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225- 세로토닌

180222- 겨울소풍

하룻동안의 겨울 소풍. 요즘 나는 계속 좀 화가 나있었던 것 같다. 이럴 때는 같이 화가 나있는 친구들과 꽁꽁 언 강가를 거닐고, 맛있는 것- 도토리 메밀 전병 도토리 국수 도토리 묵밥-도 먹고, 인간따위보다 이 지구에 훨씬 이로울 게 분명한 개들과 놀고, 친구집에서 주전부리 계속 주워먹으며 오후부터 밤까지 하루로는 모자랄 이야기들을 시간을 꽉꽉 채워 나누고, 역으로 가는 길에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순대국을 한그릇씩 먹고 헤어지는, 짧은 온천여행 같은 하루가 최고.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은 시간보다 미투와 미투를 비롯한 여성이슈와 관련한 일들, 거기서 파생되는 많은 생각들과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 나눈 시간이 훨씬 많았지만, 그건 언젠가부터 이 후진 땅에서 이 시간들을 오래전부터 통과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올타임 근황이기도 하니까. 1년 반만에 만난 산쵸는 그새 눈빛이 깊어졌다. 새삼 산초야 너도 같이 나이 먹어가는구나 싶어 조금 찡했다. 그에 비하면 탄이는 개구진 꼬맹이 티가 나는 엄청 힘좋은 리트리버ㅋㅋ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싸워나가며 사는 친구들, 부러울 정도로 단단한 친구들을 만나고 오면 내 사고와 행동에서 단단하지 못하고 말랑한 부분들이 무엇인지가 잘 보인다. 반성과 숙제들과 돌아서는 순간부터 시작된 그리움을 안고 서울에 도착하니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겨울소풍다운 하루의 끝-

180221- 영혼이 부서져나간다는 것

연극계에서 참담한 이야기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글들 하나하나 읽을 때마다 손끝까지 부들부들 떨리는 가운데, 가끔씩 조심스럽게 비죽비죽 보이는 ’연극계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니 내가 겪은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뭐라고 말 얹기도 죄스럽다‘ 같은 글들을 보면 마음이 베인 듯이 아프다. 전자의 글들로 화를 내다가 후자의 글들을 보면 눈물이 나서 울고 만다. 당신이 겪은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결코 아무 것도 아니지 않다고 너무나 말해주고 싶다.

저런 조심스러운 마음은 타인의 경험과의 비교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한 인간의 세계 안에서도 너무 쉽게 일어나는 일이라 더 그렇다. 오랫동안 가정에서 학대를 당해온 아동들이 누군가의 가해가 물리적 가해가 아닌 언어적 가해 정도에서 그쳤을 때 그것을 학대로 인지하지 않고, 심지어 ’그 정도 까지만‘ 가해를 한 사람을 비교적 ’좋은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도 비슷하게, 강도10의 심한 가해를 지속적으로 받고나면 강도5 정도의 가해는 괜찮다고 넘기게 되는, 그전까지 나는 분명히 강도1의 행위도 부당하다고 느끼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 강도5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세상은 한 인간의 견적을 뽑아내는 데에 가차 없어서 강도5까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강도5까지의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른다. 쟤는 그래도 괜찮은 애니까. 쟤는 쿨하니까. 이런 식으로 내가 지켜나가야 하는, 그리고 세상이 지켜줘야 마땅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의 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일은 무서운 일이다. 그 누구도 어떤 강도로든 존엄이 밟혀서는 안 되는 건데. 피해의 등급을 매겨 10보다 낮은 5가 5가 아닌 0으로 가치 매겨져서는 안 되는 건데.

’강도1까지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에서 ’강도5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한 인간의 영혼이 어느 정도로 부서져 나갔을지를 생각해보면 마음이 베여나간다는 표현 외에 뭘 더 쓸 수 있을지 모르겠을 정도로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피해 당사자들도 매겨서는 안 되는 피해의 등급을 당사자도 아닌 사람들이 지켜보며 등급을 매기는 것이 화가 난다. 누구도 ’내가 겪은 것들은 저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고(이게 절실한 바람이라면), 누구도 ’네가 겪은 것들은 저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내가 저지른 것들은 저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이건 인간이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는 당위의 영역이다)

180220- 평창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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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올림픽 시즌마다 하루이틀 날 잡아서 옛날 피겨들 다 찾아보는, 나만의 이벤트라고 하기에는 전혀 계획한 바도 없고 오히려 이번에는 제발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지만 어쩔 수 없이 또 그러고 앉아있는 것은 이번에도 예외가 없어서 새해 연휴 중에도 남자싱글피겨가 끝난 직후부터 다음날까지 내내 제냐의 옛날 영상들, 김연아의 옛날 영상들, 소치와 평창 사이에 있었던 세계선수권 영상들(이거 보다가 네이선 첸 옛날 영상들도 다 보고...), 버츄-모이어 아이스댄스들, 사브첸코-졸코비 피겨 페어 영상들을 새벽까지 보느라 거의 좀비상태로 월요일에 출근했다.

오늘은 회사 쉬는 날인데도 아침 9시부터 발딱 일어나서 아이스댄스 경기를 봤고 버츄모이어 은퇴경기까지 보고나니 나에게는 동계올림픽이 끝나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다. 사실 제냐도 은퇴했고 김연아도 은퇴했기 때문에 올해부터는 피겨 근처에도 안 가려고 그랬다. 피겨... 나에게 너무나 많은 빡침들을 선사하는 종목이기 때문에... 밀어주는 선수 정해놓고 심판들이 PCS로 장난치는 걸 왜 맨날 보고 있어야하냐 싶어 올해는 절대 안 보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쩔 수 없이 또 보면서 또 열내고 있더라ㅋㅋ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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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 컬링 다 너무나 재미있게 봤고 감동적이었는데 그래도 나를 가장 많이 긴장시키고 웃기고 울리는 건 어쩔 수 없이 피겨다. 사브첸코가 그랬고(단체전에 등장할 때부터 눈물 났는데, 경기 보면서 내내 찡하고, 스로우 점프에서 실수할 때 개인전 미리부터 걱정돼서 울고, 쇼트에서 사이드 바이 사이드에서 마소가 트리플 못 했을 때 또 울고, 점수 보고 울고, 프리에서 퍼펙트한 경기를 마치고 빙판에 쓰려져 누운 거 보고 울고, 금메달 확정되던 순간 사브첸코 마소 우는 내내 또 울고...) 민유라-겜린 아이스댄스가 그랬고(의상 끈이 풀려서 팔 쓰기 힘든 와중에도 분전했고 마지막에 겜린이 춤추며 스무스하게 민유라 의상 여며주는 것도 너무 좋았고, 쇼트에서 컷오프 점수 넘었을 때 울고ㅠㅠㅠㅠ), 버츄-모이어도 그랬다(역시 등장하는 순간부터 눈물나게 하는 팀ㅠㅠㅠ)

남자싱글피겨는 피겨 페어나 아이스댄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좀 덜 행복하고 덜 감동적으로 봤는데, 내가 너무 오래 제냐팬이었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끼는 거겠지만 제냐가 빠져나간 남싱판은 힘과 아우라가 많이 빠져나간 느낌이라. 게다가 심사위원들이 하뉴에게 PCS 점수 엄청 퍼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하뉴가 이미 예전 시즌에서 몇 번이나 우려먹고 좋은 성적까지 받았던 프로그램을 또 들고 나오는 거 보면서부터, 게다가 하뉴가 쿼드 성공하는 거 보면서는 하뉴가 두 번 넘어져도 메달 줄게 뻔한 경기에서 쿼드 성공했으면 아무리 못 해도 금메달 줄 게 너무 뻔해서 긴장도 별로 없고. 그래도 보니까 또 좋긴 좋더라...(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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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올림픽에서는 애덤 리폰, 네이던 첸, 패트릭 첸의 퍼포먼스들이 인상적이었고, 진보양이랑 하비의 경기도 좋았다.

애덤 리폰 정말 아름다웠는데, 쿼드 하나 없이 트리플 점프로만 구성했지만 피겨가 기술만의 승부가 아니라 예술의 승부라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고 나갔다. 난 애덤 리폰의 상체 움직임, 특히 목에서부터 리듬이 시작돼서 온 몸으로 전해지는 것 같은 목놀림을 정말 좋아해서 몇 번이나 경기영상을 돌려보게 되는데, 그 목놀림이 극대화 된 게 프리에서의 새 연기였다. 정말 반짝거리는 파란새 한 마리 같았다. 두 번째 트리플 악셀은 착지까지도 아름다웠고, 목에서 시작된 것 같은 리듬이 손끝 하나하나까지도 전해지는 것 같은 섬세한 레이백 포지션도, 스핀도 아름다웠다. 스핀 이후 심사위원들에게 싱긋 웃으면서 눈빛 보내는 것도 귀여워ㅋㅋㅋㅋ 애덤 리폰이 완벽한 피겨선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퍼포먼스를 볼 때 달콤해지고 미소짓게 만드는, 잔잔한 행복감을 불어넣어주는 선수인 건 확실하다. 쇼트의 에너지도 좋았음! 이 경기가 애덤리폰에게는 올림픽에서의 마지막 무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좀 더 애틋했다.

네이선 챈. 흑...쇼트에서 왜 그랬니ㅠㅠㅠㅠㅠ 네이던 챈의 ‘네메시스’ 정말 좋아하는 프로그램인데 점프 전부 다 실패하고 컴비네이션도 못 붙이고ㅠㅠㅠ 트리플 악셀만 조심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ㅠㅠㅠㅠ 다음날 프리에서 정말 굉장했기에 더 아쉬운 쇼트였다. 그 전날 쇼트를 잘했더라면, 기술점수에서 단연코 앞서 나간 이 프리에서 제 아무리 심판들이 PCS를 하뉴에게 퍼주더라도 금메달 노려볼 수 있었을 텐데(이번 프리에서도 챈보다 하뉴가 PCS에서는 10점 가량 앞서더라ㅋ). 그리고 우리의 패트릭 챈. 나오는 순간 빙판의 표면이 잠시 달라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선수들 중 한 명이었던 챈. 중간중간 잔실수들을 했지만 보는 사람들을 다른 세계로 끌고 들어가는 챈의 존재감을 마지막 경기에서까지 보여주고 갔다. 수고했어요ㅠㅠㅠ

그동안 좋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데 의외로 마음에 들어왔던 경기가 진보양. 나에게 진보양은 그냥 쿼드 잘 뛰고 점프 비거리 좋고 기술적으로는 매우 훌륭한 선수지만 어쩐지 마음을 건드리는 연기를 하는 선수는 아닌, 그냥 '잘 하는' 선수였는데 이번에 조금 다시 봤다. '와호장룡' 쇼트도 그렇고, 스타워즈 덕후의 마음을 건드리는 프리의 스타워즈OST의 ‘Mars’도 그렇고 역시 점프도 발군이었지만(트리플 악셀 아름답고 쿼드 대단하고 아 그 시원시원한 비거리) 코레오와 스텝에서의 연기도 좋았다. 특히 그 무술 같은 ‘와호장룡’ 안무, 너무 내 취향이었...

그래서 하뉴 금메달이야 심사위원들이 갑자기 각성해서 솔직하게 살자고 마음을 먹는 이변이 없는 한 정해진 거고 하비와 진보양이 나머지 메달들을 가져가길 바랐는데(하비도 꽤 잘했는데!!) 결국 3,4위로 끝이 났다. 우노 쇼마가 프리에서 잘하기는 했는데(스프레드 이글에서 악셀하는 거 실시간으로 보면서 솔직히 헉..... 했다) 전날 쇼트 점수가 그렇게까지 높을 연기였나요ㅠㅠㅠㅠ 하비가 우노 쇼마보다 못한게 뭔데ㅠㅠㅠ 이러면서 또 역시 “내가 다시는 피겨 안 본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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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소치 때처럼 버모네가 또 점수논란과 함께 금메달 못 땄으면 진짜 그러려고 했는데 다행히 버모네가 금메달을 받은데다가 민유라-겜린이 그렇게 펑펑 울면서 평창에서 연기하고 싶어 간절히 바라고 노력했던 ‘아리랑’ 보는데 아 진짜 피겨 뭘까ㅠㅠㅠㅠㅠ 아무튼 요즘 또 피겨폐인모드가 발동해서 연휴부터 오늘 낮까지 회사가는 것과 다른 경기보는 것 빼고는 책 한 줄 안 읽고(책이 다 뭐야, 페북 타임라인 돌면서 다른 글 읽을 여유도 없었고 메세지 확인도 제대로 못 했다) 글 한 줄 안 쓰고(심지어 목요일부터 일기조차 한 줄 안 썼다) 피겨만 계속 보고 있었는데 오늘부터 다시 정신 차리고 일상으로 돌아가야겠다. 아, 근데 오늘 저녁에는 또 쇼트트랙하지... 그래도 쇼트트랙은 피겨처럼 폐인모드 될 일은 없으니까! 아... 피겨, 정말 여러모로 유해하다....

180212- 감기와 밀당중

저녁에 요가 끝나고 밖에 나오니 눈이 내렸다. 갑자기 샌드위치가 먹고 싶어서(눈이랑은 관계 없다) 샌드위치를 사서 돌아왔다. 내일은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는 날이다. 원고 이야기도 들을 예정이라 좀 설레고 긴장된다. 감기 기운이 확실히 있다. 겨울내내 일정량의 감기 바이러스가 몸 속에 머무르면서 확 도질까 말까 고민하는 게 느껴지는데 오늘 그냥 자면 우리의 아슬아슬한 밀당관계가 깨어질 것 같다. 테라플루 나이트를 먹고 일찍 침대에 누워야겠다. 계속 밀당만 하다가 감기가 포기하고 돌아가는 걸로 마무리 되길 간절히 바란다. 그나저나 어제부터 시작한 책장정리 때문에 거실에 천 몇 백권의 책들이 흩어져있어 매우 심란하다. 내일은 아마 늦게 들어올테고 수요일에 꼭 힘내서 끝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