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세계의 역사는 곧 패권 제국의 역사였다. 이것을 부정할 수 없다. 멀리는 로마제국이 그러했고, 가까이는 대영 제국이 그러했다. 지금도 여전히 세계는 미국이란 대제국의 영향권 아래에 살고 있다. 당장 피부에 와닿지 않지만, 사실 우리 생존권이 제국 사령관의 손아귀에 있다는 사실은 섬뜩하다. 한반도 유사시 전시작전권을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갖고 있질 않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며칠 전 용산 한미연합사에서 미태평양 사령관 새뮤얼 로클리어가 국방부 기자단과 회견을 하면서 북한의 3차 핵실험시 "정밀타격(surgical strike)"도 고려하고 있다, 고 언급했다. 그 몇 시간 후 미국측은 한국 기자들이 문맥을 잘못 이해한 오보였다고 해명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정확히 그는 어떻게 말했을까? 그는 "우방국들과 함께 모든 가능성(considering all options)을 열어두고 살필 것"이라고 했다. 이 말 자체도 섬뜩하기는 마찬가지다. 타국의 일개 사령관이 주권 국가의 수도 한복판에서 전쟁개시나 다름없는 폭탄발언을 한 것이라고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 정밀 타격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걸 포함하는 뉘앙스를 품고 있다고 해도 문제 없는 발언이다. 이 발언을 듣고 무감각한 한국인이 있다면 그는 무지하거나 태평한 것이다. 정밀타격은 곧 선전포고 아닌가? 오늘날 미국은 세계의 모든 정치, 경제, 문화 등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제국이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아보면 영원한 제국은 없었다.
중국계 미국인 2세이자 현재 예일대 법학과 교수로 있는 여성 에이미 추아가 2007년 부시 정권 아래서 저술한
<제국의 미래>는 미국의 지성계와 정치계에 영향을 준 특별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미국의 일방적인 패권주의를 비판했다. 당시 미국은 9.11 테러 이후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을 침공,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했고 각 나라들의 정권을 바꿔치웠다. 2002년 연두교서에서 부시는 북한과 이란을 대놓고 `악의 축'이라 비난했다. 협상과 설득보다는 힘을 통한 일방주의적 정책은 부시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이 일방주의 덕분에 부시는 자신이 악의 축으로 규정한 국가들 뿐만 아니라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 시민의 원성을 샀다.
에이미 추아는 2003년에는 세계화의 모순을 비판한 저작 <불타는 세계 World on Fire>을 통해 미국의 경제정책을 비판한 전적이 있는 지식인이다. <제국의 미래>에서 그는 광범위한 미 제국의 패권주의를 경계하고, 미국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한다. 이 책은 정치 비평, 논문에 닿아 있는 저작이지만 역사서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한 사료로 구성되어 있다. 인류사에 등장한 제국의 역사를 다루다보니, 고대에서 중세, 현대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던 주요한 제국들의 흥망 성쇠를 흥미롭게 재구성해 놓은 것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인류사의 주요한 제국은 어떤 나라들이었을까?
최초의 패권국가,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 팍스로마나의 전설 로마, 중국의 황금기를 이룬, 당, 유럽을 삼킨 초원의 지배자, 몽골제국, 그리고 신세계를 향한 최초의 탐험자, 스페인, 자본주의 경제를 석권한 중세의 네덜란드, 불관용의 덫에 빠져든 오스만, 명, 무굴 제국과 세계 최대의 해상국가를 이룬, 대영제국 그리고 최첨단 기술, 자본으로 현대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미 제국에 이르기까지다. 더불어, 이 책은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중국과 유럽연합, 인도가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점치며 마지막으로 미국이 제국으로서 그 명백을 유지하는 길에 대해 저자의 깊이 있고 진정성 있는 논평으로 책을 마무리 한다.
"모든 초강대국들에게 관용은 패권을 장악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제국의 쇠퇴는 불관용과 외국인 혐오, 그리고 인종적, 종교적, 민족적, `순수성'에 대한 촉구와 함께 시작되었다. " p.7 에이미 추아 <제국의 미래>
제국은 성장기에 정복 전쟁을 통해 이웃 나라를 병합하고 거대 연합을 이룬다. 제국은 그 후 정복한 땅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체제를 이식하는 방법을 썼다. 고대 사회는 다종교와 다문화를 통해 하나의 제국으로 병합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음에도, 이들 제국은 어떻게 그 과정을 순탄히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일까? 로마는 시민권 부여와 제국에의 편입이라는 미끼를 통해, 발전된 로마 문화에 대한 피정복민의 환심을 이용했다. 몽골제국의 징기즈칸은 세계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이룩했지만, 본토의 빈약한 문화와 정치체제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몽골족은 각 나라의 인종과 종교에 대한 무한한 관용 정책을 폄으로써, 거대 제국을 세울 수 있었다.
네덜란드는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잔인한 종교박해가 유행하던 시절인 1492년부터 1715년 사이에 이주한 숙련된 기술과 자본력을 가진 유럽인들을 포용함으로써, 중세의 강대한 자본주의 국가를 건립할 수 있었다. 19세기 대영제국은 계몽주의적 관용정책을 갖고 만민평등 사상에 기초해, 다양한 인종 집단과 종교집단에게 본토박이 잉글랜드인들과 같은 사회, 정치적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대영제국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성장했다.
저자는 제국의 탄생과 유지, 성장과 미래의 핵심 키워드로 `관용'을 설정한다. 그것은 인종을 무차별하고 종교를 박해하지 않는 것이다. 역사상 제국이 쇠퇴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에는 언제나 인종과 종교적 무관용이 등장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역사상 모든 제국에서 그점은 예외가 없었다. 중세의 네덜란드는 유럽의 소국 가운데 하나였지만, 인종과 종교에 대한 포용력 덕분에 기술과 자본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듬으로써 유럽 최강의 부국으로 발돋음한다. 로마 제국의 쇠락해지는 지점에서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치명적인 종교적 불관용에 들어섰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종교적 불관용은 제국의 다양한 주민들을 성공적으로 통합시켰던 동화 및 통합 전략을 훼손시키게 된다. 17세기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자국내 기독교도에 대한 잔인한 박해를 시작했다. 개신교도에 대한 프랑스내 종교 자유를 인정했던 낭트칙령을 철회 한 후, 개신교 성직자들은 교수형을 당했고 교회는 파괴되었으며, 재산은 몰수되었다. 수많은 위그노교도들이 투옥,고문,처형을 당했으며, 이 당시 종교의 자유를 찾아 많은 이들이 영국으로 피신하게 된다. 대영제국의 탄생은 종교,인종적 관용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같은 사례들을 통해 저자가 추출해내려는 지혜는 바로 미국이란 제국이 나아갈 미래다. 미국은 현재 정치,경제,군사적으로도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며 기축통화국의 자격을 위협받았고, 자국의 주요한 기업들은 문을 닫거나 닫을 위기에 처했다. 공적자금의 수혈이 아니었다면, 미국의 주요한 기업들은 몰락의 길을 이미 걸었을 것이다. 경제가 몰락의 길로 들어서자, 정치적 영향력도 추락하기 시작했다. 좌파정권들로 바뀐 남미에선 미국의 목소리가 잘 먹혀들지 않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고, 아시아 지역에선 중국의 경제력이 상승함으로써 군사적 힘겨루기가 진행중이다.
" 내가 반대하는 것은 미국 제국을 건설하는 것, 즉 다른 나라들의 정권을 변화시키고 미국식 제도를 강제하는 일에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쓰는 것이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세계의 패권을 지키겠다는 의도를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니는 것 또한 다른 나라 사이에서 미국의 입지를 위태롭게 할 뿐이다. " p. 467 에이미 추아 <제국의 미래>
저자는 군사력을 바탕으로한 미국의 일방주의 전략은 반드시 종말을 맞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미국이 전 세계를 자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개조하려는 무의미한 노력을 지속하기 보다는 자국의 역사와 원칙에 입각하여 세계를 위한 본보기 국가가 되는 편이 낫다고 조언한다. 세계에 체제적 제국을 이식하려 들지 말고, 자유주의 국가로서 보다 많은 관용과 포용력을 보여주는 `언덕위의 도시'가 되라고 말한다.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습성은 위험하다. 그것은 반드시 반발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것보단 공존을 택해야 한다. 저자의 말대로 역사와 문화, 종교가 다른 지역을 하나의 체제로 통합하려는 시도 자체가 반민주적이다. 역사에서도 그같은 제국의 시도는 언제나 실패했고, 제국 자체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힘이 있을 때, 그 힘을 평화와 공존을 위해 쓰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회와 역동성, 도덕성을 갖춘 나라로서 성장할 때, 제국은 군사력이 아니더라도 세계가 인정하는 제국으로 영속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에이미 추아의 이 책은 중국계 미국인으로서 자신의 성장 배경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를 담았다. 저자의 아버지는 중국인이었지만 필리핀에서 자라났다. 2차세계 대전을 겪던 필리핀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며, 미군의 지프차에서 던져주던 스팸 깡통을 뒤쫓던 아이였지만, 미국으로 건너와 일과 공부를 병행해 31세에 박사학위를 따고 미국 대학에서 종신교수로 임명된다. 저자는 미국이 이민자에 대한 기회와 관용을 베풀었기 때문에, 오늘의 자신과 가족이 진정한 미국인으로 성장하여, 성공적인 삶을 살아올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미국의 힘은, 또 제국의 힘은, 그같은 세계 시민에 대한 기회의 땅으로서 미국이 건네준 포용력과 관용임을 저자 자신이 증거하고 있다.
2012.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