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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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쓰기 어려운 글은 칼럼이다.  아직까지 내게 그렇다.  서평이나 영화평, 여행산문에 도전해 봤지만 칼럼 쓰기는 거의 해본적도 없다. 몇 번 손가락에 들 정도다.  글을 잘 쓴다는 작가들조차도 써 놓은 칼럼이 부실한 경우가 많다. 일상적으로 칼럼을 읽지만 내가 여태 쓰기를 시도하지 않은 이유도 그와 같다.  칼럼은 자기 주관을 드러내야 하고 독자들이 읽기에도 그 생각에 공감할 구석이 있어야 한다.  모든 글은 써야할 주제와 대상이 존재한다.  칼럼이 주제와 대상으로 설정하는 것은 세상이다. 세상을 잘 읽어내야 좋은 글이 나온다. 

 

하지만, 칼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연성이다. 칼럼이 현실 세계의 비평이다보니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온전히 독자가 공감만 할 수는 없다. 자기 생각이 틀릴 수 있다, 다를 수 있다, 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작가는 칼럼을 써서는 안 된다.  세상 일에 대한 생각을 정직히 드러내는 글이니 쓰는 사람은 여러모로 힘들다. 하여, 작가들도 산문집을 자주 내진 않는다.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문학동네,2013)는 그가 엮어낸 첫 산문집이란다. 

 

그렇더라도 경륜을 갖춘 노학자가 논문과 문학비평에 대한 글을 제외하곤 첫 산문집이라니, 그런 소개를 읽곤 조금 놀랐다.  한겨레와 경향, 국민 일보 등 수년간 조금씩 써 모은 짧은 칼럼 겸 산문 등을 모아낸 이 책의 특성은 한 마디로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세상 읽어내기다. 그것은 품격있지만 달리 유약하게 보인다.  그게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직접적으로 호명하지 않지만 세계의 비상식과 치부에 항의하고 에둘러 비판하는 글이다.  직설적이지 않아 시원하진 않고 절제됨이 느껴지는 글이다.  하여, 그의 독자는 세계를 비평하는 냉정함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투사가 아닌 선비같은 글쓰기다.

 

<과거도 착취당한다>라는 칼럼에는 유신 시절의 기억이 등장한다. 70년대 한국에서 외국책을 구입해 공부한다는 것은 수많은 통과의례를 거쳐야 했다. 최종 통관은 서대문 국제우체국의 `미스 아무개'의 소관이었다. 그런데 이 아무개 양이 몹시 까탈스러웠단다.  황현산은 결국 아무개씨와 크게 다투며 창구의 가로대를 뛰어넘는 활극을 연출할 적이 있다.   그때 거칠게 항의하며 내뱉은 말이 명언이다. " 내가 공부를 하는데 국가가 왜 방해를 하느냐?"(11쪽)

 

" 생각하면 우습다. 내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커피라도 한잔 뽑아다 미스 아무개에게 권했어야지'라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던 것이, 당시에는 자판기가 없었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그때가 유신시대였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 우리는 모두 괴물이었다. 불의를 불의라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시대에 사람들은 분노를 내장에 쌓아두고 살았다."  11-12쪽, <과거도 착취당한다>

 

<군대문제>라는 칼럼은 많은 젊은이들이 군대라는 장벽앞에서 느끼는 절망감의 정체를 드러낸다. 세상도 바뀐것처럼 군대도 바뀌었다. 군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남학생들은 몇 해를 방황하다가 복학생 아저씨 소리를 듣고서야 공부에 전념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군대가 사람 만들었다'고 주장한단다.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오히려 군대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었기 때문'이란다.(23쪽)  내 생각도 그와 같다.  2년이란 그 짧은 시간이 한 젊은이의 영혼에 미치는 압력과 갈등은 쉬운게 아니다. 그 갈등의 결과 탄생한 인간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군대가 사람을 만들었다고 흔히 말하는 그 착시효과의 내면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게 이 칼럼의 주장이다.

 

<시가 무슨 소용인가>라는 칼럼은 대중가요나 문화에 `시적인' 것들이 넘쳐나는 문제를 짚고, 그럼에도 그것들은 왜 본격적인 시와 구분되는지를 따진다.  시인은 왜 오늘도 말을 고르고 좋은 시어를 발굴하기 위해, 가산과 전답을 팔아 시집을 내며, 파산에 이르는 사람까지 나오는걸까?  시적인 것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시가 그 위에 더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  시는 낡았고 댄스 뮤직은 새롭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저자는 실은 `시에서는 한참 낡은 것이 댄스 뮤직의 첨단을 이룬다'(184쪽)는 말로 시의 선도적인 아름다움과 감수성을 표현한다. 문학의 존재가치를 되돌아보게 하는 글이다.

 

"온갖 종류의 대중물과 상업물에는 시가 충분히 들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시를 소비할 뿐 생산하지는 않는다. 시인이 제 몸을 상해가며 시를 쓴다는 것은 인간의 감정을 새로운 깊이에서 통찰한다는 것이며, 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개척한다는 것이며,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과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이다"   184쪽, <시가 무슨 소용인가>

 

산문집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깊은 울림을 지닌 칼럼 한 편이 자리한다. <삼가 노 전 대통령의 유서를 읽는다> 2009년 세상의 비정함 속에서 생사를 달리한 한 전직 대통령의 그 짧은 유서를 읽으며 황현산은 평론가다운 솜씨를 발휘해 그 의미를 유추해 낸다. 짧은 유서를 세 부분으로 나눠 읽는 것도 독특하지만, 문장 하나하나에서 대체 그가 발설하고자 하는 깊은 고민과 사유가 무엇이었는지 분석하는 문장도 예사롭지 않다. 꼭 비평가여서가 아니다. 누군가의 독자라면 글의 분량을 떠나서 짧은 문장, 단어 하나에까지도 최선을 다해 읽어내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것이 글 쓰는 자에 대한 독자로서의 예의임을 이 칼럼은 덧붙여 가르친다.

 

"처절한 결단을 향해 추호의 주저함도 없었던 고인의 유서에는 짧은 문장과 비교적 긴 문장이 어울려 만드는 단호한 리듬과 처연한 속도감이 있다. 이 다감하고 열정적이었던 사람의 절명사는, 고결한 정신과 높은 집중력에서 비롯하는 순결한 힘 아래, 우리 시대의 어느 시에서도 보기 드문 시적 전기장치를 감추고 있다.  고인이 믿었던 미래의 힘과 깊이가 그와 같다. " 302쪽, <삼가 노 전 대통령의 유서를 읽는다>

 

황현산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에는 이 외에도 수년간 그가 발표한 짧고 품격 있는 칼럼들이 담겨있다.  대개 책의 제목은 목차의 소주제문을 따오기 마련이다. 하여, `밤이 선생이다'라는  주제문을 포함한 칼럼이 존재할꺼란 생각을 했다.  내 예상은 빗나갔다. 아마도 제목은 따로 정한 모양이다.  그런데 `밤이 선생이다'라는 이 문장이 참 좋았다.  밤은 상징적으로 무엇을 표현할까?  밤은 책장을 넘기는 시간일 수도 있다.  하여, 그 고요한 순간은 가르침이 된다.  다시, 밤은 역사의 어두움일 수 있다.  어두움은 밝음을 갈망한다.  그또한 가르침이다.  또다시 밤은 인간이 극복해야할 운명이고 고뇌일 수도 있다.  하여,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밤은 `선생이다' 

 

어떻게 그 의미를 해석하든, 이 짧고 단호한 책의 제목은 깊은 상징성을 드러내며 큰 울림을 갖는다. 그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밤은 책과 만나는 가장 고요한 순간이기에 `밤(night)' 이 선생이길 소망한다.  이제는 은퇴한 노학자인 황현산은 여전히 명예교수라는 직함을 달고, 후학들을 만나고 있다.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책 읽기와 세상 읽기에 조금의 게으름도 없는 노학자는 젊은 독자들이 살아갈 방향을 칼럼속에서 힌트로 건넨다.  어떻게 나이들고 싶은지 선택해야 한다면 밤을 선생삼아 책읽는 독자로서 늙어가고 싶다.  품격있고 정직한 글을 쓰는 필자로서 나이들고 싶다.  문학 평론가이자 불문학자 황현산은 그 좋은 본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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