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풍론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박하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단 하룻밤 만에 소설 한 편을 읽는 일은  짜릿한 경험이다. 나처럼 느린 독서를 선호하는 독자에겐 더욱 그렇다. 어쩌면 그건 추리소설이어서 가능한 일인 듯하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작년 겨울에 이어, 올 겨울 다시 읽었다.  순수문학에 집착하는 습벽을 갖고 있는 나는 지난 겨울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현대문학,2012년)이 건네준 따뜻한 위로와 감성을 잊을 수 없다.  문학의 형식은 중요치 않다.  무엇을 담아냈는가, 내용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히가시노 게이고란 작가는 새로운 문학 영토로 나를 이끈 작가로 평가하고 싶다.  이 작가의 장점이라면 이야기의 빠른 전개, 복잡한 플롯,  특유의 반전,  예상치 못한 결말로 끝까지 독자의 방심을 허락치 않는다는 것이다.   더불어, 유머와 인간미가 넘치는 대사와 인물 창조는 그의 특기다.

 

2014년 겨울 시즌 추리소설 독자들을 위한 작품이 출현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근작 <질풍론도>(박하, 2014년)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환상과 현실의 조합을 추구하며 독자의 혼을 빼 놓았다면, 이 작품은 탄탄한 현실에 두 발 디딘 작품이다. 소설의 배경은 지극히 판타스틱하다.  `은색 빛이 넘치는 광활한 설원'이다.  남극이나 북극인가?  아니다.  바로 일본 최대의 `사토자와 온천 스키장'이다.  수많은 스키어들과 스노보더들이 화려한 복장과 날렵한 몸짓으로 앞다투어 설원을 질주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미스터리는 이곳에서 `활강'을 시작해 독자를 설원의 미스터리로 초대한다. 

 

다이오 대학 의과대 연구소에서 K-55라는 생물학 무기가 은밀히 계발된다. 이 무기의 정체는 `초미립자 형태로 가공된 탄저균'이다. 연구소의 룰을 어기고, 생화학 무기를 계발한 사람은 연구원 구즈하라였다.  연구소장 도고에게 이 사실이 들통나 결국 구즈하라는 해임당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 구즈하라가 설산에 밀봉된 K-55 를 파묻는 것에서 시작한다. 플라스틱 용기는 10C가 넘어서면 파손될 수 있다. 말하자면, 눈이 녹기 시작하면 탄저균 포자는 공기중에 떠돌아다니며 무서운 재앙을 초라할 것이다. 독자의 예상대로 구즈하라는 연구소장 도고에게 협박메일을 한 통 날린다.  탄저균을 회수하려면 3억엔을 준비하라 !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의 흐름을 끊어버리는 반전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 

 

미스터리의 추진엔진 악당 구즈하라가 연구소장 도고에게 협박 메일을 날리고, 운 나쁘게 교통사고로 사망해 버렸다.  미스터리는 힘을 잃을까?  아니다. 사건은 더 복잡하게 꼬였다.  악당이 감추어둔 광활한 설산속 K-55 회수가 미궁속에 빠져들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것은 이제 누구의 몫인가 ?  히가시노 게이고의 특기가 빛을 발할 시간이다. 해결사 두 명이 급파된다.  능력은 출중하나 요령없이 사는 것에 익숙한 만년 연구원 `구리바야시'와 스노보드 마니아인 그의 중학생 아들 `슈토'다.  K-55를 되찾아올 유일한 끈 하나가 등장한다.  수신기를 장착한 `테디베어'다.  악당 구즈하라는 스키장 출입금지 구역으로 걸어들어가 너도밤나무 가지에 테디 베어를 묶고, 그 아래 눈속에 생물 무기를 파묻었다. 그러니 전파를 발신하는 테디베어를 찾으면 K-55로 회수가 가능하다. 

 

대학시절 스키를 타본 후, 중학생 아들과 다시 스키장을 찾은 구리바야시는 형편없는 스키실력을 갖고 있다. 사건을 철저히 비공개로 처리해야 한다고 연구소장 도고에게 지시받은 그는 결국 테디베어를 찾다, 부상당하고 만다. 테디베어 송신기의 밧데리는 이틀후면 소진될 것이다. 테디베어를 혼자 힘으로 찾을 수 있을까?   파국을 막는 일은 비밀에 부친다고 해결될 수 없다.  작가는 스키실력이 출중하고 정의로운 구조요원 네즈와 전직 여성 스노보더 선수 치아키를 등장시킨다. 또, 구리바야시의 아들 슈토와 그의 친구들의 집요한 추적과 노력을 통해  K-55를 회수하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낸다.   악당 구즈하라를 대신해 가공할 무기를 손에 넣으려는 신예 악당 `오리구치 마나미'를 등장시켜 서스펜스와 스릴을 잊지 않고 가미한다. 사건을 뚝딱 해결해줄 영웅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합심할 때 선(善)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꼬인 실타래를 풀어내는 일에 스키장의 구성원 모두가 조금씩 힘을 합친다는 건 분명 상징적이다. 

 

"자신이 불행하다고, 다른 사람도 불행해지길 바라는 건 인간으로서 실격이야.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몫마저 행복해지길 바라야 해.  그러면 분명 그 행복이 넘쳐흘러 우리에게도 돌아올 테니까.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불행을 만났을 때, 다른 사람이 생각해야할 것은 자신들도 같은 불행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힘껏 행복을 만들어서 그 가엾은 사람들에게도 행복이 돌아가도록 애쓰는 것라고 생각해."  233 쪽, 히가시노 게이고 <질풍론도>

 

사건 해결의 주체인 전직 스노보더 치야키는 시합을 앞두고 K-55을 찾는 일에 앞장선다.  어쩌면 대량 살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태를 앞두고 이제 그만 뒤로 빠지라는 친구, 네즈에게 그는 빠질 수 없다고, 며칠 남은 시합 따위보다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토로한다.  이 작품은 후반부로 갈수록 동일본 대지진을 겪은 일본인의 심리적 트라우마를 짐작케 하는 대사들이 등장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유쾌한 추리게임 속에서도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열패감을 위로하는 길을 찾고 있었다. 이타심이 가득한 등장인물들이 생명을 살리는 숭고한 일에 열정을 쏟고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은 추리소설의 한계를 넘어서는 히가시노 게이고만의 감성적 스토리 작법이다.

 

설산의 리프트가 찍힌 테디베어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정신없이 독자를 소설 안으로 빠져들게 했다. 스키장의 슬로프를 단 한 번이라도 질주해본 사람들은 그 짜릿한 속도감과 쾌감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 이 겨울 가장 잘 어울리는 추리소설 한 편이 있다면, 바로 슬로프의 질풍같은 활강을 미스터리로 변주해 낸 이 작품이 아닐까 싶다. 더군다나 출입금지 구역인 슬로프 밖, 단 한 번도 스키어의 발자국이 나지 않은 그 평화롭고 신비로운 공간에 지금 K-55라는 무시무시한 생화학 무기가 감추어져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리고 당신은 지금 구조요원의 감시를 벗어나 스노보드와 스키에 몸을 싣고, 어딘가에 감추어져 있을 테디 베어의 송신음을 추적하기 위해 활강을 주저치 않는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질풍론도>가 스키시즌이 끝나가는 지금, 다시 마니아들을 `겔렌데(슬로프)'로 유혹하는 듯 하다.

 

질풍처럼 덮쳐오는 위기, 이야기 전개는 독자의 흥미와 즐거움을 유도하는 긍정적 면이 있지만, 후반부로 오면서 지나친 반전이 롤로코스터를 탄 듯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세심한 성격이 독자의 상상력을 침해하는 경향도 눈에 띈다. 지나치게 사건의 앞 뒤를 친절하게 풀어놓는 것은 `잉여적 설명'이다.  전편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보다는 플롯이 단순하고 이야기에 깊이가 부족한 면도 단점이다.  하지만, 그 모든 단점들을 조합해도 장점들이 더 많이 눈에 띄는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매번 기발한 소재를 작품속에 담아낼 줄 아는 작가의 차기작을 마음 편히 기대할 수 있을 듯 하다.  스키시즌에 맞춰 출간된 이 책은 스키마니아들의 질주에 야릇한 흥분과 상상력을 선물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 구리바야시의 스키실력은 몸보다 마음이 앞서는 대표적 예다.  스키장에선 몸이 부자연스런 독자로서 자연스레 감정이입이 되고 말았다.  소설의 첫 페이지에 작가는 중의적인 멘트 하나를 남겼다.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나 자신도 놀랐다."  그 재밌다는게 자신의 소설일까?  자화자찬의 오해를 불러올 수 있기에 난 그걸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작가는 슬로프에서 활강의 추억을 저렇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소설 속에는 스키 전문용어가 많이 등장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스키장을 자주 찾았을지 모른다.  물론 타보기도 했을 것이다. 자연스런 소설을 쓰기 위해 못할것도 없다.  이 작품은 슬로프의 질주를 빼닮았고 한밤의 독서는 지칠줄 몰랐다. 그리고 "추리문학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  나 자신도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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