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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밀리타스 - 위대한 리더십의 완성
존 딕슨 지음, 김명희 옮김 / 포이에마 / 2013년 5월
평점 :
교만과 겸손은 기독교에서 대척점에 있는 단어다. 교만은 철저히 배격하고, 겸손은 환영받는다. 마태복음에는 겸손한 사람을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표현한다. 기독교인이 되기 위한 첫번째 덕목은 겸손이다. 기독교에서 구원은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적으로 신의 은혜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였을까? 기독교 저술가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교만을 가장 큰 죄의 목록에 올려 놓는다. 은총을 갈망해야할 신의 피조물이 인간이다. 인간은 절대 완전하지 않다. 그런데 인간이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에 완전하며 공정한 척한다. 좀더 가진 사람은 가난한 자를 업신 여기고, 좀더 배운 사람은 덜 배운 사람을 깔보기 마련이다. 교만의 최종적 단계는 신앙을 잃는 것이다. 신을 자신의 마음속에서 재단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오히려 교만이 장려되고 겸손은 무시되었다. 고대에 통용된 겸손의 의미는 `낮게 여겨지다' 즉, 굴욕을 당하다였다. 히브리어는 `아나와 anawa' 그리스어는 `타페이노스tapeinos', 라틴어는 후밀리타스humilitas', 이것이 오늘날 겸손으로 묘사되는 고대의 단어들이다. 서양의 고대 세계는 정복과 통일 전쟁이 지속되면서, 거대 제국을 형성하던 시기다. 이민족과 싸움이 잦았기에, 정복을 당하면 수치심을 느꼈고 이 때 이 단어들을 썼다. 겸손이 오늘날의 긍정적 의미를 찾기 시작한 것은 로마 시대 후반기(2-5세기)였다. 정확히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뿌리를 내리던 시기다. 서양 역사에서 교만과 겸손이 긍정과 부정의 자리 바꿈을 한 때이기도 하다.
겸손은 문명과 종교로부터 발원한 단어지만, 오늘날 리더쉽 이론에서 각광받고 있는 경영자의 가장 중요한 성품이 됐다. 서양 역사에서 겸손이란 성품은 어떻게 발원했고 오늘날 리더쉽과 겸손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어떻게 나사렛 출신의 한 유대인이 위대함의 정의를 한없이 낮은 겸손이란 성품에서 다시 썼는지 궁금하다면, 우리는 호주의 역사학자이자 목사이며, 저술가인 존 딕슨의 <후밀리타스>를 펼쳐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의 성품에 지나지 않은 `겸손'의 먼 과거와 오늘을 되돌아보고, 이것이 종교의 영역을 넘어, 사회 각개 각층의 리더와 조직을 이끄는 핵심 가치가 된 이유를 놀랍도록 세밀한 역사 지식과 방대한 예를 인용해 풀어 놓는다.
이 책이 전제하는 겸손의 뜻은 이렇다. "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지위를 포기하거나, 자신의 자원을 사용하거나,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고귀한 선택 " 즉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힘을 내려놓으려 한다. 겸손한 사람은 성공 의지나 영향력이 약한 사람일 것이란 편견이 가능할까?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라는 베스트셀러 작가 짐 콜린스는 가장 영향력 있고 감화력 있는 이들은 보통 겸손하다는 사실을 알아 냈다. 더불어, 좋은 기업에서 위대한 기업으로 성장한 11개 기업의 핵심 성장 요인 중 하나가 바로 결단력과 겸손한 자세라고 선언한다. 위대한 기업을 이끈 리더들은 공통적으로 나서지 않고, 조용하고, 내성적인데다 부끄러움까지 탔지만, 개인적 겸손함과 직업적인 의지가 융합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콜린스는 이들을 `화성인' 같았다고 표현한다.
역사상 자신의 힘과 지위를 내려놓고 고귀한 영향력을 전파한 이같은 `화성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성인으로부터 오늘날 기업의 CEO들까지 다양하다. 부처나 예수와 같은 종교적 성인과 마하트마 간디, 넬슨 만델라와 같은 정치 지도자, 그리고 킴벌리 클라크의 다윈 스미스, 질레트의 콜먼 모클러 등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겸손이 리더쉽의 핵심이 되는걸까? 저자는 리더쉽의 도구들을 네가지로 정리한다. 능력, 권위, 설득력, 본보기다. 능력은 리더가 갖추어야 할 기본이다. 이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가지 도구들은 겸손을 통해 완성에 이를 수 있다. 자기를 낮추고 팀원을 높이고 존중할 때 그 팀은 자발적인 충성심과 존중감이 흘러 넘친다. 위대함은 힘과 권위에 대한 복종에서가 아닌, 자유의지에 따른 창의성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모든 위대한 종교와 기업의 특징이 이와 같다.
"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는 성취와 지위만으로는 진정으로 감화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영웅들로부터 가장 감화를 받는 순간은 그들이 겸손을 보일 때이다. "169쪽
우리는 능력에 목말라 한다. 학생들은 스펙을 경쟁 하듯 쌓아 올리고, 직장인들은 실적을 통해 승진을 이루고자 목을 맨다. 종교인들은 타종교에 대한 관용이 부족하다. 이 편협함은 가끔 사회 문제를 일으킨다. 모두가 자신의 능력과 권위를 드러내고파 하는 시대다. 하지만, 이천년 전 예수는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일찌감치 겸손의 미덕에 대해 설파했다. 마굿간에서 태어나고 일평생 가난하게 살고 핍박받다 십자가에서 생을 마감한 예수야말로 삶 자체가 겸양으로 가득차 있었다. 왜 예수는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지리라고 했을까? 구태여 종교적인 답을 구할 필요도 없다.
사람들은 겸손한 이에게 호의를 품는다. 리더의 기본 자질 가운데 설득력과 본보기는 겸손한 사람만이 실현시킬 수 있다. 누군가를 논리적으로 납득시킬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적의까지 해소시킬 순 없다. 타인을 설득시키는 건 논리가 아닌 감성의 몫이다. 자기를 낮추는 지도자는 명령이 아닌 존경심으로 조직을 이끈다. 힘이 있는 자가 낮아지려 할 때, 그의 능력과 권위는 더 높아지는 역설이 발생한다. 리더는 갈등을 해소하고 조직을 일치단결 시키는 새로운 능력을 겸손이라는 성품을 통해 이끌어 낸다. 더불어, 겸손은 인간의 본래 위치를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교만과 자만심이 불러온 우리 시대의 위기는 한 두가지가 아니다.
인간은 본래 미미한 존재다. 만물의 영장이란 수식어는 자화자찬일 뿐이다. 인간이 이 지구에서 문명을 건설하고 살아온 시간은 1만년에 지나지 않는다. 멸종한 공룡이 이 지구를 지배한 기간은 3억년이나 된다. 대우주에서 지구가 차지하는 위치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작다. 우주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항성(태양)이 존재하고, 생명체가 거주할지도 모르는 행성들이 있다. 지구는 은하수 은하의 구석진 나선팔의 태양계에 위치한 존재조차 희미한 행성일 뿐이다. 그것뿐인가. 인간의 오만으로 탄생한 핵무기는 지구의 전 도시들을 수천번 파괴하고도 남을만큼 충분히 비축돼 있다. 산업혁명 이후 200년이 겨우 지난 지금, 경제적 욕망에 가득찬 인간은 하나밖에 없는 지구 환경을 파괴하며 기후변화, 생태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모두 겸손이란 성품을 잃어버린 결과다.
겸손한 리더는 하찮은 기업을 위대한 기업으로 키워낸다고 이 책은 논증한다. 하지만, 겸손이야말로 이 시대가 구할 종교적, 문명적 성품이 아닐까? 겸손은 넓게 보면 대우주의 미미한 구성원으로서, 인간의 한계를 깨닫는 일이다. 우리 시대 모든 분쟁의 씨앗은 자만심과 오만의 결과다. 겸손할 성품들이 모일 때, 이 세계는 지금보다 훨씬 살기 좋은 낙원이 될 것이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필요한 시대다. 그런 사람이 결국 가정과 기업과 국가를 살릴 것이다. 겸손은 위대한 리더를 완성으로 이끄는 덕목이다. 겸손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미덕을 문명과 종교적 관점에서 논한 이 책도 마찬가지로 겸양의 미덕에 따라 치우침이 없다. 겸손은 우리 시대의 필수 처세술이자, 성공하는 리더의 성품이며, 지속가능한 인류의 미래를 위한 처방전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위대한 지혜, `겸손'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