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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나의 집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속에서 사람들과 얽혀 살아가는 일은 평범한 일상이지만 때로 피곤한 일이다.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당대 가장 좋은 대학을 나오고서도 산속으로 들어가 오두막집을 짓고 사람과 문명과 격리된 삶을 선택했었다. 그 이유가 구구절절 말들이 많겠지만, 나는 소로우가 사회와 인간관계의 어려움에서 벗어나려 한 의도를 어느정도 지니고 있었던게 아닌가 추측해보고 싶다. 그가 쓴 <월든>을 보면 이러한 내용이 나온다.
"사람들이 헛간으로 피할 때 그대는 구름 밑으로 피하라. 밥벌이를 그대의 직업으로 삼지말고 도락으로 삼으라. 대지를 즐기되 소유하려 들지 마라. 진취성과 신념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이 지금 있는 곳에 머무르면서 사고 팔고 농노처럼 인생을 보내는 것이다." <월든> H.D.소로우
그의 이 말에서 자유로운 영혼의 소중함을 깨닫고 사람들의 시선따위를 의식하지 않으며, 개성있게 자신을 풀어놓고 살아갈 것을 희망하는 그의 바람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인간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한 거의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체면을 생각하게 되면서, 사회 구석구석에선 수많은 비효율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결혼생활 자체가 지옥이면서도 이웃과 친척들의 눈이 무서워 이혼도 쉽게 고려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난 우리 부모님 세대처럼 참는걸 미덕으로 알고 자신의 행복추구보다는 자식의 미래를 더 걱정하면서, 사랑없고, 정없는, 결혼생활을 이어간다.
우리사회에서 이혼이라는 것은 여전히 금기중의 금기다. 결혼의 그 성대함과 화려함에 비교하면 이혼이라는 인간사의 사건 가운데 하나가 왜 유독 우리사회에서 그렇게 금기시 되고 있는지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대개 결혼의 전제조건은 사랑이다. 그 전제조건은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가장 큰 동력인 것이다. 하여, 더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어 그 동력을 상실하게 된다면, 결혼의 당사자들은 이혼할 "수도" 있는 것이 논리적이다. 더불어 타인의 행복추구권과 직결되고 사생활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이혼에 대해, 가십으로 삼거나 더 나아가 이혼행위 자체를 비난해야 할 이유는 타인에겐 없다고 봐야 한다.
한나라당 나경원 의원이 우리 사회의 고질적 행태를 빗댄 유머를 했다가 된통 혼쭐이 나고 있다. 그녀 왈 이렇게 말했었다. "1등 신부감은 예쁜 선생님이고, 2등 신부감은 못생긴 선생님이고, 3등 신부감은 이혼한 선생님, 4등 신부감은 이혼하고 애딸린 선생님이다" 대개 유머란게 핵심를 찔러야 웃음을 유도해 낼 수 있는 것이기에, 그가 유머라고 내뱉은 이같은 얘기는 우리 사회의 인식을 제대로 찔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책임있는 여당의 국회의원 입에서 나올만한 말은 못 된다. 그의 이 유머속엔 이혼녀에 대한 편견과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고정관념이 흉물처럼 단단히 박혀 있기 때문이다.
공지영의 소설 <즐거운 나의 집>에는 세번 이혼한 여류작가를 엄마로 두고 있는, 더불어 각자 성씨가 다른 동생 두 명을 갖고 있는, 여고생이 화자로 나온다. 세번 이혼한 전력을 갖고 있는 이 가정의 엄마는 이 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는 유명인이고, 지식인이며, 아이들을 혼자 키워낼 능력도 된다. 강연과 소설쓰기로 바쁜 엄마. 사회적 이슈에 대해선 가장 진보적인 시선을 가진 엄마. 그러나 사춘기에 접어든 고등학생 딸의 눈을 통해 묘사된 엄마는 평소 덜렁대고, 감상적인 눈물을 아무대나 흘려대고, 아이들에게 공부해라 소리를 지겹도록 해대며, 담배와 술로 인생을 즐길 줄도 알고, 가끔 아이들을 위해 맛있는 요리도 할 수 있는, "비교적" 평범한 엄마다. 그러나 또 하나가 있다. 그는 성씨가 다르지만 자기 배 아파 낳은 아이 셋과 함께 한번 하기도 어려운 결혼을 세번씩이나 하고,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살겠다는 서약을 세번이나 어긴, "세번씩이나" 이혼한 이혼녀다.
이 소설의 화자는 엄마의 큰딸인 여고생이다. 그는 아빠와 새엄마와 함께 살다 그 집을 나와 엄마의 집으로 온다. 그가 어린 시절을 포함해 아빠의 집에서 성장한 것을 생각하면, 엄마의 집으로 되돌아오는 과정은 비교적 순탄하게 이 소설속에 그려져 있다. 새엄마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 어린 시절 사랑없고 정없는 삶의 아픈 추억, 그리고 아빠에 대한 애증을 안고 세상 사람들처럼 세번 이혼한 엄마에 대한 편견을 품고 있는 그지만, 점점 엄마의 삶을 이해하고 세상의 편견앞에 떳떳해지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삶이란 시답잖고 부담스런 시선들의 연속이다. 올곧게 살아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이 세상에서 타인의 적대적인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 익명이란 옷을 걸치면, 그들의 타인에 대한 공격성은 극에 달한다. 칼보다 펜의 힘이 강하다, 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때 펜의 의미는 정당하고 공정한 펜을 의미한다. 인터넷에 악플을 다는 사람들을 보면, 인간이란 태어날때부터 타인에 대한 원초적 공격성을 그 본성에 내포하고 있는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그 폭력성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내포하고 있는지, 그러한 폭력적인 본성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도, 우리는 최근의 연예인 자살 사건 등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빙점>을 지은 일본작가 미우라 아야꼬는 어느 책에서 죄인의 정의를 이렇게 빗대어 설명했었다.
"우리집에 도둑이 들어 귀한 물건을 훔쳐 달아났다면, 우리는 도둑을 나쁘다고 증오하고 그의 죄를 미워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내 자신이 누군가에게 내뱉고 행한 증오스런 언어와 몸짓에 대해서는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귀중한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자살해 버리진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에게서 들은 모욕적인 말 한마디로 죽을 수도 있는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야말로 우리가 감옥에 있는 그 도둑보다 죄가 더 적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 미우라 아야꼬
그래서 세번 이혼한 여자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일은 좀체 녹녹치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조용히 살아도 유명세를 치를 수밖에 없는 소설속 베스트셀러 여류작가란 그들에게 먹음직스런 먹잇감이며, 이 때 그들은 먹이를 찾아 킬리만자로를 오르는 하이에나만큼이나 집요하고 난폭해진다.
이 소설이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새 시대에 새 가족의 의미를 묻다"였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이 소설이 지향하고 있는 방향은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과 편견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선언이다. 그에 빗대면 엄마는 해방군의 선봉에 선 여장부와 다를 바 없다. 강연을 부탁하러 왔다가 세번 이혼한 전력을 비꼬는 상대에게 엄마가 쏘아대는 장면은 보라.
"당신, 이혼 세번이나 했지? 왜 했어? 내가 직접 보니까 알 것 같군만 응?"
"웃어? 세번이나 이혼해놓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웃어?"
엄마는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여자는 엄마가 대답이 없자 약간 의기 양양해지는 거 같았다.
"...저기요. 그거 지금 저에게 상처 입으라고 하신 소리 같은데, 그건 잘못 짚으셨어요. 저 이제는 별로 그런 거에는 상처받지 않아요." (중략)
엄마는 우리까지 들먹이자 순간 내가 나서서 말려야 하나, 어쩌나 생각하고 있는데 엄마가 벌떡 일어났다.
"야 ! 너.., 반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리고 그래! 나 이뻐! 얼굴도 매꼬롬해, 근데 너는? 너! 못생기면 아무 말이나 해도되는거야 ? 못생기면 다야?" p. 121 공지영 <즐거운 나의 집>
그럼에도, 이 엄마와 각이 성이 다른 아이 셋은 꿋꿋히 이 사회속의 일원으로 살아가려 노력한다. 화자인 여고생 나는 학교 선생님과 아이들의 시선따윈 고려치 않고, 모든걸 드러내려 노력한다. 등장인물인 엄마는 소설속에서 몇번이나 세번 이혼한 전력을 독자가 혹시 까먹지나 않을까 애써 강조하고 있는 듯 보인다. 상처를 감추려고 하지 않고 드러내려고 하는 이러한 시도는, 모든 상처받은 이들의 자기방어적 전략의 전형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 하나를 해볼 필요가 있다.
그녀에게 던지는 우리의 얄궂은 시선은 정당한 것인가? 독자인 나부터, 이 소설밖 모든 타자들, 이 사회 구성원들이 우리 사회의 싱글맘이나, 이혼가정, 이혼녀에게 갖는 고정관념이나 편견은 올바른 것인가? 이혼이 많은 사회적 파장과 가정의 혼란, 아이들에게 남길 상처 등의 부작용이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그래서 아마도 이혼이란 금기시되고, 이혼녀나 이혼남이라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편견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이혼율의 급증은 참을성 없고, 개인주의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경박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비정상적이고 불행한 결혼생활이 이러한 사회적 시선과 아이들에게 미칠 후폭풍 때문에 지속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혼생활이 결코 만족스럽지 못하고, 중대한 결함이 있어 그 자체가 더 이상 성립불가능할 정도라면, 이같은 인내는 인간본성 그 자체 즉, 행복을 추구하는 그 본성에는 결코 맞지 않는 일이다. 즉, 결혼생활과 이혼의 결정은 본인의 행복추구의 본성이 내릴 가치 판단의 문제가 될 수 있고, 그 자체가 인권과 맞물린 각 개인의 행복추구권과 닿아 있다는 것이다. 그럴때, 이혼이란 결정은 각 개인의 순수한 가치판단의 문제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소설속 엄마는 지금껏 이 모든 사회적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똘똘뭉친 이들의 시선에서 하루도 편할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꿋꿋하게 그녀는 살아가고 있다. 성이 다른 아이 셋을 자신의 힘으로 키우며, 사회적 편견 따위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담배와 술을 즐기며, 가끔 연애도 하면서 이혼녀니까 이렇게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라는 사회적 자제심을 조롱하며 그들보다 더 신나고 재밌게 살아가려 노력한다. 이같은 엄마의 당당한 삶의 자세가 이 소설속 각기 성씨가 다르지만 한 지붕밑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가장 큰 산교육이 되고 있다. 엄마는 세번 이혼한 여자지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사람이며, 이 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그리고 한때는 운동권에 몸담았던 낭만적 사회 운동가였다. 이혼만 아니라면, 대체 그녀가 이 사회에 무슨 민폐를 끼쳤는가? 그런데도 왜 타인은 그녀와 그녀의 가정과 그녀 가정의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가? 화자인 나의 눈엔, 세번 이혼한 엄마의 삶은 세상 사람들이 가진 편견처럼 그리 나쁘지 않다. 엄마는 이제 고3이 되고 곧 어른이 되는 화자인 `나'의 가장 큰 멘토이자 자랑스런 사표(師表)다.
"사랑하는 딸, 너의 길을 가거라. 엄마는 여기 남아 있을게. 너의 스물은 엄마의 스물과 다르고 달라야 하겠지. 엄마의 기도를 믿고 앞으로 가거라. 고통이 너의 스승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네 앞에 있는 많은 시간의 결들을 촘촘히 살아내라. 그리고 엄마의 사랑으로 너에게 금빛 열쇠를 줄게. 그것으로 세상을 열어라. 오직 너만의 세상을." p.337 <즐거운 나의 집>, 공지영
유대율법엔 간음한 여인은 광장에서 돌로 쳐 죽이는 풍습이 있다. 예수님이 길 한복판에서 사람들에 포위된 한 여인을 보시고, 돌을 든 사람들에게 보라 하시며 흙바닥에 이렇게 썼다.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그러자 군중은 조용히 돌을 내려놓고 자기 갈길을 갔고, 간음한 여인에게 예수님은 다시는 죄짓지 말라 하시고, 손을 내밀었다. 왜 그들은 돌을 던지지 못했을까?
우리 사회의 편견과 고정관념의 가해자들은 어느시점엔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던진 돌덩이는 언제든 방향을 바꿔 자신의 얼굴로 향할 수 있다. 이 사회의 편견과 고정관념의 1차 피해자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사회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는 이혼자, 이혼가정은 `틀린'것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것이다. 사회적 지위가 높고 학식이 높은 국회의원조차도 가끔 `다르다'와 `틀리다'의 용법을 헷갈리곤 한다. 그래서 유머라고 내뱉은 말이 지탄의 대상이 되곤 하는 것이다. 이 소설의 메세지도 그와 같다. 제발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별해서 쓰자. 이것이다.
2008.11.19
개츠비의 독서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