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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잃어버린 시간들
까마득한 시간들이 있다. 지금은 잊혀진 듯 하지만, 어느 순간이라도 다시 기억속에 물리적인 법칙보다 더 빨리 불러낼 수 있을 듯한 구체적인 형상들로 다가오는 시간들 말이다. 과거가 없이 현재를 누비는 존재란 없다. 몸에 난 조그마한 흉터마다에 시간과 사건의 구체적 결이 묻어 있는 것을 어찌 부정하랴. 내 손등에는 초등학교 4학년때 논두렁을 불태우다 덴 상처가 있다. 초등학교 2학년땐 자전거를 배우다 넘어져 난 상처가 무릎에 제법 길게 나 있다. 몸 구석구석은 나의 지난 시간의 결을 대변하고 증거한다. 그런데 마음에 덴 상처와 찢겨진 상처들은 흔적이 없다. 마음엔 상처가 나지 않는 것일까?
신경숙 장편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뭇 사람의 성장소설이자 청춘소설이다. 구체적인 육체의 흉터들이 아니라 마음의 상처와 덴 흔적들을 파고드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한 개인의 기억속에 숨겨진 모든 아릿한 상처들을 복원시킨다. 상처는 치유되고, 봉입되어야 하지만 이 소설은 오히려 감싼 붕대를 풀고 아물지 않는 상처를 독자의 시선과 공유하려 한다. 신경숙의 이야기는 청춘을 벗어나 편리하게 과거를 잊고 살아가는 바쁜 `중년'들에게 그들이 어물쩍 잊으려 했던 시간들을 되살려낸다. 청춘이란 현재를 억압과 불안속에 지나오고 있는 `청년'들에게 그들이 존재하는 좌표를 확인케 돕는다.
이 소설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내가 존재했던 20대 초입의 시간과 공간이 내 현재의 삶 안에서 다시 되살아나는 경험을 했다. 그것은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들과 `오늘을 잊지말자(p.20)'라고 되뇌이는 소설속 주인공의 주문처럼 애틋함이 동시에 물려 있는 순간이다. 그래서 균형추로서 오늘의 나를 서 있게 해주었던 것들이라 말할 수 있겠다.
문학이 아니라면, 한 편의 잘 쓰인 소설이 아니라면, 우린, 나는, 어떻게 이 비열하고 편리하게 잊고지낸 시간들을 기억속에서 불러낼 생각이나 했을까? 그 시간의 결 안에 잠든 나의 모든 아름답고 초라했던 사랑과 다시 마주할 용기를 얻어낼 수 있었을까? 현재와 미래안에 갖힌 닫혀버린 영혼이 과거로 들어가는 길은 다채롭다. 신경숙은 이 다채로운 길 가운데 한가지를 선택한다. 그것은 어느날 어디선가 나를 향해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를 듣는 것이다. 아마도 그 전화는 휴대폰 같은 건 아닐 것이다. 거실의 어느 구석 테이블에 올려진 두툼한 수화기가 달린 전화기 같을까? 새벽녘이거나 자정 정도일지도 모른다. 긴 정적을 깨뜨리는 전화벨은 불길하진 않을 듯 하고, 당신은 전화벨 소리가 오래도록 울릴만한 넓디 넓은 공간속에 아직 잠들지 못하고 서성인다. 누가, 무엇이, 왜, 그 늦고 이른 시각, 나를 찾고 있는 것일까?
"그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은 팔 년 만이었다. 나는 단번에 그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여보세요 ? 하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어디야? 하고 물었다. 그가 침묵을 지켰다. 팔 년. 짧은 세월이 아니다. ............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 p.9-26 신경숙, 프롤로그
시간의 세심한 결
작가가 불러낸 인물들은 4명의 청춘(윤이,명서,미루,단이)과 한 명의 스승(윤교수)이다. 민주화 운동, 독재의 항거, 명동 성당의 단식투쟁, 연이은 사람들의 실종 사건, 군대간 이들의 의문사, 도로를 가득메운 최루가스, 몰려다니는 시위대, 교수들의 시국선언, 해직과 사표, 이 모든 것은 이 소설을 감싸고 있는 주요한 외피다. 그들이 놓여 있던 공간과 시대 상황은 평탄했을 사람들을 삶을 훼손한다. 양심과 상식을 가진 청춘들을 거리로 내몰고 투사로 만들었던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들을 소설은 안쓰럽게 그려낸다. 그 안에서 인물들은 두가지 관점에서 실패로 내몰린다. 민주화의 패배와 실연이다. 그들이 도달하고자 한것은 이 두가지 였으나, 소설속 청춘에게 그 어떤 것도 허락되지 못한다. 소설은 실패와 자신과 실패를 목도하는 또다른 시선을 모두 담는다. 그 두 진영이 겪는 아픔의 무게는 똑같다. 죽음이란 무서운 단절은 독재와 실연이란 이유로 그들이 내몰린 운명이다.
소설은 스승 윤교수의 가르침(크리스토프의 교훈:예수님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너서 구원을 받은 사람처럼 용기있고 담대하게 살라)과 육체적 쇠락(윤교수의 죽음) 사이를 4명의 청춘이 지나오는 시간속에 담는다. 신경숙의 문체는 시간을 정체시킬만큼 느리다. 그가 미루와 단이와 명서와의 관계를 짓고 허무는 윤이의 시간들을 길게 이야기 할때마다, 이 갑갑함은 독자를 짓누른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갑갑한 더딤이 바로 이 소설의 미덕이요 가르침이다. 독자는 윤이의 그 길고 느린 이야기속에서, 우리를 구성한 `시간의 세심한 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 않을까? 소설속 그들의 운명과 함께 독자의 과거가 뚜렷한 기억속의 결로 복원되는 마술이 시작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아무런 감흥이 없다. 내게 어떤 아름다운 추억도, 기억할만한 사건도, 그저 그런 에피소드, 아님 소극(笑劇)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자책은, 우리가 과거를 회상하는 사소한 방식 아닐 것인가? 지나온 청춘들을 회상할 여건도 여력도 없이, 둔중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독자들이 한 둘 일까? 다만, 이 불황과 궁핍의 시절을 잘 살아내야 한다는 몹시도 저열할지도 모르는 이유 때문에 말이다.
친절하고, 세밀하게, 애잔하고, 포근하게, 이 상처난 시대와 아픈 청춘들의 사랑을 그려내는 작가의 글은 소설책의 표지 그림으로 들어간 John Atkinson Grimshaw(존 앳킨슨 그림쇼)의 ‘Wharfedale(와피데일)’ 의 분위기와 빼닮았다. 와피데일은 영국 요크셔데일의 한 골짜기를 이름한단다. 과거로 인한 상처, 청춘으로 인한 절망을 담고 있는 소설속 인물과 독자, 모두를 위로할만한 색감과 분위기를 담고 있는 그림이 와피데일 같다. 어쩌면, 독자는 이 표지 그림을 바라보며 가끔 책장을 덮고 오랜 상념에 빠져들었을지도 모른다. 현실의 황혼이나 그림속의 황혼이란 모두 그런 역할을 하게 마련이니까.

"인생은 매순간 우리에게 힘든 결단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산다는 것은 무無의 허공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와 질감을 지닌 실존하는 것들의 관계망을 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끝없이 변하는 한 우리의 희망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p.291 `윤교수가 학교를 떠나며 남긴 편지中'
`오늘을 잊지말자'
그것이 기쁨이나 아픔이거나 과거의 어느 순간 소설속 인물들은 `오늘을 잊지 말자'고 서로를 다독인다. 윤이는 소꿉친구 단이를 군대에서 잃고, 명서는 사랑했던 사람 미루를 자살로 잃었다. 그들에게 인생과 예술을 가르친 스승, 윤교수는 제자들 앞에서 담담히 소멸의 시간을 맞는다. 모든 것은 지나가기 마련이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간이란 파고에 휩쓸려 나이를 먹지만 어딘가로 흐르는 시간은 배 안에 갖힌 우리를 끝없이 우리가 설정한 목적지로 실어 나를 것이다. 그 중간, 우리는 사랑했던, 존경했던, 어떤 이를 잃을 것이다. 그것이 시간의 이치다.
그러나, 남겨진 이들에게 과거는 사라진 거짓이 아니다. 엄연히 우리의 몸, 우리의 뇌세포, 하나하나를 이루는 분명한 현실이요, 진실이었다. 신경숙은 에필로그에서 이 소설의 의미를 단정짓는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울한 사회풍경과 시간을 뚫고 나아가서 서로에게 어떻게 불멸의 풍경으로 각인되는지...를 따라가보았다.'(p.377)
이 소설속 인물들처럼, 독자들의 사랑에도 만남과 이별과 죽음이 존재했을 것이다. 암울한 시대상황이란 무거운 대기가 짓누르는 그런 엄혹함은 없었을지 모른다. 아마, 대부분은 그러할 것이다. 허나, 잊혀진 사랑에는 언제나 절박함 같은게 있기 마련이다. 실패한 사랑은, 예외없이 아린 상처를 남긴다. 이제 청춘의 시간을 멀리 지나온 이들에게도, 사랑은 그저 행복한 그 어떤 것들로 기억되진 않는다. 언제나 과거의 사랑은 두가지 상반된 기억들을 모두 함유한다. 설레임과 상실감이다.
신경숙의 소설은 기억상실증에 걸려버린 노쇠한 독자들에게 이 모두를 되살려주려는 노력의 일부분이다. 어쩌면 `안데스 산맥 기슭의 황량한 나스카 평원에 사람의 눈높이로는 볼 수 없고 하늘에서만 볼 수 있는 해독이 불가능한 기하학적인 도형들이 황무지에 새겨졌던 것처럼'(p.367) 이 소설은 청춘안에 머물고 있는 당신의 좁은 시야를 넓혀주는 가상한 노고같기도 하다. 청춘을 지나온 이와 청춘을 지나고 있는 이, 모두에게 그러므로 이 소설은 의미를 지닌다.
그녀의 일곱번째 장편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내게 신경숙 작가를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녀의 소설들은 지금껏 내게 서먹한 손님에 지나지 않았음을 고백해야겠다. 십수년 전 <외딴방>이 그랬고, 최근의 <엄마를 부탁해>가 그랬다. 모두, 평단과 독자의 극찬을 받았건만 내게 신경숙의 소설들은 어김없이 자리한 에고(Ego)에 짓눌려, 언제나 거리감을 두고 싶은 문장들이었다. 그러나, 일곱번째 장편과 그를 알게 된지 이십여년이 지나서야 그의 소설을 아무런 의심없이 지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건, 외면하던 누군가와 화해하는 것만큼 기분좋은 일이다. 즐겁고, 행복하게, 그리고 아릿하고 처연하게 읽은 몇 안되는 소설로 기억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