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 치유 식당 - 당신, 문제는 너무 열심히 산다는 것이다 심야 치유 식당 1
하지현 지음 / 푸른숲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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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갖고 있는 질병과 관계된 가장 큰 편견과 오해는 정신과와 연관돼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래서 정신과에 가는 일은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가는 일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불필요한 오해와 눈총을 받기 싫어 정신적 문제들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우리나라가 OECD 국가중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것도 어쩌면 정신과에 대한 홀대와 편견 때문이 아닐까 한다. 고민이 있을 때, 그 고민을 들어주고 함께 의논할 타자를 찾지 못할 때 판단력이 미숙한 사람은 쉽게 극단을 생각할 수 있다.

 

10년도 더 되었지만, 대학 졸업반 시절 나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가 보다. 4월에서 5월 사이로 기억하는데, 불면과 불안이 나를 옥죄었던 적이 있다. 망상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고, 불안 때문에 잠시도 혼자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짧은 두 달 동안 내가 잠깐 공황장애 비슷한 걸 앓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그때 내 몸은 무척 건강했다. 하지만, 망상과 불안이 내 정신을 잠식했고 곧이어 내 육체의 건강을 위협했다. 그 시절 처음으로 정신과를 찾았다. 놀랍게도 정신과 진료를 받은 날 이후 상태가 빠르게 호전되었고,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때 내가 정신과에 들러 한 일이라곤 정신과 의사에게 내 상태를 설명하고, 고민을 풀어놓은 것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정신과를 제발로 찾는 일은 현대인에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찾는다 하더라도 콧대높은 의사가 당신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어줄지 장담할 수 없다. 주변인은 정신과를 찾는 당신을 색안경 끼고 쳐다볼 것이다. 정신과 의사는 외과의처럼 환부에 칼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가장 공부를 잘하고 많이 해야 될 수 있는 의사가 바로 정신과 전문의다. 정신과 의사는 환자를 의료지식으로만 고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탐구와 이해가 선행되어야 보이지 않는 환자의 정신적 문제들에 대한 치료법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정신적 문제가 있는 당신에게 필요한 의사는 친구처럼 편안히 술한잔 나누며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현직 대학교수이자 정신과 의사인 하지현의 심리 에세이 <심야치유식당>에서 만날 수 있는 픽션속의 전직 정신과 의사 `철주'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대학가 뒷골목 지하에 20평 남짓한 술집겸 식당 노사이드를 열어, 그곳을 찾는 주객들의 심리상담을 해주는 철주는 이 책의 저자, 하지현의 아바타 같은 인물이다. 그는 정신과 의사이자 대학교수로서의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 밖으로 뛰쳐 나와 술집을 열었다. 사회적 지위와 돈보다는 온전히 자신의 삶과 마주하고 싶어서 였다고, 그는 철주의 입을 빌려 말한다.

 

이 책은 정신과 의사의 심리 에세이지만, 소설 형식을 빌어 환자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의사로서의 삶 자체를 성찰하고픈 속내를 드러낸다. 일반적인 정신과 의사가 내는 저작의 틀을 벗어나 일방적인 상담과 해법이란 형식으로 책을 엮지 않았다. 저자는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정신,심리적 문제들을 그러한 상황에 놓인 가상적 인물들의 삶을 통해 복기하고 치유하는 여정을 담는다.

 

"48일 동안 잠 못 든 남자 이야기"에 등장하는 민수라는 남자는 실패를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정돈된 삶을 선호한다. 민수는 성실하고 올곧지만 한가지 삶의 방식을 정답인냥 집요하게 추구한다. 그의 문제점은 정돈된 트랙에서 벗어나면 모든게 끝날 것이라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불면증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불감증에 기원하므로 화낼 일이 있으면 화를 내고, 부당한 일을 당할 때 표현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조언한다. 잠을 잘 때, 알람을 맞춰둔 방안의 시계가 숙면을 방해할 수 있으므로 방안에서 시계를 추방하는 것은 부차적인 처방이다.

 

"공황장애에 걸린 남자" 편에서 사십대 초반 임원으로 한 사업부 전체를 총괄하는 동우는 1년 후가 아니라 , 단 한 달 후도 장담하기 어려운 삶을 살아간다. 실적을 채우지 못하면 루저가 될 것이므로 삶은 싸워서 이기는 것이고 계속 달려나가지 않으면 넘어지고 말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저 열심히 살아온 죄밖에 없는데, 가정에선 아이 얼굴 보기도 힘들어 아이와 멀어지고, 아내에게 일방적인 별거 통보를 받은 남자. 철주는 이 남자에게 맞서 싸우지 말고 힘에 부치면 내려 놓는 것도 좋다고 말한다.

 

"채워지지 않는 잔을 놓고 안달복달을 하니 경고등이 켜질 수밖에 없겠죠. 저도 그렇게 살았어요. 어느 순간 그 완벽함이란 결국 내 마음속의 허상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이 세상이 우리를 너무 열심히, 뼈 빠지게 일만 하게 만들기 위해 거는 최면 같은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죠." p. 175 <심야치유식당> 하지현

 

이 책에서 일곱번째 손님으로 등장하는 "자신감 없는 여자" 편에선 예민할수록 피곤해지는 인생에 대해 상담한다. 직장에서 사람들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습관이 있는 완벽주의자 유진에게 철주는 감정의 레이더 수신 감도를 줄이라고 조언한다. 수신 감도가 높을수록 레이더는 미세한 사물까지 포착해 낸다. 군사 레이더는 감도가 높을수록 좋은 법이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레이더가 이처럼 성능 좋다면 그의 인생은 쓸데 없는 감정낭비로 소진되고 말 것이다.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레이더 감도는 최고조다. 무시하고 넘어가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도 될 타인의 시선과 행동, 사소한 말 하나하나를 의미 있는 것으로 포착해 해석한다. 그리고 그 신호가 자신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반응을 준비한다. 그러니 인생이 피곤할 수밖에 없다. 대범한 사람은 비중이 큰 일들만 마음의 레이더에 포착되도록 세팅을 해놓는다. 그 외의 일은 아예 정보로 취급하지 않는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효율성의 추구. " p. 256 <심야치유식당> 하지현

 

이 책에서 여덟 개의 질환을 가진 여덟 명의 손님은 노사이드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전직 정신과 의사와 속깊은 상담에 이른다. 때로 철주는 그들을 데리고 거리나 놀이시설, 직장을 찾는다. 혹은 직접 집으로 찾아가 그들의 삶을 관찰하고 그네들의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세심하게 조언한다. 현실에서 그런 정성으로 치유하는 정신과 의사는 없다. 역시 잘나가는 대학교수와 정신과 의사직을 내버리고 심야에 술집겸 식당을 열어, 찾아오는 고객에게 정신상담을 하는 사람도 없을 게다. 하지만, 상상의 나래를 펼쳐 철주가 운영하는 노사이드 식당에 찾아가고픈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만큼 책 속 철주는 인간미가 풍겨나는 의사다. 고압적인 태도도 없고, 환자의 상황을 뼈속까지 이해하며, 환자와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 발벗고 나선다.

 

모든 정신적 문제들엔 이유가 있다. 그리고 누구나 정신적인 문제들에 직면할 수 있다. 경쟁과 성공만을 지향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쉽게 낙오와 나태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정신적 문제에는 예외가 없다. 미국 내 조사를 보면 정신과 의사의 자살률이 가장 높게 나온적이 있다. 책 속 `철주'라는 인물이 환자들을 상담하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성공하지만 정작 책 끝 부분에선 자신의 문제를 풀어야 할 상황에 놓인 것만 보아야 알 수 있다. 우리는 직업인이기 전에 모두가 연약한 인간이라는 한계를 깨달아야 한다. 수퍼맨과 수퍼우먼을 선호하는 사회의 요구에 당당히 `인간'으로서 자신을 드러내 보이며 가끔 `No'라고 말해야 할 이유다.

 

좀더 자신에게 관대해지고, 완벽함 보다는 때로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르도 삶은 의미가 있다는 조언이 마음에 와 닿았다. 사회가 요구하는 그 수준이 아니라, 내가 행복하고 내가 즐기는 방식으로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 때만 행복할 수 있다,는 철주의 말도 기억에 남는다. 처방하고 고치는 의사로서가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한 시대의 동류의식으로서 환자와 접촉하고, 치유를 시도하려는 한 정신과 의사의 가상한 노력이 `픽션심리에세이'라는 흥미롭고 독창적인 장르를 만들어냈다. 이 책은 독자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정신과 의사가 이 시대의 직장인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처럼 보인다. 그리고 읽고나면 왠지 편안해 진다. 진심이 담긴 위로 때문일까? 혹은 직장인으로서의 일상적인 피로감 때문일지도?

 

 

 

2012.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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