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에 꼭 한 번은 들어야 할 명강 - 불확실한 시대, 지성에게 길을 묻다
송호근.유홍준.정재승 외 지음 / 블루엘리펀트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신동아> 창간 80 주년을 기념해 이 잡지는 자축행사의 일환으로 지식인 강연회를 개최한다. 2011년 한 해 동안 12명의 강사를 초청해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강연회를 열기로 한 것이다. 이 기획은 우여곡절 끝에 차일피일 미루어졌고 1월부터 한 번씩 기획된 강연은 5월에서야 시작되었다. 그리고 12월까지 강연회는 비교적 성황리에 지속된다. 기념이 되는 해를 넘기지 않겠다는 <신동아> 측의 의지로 강연은 8회에서 종결된다. 이곳에 초청된 강연자는 우리 시대의 지식인 8인이었다. 웬만한 독자라면 이들의 이름은 눈에 익을 것이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의 저자이자 문화재청장을 했던 분이고, 정재승은 활발한 저술, 강연 활동을 하고 있는 카이스트 교수이자 과학자다.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는 <통섭>이란 저서가 가장 유명한 분이고, 김지하는 유신과 싸운 전설적인 시인이자 <토지>의 작가 박경리의 사위다. 이덕일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학계와 역사문제를 갖고 피튀기는 논쟁을 이어오신 재야의 역사학자이며, 도정일은 시인이자 유명한 인문학자다. 그외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와 문정인 연세대 교수 정도가 내겐 익숙지 않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분들도 신문지상에서 몇 번 칼럼을 읽은적은 있다.

 

이 책은 음악앨범으로 치자면 당대의 히트곡만 엄선해 놓은 컴필레이션 앨범과 같은 속성을 지닌다. 유명 지식인의 강연을 선별해 묶어 놓았으니 말이다. 컴필레이션 앨범이 한장으로 좋은 곡들을 들을 수 있는 점에선 좋지만, 아티스트와 앨범의 분위기가 잘 파악되지 않는 단점이 있다. 이 책도 지식인 8인의 알곡진 강연 내용을 수록했지만, 그닥 깊이 있지는 못하다. 하지만, 자신들이 일평생 쌓아온 지식과 내공을 한 편의 강연에서 쏟아내는 열정과 압축된 메세지의 강렬함을 느낄 수 있다. 동시에 지식인이 대중과 소통하는 방식으로서 한계와 지식인의 시대적 역할에 대해 독자들이 고민할 거리를 주는 책이기도 하다.

 

시인 김지하의 강연은 그 깊이와 열정면에서 단연 앞섰지만, 대중과의 소통에 문제점을 드러내 놓는다. 그는 인류 최고의 도덕률로서 모심(母心)의 실천을 들고나온다. 그는 "살림(生)의 힘은 모심에 있고, 모심(섬김,존경)만이 우리 시대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주제문으로 놓고 그는 우리 나라의 산새에 대한 풍수지리를 해설하고, 각 나라의 철학자의 이론을 검토하고, 종교와 사상을 넘나들며 설명을 이어가는데 좀체 책으로 옮겨 놓아도 강연의 진의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이런 강의를 현장에서 듣는 청중이 과연 김지하의 강연을 얼마나 이해하고 자리를 비웠는지 알 길 없다. 내용의 깊이를 떠나서 어떻게 보면 현학적이기도 하고, 또 어찌보면 횡설수설 같기도 한 그의 강연은 실망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그래서일까? 김지하는 아내의 말을 강연 말미에 인용하며 머쓱해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내가 `만날 민중,민중 하면서 여성이나 아기들, 또 쓸쓸한 사람들 그 누구더러 들으라고 주역이니 정역이니 산알이니 그 어려운 얘기를 혼자서 즐기느냐?'고 말했기 때문에 벌컥 화부터 냈다." p.150 김지하 편 <명강>

 

가장 쉽고 인상깊은 강의는 재야 역사학자 이덕일 소장의 강연이다. 그는 <조선 후기 정치사의 현재적 의의>를 주제문으로 놓고 `노론 사관과 일제 식민 사관에서 벗어나는 정신적 과거 청산이 반드시 필요하다'라는 주장을 쉽고 풍부한 해설과 사료를 바탕으로 한 호소력있는 목소리로 풀어낸다. 서울대를 비롯한 학계와 조선후기사에 대한 논쟁을 이어온 그는 이 강연에서 인조반정이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유가 무엇이며 독자가 어떤 역사의식을 가져야 하는지 공식적인 역사교육이 지나치고 무시한 관점을 끌고와 독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는 인조반정을 정권에서 소외된 서인들이 일으킨 쿠테타로 정의한다. 광해군의 중립 정책을 바꿔 강대해지는 후금(청)을 적대시 함으로써 우리 역사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불러온 책임이 있음을 질책한다. 충과 효를 최고의 미덕으로 삼아온 유학자들이 왕을 내친 건, 왕 자체를 자신들과 같은 사대부로 여기고 소중화(小中華), 즉 우리는 작은 중국인이기에 중국 왕(명나라 황제)를 섬겨야 한다는 사대 사상에 노론 사대부들이 빠져있었음을 해설한다. 그의 강연은 곧 그가 집필한 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강연의 완성도가 불러온 힘이다.

 

"이인직은 이완용의 비서입니다. (중략...) 이인직이 고마쓰를 찾아가서 `우리는 중국을 섬겨 왔는데 이제 일본으로 바꾸는 것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게 정확한 노론의 당론입니다. 그런데 국어 교과서에서는 이인직을 <혈의 누>를 쓴 선각자로 가르쳐 왔지 않습니까? 이 상태에서 대한민국이 미래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혈의 누> 내용이 뭔지 아세요? 청일 전쟁 때 청나라 군사가 조선 처녀를 겁탈하려는 것을 일본군이 구해 준다는 내용이에요." p.217-218 이덕일 편 <명강>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는 강연 <대학문국의 꿈과 지식의 통섭>에서 `한 우물만 파는 시대는 지났다. 지식의 통섭을 통해 나만의 영역을 넓혀라'고 조언한다. 그는 대학시절 학문의 벽을 넘어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교류를 줄곧 연구하고, 공부해 왔다. 생물학자인 그가 인문학에도 정통한 것은 대학시절부터 학문간 통섭을 몸에 익혀왔기 때문이다. 가장 열정적으로 공부하고, 열심히 연구하는 학자라는 걸 그의 강연을 통해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그는 자원과 인구가 부족한 대한민국이 흥하는 길은 오직 학문 뿐이며, 정부가 이곳저곳에 투자할 것이 아니라 교육과 학문에 투자하면 절대로 굶어죽을 일은 없다, 고 주장한다. 그가 꿈꾸는 나라는 대학문국(大學問國)이다.

 

최재천 교수는 강의 말미에 독자에게 살과 피가 될만한 말을 남긴다. 우리 시대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학자가 하는 말이라서 쉽게 넘길 수 없다. 그는 세상 모든 일의 종국에 반드시 글쓰기가 있고, 글쓰기로 모든게 판가름 나더라는 걸 최근에 깨달았다고 전한다. 대학교수는 논문을 써야 하고 똑같은 데이터를 갖고 누가 설득력 있게 써 내느냐에 따라 최고의 저널에 실리느냐 못 실리느냐가 결정된다. 회사에 가면 기안을 한다. 원 페이지 프로포절, 한 페이지에 누가 설득력있게 기안을 했느냐가 업무의 성패를 가른다. 즉, 누가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으냐가 아니라 그 지식을 갖고 짜임새 있는 글을 써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느냐가, 지식인으로서 필수적 관건이라는 말이다. 더불어, 그는 독서가 취미가 아닌 일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이 모르는 분야의 책을 붙들고 씨름하는게 독서라고 말한다.

 

"모든 게 글쓰기입니다. 끝에 가면 나는 책은 안 읽는데 글은 잘 쓴다? 그게 가능합니까? 그건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역시 많이 읽은 사람이 잘 씁니다. 결국은 흉내 내는 거니까요. 어디서 오겠습니까? 다 읽은 것에서, 그게 제 안에서 녹았다가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풍부한 책 읽기가 좋은 글쓰기의 전제 조건입니다." p.128 최재천 편 <명강>

 

지식인은 지식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실천력과 현실판단력이 없다면 지식은 쓸모없는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다. 지식의 양과 배움의 정도로 지식인을 판가름 한다면, 곡필아세와 권언유착에 여념이 없는 언론인들은 지식인이다. 하지만, 그들이 파는 지식은 지금 불량품이질 않는가? 불량품을 팔고 돌아다니는 상인을 우리는 잡상인이라 부른다. 잡상인은 팔고 도망치기라도 한다. 하지만, 그네들은 불량 지식을 파는 상점을 차렸다. 더불어 지식인은 또 동시대의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현학적 언어가 아니라 대중앞에 나설 때는 언제나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자신만 알아먹는 언어로 유창하게 떠들어댄다면, 그는 지식인이 아니라 자폐와 정신분열을 의심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우리 시대 대표 지식인 8명을 만날 수 있다. 모두 각 분야를 이끌고 있는 역량과 실력이 충분한 분들이다. 하지만, 자신의 분야에만 능통해 시야가 좁은 지식인도 있다. 자신만의 언어로 대중과 소통을 이끌어 내지 못하는 안타까운 지식인도 있다. 사회적이자 정치적인 발언에 서슴없는 용기를 보여줘야 할 위치에 있건만, 말을 무척 아끼는 소극적인 지식인도 있다. 나의 생각에 지식인은 통섭에 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지식인은 용기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분야에 정통하지만, 한 시대의 정치와 사회를 알지 못한다면 그는 절름발이 지식인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의 소설가 조지오웰은 모든 지식인의 사표가 될 만 한 인물이다. 조지오웰은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Why I write)'에서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 되었을 때였다."

 

이 책을 통해 한 시대의 지식인이 어떤 자세로 글을 쓰고 발언을 해야 하는지 독자는 어떤 암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누가 존경받아야 할 지식인상인지 독자 스스로 읽고 판단해 보는 것도 한가지 재미가 될 수 있겠다. 지금 우리사회에는 지식인이 부족한게 아니라, 넘쳐나서 문제이며 그 많은 지식인 가운데 제대로 된 지식인이 없어서 나라가 곤궁에 처했다. 곡학아세와 권언유착에 능통한 지식인들이 주류가 되어, 국민을 속이고 나라를 어지럽힌다. 한말 나라가 망할 때 이인직 같은 당대 대표 지식인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같은 세도가의 비서였다. 하지만, 그들은 일신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 나라를 함께 팔아치웠을 뿐이다. 지식인의 존재 이유를 되물어봐야 할 역사다.

 

모름지기 대학교육이란 궁극적으로 교양인의 양성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제는 거대한 취업기지로 변한 대학이라 그 말도 퇴색된지 오래겠지만, 원래 대학을 나온다는 것은 교양인이 되는 일이다. 교양인은 일평생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섭취하고 소화하는 일을 행하는 사람이다. 그 가운데 판단력, 즉 옳고 그름에 대한 나름의 가치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배양된다. 교양인은 죽는날까지 책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인게다. 한 나라에 이러한 교양인이 많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결국, 정치인이 국민을 쉽게 속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혹세무민(惑世誣民,: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이는 것), 권언유착(權言癒着:권력과 언론이 서로 깊은 관계를 가지고 결합하여 있음), 곡학아세(曲學阿世:학문을 굽히어 세상에 아첨한다는 뜻)가 불가능한 나라, 그게 바로 현실세계에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201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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