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 + 작별 세트 - 전2권 - 정이현 산문집
정이현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90년대 X세대는 지금 어디서 무얼하며 살고 있을까?  소비지향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좋고 싫음에 대한 태도가 명확하고, 어른들의 시선따위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과 새로운 미디어(PC통신)에 첨병 역할을 한 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하며 살고 있을까?   가끔 일상에 파묻혀 살다보면,  내가 내 자신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낯설어지는 경우가 있다.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어린애같고, 철이 든다는 것은 먼 훗날의 남의 얘기처럼 살고 있는 사람. 30대 중반, 그 나이의 무게감을 느끼기란 좀체 어렵다.  그러나 김광석의 `서른즈음에'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아마도 스물아홉의 가을날이었을 것이다.  

군대를 다녀와 복학을 하고,  2년정도 남은 대학 생활을 고3처럼 열심히 보냈던 시절.  군대가서 사람 됐다는 주위의 호의적인 평가를 받으며,  자랑스런 사각모자를 쓰고 졸업앨범 한 장 씩을 받고 곧바로 백수가 되었던 시절. 그런데 스물 아홉이란 낭떨어지에 선 나는 현실과 어울리지 않게도 사랑을 하고 있었다.  보기좋게 미끄러지긴 했지만, 스물 아홉까지의 그 사랑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X세대로서 젊은 날에 남겨둔 마지막 낭만적 사랑의 기억이란, 그게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서른이 되고, 나는 더이상 스물 아홉의 순수한 사랑따윈, 내게도 상대에게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아직도 서른 중반의 내가 이 사회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아득하다.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  언제까지든, 이 사회속에서 나와 우리 세대의 시대는 오지않을거란 비극적인 예감은 대체 어느 지점부터 머리속에 기생하게 된 것일까?  90년대 PC통신의 창작공간을 종횡무진하던 내또래의 K씨는 아직도, 도서관으로 출근을 하고 있다. 초등학교때 제법 공부를 잘 했고, 집안이 부유했던 J는 몇차례의 고시에 연타 떨어지더니, 아직도 그 세계를 헤매고 있는 모양이다.  그에 비하면, 매일 밥벌이를 위해 정시출근을 생활화 한 나는 그 정체성의 혼란에서 좀 벗어날때도 되지 않았나 ?

며칠전 회사에서 정이현의 산문집을 읽다 휴게실 탁자 위에 놓아두었다. P가 내게 묻는다.  정이현? 소설가냐 ? 몇살인데?  "형님하고 동갑.... " 곁에서 지켜보던 마흔이 넘은 Y형이 P에게 말한다. "야, 너랑 동갑이잖아.  이 여자는 소설쓰고 책까지 내는데, 너는 그 나이에 지금 뭐하고 있냐 ? 풋ㅎㅎ " 이 말에 모두다 한바탕 웃었다.  그 말을 들은 P 왈. "내가 지금 어때서 ?"  그래 맞다.  꼭 정이현처럼 자기 이름으로 책내야 성공한건 아니니까. 

정이현의 산문집을 하루에 한 권씩. 이틀에 걸쳐 읽었다.  근래에 책을 잡고 이렇게 빠르게 속독을 할수 있었던건 나의 독해력이 늘어나서일까?  아닌거 같다. 정이현의 문체에 날개가 달린것뿐.  글을 이렇게 속도감있게, 전혀 지루하지 않게, 쓸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김형경도 그랬고, 정이현도 그렇다.  소설가인데, 소설을 먼저 읽지 않고 산문집부터 보고 있으니 나는 책읽기를 잘못하고 있는건가 ?

<풍선>과 <작별>, 책은 두 갈래로 묶여 있다.  <풍선>에선 영화평을 담았고 <작별>은 내 또래 여자 소설가의 삶을 조금 보여주다 곧바로 읽은 책에 대한 리뷰로 이어진다.  지금껏 작가가 소설을 쓰다가 외유처럼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한 글들을 묶은 것 같다.  때는 2005년을 전후로 한 시점.  그 시점엔 된장녀란 것도 없었고, 촛불집회도 없었고, 쇠고기 협상도 없었고, 비정규직 문제도 없었을까?  밀려서 가끔 읽는 신문과 매일 노트북을 켜고 포탈에 접속하면 보게되는 요즘의 시대상과 격세지감?을 느꼈다면 오버일까?  아침에 늦잠을 푹 자고 일어나 브런치를 먹고, 커피 한잔을 타서 책상에 앉아 인터넷을 검색하다, 곧바로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맘내키는대로 소설을 쓰는 생활? 

이것이 중산층으로 자라나 여류 소설가로 살고 있는 정이현의 일상의 단편이다. 영화와 티비 드라마 그리고 책에 대한 이야기와 소설가로서의 삶의 일부분을 담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며, 좀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소시민, 작가와 같은 서른 중반의 한 남자가 지난달에 이미 다녀온 여름휴가를 한 번 더 정신적으로 다녀온 듯 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면, 이 산문집에 감사할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  

"그분들께 짧은 질문 하나를 드리고 싶다. 정말로 궁금해서 하는 말인데, 당신에게 `좋다'의 반대말은 `싫다'인가,`나쁘다'인가?  주지하건대 `싫다'와 `나쁘다'는 엄청나게 다른 말이다. `싫다'는 것은 주어의 주관적 감상을 전면에 드러내는 형용사이며, `나쁘다'는 것은 객관적 근거에 의거한 윤리적 판단의 표현이다. 타인의 문화적 텍스트에 대한 것이라면, `좋다'의 반대말은 당연히 `싫다'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박한 상식이다. 그러니까, " 그 영화 별로다"라는 문장의 앞뒤에 생략된 말은, `나는' 과 `~라고 생각한다'가 아닌가 말이다. " <풍선> p.203

이 산문집의 어느 구석에 여자로서 남자란 어떤 생물인지 궁금하다 라는 문구를 읽다가, 내가 이 책을 집어든 이유를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서른 중반, 90년대를 함께 통과해온. 중산층 가정의 정규 교육을 받은, 내 또래의 여자와 또 여자 소설가는 이 시대를 좀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건지, 궁금했던 거다.  직장 형이 "너 나이에 이 여자는' 이라는 말을 할때처럼, 나는 내 스스로에게 `이 나이에 나란 남자는'이란 질문을 해보고 싶었던 거다. 그리고 정이현의 산문집은 그에 대한 그림을 너무도 선명히, 지루하지 않고, 즐겁게 엿보여주고 있었으니, 어찌 올 여름 두번째 외유의 순간이라 느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작가와 내가 한 시대를 동시에 통과해서, 그리고 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몹시 새롭고도 낯설다.  시대를 읽는 감각의 더듬이를 한층 높이 세우고, 기생하는 지역과 공간을 뛰어넘고, 가정환경과 직업적 차이를 무시하고, 함께 현시대를 사는 동료로서 작가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독서의 묘미를 몇배는 더 첨가하는 길이다.  

그래 이 여름, 지난 90년대의 X세대들은 사회 구석구석에 박혀 제 나름의 삶을 살아간다. 그 다양성이 모여 우리들의 정체성을 찾게 될 날이 올 것이다.  90년대 잊혀진 세대인 나와 작가가 만나게 될 지점이 거기가 아니겠는가?  정이현의 산문집을 읽으며 지난 여름 휴가 중에 만난, 아내의 중학 친구가 생각이 났다.  유명 방송인으로서, 나름의 프라이드와 지성적인 체취가 물씬 풍겼던 그녀.  그녀가 몰고온 프라이드 골드 뒷자석엔 영문모를 영어 원서 뭉치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가 아내에게 말한다. " 너 자신을 믿어, 그리고 타인이 아니라 바로 너에게 감사해, 너가 이룩해 놓은 모든 것들에 대해서 말이야"  


 

 


 

 

200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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