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커리큘럼 - 고민하는 청년들과 함께하는 공부의 길
이계삼 지음 / 한티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한겨레 신문에 칼럼을 쓰던 고등학교 교사가 있었다. 많은 칼럼 가운데서도 난 꼭 그의 글을 찾아 읽었다. 정교한 논리, 세상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에 끌렸다. 칼럼의 마지막엔 칼럼리스트의 직명이 나오는데, 이 분의 직명이 얼마 전 바뀌었다. 경남 밀성고 교사에서 `오늘의 교육 편집 위원'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분은 그외 몇 가지 감투를 더 갖고 있다.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대책위 일꾼, 감물 생태학습관 인문학 교사 겸 사무장. 그는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는 현직 칼럼리스트이자 `전직' 고교 교사인 이계삼이다. 물론 최근에 펴낸 <청춘의 커리큘럼>이란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

 

교사가 쓰는 책 답게 제목에 커리큘럼 즉 교과과정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다. 그것도 청춘의 교과과정이다. 청춘이란 애매한 지칭어는 또 뭔가? 청춘에겐 특정한 배움이 필요하단 의미일까? 이계삼은 11년간 고향의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그런 그가 최근 학교에 사표를 냈다. 이제 막 마흔 줄에 들어선 젊은 선생이 말이다. 그 오랜 궁금증은 이 책의 말미에서 풀렸다. `나는 왜 학교를 그만두었는가' 라는 꼭지의 글에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고백한다. `사기를 좀 그만 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325쪽)

 

학교 교육에 대한 불신은 이 책의 곳곳에 등장한다. "내 경험으로 학교 교육 속에서 아이들에게 받을 수 있는 질문이란 시험 범위 알려 달라는 것밖에 없다" (100쪽) 그는 학교 교육의 최대 수혜자는 아이들을 낮은 사고력과 높은 애국심으로 길러내고 싶어하는 지배자들이라 잘라 말한다. 이 불온한 표현들은 다 뭐란 말인가? 그가 교사를 그만두기 잘했단 생각이 드는가? 학교에서는 절대 가르치지 않는 교육과정이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이계삼이 학교 교육을 부정하고, 청년들에게 새롭게 가르치고자 한 커리큘럼은 어떤 것인지 먼저 살펴보자.

 

이 책에는 많은 저자들의 책이 소개 돼 있다. 이계삼의 책은 이 책들에 관한 서평과 평론 모음집이다. 평이한 서평이 아닌 또 하나의 사상을 담고 있는 수준높은 글들이다. E.F 슈마허는 생태론적 경제 사상가로 `작은 것의 가치'와 `적정 기술론'을 제창한 지식인이다. 또, <온 삶을 먹다>의 저자 이자, 녹색평론에 글을 싣던 웬델 베리는 미국의 농부다. 그는 43살에 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고향 켄터키로 돌아와 농사를 짓고, 문필 활동을 해왔다. 이들이 한결같이 내세운 건 새로운 경제 모델에 관한 구상이다. 이들 저서에 대한 서평을 통해 저자는 자본집약적 산업화된 농업에 반대하고, 공동체 중심 소농의 삶과 자립 가능한 농촌의 새로운 미래를 상상한다.

 

영화 <매트릭스>에 대한 평론에선 우리 시대 노동 환경을 영화를 빗대 비판한다. 네오가 선택한 트리니티의 빨간약은 한진중공업 크레인 위에서 200일 넘게 고공농성을 벌인 김진숙의 선택으로 풍자된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의 저자 스베틀라나 일렉시예비치의 문장들을 소개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깝다. 원자력에 대한 실상과 공포를 비추는 글 속에서 독자들은 종말의 징후들을 감지한다.

 

" 한 아내가 있다. 남편이 체르노빌에서 트럭으로 모래와 콘크리트를 운반하는 일에 종사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고, 의사의 중절 권유에도 기어코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죽은 채 태어났다. 손가락도 두 개 모자란 계집아이였다. 사랑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 사랑의 감정에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는 것, 사랑 때문에 2세에게 끔찍한 고통을 넘겨주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체르노빌 이후의 세계다." 123쪽, <청춘의 커리큘럼>, 이계삼

 

로버트 콜스의 <환대하는 삶>은 20세 미국의 카톨릭 빈민 운동가 도로시 데이의 삶을 그리고 있는 평전이다. 가난한 이들과의 공존, 교회의 경직성과 투쟁 등을 다루는 이 평전에서 이계삼은 올바른 신앙이 가야할 길을 상상한다. 근거없는 도그마를 고집하는 교조주의는 권력과 신앙의 오랜 전통이다. 도로시 데이는 "무신론자의 흠 없는 삶을 내치고, 자신을 경배하는 신앙인을 더 사랑할 만큼 하느님이 경배에 굶주린 존재가 아니라고 믿었다" (299쪽) 란 표현을 쓴다.

 

<죄와 벌을 거꾸로 읽다>란 장에서 이계삼은 청년들이 살아가야할 이 세상이 어떤 세계인지 되묻고, 되살필 것을 요구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은 한 사회의 총체적 부조리를 어떻게 응징할 것인가, 라는 고뇌가 깊이 내재된 소설이다. 이계삼은 오늘 우리 사회의 부조리가 자신을 소설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과 응징이란 몽상에 젖어들게 한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을 강력한 후원자로 등에 업은 돼지 같은 자본가가 활개를 치고, 멀쩡한 갯벌의 숨통을 끊어 놓고 죽음의 시궁창이 되어가는 그 갯벌 옆에서 록 페스티벌을 벌이고 수천 명이 떼로 모여 춤추고 노는 나라에서, 60대 70대 할머니들을 하루 열여섯 시간 동안 유독가스가 넘쳐나는 공장으로 밀어 넣는 나라에서, 이성을 가진 누군들 그런 몽상에 젖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 216쪽

 

이 책의 주장은 과격한 면이 없지 않다. 세계를 날것으로 보여주고 비판해서다. 주류 언론과 교육이 감추고 무시한 현실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다수가 긍정하는 삶을 비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익숙한 체제 내의 성공을 꿈꾸는 젊은이가 있다면, 이 책의 주장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런 비판이 나의 미래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 어떤 해법을 주는가 알 수 없다. 하지만, 1 대 99의 사회나 원자력의 공포, 환경 오염과, 먹거리에 대한 걱정, 삼포세대(연애,결혼,출산이 불가능한 세대)는 이미 우리 앞에 출현한 현실이다. 모든 정권과 모든 세계의 지도자의 꿈이 지상의 유토피아를 만드는 것인데도 이 지경이다. 그러니 뭔가 근본적으로 세계는 잘못된게 아닐까? 결론적으로 저자는 자급자족의 농업 사회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소통이 원활한 소규모 공동체가 주체가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더불어 인문학과 노동을 삶의 중요한 지렛대로 삼는 개인의 삶을 꿈꾼다.

 

이 책은 신념으로 가득차 있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바뀔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면, 강건한 학교 교육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 교육은 이 체제를 현상 유지하는 것이 최대의 목표다. 자본과 권력이 경제의 무한한 확장과 인류의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란 환상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하여, 인간적인 공동체, 행복한 개인은 미사여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인류 역사상 핵폭탄의 위력을 최초로 경험한 일본이 전후 50기가 넘는 원자력 발전소를 보유한 것은 무얼 말하는가? 국가 권력의 생리는 과거와 역사를 외면한다. 탐욕과 반사유성이 자본과 권력의 본질이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그럼에도 청년들의 몫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환경오염과 원자력, 전쟁의 공포와 자본주의의 폐해 모두를 막아낼 지혜는 공부하는 청년들에게서 나온다, 고 그는 믿는다.

 

지금 청년들은 정작 체제속의 정착을 꿈꾸는 공부에 여념이 없다. 하여, 이 책이 제시하는 청춘의 커리큘럼은 배부른 자의 탁상공론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가 걸어간 길이 새로운 삶과 미래에 대한 실천적 상상력을 제공한다. 시험 범위 외에는 질문할줄 모르는 학생들을 양산하는 학교를 벗어난 이후라면, 이제야 본격적으로 세상과 삶을 공부해야 할 때가 아닐까? 책 속 청년들의 커리큘럼은 가볍지 않고, 즐겁지 않은 과목들이다. 하지만 우리 세계를 반성하고,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책들로 가득하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책을 통해 공부의 길로 들어선다는 데 있다. 이 안에 소개된 책의 목록을 기록해 두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 절대로 학교 교과서로 채택될리 만무한 이 커리큘럼을 주목하자. 다른 삶은 가능하다,는 저자의 믿음을 지지한다.

 

 

 

2013년 6월 16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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