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먼 지음 / 책벌레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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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래리와 앤디 워쇼스키 형제가 만든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많은 화제속에 개봉된 이 영화는 영화사적으로 적지 않은 이슈를 만들어 냈다.  이 영화는 단순한 공상과학(SF) 영화가 아니라 그 촬영 기법의 독특함에서부터 영화가 보여주는 상징성과 함축성이 종교와 철학적 비유에 닿아 있다는 해석을 낳게 만들었다.  이 영화 이후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매트릭스란 무엇이며, 우리의 메트릭스는 진정 우리 자신을 어떻게 프로그램화 시켰을까?"라고 질문하는 법을 배웠다. 

이 영화가 의미 깊었던 것은 바로 단순한 SF 영화로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는데 그치지 않고, 관객 자신에게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게 한것에 있다.  이것은 평소 그런 의문속에 살아오지 않은 사람에게도 가상현실속에서 기계에 의해 프로그램화 되어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영화속의 인간들이 곧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란 의문을 품게 한다.  우리들을 가두고 있는 이 외부의 알 수 없는 힘은 대체 무엇일까?   그 힘은 셀 수 없이 많고, 또한 무한한 것처럼 보인다.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이란 본래 아무런 힘도, 권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그는 하나의 시스템(체제)속에 무방비로 내던져진 존재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시스템은 국가일 수도 있고, 법률일 수도 있고, 한 사회의 도덕률 일 수도 있고, 또 인종이나 민족, 더 좁게 가족일 수도 있다.  영화 <매트릭스1>의 대사 한 부분은 그런점에서 의미깊다.

"(모피어스)  그게 뭔지 알고 싶나? 매트릭스는 사방에 있어. 바로 이 방에도 있고 창밖을 내다봐도 있고 TV안에도 있지. 출근할때도 느껴지고 교회에 갈 때도 세금을 낼 때도 진실을 못 보도록 눈을 가리는 세계관이지."
"(네오)  무슨 진실요"
"(모피어스)  네가 노예란 진실.....너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모든 감각이 마비된 채 감옥에서 태어났지. 네 마음의 감옥. 불행히도 매트릭스가 뭔지 말할 수 없어. 직접 봐야만 해."  영화 <매트릭스1> 대사 중

한 권의 책을 소개하기에 앞서, 영화 얘기를 한 것은 내가 읽은 책이 우리들의 세계관, 즉 경제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현대의 자본주의가 어떻게 기원, 발전, 변질, 고착 되었는지에 관해 우리가 지금껏 배우고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내용들을 세밀하고, 친절하게 분석,설명하고 있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원제 Man's Worldly Good(The Story of the Wealth of Nations>의 저자인 리오 휴버먼은 1903년 미국 뉴저지의 뉴어크라는 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언론인이자 학자로 노동운동가로 살았던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적 지식인 가운데 하나다. 그는 1949년 세계적으로 유명한 진보 잡지 <먼슬리 리뷰 Monthly Review>를 폴 M. 스위지라는 사람과 창간해 죽을때까지 편집자로 일한다.  그의 이 책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는 출판된지 꽤 오래 되었지만(20세기 초), 현대 자본주의 역사에 대한 교과서로 부족함이 없이 지금껏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있다.  

한 권의 책이 한 인간이 살아오면서 받은 경제나 역사 교육 전체보다 더 많은 것을 줄 수도 있다. 그러한 책은 흔하지 않다.  오랜 시간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요약하고, 분석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 경제나 역사를 꿰뚫어 보는 저자의 능력이 첨가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작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리오 휴버먼의 이 책은 오늘날 소위 `인간의 얼굴'을 한 친숙한 자본주의로 발전하기까지 그 체제가 발전되어온 단계를 매우 소상하고, 흥미롭고, 지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수작이라 말할 수 있다.  

이 방대하고 세밀한 책을 요약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 몇단계를 간략히 요약해보는 것은 이 글에서 필요할 것 같다.

중세를 거쳐 근대와 현대로까지 이어지는 이 책의 분석은 경제적 체제의 변화에 그 포커스가 맞춰져 있으나, 실은 경제만을 다루고 있지 않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경제체제는 경제만을 중심으로 발전돼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제는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은 사회의 하부구조를 이루는 견고한 뼈대였으나 상부구조를 결정하고, 통제하는 강력한 수단이었고, 정치 체제까지를 떠받치고 있었다.  중세의 봉건구조아래선, 농민이 지배계층인 성직자와 지주(귀족) 계급을 부양했다. 

중세의 장원제도 아래서 지주는 땅을 분배했고, 그 땅을 경작했던 농민은 수많은 의무를 졌다. 교회와 지주 계층에 대한 농민의 의무는 가혹했다. 즉, 그들은 수탈 당했던 것이다.

" 또 교회는 `십일조'로 재산을 늘렸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의 소득에 대한 10퍼센트의 세금이었다. 한 유명한 역사가는 그것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십일조는 오늘날의 어떤 세금보다도 훨씬 더 부담이 큰 토지세, 소득세, 사망세로 이루어졌다. 농민들은 모든 생산물에서 정확히 10분의 1을 바칠 의무가 있었을 뿐 아니라... 양모에 붙은 십일조는 심지어 거위 털에도 적용되는 것이 관행이었다. 길가에서 풀을 깍아도 통행세를 내야 했다.  수확한 곡물에서 경작 비용을 공제한 후에 십일조를 바친 농민은 지옥에 떨어지라는 저주를 받았다. "  리오 휴버먼,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p.29

중세의 십자군 전쟁에 대한 저자의 견해가 드러난 장면은 역사속에 매몰된 하나의 진실을 건져올리는데 유용하다.

"지중해 연안의 이슬람 교도들과 동유럽의 여러 부족들을 상대로 한 영토 전쟁은 십자군이라는 존엄한 이름이 붙었지만, 실제로는 약탈과 토지를 위한 전쟁이었다. 교회는 이 약탈 원정이 복음을 전파하거나 이교도를 절명하거나 성지를 수호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존엄을 가장했다."   리오 휴버먼,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p.34

중세가 저무는 지점은 상업의 번성이란 사건을 동반한다.  상업이 각 도시를 중심으로 점차 번지면서 상인계급이 새롭게 부상한다.  상업이 번성하면서 각 도시는 더욱 번성하기 위해, 많은 혜택들을 도시민에게 주려 했다.  그 가운데 구체제인 장원제도와 그 제도 아래서 이익을 봐온 세력은 자신들이 누려온 특권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만약 이 책을 읽는 독자가 기독교도라면 매우 불편할 수도 있다. 오늘날 근엄과 도덕을 내세우는 교회의 역사적인 악행이 모두 이 책 속에 집약돼 있단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 악행은 지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민간인을 상대로 파렴치한 전쟁을 수행하며, 수많은 민간인을 살해하고 있으면서, 적반하장격으로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그 어떤 세력도 모두 적이라고 천명하는 그 오만함에 비견될 만하다.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농노 해방을 제일 반대한 사람들은 귀족이 아니라 교회였다. 농노에게 자유를 주고 돈으로 하루 임금을 받고 자유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 자기 지갑을 위해서 더 낫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영주가 알게 됐을 때도 교회는 여전히 농노 해방을 반대했다. 클루니악 수도회의 규칙을 보면 그런 태도가 얼마나 오래 유지됐는지 알 수 있다. `우리 수도회의 수도원이 거느리는 농노나 남녀 종, [종] 신분의 여자를 다스리는 사람 가운데 그들에게 해방과 자유의 문서나 특권을 주는 사람들을 [우리는 파문한다]'" 리오 휴버먼,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p.68

중세를 벗어난 유럽은 국부와 국력을 증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여러 법률을 통과시키면서, 해외 무역을 통해 식민지를 개척한다. 이러한 이론과 법률을 역사는 중상주의라고 규정했다.  중상주의는 자본 형성의 씨앗이 되었다.  그리고 구체제는 부르주아들에 의해 혁명이란 결과로 나아가 결국 프랑스 혁명을 통해, 봉건제는 치명타를 입는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중세의 끝으로 기록될만 하다. 그리고 이 혁명을 통해 하나의 분명한 중간 계급이 생겨났는데, 그들은 부르주아였고, 그들은 봉건제 대신 이윤 창출을 제 1의 목적으로 하는 상품의 자유 교환에 기초한 다른 사회 체제를 등장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다.

역사의 긴 여정을 마치고 도달한 것은 자본주의다.  체제가 바뀌었을 때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까?  봉건제를 굳건히 바치고 있던 농민과 성직자, 귀족은 새로운 사회에 새로운 옷을 입어야 했다.  농민은 명목상 지주의 땅에서 노동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성직자는 농민에게 구시대의 수탈을 할 수 없었다. 이제 종교는 새로운 체제의 옷을 입어야 했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맞게 수정되어야 했던 것이다.  신교는 근면과 절약이란 미덕을 가르쳤다.  중세 교회는 돈이 많은 것을 악덕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였으나 이제 세상 사람들에게 근면해서 부자가 되는 것은 가장 큰 미덕 가운데 하나라는 다른 가르침을 주었다.  국가는 국부를 향해 달려가면서 식민주의 건설에 열을 올렸고, 자본은 이제 농노에서 자유민이 된 사람들을 새로운 체제안에서 새로운 방법으로 수탈했다.  

전체가 하나 버릴 것 없는 알곡으로만 채워진 책을 만나는 것은 독자에겐 행운이다. 그러나 이런 책에 과도한 욕심을 부려 그 모두를 요약하고자 욕심을 부린다면, 그것은 쓸데없는 노력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그러므로, 이 책에 대한 요약은 여기서 끝내고자 한다.  리오 휴버먼의 이 책을 통해, 현대의 자본주의가 어떻게 생성되고, 뿌리 내리고, 그리고 유지되었는지 이 책을 읽는 독자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을 역사속에서 조망함으로써,  시대의 역사와 경제, 법률, 종교 그 모두를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는 지식을 제공한다. 

분명한 것은 중세의 농민은 90 프로가 넘었고, 특권층인 성직자와 귀족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며, 수탈했던 역사는 과연 몇백년전의 중세에서 끝나고 말았을까?  중세는 근세와 근대를 거쳐 현대의 이르렀다.  그러나 자본주의 발전도상에서 중세의 `농민'은 현대의 `노동자'가 변신하여 자본에 의해 수탈되는 역사를 재현하고 있다,고 이 책은 분석한다. 이 책은 20세기 초에 집필 되었지만, 21세기 현대의 독자에게도 시대적 감각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리오 휴버먼은 단적으로 자본주의를 이렇게 분석한다.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로 남아 있는 한, 과잉 자본은 결코 대중의 생활 수준 향상을 위해 쓰이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자본가의 이윤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 p. 310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윤을 남기는 교환을 위해서 상품을 생산한다. 자본가는 애국심이나 공익 차원에서 투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돈벌 기회를 발견할 때에만 투자한다. 이것이 자본주의 체제다. 이것이 자본주의 체제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p. 321

우리에게 매트릭스는 몸에 익숙한 체제다.  그것은 자본주의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안에서 산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인간의 얼굴'을 하게 되기까지 어떤 모습으로 발전해 왔는지 아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매트릭스의 본질로 다가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본질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많다.

현대의 자본주의는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발전해 왔다. 그것은 노동에 대한 자본의 수탈과 노동자의 생산 도구화로 변질된 역사가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가장 충실한 체제라는 고전적 해석도 있다. 이윤추구라는 인간성의 일부분을 체제로 수용하고, 개인의 발전과 경쟁을 무엇보다 우선으로 두는 공정한 제도라는 인상도 담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에서 강자와 약자가 존재한다.  지금껏 역사는 언제나 강자 편을 들어왔다. 자본주의 역사의 발전 과정을 지켜보면서, 권력이 무엇을 위해 존재했는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그 시대의 자신들이 가진 부와 권력과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법과 제도와 종교까지를 이용해 왔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이 아닌 소수가 잘 사는 사회를 위한 그러한 지난한 노력 자체가 바로 인류의 역사였다는 것은 아이러니고 안타까움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은 도덕률은 강자보다는 약자의 손을 들어줄 것을 요구한다.  약자는 강자의 횡포에 보호되어야 하며, 그것이 곧 정의다.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훌륭한 교과서가 될만한 리오 휴버먼의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역사와 경제에 대한 제대로 된 수업을 받은 느낌이 든다.  자본이나 노동의 편향된 시각이 아니라, 이 책은 `역사'라는 하나의 관점을 정직하게 수용하고 있다.  그 역사속에서 인간이 한 인간을 그리고 민족이 한 민족을 수탈하고, 살육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것은 먼 과거의 이야기일 뿐더러, 현재 진행형의 역사이기도 하다.  우리가 서글픈 이유다.   

지금도 우리 노동자는, 그리고 세계의 약소 민족은,  힘있는 자들의 폭력과 자기합리화 아래서 고통받고 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부르짖는 우리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절규가 그것을 말해주고, 지구 반대편 세계, 이스라엘의 맹폭을 받은 팔레스타인에서 한 아버지의 손에 들려 피흘린채 울부짖는 아이의 일그러진 얼굴과 눈물이 또한 그것을 증명한다. 

자본주의, 우리들의 매트릭스는 `정의(正義)'를 어떤 의미로 프로그램화 시켰을까?   진리가 하나라면 그 뜻도 하나여야 한다.  



 
 

2009.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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