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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눈물
박경숙 지음 / 문학나무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문학에서 공간의 역할은 중요하다. 작가에게 공간은 문학이 자라나는 날것으로서의 토양이다. 공간은 소설의 주제와 소재가 되기도 한다. 동시대의 사회와 공간을 함께 소유한다는 건 그 사회가 내뿜는 환희와 절망을 작가와 독자가 공유하는 일이다. 미주 문단을 대표하는 소설가 박경숙의 소설집 <빛나는 눈물>은 근래에 내가 읽은 가장 생소하며, 독특한 소설 모음이었다.
이 작품집 안에는 9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하나같이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품들이다. 자신이 태어난 땅을 떠났지만, 결국 그 조국과의 끈을 놓치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그들이 떠나간 나라와 정착한 나라는 물리적인 공간만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기억과 현재를 지배하는 역할까지 겸한다. 버리고 온 땅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질긴 인연은 이 소설들의 중요한 소재가 된다.
표제작 <빛나는 눈물>은 정체모를 한 흑인 노인에게 살해당한 늙은 한국 남성이 혼령이 되어, 살인자의 뒤를 쫓는 소설이다. 현실속에 존재하는 혼령은 죽음 저 너머로 떠나서야 자신이 왜 살해당했는지 깨닫는다. 한국을 떠나기 전 사랑했던 여인에게 상처를 주고, 그 상처가 먼 이국의 땅에까지 인연과 복수로 연결되는 스토리다. 수많은 사연을 안고 조국을 떠난 이민자들 가운데 온전히 행복한 추억만을 안고 이 땅을 버린 이가 몇이나 될까?
소수 이민 사회의 환멸을 다루고 있는 작품도 있다. <검은 파도>의 등장인물들은 방송사와 신문사 소속의 국장이나 여기자들이다. 권력과 재력을 소유한 남성들은 그러한 힘을 바탕으로 힘없는 여성 기자들을 희롱하거나 복종시키곤 한다. 권력자들의 욕망과 비위를 잘 맞추고 미주사회의 영향력 있는 직위를 유지하기 위해 벌이는 여기자들의 암투는, 보기에 민망하면서 동시에 서글픔을 안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이민자 사회의 특수성은 아니다. 이 소설의 주제 자체가 권력의 비열한 특성을 표현했다고 보는게 맞다.
이와 비슷한 주제를 담고 있는 작품으로 <블랙리스트>는 상당히 흥미로운 작법으로 쓰였다. 살인사건을 현장감 있는 묘사와 언어로 표현해 낸 이 작품에서 주인공 남성 미스터 정은 미국의 명문 대학을 중퇴하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유령 회사에 다니고 있는 사람이다. 어려운 가정 환경이 아니었다면, 그는 미국 사회에서 남 보란듯 성공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을 은근히 무시하는 유령 회사의 상사들을 하룻밤 모두 처단한다는 이야기는 훗날 주인공의 꿈 속 이야기로 치환되는데, 누추하고 부정의한 이주 사회의 어두운 면을 작가는 상상력의 힘을 빌어 처벌하고자 한다.
<전생을 봐드립니다>와 <오빠를 묻다>는 다른 성질의 귀향을 다룬 작품이다. <전생을 봐드립니다>의 이모는 대학을 졸업할 무렵, `결코 자신을 토해내지 않는 새로운 세상을 찾겠다며 미국으로 떠났지만' 곧 이혼의 상처를 안고 이 땅으로 귀향한다. 이모는 `내'가 연 카페의 자리 한 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찾아오는 사람들의 전생을 봐 주는데, 이생에 만족하지 못해 전생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며, 이생에 충실할 것을 가르친다. 이모의 방랑과 방황속에서 이민자의 불안정한 마음 상태가 전해온다. <오빠를 묻다>에서 `나'는 친오빠의 장례 때문에 귀향한 인물이다. 그는 고향에서 살아온 과거를 되짚고, 뿌리내리지 못한 미국에서의 정체성에 혼란스러워 한다. 이승을 홀가분하게 떠난 오빠와 다시 이승의 환경에 불만족하며 살아가야 하는 내가 묘한 대조를 이룬 작품이다.
"뿌리가 없잖아. 여기에 이렇게 뿌리를 두고 나 홀로 절단 당한 채 떠나간 그곳에서 내가 자생하는 길은 홀씨식물이 되는 것이었어. 남의 나라 땅에서 내 나라 말로 글 쓰는 일, 당연히 음지의 일이야. 어쩌면 우리가 사는 삶 자체가 그 나라의 음지인지도 모르지만." <오빠를 묻다> 271쪽, 박경숙
박경숙은 생소한 작가다. 미국으로 이주한지 20여 년이 되어 간다고 그는 작가의 말에서 고백한다. 더불어 이 작품들에 대해서 "이국 생활의 불안정과 땅을 바꿔도 버려지지 않던 안일한 습성 사이에서 태어난 못난 자식들이다"고 썼다. 이민자 문학을 알지 못하고 읽을 기회가 없는 독자들이 이 책을 잡는다면, 아마도 그는 어느 화성인이 쓴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들 것 같다. 요즘 한국 내 젊은 작가들의 체취와 습성이 이 소설가에게선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소설은 한국 문단의 과거나 현재의 경향을 따르지 않는다. 이 독특함이 이 작품집의 매력이다.
하지만, 이 단편집에 실린 중,단편 소설들은 독창성 못지 않게 보편성을 띤다. 그것은 인간을 우주의 어느 공간에 유폐시켜도 사라지지 않을 성질의 것이다. 이 작가의 소설 쓰기는 이국땅의 낯섬과 외로움에 버려진 한 영혼의 절박함이자 고백으로 읽힌다. 각 작품마다 제각각의 서사와 인물이 새로운 사건을 짓고 허물지만, 소설집의 지반을 이루는 그 견고한 기초는 거친 세상을 헤쳐가는 한 여린 영혼의 힘겨운 투쟁이다. 여기에 이 작품들에 세계 문학으로서의 확장성이 있다.
결국, 모든 글쓰기는 자기 치유의 효능을 가진다. 박경숙의 작품집을 읽으며 치유하는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닫는다. 위대한 문학이 아니어도, 잘 팔리는 작품이 아니어도, 좋다. 최고의 독자는 일차적으로 자기자신이다. 그녀의 글쓰기는 고달픈 이민 생활의 활력소 였을 듯 하다. 그 절망의 파편들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이루었을 게다. 그는 지금도 무언가를 쓰고 창작열을 불태울 것 같다. 그 기약없는 고통과 외로움이 작가의 숙명이다. 나는 그녀의 힘겨운 창작 활동에 먼 화성인의 시선으로 응원을 보낸다. 세상의 모든 글쓴이가 그렇듯, 그도 위로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어쩌면 글쓴이의 고통과 절망의 울림은 독자에겐 밤하늘의 별처럼 적막하고 고요한 것이 아닐텐가.

201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