문제는, 년간, 일일, 계획을 세우는데 유용한 반면 주간 계획을 수립하는데는 부족함을 느꼈다. 내가 처음에 주간계획 관리 속지를 아예 구입하지 않고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내년도 일일속지를 산 후에 다시, 주간 속지를 샀다.  아내가 왜 똑같은 속지를 중복해서 구입했냐고 묻는다.  그건, 내가 이 책을 읽고, 주간 관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투자한  돈에 비해, 앞으로 1년간 정확하게 주간 계획이 잘 수립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불필요한 낭비가 아니다.  종이 한장으로 한 주가 깔끔하게 계획되고, 정리된다면 그만한 가치는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 플레너를 사용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사람들은 규칙적인 쇄신이나 재충전 없이는 원칙과는 다른 방향으로 떠밀려 가게 된다. 작용을 하는 대신 늘 작용을 받으며 살게 된다. "P.229

주관 시간 관리는 일일과 년간의 중간에 위치하면서, 두 영역의 차이를 좁히는 징검다리의 기능을 한다. 좁게 보고, 크게 보는 것이 필요한 반면, 적당한 거리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시간, 자신의 생활을 관찰하는 일도 필요하다. 그것을 이 책에선 쇄신이라 칭한다. 주간관리는 재충전과 쇄신을 가능하게 한다.   플레너의 장점은 그것을 이용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만 있다면, 그 사용자가 플레너 속지의 내용물에 따라 살아가게 해준다는 것이다.

"평화는 삶으로부터 물러나서 얻는 것이 아니라, 삶 복판에서 찾아 내는 것이다. " P.413

시간관리와 메모의 중요성을 우리는 잊기 쉽다.  꿈을 자신의 노트에 적어놓으면 그 꿈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말보다 기록의 힘이 세다.  즉, 시간을 관리한다는 것은 시간을 기록한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 관리를 잘 하려면 플레너와 같은 도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시간과의 싸움에서 평화를 얻는 다는 것은 자신이 정한 시간표 대로 우선 살아야가 한다는 것을 전제하긴 하지만, 4세대 시간 관리를 표명한 이 책에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시간계획대로 시간을 운영하기에 앞서, 시간을 어디에 투자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시간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지키는 일을 이 책의 저자는 사다리를 급히 오르는 일의 오류에 비유한다. 그러나 만약 열심히 올라 정상에 이르렀지만 사다리 자체를 잘못 놓았다면 어쩔 것인가?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는 이 책의 선언은 시간관리에 앞서 시간배정의 우열을 정하라는 메세지와 같다.   우리는 살면서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현명한 시간관리자는 `소중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원칙 중심인 사람들은 분별력 있고 즐겁게 현재를 살며, 신중하게 미래의 계획을 짜고, 융통성 있게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한다."  p.433

2009년 바쁘게 달려왔다.  올 한 해 난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고 투덜대고 살았다.  부족하다는 것은, 책 읽고, 생각하고, 글쓰는 시간에 맞춰진 평가다.  온전한 가내 수공업이었던 책읽기와 글쓰기는 시간을 많이 잡아먹곤 한다. 그러나 나는 학생도 아니고, 이제 직업인이며 생활인이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의 시간을 기다려주는 사람이 항상 곁에 있다.  그것은 가족이며, 지인들이다.  욕심을 부리려 할 때마다 내 삶은 균형을 잃을 것이다.  겨우 50권의 책을 올 한 해 읽었지만, 난 그보다 몇 배는 더 책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겨우 몇 편의 글을 썼지만, 사실 더 많이 생각하고 쓸 시간을 원했다.  허나, 간절하지만 내 시간을 온통 거기다만 바칠 순 없었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평화를 얻기 위해서다. 마침 이 책은 내게 시간 관리의 정교함과 철학을 건내준다.  그것은 시간에 욕심을 부리지 말고, 오직 균형과 분배를 통해 삶의 평화로움에 이르라는 것이다.  그래서 급한 것도, 즐거운 것도, 아닌 `소중한 것'을 먼저하라고 넌지시 조언해준다.  

읽는 내내 번역이 너무 투박하다 했다.  책의 옮긴이는 맨 뒷장에서 고백한다. " 이 책의 애벌 번역을 맡아 애써 주신 분들께 감사하며..."  애벌은 초벌번역이란 말인가?   난 애벌 번역이란 말이 도통 이해가 안간다.  이 책을 번역한 분도, 시간이 부족했나?   차라리 넉넉한 시간을 갖고 자신이 온전히 번역했다면, 지금보단 번역이 매끄럽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건, 그렇고 2010년에는 시간과 화해하고, 평화롭게 살자.  그래서 2010년 12월이 오면 노벨평화상, 아니 노벨시간평화상이나 하나 내 자신에게 수여하고 싶다.  :D

 


 

2009.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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