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평전 - 신판
조영래 지음 / 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전태일, 그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어떤 육중한 무게감이 항상 나를 짓눌러왔다.  전태일에 관한 한국 현대사의 인식은 자신의 목숨을 불살라 뜻을 관철했던 무서운 `역사'로 자리매김 했던가?    그래서 그의 이름은,  같은 노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불리워질 수 없고  언급할 수 없는 `신화'로 나의 내면에 가라앉아 있었던 듯 하다.   그래서였을까?  흔쾌히 <전태일 평전>을 펴들 용기를 내지 못했다.  스물 두살 나이에 평화 시장의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을 목도하고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자신의 온 몸을 불구덩이 안에 가둬버린 사람.  아무래도 그를 읽어내는 일은 세상과 화해하며, 조화롭게, 성실하게, 잘 적응하여 살아가고 있는 유순한 이의 마음을 결국 갈아엎고야 말 것이란 두려움을 안겼다.  한 권의 책이라고 무턱대고 펴들 수만은 없다.  책 한 권이 역사를 변형시키는 무게를 갖는 것은 그러한 책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자를 독자로 맞이하였을 때이다. 

 

전태일 그가 죽고 40년이 흘렀다.  지난 2010년 11월 13일은 그의 분신 40주기였다.  살아 있다면 전태일은 이제 환갑을 맞았을 나이다.  그의 40주기를 맞아, 전태일이 분신했던 서울 종로구 청계6가에는 그의 이름을 딴 다리 하나가 생겼다.  많은 시민들은 `버들다리'라는 평범한 이름대신 "전태일 다리" 로 개명할 것을 허락하였다.   40년 전 평화시장의 한 복판 이었던 그곳에서 전태일은 온 몸을 불태우며,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 는 지극히 상식적인 문장들과 최후의 유언같은 `내 죽음을 헛되어 말라'는 말을 세상에 토해내고 분신했다.  그의 전신은 순간 숯처럼 시커멓게 타올랐으며, 온 살결이 화상으로 터쳤다.  그리고  얇은 눈꺼풀은 뒤집혔고,  입술은 퉁퉁부르터서 이제 그의 형체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비롯, 세상 그 누구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고야 말았다.  그럼에도,  전태일은 그 `몰골'을 하고서도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주장을 토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스물 두살의 이 파릇한 청년을, 불구덩이 속에 집어 넣었으며,  무엇이 이 청년의 절박한 외침을 불러왔는가? 

 

전태일은 가난했다. 평생 헐벗고 굶주렸다. 그가 성모병원의 누추한 병상에서 한 마지막 유언은 `배가 고프다'는 것이었다.  분신 하루 전날 라면 한끼를 먹은게 다였던 그는 그 말을 이 지상에 남겨두고 세상을 떴다.  어린 시절 재단기술자였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 때문에 전태일은 초등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고, 가족 모두가 굶주렸던게 일상사였다.  인생을 비관한 아버지의 술주정과 폭력 등에 못이겨 그의 어린 시절은 가출과 노동, 방황의 연속이었다.  어린 시절 전태일의 직업은 신문팔이, 구두닦이, 손수레 뒤밀이, 삼발이 장사였다.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부모의 후원아래 사랑받으며 공부할 나이에,  그는 세상의 밑바닥에서 주린 배를 안고  가난과 굶주림을 학습했고 그런 아이에게 던져지는 뭇 사람들의 멸시와 무관심을 경험했다.  그가 어떤 성품을 지니고 있건 상관없이, 그의 미래가 어떻게 꽃피울지 관심조차 없이, 단지 가진게 없다는 이유 하나로 천대와 비웃음이 그의 삶을 이미 규정해버렸다. 

 

가난했기에 학교를 제대로 다녀본적도 없었다. 그러나, 전태일은 배움에 대한 열망을 자신의 짧은 삶 안에서 불태웠던 사람이다.  그의 학력이란 가정 형편이 어려운 이들이 다녔던 고등공민학교의 1년간이 전부였다. 그의 수기에서 `청옥시절'로 표기되는 이 기간 동안, 그는 스물 두해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일할 때, 그는 입버릇 처럼 `대학생 친구가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되뇌인다.  하루 14시간 혹은 하루 16시간의 노동에 혹사당하면서도, 그는 대학에 대한 꿈을 잃지 않았고, 거금을 모아 검정고시를 위한 통신강의록을 구입하기도 한다.  훗날 그가 법대생이 독해할 수 있을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독학하고, 노동현실의 부당함을 스스로 깨우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분신의 순간, 근로기준법 책을 품에 안고 있었다.  그 책엔 수많은 밑줄이 쳐지고, 페이지마다 손때가 묻어 있었을 것이다.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비참한 노동 현실의 돌파구만큼이나 지식과 배움은 전태일에겐 간절한 무엇이었다.  

 

196,70년대 평화 시장엔 수많은 피복공장들이 난립해 있었다. 여기에 속한 공장주들은 시장법에 따라 발족한 평화시장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관청과 노동자를 상대하며, 업주들의 대변인기관 노릇을 했다. 평화시장 피복 노동자는 재단사, 미싱사, 시다, 등으로 구성 되었는데 총 작업장 수가 800여개, 근로자 수는 2만 여명에 달했다.  그 가운데 미싱사와 시다는 대부분 여공들로서 대부분 가정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12살에서 15살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이들은 철저한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 처해 있었다.  8평 정도 되는 작업장에 수대의 재봉대와 시다판들이 가뜩이나 비좁은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 틈서리에서 핏기 잃은 창백한 얼굴의 종업원 수십명이 끼어 앉아 일을 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1.5미터.  악명높은 평화시장의 다락방. 전태일과 그의 어린 시다들은 이런 환경속에서 하루종일 혀리조차 펴지 못하고, 제대로된 건강 검진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채 일해야 했다.  명절 성수기엔 밀려드는 물량으로 업주들은 잠이 안오는 약이나 주사를 종업원들에게 놓기까지했다.  그렇게 하루 14시간씩 몇 년을 일해도 어린 시다들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나이를 먹어 병든 몸을 안고 공장을 떠나기 일수였다.  1970년대 한강의 기적을 일구었던 노동자들의 현실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던가?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貧)한 자는 부(富)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가장 청순하고 때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묻고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  전태일의 1970년 초 작품 초고에서  

 

 

 전태일은 거대한 인간 시장인 평화 시장의 어두운 작업장에서, 저 처절한 노동의 현실을 목격하며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노동자의 권리, 노동자의 인권은 업주들이 스스로 챙겨주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스스로 요구해야할 권리임이 마땅하다고 말이다. 그런 전태일에게 근로기준법의 발견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만연되는 현실의 부당함을 근로기준법은 철저히 부정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근로기준법은 노동자가 정당한 급여와 근로 여건과 건강과 휴식과 자존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명백히 쓰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은 정반대였지만, 근로기준법만 지키면 모든 부정의가 정의로 환원되고야 마는 이 역설.   그는 근로기준법을 연구하며, 노동자를 규합하고 노동 현실을 고발할 것을 결심한다.   전태일은 1969년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와 1970년 `삼동친목회'를 조직하여 평화시장의 노동자 동료들을 규합하고 노동청과 근로관독관을 찾아다니며, 근로 조건의 개선을 요구했다.  그러나, 업주와 관료의 카르텔은 확고했다.  그가 손에 든 근로기준법은 그저 유식한 법조항에 지나지 않았고, 현실에서 힘을 발휘할 수 없는 휴지조각이었다.   그러나 전태일의 강고한 저항은 언론을 통해 평화시장의 실체가 보도 되는 성과를 올리기에 이른다.  

 

그가 꿈꾸었던 세상은 정직한 노동에 정당한 대우가 보장되는 사회였다.  부한 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노예취급 하지 않는 세상,  모두가 인간으로서 공정하게 부가 분배되고,  소중한 노동자의 땀이 결실이 되어 돌아오는 그 순리의 세상이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내며 노동자를 착취하고 억압하지 않아도, 업주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보여주고자 했다.  노동자에게 은전과 자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상식적인 대우만 해도, 업주와 노동자가 모두 다 잘 살 수 있음을 그는 증거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기엔 현실은 너무 척박했다.  비록 배우지 못했지만, 전태일은 이것이 인간의 도리임을 알고 있었다. 평화 시장의 돈만 밝히는 그 업주들처럼이 아니고,  언젠가 철학자 칸트가 역설했듯이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걸,  그는 사람의 도리로서 깨우치고 있었던 것이다.   

 

전태일은 어느 순간,  재단사로서 성공한 미래의 청사진을 버린다.   그토록 평범하고 쉽고 이기적인 길을 버린다.   언제까지나 계속될지 모를 저 어린 시다들의 노동을 목격했던 그로서, 그는 내면의 양심의 소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가 요구했던 근로조건의 개선은 관료와 업주들의 결탁으로 진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약속을 어겼고, 끝없이 노동자인 자신과 그들의 동료들을 조롱하고 있었다.  세상은 하루 14시간의 살인적인 노동속에서 피어보지도 못하고, 시들고 있는 어린 시다들에게 그다지 관심을 보이질 않았다.  그는 그 어린 동생들을 위해, 이 땅의 처절한 노동 환경의 부당함을 고발키 위해,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했다.  세상의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평화시장의 어린 노동자들의 인간답지 못한 삶을 알려야했다.  그는 성자처럼 모두를 위해 혼자 희생하기로 마음먹었다.   분신 몇 달 전 어느 기도원에서 써내려갔을 일기는 여전히 세상의 모든 노동자들을 숙연케 한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간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理想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나님, 궁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전태일의 1970년 8월 9일 일기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최초의 노동자 항의 집회가 예정된 청계천 광장으로 자신의 동료들을 먼저 내려보낸 후,  한쪽 품에 근로 기준법 책을 안고 10분후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다.  전태일이 몇 발자국 발을 내딛자마자, 갑자기 그는 불길에 휩싸였다.  그가 한쪽 품에 끼고 있던 근로 기준법 책도 함께 불타올랐다.  그리고 그 화염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목놓아 부르짖는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을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그리고 최후 성모병원의 어느 누추한 병상에서,  그의 곁을 지키던 어머니와 동료들에게 외마디 당부를 하고 스물 두살 슬프고 아름다운 생을 마감하였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전태일은 그렇게 이땅에 영원한 노동자의 친구이자, 오빠이자, 형으로서 남겨졌다.  전태일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비인간적인 노동현실을 고발했고, 어린 나이에 피지 못하고 시들고 있던 어린 노동자들을 감싸안았고,  부당한 착취와 억압과 직무유기에 능한 업주와 관료들의 비리를 증거했다.  자신의 살과 함께 태워진 근로기준법 책을 통해 근엄한 법조항이 고통받는 노동자를 위해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함을 세상에 알렸다.  전태일의 분신은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신화가 아니며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800만 비정규직이 처한 오늘의 현실이자, 사회 곳곳에서 착취와 억압아래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모든 노동자들의 일상이다.  그래서 전태일의 외침은 아직도 유효하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어서 혹사당해서는 안 된다.  근로기준법은 지켜져야 하며, 법을 지키는 것은 민주국가의 기본이다.   인간은 수단이 아니며 목적이어야 한다.  정의란 이렇게 단순하고, 명쾌한 법이다.  전태일의 수기는 인권변호사이자 깨어있는 양심이었던 고 조영래 변호사의 집념으로 쓰여졌다.  독재에 항거하며 투옥과 수배를 반복했던 그는, 수배시절 인간애로 넘쳐나던 청년 노동자 전태일을 발견했다. 그의 손에 의해 다시 쓰여진 전태일의 삶은 항상 가난한 자들과 권력에 휩쓸리던 사람들의 변호에 앞장서던 그의 삶과 닮아 있다.   

 

전태일과 조영래의 만남은 생전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입버릇처럼 생전 전태일은 대학생 친구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결국, 죽어서야 그는 믿음직한 친구 한 명을 얻고야 만 것인가.



201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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