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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사랑은 단순히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지각 있게 주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지각 있게 주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지각 있게 칭찬하고, 지각 있게 비판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평안하게 해 주는 것과 더불어 지각 있게 논쟁 하고, 투쟁하고,맞서고, 몰아대고 밀고 당기는 것이다. 그것은 `지도'를 필요로 하는 관계다. 지각 있다는 것은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며, 판단은 본능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심사숙고해야 하며 때로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해야할 때도 있다" M. 스캇펙 <아직도 가야 할 길>
1. 미스터리로 엮은 한 가족의 이야기
작가 정이현의 소설을 읽기는 처음이다. 이제, 그의 산문집 2권을 읽은 것도 두 해째가 흘러간다. 글을 참 잘 쓰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감각적인 문체와 발랄한 감성이 가득한 문장들은 생기가 가득하고, 거침없이 읽힌다. 그의 산문집 <풍선>과 <작별>을 읽던 두 해 전 여름의 끝은 여전히 내 기억속에 즐거운 시간으로 자리잡았다. 그때 쓴 리뷰엔, 그 책을 통해 여름 휴가를 한 번 더 다녀온 기분이라고 적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오랫동안 정이현의 책을 읽을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매년 연초에 읽는 책엔 무언가 그 해 독서의 큰 로드맵을 그리기 마련이다. 1월의 모든 계획엔 나름의 진중함이 묻는다. 난 올 해 첫 우리 소설 읽기에 정이현을 택했다. 1월 1일 첫날, 발표되는 신춘문예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올핸 특히 문학평론에 관심이 갔다. 그 평론들을 읽으면서, 한 작가의 작품들을 깊이 읽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매년, 한해동안 집중해서 읽어볼만한 작가를 정하는것도 괜찮다는 느낌이다. 그것이 올해 내게 정이현이 될까 ?
미스터리는 내가 좋아하는 분야가 아니다. 아니, 그것보단 미스터리에 익숙하지 않다는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일부러 미스터리를 찾아읽는 독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이현은 신작 <너는 모른다>에서 가족서사에 미스터리를 첨가한다. 한 낯선 남자의 익사체에 대한 묘사로 시작되는 이 소설의 도입 부분을 읽는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작가가 심어놓은 블랙홀에 정신없이 빠져드는 모습을 한참이 지난후에야 깨닫게 된다. 글의 흡인력이란 이런 것인가?
"시체가 발견된 것은 5월의 마지막 일요일이었다.(첫문장,중략) 일요일 오전 열시, 회사원은 늦잠을 자고 교인은 기도를 하고 연인은 사랑을 속삭이며 누군가는 축구공을 찬다. 막 몽정을 시작한 사내아이들이 강가를 이유 없이 배회하는 것도, 강바닥을 흘러다니던 시체가 홀연히 떠오르는 것도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표류사체의 최초 발견자인 소년은 처음엔 그것이 설마 사람일 줄은 몰랐다고...(중략) " 정이현, <너는 모른다> 7-8p.
그러나 작가는 미스터리의 본질을 잘 파악하고 있다. 이 강렬한 블랙홀에 빠진 독자가 궁금증을 증폭하는 사이, 작가는 더이상 표류사체의 정체에 대해 입을 닫는다. 그리고 나레이터는 이제 한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사체의 정체를 알고 싶은가? 이 소설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 되도록이면 빨리 읽기를. 이 하나의 장치는 정이현의 감각적인 문체와 맞물려,소설읽기에 가독력을 높인다. 이 작품이 가족서사를 통해 단막극의 평범한 비사를 다루는 듯 하면서도, 혹은 주말 드라마의 낯익은 고민들을 풀어내는 듯 하면서도, 나름 소설의 품격을 유지하는 힘은 바로 미스터리를 감싸고 있는 정이현 문체의 즐거운 달리기에 있는 것이다.
미스터리로 시작된 독서는 가족의 이야기로 들어와 또다른 미스터리를 통해 추동력을 얻는다. 등장인물인 `유지'라는 아이의 실종 사건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죽음과 실종이라는 미스터리를 장착하고, 본 궤도에 진입해 한 가족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원껏 쏟아주는 형태를 갖고 있다. 독자는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가 가까웠을때까지, 이 두 미스터리를 풀지 못한다.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체는 누구의 것이며, 아이의 실종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시원스레 이 소설속 나레이터는 답하지 않는다. 말은 끝까지 들어야하고, 독자는 마지막 페이지에 안착해야만 한다. 다만, 여러가지로 "집안 꼴 하고는(p.346)" 이라고 혀를 찰 만한 이 느슨한 가족 집단을 통해 독자는 자주 자신의 가족에 대해 생각케 된다. 미스터리는 흡인력을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그것은 부수적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독자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독자의 삶과 독자의 가족과 독자의 관계에 대해 묻고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의 매력은 그 질문들에 있다.
2. 사랑하고 싶다. 그러나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소설을 읽으며 감정이입할 수 있는 등장인물과 조우하는 일은 무척 행복한 경험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작가와 독자에게 모두 축복된 일이다. 소설을 통해 창조된 인물은 독자를 통해 살아 있는 인격을 부여받게 되고, 독자는 그에게서 인간의 냄새를 맡는다. 그러나 때론 어떤 소설들에선 한 인물에게서도 그러한 애정을 품을 수가 없는 경우가 있다. 인물들은 교훈적이지 못하다. 닮고 싶은 인물이 없다. 왜 소설을 읽는가에 대한 답은 그 발견의 과정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정이현의 작품 <너는 모른다>의 등장인물들은 어떤 부류인가? 그들에게선 인간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서 교훈을 얻지 않는다. 대신, 거리감을 두고 싶다. 나는 저렇게 살면 안돼 하고, 혀를 차게 된다. 작가는 교훈적인 인물을 이 작품에 심지 않았다. 고의적이다. 누구에게 독자는 의지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의 인물들은 독자에게 긍정적인 면들을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어딘가 모르게 부족하고, 안쓰럽고, 불행하다. 독자는 소설속 인물들을 오히려 위로하고 싶어진다. 아니, 그렇게 사는 것은 삶이 아니라고 조언하고 싶어진다. 소설밖 독자가 소설속 인물들에게 말을 걸고 싶다. <너는 모른다>의 가족을 구성하는 일원들의 삶은 척박하다. 작가의 고의성은 여기서 빛을 낸다. 내가 소설속에서 원하는 것은 닮고 싶은 인물에게 위로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 반대의 경험을 유도한다. 소설 읽기의 새로운 체험이다.
아버지 상호, 엄마 옥영, 큰딸 은성, 아들 혜성, 옥영의 친딸 유지. 사회 중산층을 이루는 다섯 가족. 그들은 사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생활하는데 지장을 주지 않고 남들 하는것보다 조금 더 누리고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아버지 상호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상호는 가족 모두에게 핵우산만큼이나 안정적인 생의 안전감을 전해주는 인물이다. 그의 혜택을 알게 모르게 받고 있는 가족들은 그러나 아버지 상호가 어떤 일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며,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상호는 엄격하고, 신경질적인 기질이 넘친다. 돈이 되는 일은 그것이 도덕적인 결핍을 갖고 있건 상관없다. 나와 가족은 중산층이며, 그것은 유지되어야 한다. 그것이 그의 삶의 로드맵이다. 아이의 실종 앞에서도,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여 경찰에 알리지 않는 사람. 나름대로 사설탐정을 고용하였으나 그릇된 상상력으로 아이가 자신의 부도덕한 직업 집단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지레짐작하는 피해의식을 지니고 사는 사람. 무늬없는 인격을 지닌 아버지. 이 가정에서 그저 현금 인출기같은 삭막한 정확성을 갖춘 사람이 바로 그다. "아빠는 지갑에서 수표 한 장을 뽑아주었다." p.101
엄마 옥영은 어떤가? 화교로서, 재혼이었던 상호와 사랑아닌 결혼을 한 결단력을 지닌 인물. 그러나 뒤짚어 보면, 사랑했던 사람과 누추한 사랑을 이어갈 자신도 없고, 더군다나 그 사랑을 잊지도 못하는 우유부단적 성질을 동시에 지닌 사람. 아이들의 방에 깨끗이 세탁한 옷가지와 수건들을 깔끔하게 쌓아두는 일을 잊지 않았던 성실한 주부지만, 가끔은 남편에게 거짓말을 하고 친정집이 아닌 대만의 옛 연인을 만나러 비행기표를 끊고 먼 이국으로 떠나기도 하는 충동적인 기질을 지닌 여자.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이 소설의 다른 인물들처럼 내면은 엉망인체로 방치하는 여자가 바로 옥영이다. 아이가 실종되는 날 옥영은 집을 비운다. 그녀의 영혼은 이미 오래전 가출중이었다. " 그날, 집에 안 계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 p. 147
상호의 전부인에게서 얻은 첫째딸 은성은 어떤가? 이 인물은 그간 정이현이 그려온 히스테릭한 도시여성을 압축한 형태를 보여주는 듯 하다. 구체적으로 그가 `도시적 감수성'을 갖고, 중산층의 젊은 여성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알 길 없으나, 그의 원작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보면, 그건 충분한 유추가 가능하다. 언제나 사랑에 목말라 하는 여자, 언제나 사랑에 대해선 피해의식을 갖고, 연애의 실패를 인생의 실패로 과장하고 확대하는 몽상가적 기질이 넘치는 여인. 그 과격함은 그녀가 가진 상처의 근원에서 발생된 폭력성까지로 확대된다. "말리는 남자의 가슴팍을 향해 칼날을 겨눈 것도 절대로 죽거나 죽이려는 뜻이 아니었다. 그저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얼마나 상처받았는지를...중략" p.29
이 소설에서 독자의 지지를 받을만한 긍정적인 요소를 지닌 인물로서 아들 혜성을 설정할 순 있겠다. 그는 번듯한 집안에서 별 탈없이 자란 의대생이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순응적이며, 연애에 실패하는 누나를 위로하고, 계모인 옥영을 악의없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배다른 막내 동생, 유지의 실종에 가장 큰 정신적 혼란을 겪고, 모든 것에 공정한 체 하는 아이. 그러나 그 내면은 얼마나 피폐하고, 영혼은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가? 그 불균형이 외부로 표출될때, 그는 일순간 초라한 방화범으로 변신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앞에서, 사랑에 두려움을 느끼는 정신병적 퇴행을 보여준다. "누군가 자신을 이토록 사랑한다는 게 혜성에게는 몹시도 무서운 일이었다." p.179
미스터리의 중심에 있는 가족 구성원 유지. 초등학생인 아이치고는 무척 조숙하다. 이 소설속에서 아이는 실종된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가출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유지는 이 가족의 비정상성을 고발하는 단초 역할을 해낸다. 공부도 잘하고, 음악에도 특출난 재능을 보여주는 아이. 그러나 아이는 그것을 즐기는 것보다는 모든걸 의무로 받아들인다. 그저 자신이 부유한 집안의 촉망받는 수재라는 인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이는 마치 연극을 하듯 모범적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아이의 가출이 말해주는 것은, 그 모든 것이 모래성에 지나지 않다는 고백과도 같다. 아이는 소통하고자 하나,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다.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번호를 눌렀다. 집이었다.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p.408
가족 구성원에 대해 개별적인 분석을 내 놓았으나, 이것은 곁가지에 불과하다. 이것은 그 인물들에 대한 `사실적'이거나 `진실'이 담겨 있는 묘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한계를 지닌다. 한가지 예를 들자. 아버지 상호는 이 소설속에서 비도덕적인 직업에 종사한다. 도덕적으로 보자면, 절대로 해서는 안될 일이다. 장기매매를 통해, 고수익을 올리는 무역업이라? 어떻게 이러한 일을 비범한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Only One, `그만'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그가 무척 정없고, 가족간의 유대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되긴 하지만, 그게 상호의 모든 것은 아니리라. 그는 무척 여리기도 하고, 딸 유지의 실종에 가장 큰 두려움과 공포와 해결책을 내놓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때 김상호가 얼마나 처절하게 무섭고 또 외로웠는지 알았더라면 혜성은 기꺼이 우유 한 잔을 따뜻이 데워와 아버지라는 이름의 남자에게 건넸을 텐데." p. 94 아버지의 일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고, 자신들의 안락한 삶이 상호의 희생위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도 크게 느끼지 않고, 않으려는 저 가족의 이기적인 태도들을 보라. 상호는 이 가족의 위기에 대한 책임을 혼자만 질 수 없다. 그것은 공정한게 아니다. 이 가족 모두가 공범인 것이다. 죄가 있다면, 공평히 다섯 등분을 해야 한다. 이 가족에 대한 분명한 관전평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호만의 문제는 아니다. 다섯 가족 모두, "너는 모르는" "쉽게 잘라 말할 수 없는" 저만의 사정을 갖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사랑이지만,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이 사랑에 대한 비자발성이 이 가족의 근원적인 소통불능의 원인이다. 그러나 아직 독자는 모두를 알 수 없다.
"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것은 `가족'의 문제라는 것을. 원인 모를 지독하고 남루하고 축축한 냄새가 코끝에 딱 달라붙어 오후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p 271 <너는 모른다>, 정이현
3. 단자(單子)화된 가족을 통해 생의 역할을 묻다
모든 것을 가졌으나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이 소설속 인물들은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풍요로움속에서 살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행한 것은 이 두 가지 요소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행복한 삶이란 흔히 물질적인 것에 기반한다. 실로 물질적인 것의 충족은 대단히 중요하다. 정이현의 소설은 그러나 이 부분을 삭제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중산층이란 꼬리표를 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부분으로 넘어가자. 아버지는 부유하고, 어머니는 지적이고 교양이 있다. 아이들은 모두 명문대를 다니고, 막내딸은 출중한 재원으로 자라나고 있다. 상호네 가족은 완벽하다. 현대 가족의 이상(理想)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에겐 네트워크가 없다. 소통의 수단이 없다. 그들은 가족이란 이름으로만 이론적으로 묶여 있다. 실제적인 교감이 없는 가족은 타인보다 더 멀게 느껴진다. 그래서 독자는 그들에게서 가족이란 익숙한 개념을 적용시키기가 어렵다. 그들의 삶은 단자화 되어 있는 것이다. 개별성 속에서 교류 없이 존재한다. 가족 구성원은 자신만의 세계를 배회한다. 그것이 그들에겐 익숙한 삶의 형태같다.
아버지는 왜 부도덕한 직업을 가졌을까? 그는 왜 돈을 벌고자 하는가? 부유한 생활, 안락한 삶, 가장으로서의 권위, 가족의 부양. 그 모두가 작은 목적이 될 순 있겠으나, 그게 궁극적인 삶의 목표인가? 삶의 목표는 부유함이 아니라 행복이란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니 상호는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주객전도(主客顚倒)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 옥영은 왜 과거의 사랑에 집착하는가? 왜 사랑없는 결혼생활을 이어가는가? 진정 옥영은 남편 상호를 사랑하고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무의미하다. 나레이터는 분명히 이 부부의 생활이 원만치 못함을 설명한다. 그들 사이엔 관계가 없다. 한 지붕밑에서 살아가는 것, 부부라는 형식적인 자리를 유지하고 각자의 생을 버티고 있는 것만이 그들의 목표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타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있으니까. 왜냐하면, "세상은 진실의 외피를 둘러쓴 악의로 가득 차 있어서" 호시탐탐 그들의 몰락을 고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청춘을 온통 내맡긴 첫째 딸 은성은 구제불능처럼 보인다. 히스테릭한 성격과 발작은 온통 실패한 연애에 대한 반작용의 결과다. 그녀의 모습은 약간은 과장된 듯 하지만, 매번 사랑에 실패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관찰되는 병리적인 현상이다. 사랑을 갈망하지만, 사랑을 쟁취하려고만 드는 은성은 사랑에 상처받았으나, 사랑의 본질에 대한 공부가 더 필요하다. 어쩌면 그건 그녀의 책임이 아닐 것이다. 불온한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가 온전한 사랑을 피워낼 순 없다. 이러한 실패는 혜성의 자아정체성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생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품고 폭팔하는 젊음은 통제가 불가하다. 그가 명문 의대생이라는 신분을 감추고, 일개 방화범으로 변신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 소설은 묻는다. 우린 저들만큼의 생의 무게감을 견디며 살고 있는가? 때론 삶이 잘못된 길에 들어서 헤매이는 순간 그 오류를 수정할 용기는 없는가? 혹은 자신을 타인의 시선따위에 방치해 두진 않는가? 이 소설을 막장 드라마의 일화처럼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이현은 그리 간단치 않은 작가라고 생각한다. 막장 드라마를 보기 싫어, 소설책을 잡은 독자들이 한둘이겠는가? 그러므로, 평면적인 의미를 결론으로 끌어들일 순 없다. 그건 애써 이 소설의 독서에 참여한 독자에게 배당될 합당한 소득이 아니다. 우린 좀더 다른, 좀더 심오한 결론에 도달하고 싶다.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에 몰입하는 이윤 우리가 안정감을 원하기 때문이다. 평균치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은 타인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해서이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용기가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모든 평균치의 `성실한 일상'을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안이 엉망이 되어도, 밖은 멀쩡해야 한다. 매년 영혼이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지만, 예,적금 통장의 잔고는 훌륭하게 늘어나고 있다. 이 둘을 모두 다 적당히 채워넣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좀더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 모두를 충족하는 균형감을 발휘하기엔 우린 너무 약삭빠르지 못하다. 세상은 그래서 상처를 주고, 우리는 그저 묵묵히 상처를 감내한다. 이 소설속 인물들이 삶의 언저리를 배회하는 것은 그 수동성 때문이다.
이 소설속의 가족들은 물론 현실에서 흔히 보는 가족의 예시는 되지 못한다. 예시된 가족은 극단의 전형이다. 더불어, 재혼가정이라는 설정을 하나 더했다. 평범치 않은 가족인것은 분명하다. 이 소설을 읽어가면서 독자는 자신의 가족, 그 구성원의 일면을 생각할 것이다. 가족은 이 지상에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이자 따뜻한 소집단이다. 에베레스트의 정상을 정복하기 위해, 흔히 등반대는 각 고점마다 베이스캠프를 마련한다. 거대한 산과 유약한 한 인간이 대치할 수 있는 것은, 한평 남짓한 텐트안의 온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받쳐든 뜨거운 차 한 잔이 다시 정상을 오르는 사람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가족 구성원과 그 가정이란 공간은 거친 세상을 헤쳐나가는 인간이 쉬어가야할 최후의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다. 가정이 없고, 가족의 유대감이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치 베이스캠프 하나 마련하지 않고, 스트레이트로 거대한 산을 오르는 사람과 같다. 무모한 일이다. 가정, 우리는 그곳에서 태어났고, 사랑을 받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가족은 온전히 내가 믿고, 사랑할 존재들이 모여 있는 신뢰가 넘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믿음이 깨어지는 순간이 인생의 어느 순간 찾아오게 된다. 순진무구한 신뢰가 깨어질 때,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충격은 크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의 가치를 송두리째 흔들어놓기도 한다. 어린 시절 모든 것이 완벽하게 보였던 부모님과 가족 구성원들의 면면들이 커가면서 실망과 원망의 소굴로 변한다. 당신은 누구에게 위로받아야 하는가?
단자화된 가족은 관계가 없다. 상호와 옥영, 상호와 아이들은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가족이란 아름다운 이름으로 묶여 있다. 실제의 관계가 소원할지라도, 전혀 소통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상호와 옥영은 부부라는 이름으로, 상호와 아이들은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관계로,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그들은 가족을 재건해야 한다. 사랑을 받아줘야 한다. 좀더 자발적으로 사랑하기 위해 지금 이 순간 말이 아닌 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타인처럼, 관계를 끊어버릴 수 없는 가족 구성원에게 남는 길은 그러므로, `인내하는' 것이다. 서로를 참아주는 것, 한때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 자신들을 잘 알고, 사랑하고, 위해주던 관계였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인내하고, 이해하는 길을 선택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너는 모른다' 라는 명제 때문이다. 너는 모른다는 명제는 무책임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것은 사랑이며, 이해다. 그것은 엉망이 되어버린 관계를 회복시키는 마법의 주술이다. 알지 못하면, 일단 인내해야 한다. 그래야 단자화된 가족은 다시 합일될 가능성을 품는다.
4. 결론
정이현의 신작 <너는 모른다>는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으나 전혀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행복의 기원을 묻고, 가족의 정체를 묻고, 사랑의 의미를 묻고, 생의 역할을 묻는다. 이 소설은 독자에게 많은 질문을 쏟아 낸다. 미스터리를 파고들면서 독자는 끝임없이 작가의 질문을 요구받는다. 아버지로서의 역할은 무엇인가? 돈을 벌어다주는 것이 아버지의 역할은 아니다. 그러나 일과 가족의 경계에서 균형감을 잡지 못할때 흔히 아버지는 가족내의 낯선 타인으로 자리잡는 경우가 흔하다. 어머니의 역할은 무엇인가? 아이들에 대한 훈육과 가계의 경제를 지휘하는 것에 몰두하는 것인가? 가족의 범주를 뛰어넘어, 이 작품은 각자에게 짐지워진 생의 의미를 묻고 있기도 하다. 삶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그저 생의 언저리에서 배회하는 주인공들의 삶은 불안하고, 모순된다. 그러나 회복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유지의 실종은 파국의 시작이지만, 인물들이 치유되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상처를 들어내고 문제점을 파악하는 단초가 된다. 이 소설은 어떤 관계도 회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며 끝난다.
"나는 소파 뒤에 서서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조용한 세계다. 문득 내가 이들을 영원토록 알 수 없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그곳을 향해 나는 가만히 한 발을 내딛는다." 정이현, <너는 모른다> p. 486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다. 누구나 서로의 인생을 알 수 없다. 본인조차 자신의 삶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 구성원을 모두다 아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된다. 결혼이란 이름으로 두 남녀가 결합하여 하나가 되지만, 상대의 영혼까지를 소유하려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소유하려는 욕망은 언제나 사랑보다 욕심에 그친다. 독자는 이 작품을 통해, M. 스캇펙이 말하듯 `지각있게' 사랑하는 법, 사랑이란 단순히 `거저주는 것'이 아니라 `심사숙고'가 필요하며, 사랑이 때론 고통스런 결정을 내리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가족은 단지 상징에 불과하다. 사랑은 가족사이에만 있질 않다. 모든 `관계'속에 존재하고 있다.

2010. 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