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부 서문을 읽으면서 어쩐지 스피노자에게 격려 받는 느낌이라 뭉클했다. 격려를 받아서라기보다 처음으로 스피노자가 매우 가깝게 느껴져서. 추상적 거리감이 아니라 1차원적인- 굳이 분류하자면 사유보다는 연장속성에 가까운ㅋㅋ- 거리감에서. 반 년 동안 걸어온 1부의 터널 속은 때로는 아찔할 만큼 매혹적이었고 때로는 아득할 만큼 모호했다. 모호한 길을 따라 한참을 더듬더듬 걸을 때는 물론이고 중간중간에 가닿는 매혹적인 공간에서 황홀한 기분으로 하염없이 앉아있을 때에도 기력의 일부가 모래시계 속 모래처럼 초 단위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을 정도로 에티카를 만날 때면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늘 바짝 긴장해있었던 것 같다. 잠깐 숨을 돌리고 이제 다시 비슷한 듯 낯설 2부의 터널로 다시 넘어왔는데 그 길목에서 스피노자가 기다리고 있다가 그동안 수고했다고 계속 이렇게 걸어가면 된다고 직접 내 손을 잡아 이끄는 듯한 기분이 들어 좀 힘났다. 아직도 갈 길이 멀어서 지복이라는, 스피노자가 우리를 최종적으로 데려가고자 하는 그곳이 전혀 현실적으로 와닿지 않지만, 사실 이미 가는 길이 신나고 재미있으니까, 강의를 듣고 공부를 할 때마다 뭔가 삶에 희망 같은 게 차오르는 느낌으로 이미 행복하니까(물론 심도 높은 희망은 아니고, 그냥 세상에는 참 파고들면 재미있는 것들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에 대한 희망이지만), 그곳에 닿는 것에 실패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엄마가 맨날 무슨 이야기 말끝마다 아유, 그냥 그렇게 살라고 해~ 다 지 복이지 뭐!“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잘 가면 지복이고 못 가면 지 복이지 뭐~

 

- 그러나 양태 전부가 아니라 우리를 마치 손으로 이끌 듯이 인간 정신 및 그것의 지복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다루겠다. <- 자기 논의의 범위 한정. 신체에 대한 이야기보다 정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말이다. 정신이 갖고 있는 정서, 관념, 감정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정신이 지복, 지고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하여. , 나의 목표는 윤리적인 데에 있다는 말이다. 스피노자의 책이 왜 <형이상학>이나 <철학>이라는 제목이 아니라 <윤리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2. 본질에 대한 정의들 재미있었다. 양태로서의 물, 실체로서의 물로서 설명되었던 본질에 대한 이야기는 1부 공부하면서도 매우 인상적이었는데(자세히 쓰기 뭐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에 좀 위안과 동시에 위안을 느끼는 것에 반성도 좀 했었는데), 코나투스와 이어지는 2부 정의2의 본질론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들뢰즈의 짐말과 경주마 이야기. 가끔 나는 들뢰즈의 어떤 독특함이 그가 갖고 있는 어떤 동양적인 관점에서 나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 짐말과 경주마 이야기도 어떤 면에서 나에게는 개체의 동질성에 초점을 맞추는 서양식 사고가 아닌 개체 간의 관계, 일종의 감응에 초점을 맞춰 바라보는 점에서 그런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했다. 짐 끄는 말과 짐 끄는 소의 거리가 짐 끄는 말과 경주마 사이의 거리보다 가깝다는 것, 되게 명료하면서도 와닿는 비유였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순간적으로 계급 차이에 대해 떠올렸던 건 내가 촌스러워서? 겠지만, 대한민국 1프로 안에 드는 상류층과 짐 끄는 노동자의 거리 보다도 짐 끄는 노동자와 짐 끄는 말, 짐 끄는 외계인 사이의 거리가 훨씬 가까울 것 같다는 생각도. 종적 형상의 차이 너머의 연대의 실낱 같은 가능성도 이런 데에서 오는 게 아닐까. A무엇이다가 아닌, A무엇을 한다의 문제로. 나와 봉이는 가끔 결국 중요한 건 배치다라는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같은 A라는 말, 행동, 인물, 사건이라도 그게 어떤 순간에 어떤 자리에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정체성 자체가 달라지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특히 그렇다. 같은 말이라도 그것이 모욕이 되거나 농담이 되는 것은 결국 배치의 문제고, 같은 특질이라도 그것이 장점이 되거나 단점이 되는 것도 결국 배치의 문제고 같은 행동이라도 그것이 폐가 되거나 득이 되는 것도 배치의 문제고. 맥락상의 배치.

 

- 그러나 들뢰즈 같은 경우는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한다. ”짐 끄는 말하고 경주용 말 사이의 차이가 짐 끄는 말과 짐 끄는 소의 차이보다 더 크다그러니까 들뢰즈는 form의 차이보다 무슨 일을 하느냐-들뢰즈는 이것을 affect의 차이라고 하는데-의 차이가 종적인 형상의 차이보다 더 크고 중요하다, 말과 소라는 form의 차이보다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떤 affect를 갖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스피노자 생각과 가깝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간 이야기다. 스피노자는 그렇게까지는 확실히 이야기 하지 않았다.

 

3. 이날의 강의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부 때 이미 여러 번 들었던 형상적 실재성과 표상적 실재성에 대한 이야기 끝에 선생님이 덧붙인 말이었다. 데카르트의 생각이 너무 신학적이고 종교적이라 우습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데카르트의 저런 의문, 멋지지 않느냐고. 유한한 내가 이렇게 유한한데 어떻게 저 완전하고 지고하고 무한하신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을까! 반문하는 것.

 

솔직히 고백하면 1부에서나 <에티카> 관련해서 읽은 다른 책에서나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와 데카르트주의자들을 겨냥해서 비판하고 논박하고 신랄하게 조롱하는 것들을 접하다보니 데카르트의 어떤 주장들은 좀 터무니없게 느껴졌고(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신이 완전하다는 점을 확립하기 위해 그들은 동시에 신은 자신의 역량이 미치는 모든 것을 해낼 수 없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나는 사람들이 이보다 더 부조리한 것 또는 신의 전능함과 더 양립불가능한 것을 꾸며낼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류의), 자연에게서 모든 힘을 빼앗고 기하학적 공간으로 만들어놓고 신과 만물 사이의 관계를 논하는 방식이 나에게 매력적이지도 않았고, 스피노자를 압박하는 데카르트주의자들로 인해 그런 점이 더 부각되어 다가왔으므로 그가 당시에 굉장했고 중요한 영향을 끼친 대단한 철학자라는 것은 알겠지만 나에게는 빛바랜 사람처럼 느껴진 게 사실이다. 오히려 라이프니츠에게서는 감동 받았던 순간이 있었다. ‘왜 무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의 기분을 잊을 수 없다.

 

그런데 오늘 선생님 말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데카르트에 대해, 지금 내가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있는 현대적 시각들의 근원에 녹아들어있을 과거의 사람들이 치열하게 했던 고민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사실 그동안에도 후대의 사람이 후대의 잣대로 과거의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에 대해 나름 고민했었다. 이를테면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과거의 작품들을 판단하는 문제 같은 것. 필립 로스나 부코스키 같은 현존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바라볼 때도 이것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인데, 얼마 전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자기와 영혼으로 가장 가깝게 이어져있다며 극찬했던 찰스램 수필선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한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안에는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와 사회적 구조가 전제로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곳곳에서 눈에 띄는 여혐의 흔적들을 대할 때나 마그리스의 <다뉴브>에 녹아있는 여성에 대한 시선들을 보면서도 이 문제에 대해 고민했었다. 단지 이 인간들 빻았다로 판단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들인가. 그런 식으로 따지면 보부아르도 자유로울 수 없는데. 내가 그들보다 어떤 점에서 PC하게 사고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내가 현대에 태어나서 현대의 문화자본을 흡수했기 때문일 뿐인데.

 

이런 고민들을 나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데카르트에 있어서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걸 선생님 말을 듣고 깨달았다. 스피노자를 포함, 현대의 철학자들의 시선을 통해서만 접하다보니 그들이 지적하는 오류들이나 결핍된 부분들 위주로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기 때문일 텐데, 나와 비교를 하는 것 자체가 모욕으로 느껴질 만큼 지성의 완전성 면에서 저 높은 곳에 올라있는 사람이 데카르트에 대해 경이로운 존중을 표했을 때 고백하면 얼굴이 약간 뜨거워질 만큼 나의 성마르고 얕은 생각들이 매우 부끄러워졌다.

 

그러게, 현대의 사고로 봤을 때 지나치게 신학적이고 종교적이라 신은 뭐 그냥 허깨비야 하고 쉽게 결론내리고 넘어갔을 문제에 그 당시 저런 반문을 던졌던 데카르트의 질문이 훨씬 멋지다. 유한한 내가 완전한 신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라는 그의 경이감에 찬 질문의 무게가 이제야 조금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믿는 것, 그러니까 신, 그 신의 전지전능한 완전성, 인간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그 성스러운 무언가를 지켜내기 위해, 혹은 감히 그것에 의문을 표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절대적인 무언가를 중심에 놓기 위해 그가 만들어냈던 형이상학의 세계가 대단한 것임을 느꼈다. 솔직히 그동안은 아주 거칠게 트위터식으로 표현하자면 형이상학이라는, 상상의 폭이 넓은 공간을 이용해서 여러 무리수들로 결국 신 깔대기ㅋㅋ 인간의 정신 깔대기ㅋㅋ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비판하며 신이라는 추상적 존재를 다시 자연 안으로 끌어내린스피노자가 좋았고, 그래서 <에티카> 공부를 선택한 것도 있었고.

 

이런 맥락에서 선생님이 했던 말 중에 칸트 이후의 상실도 나에게는 약간 충격적이었다. 한 번도 그것을 상실의 관점에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 칸트의 불가지론은 제한이 아니라 제동이었다. 아마 현대 개신교에까지 이어져오는 중세신학적 신앙관에 내가 워낙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어서 그랬겠지만, 현상 너머의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해서 사변적 독단을 끼워넣을 틈을 막아버려서, 또한 내가 신이나 인간의 이성이 지나치게 권리를 부여받는 것에도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어서 그랬겠지만, 그 인간 이성에 인식론적 회의를 끼얹어서 그래서 나는 칸트의 불가지론을 좋아했던 것 같다. 저래도 신학자들은 신을 찬양하기 위해 날뛸 것이며 인간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특권적 위치를 차지한 양 이성을 뽐내겠지만, 누군가 그렇게 선을 딱 그었던 게 좋았던 것 같다.

 

그래서 선생님이 칸트 이후의 상실, 인간의 지성 너머에 있는 존재에 대해 이 영역 저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상상할 수 있었던 범위를 확 좁혀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했을 때 (따져보면 내가 칸트를 좋아했던 이유와 같은 이유인데) 처음으로 칸트가 박탈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마치 이걸 철학에서 문학의 장으로 옮겨놓으면 요즘 한국에서는 장르문학이라고 불리는 sifi나 추리소설, 판타지 소설에 리얼리즘 소설이 일침을 가하는 느낌일 텐데(재밌게도 나는 장르문학 매니아인데ㅋㅋ) 칸트 이후 인식의 범위,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정당하게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에 대해 제한이 되어 그 너머의 많은 세계들이 사라진 것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한 것이다. 사실 나는 현실에서 믿을 건 서류뿐이다라는 <살인의 추억>의 김상경식 방법을 고수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왜냐면 서류로 대표되는 객관적 자료, 객관적 현상의 너머에 있는 많은 가능성들을 인식으로 이성으로 추론해서 함부로 재단하는 것들이 매력적이고 때로는 직관적으로 진실에 더 가까울 수 있지만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쓰다 보니 이런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스피노자가 제동이 아니라 제한하는 세계도 있는 것 아닌가. 아마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면 신앙만큼이나 별점, 사주 같은 것들도 매우 말 같지 않을 텐데 점성학이나 명리학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거기대로만의 (물론 나는 절대 동의할 수 없지만ㅋㅋㅋ) 세계가 펼쳐져있고, 그것이 뭔가 애매모호한 세상에서 어떻게든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인간을 세상을 유형화해서 받아들이려는 집요한 이성의 집약이 있다. 사람들은 무언가에 이름이 붙은 것을 그렇지 않은 것보다 훨씬 덜 두려워한다. 왜냐면 이름이 붙어있으면 어쨌든 나의 인식 영역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고, 내가 인식할 수 있다면 컨트롤 할 힘도 생길 것 같으니까. 그래서 결국 절대로 이름 붙일 수 없고 재단할 수 없는 운명, 인생, 미래, 시간, 인간의 성격, 성향에 끊임없이 이름으로서의 유형화를 시도해서 자기 인식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지. 그런 틀 하나를 갖고 있으면 그러기 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내가 이성적으로 이미이해하고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드니까. 이게 내가 비이성에 기대어, 지성과는 매우 멀어지는 방식으로 별점이나 사주나 맹목적 신앙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하는 이유인데(그런 틀을 갖고 내가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꼰대가 될 수밖에 없잖아), 이런 상상의 영역은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선생님 말대로 칸트가 제한하기 이전의 이런 자유로운 형이상학적 사고의 세계는 재미있잖아. 거기에 치밀한 논리를 더해서 철학적으로 고민하고 한 세계를 이론으로 만들어나가는 작업에서 우리가 얻어갈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잖아. 선생님이 데카르트에 대해 이야기하며 너무 신학적이고 종교적이다, 라고 생각해서 무시하는 것 보다는 거기에 담겨있는 다른 측면들을 더 살려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고 한 말, 나를 매우 반성하고 돌아보게 한 말인데, ‘무시하기 보다 거기에 담겨있는 다른 측면들을 살려보는 것의 영역을 어디까지 해야할 지에 대한 고민 또한 하게 만든 말이다.

 

2. 형상적 실재성 대 표상적 실재성

- 형상적 실재성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관념은 동등하지만, 관념이 표상하는 대상을 생각하면 완전성에 정도에 따라 등급이 있다는 생각.

-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이상하다, 나는 유한한데 유한한 내가 어떻게 저 완전하고 지고하고 무한하신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가 있을까. 정말 놀랍다라고 반문했다. 관념이라는 것을 표상적 실재성을 갖는다고 생각하니까 저렇게 반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같으면 신 뭐 그거 그냥 허깨비야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갔겠지만 데카르트는 우리가 저 신, 완전한 분의 관념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 이게 더 멋진 생각이지 않은가.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아주 흥미로운 생각이다. 너무 신학적이고 종교적이다, 라고 생각해서 무시하는 것 보다는 거기에 담겨있는 다른 측면들을 더 살려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4. ”명석하지만 판명하지 않은 지각들이 존재한다.“ , 나 이 말도 너무 좋았네. 그리고 데카르트가 이것에 대한 설명으로 <철학원리> 146항에서 고통과 연결시켜 한 말도 좋았다. 누군가가 강한 고통을 느낄 때 그가 이 고통에 대하여 갖고 있는 지각은 실로 아주 명석한 것이지만, 늘 판명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개 이 지각을 그들이 고통스러운 지점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고통의 감각과 닮았다고 가정하는 것의 본성과 관련하여 그들이 내리는 모호한 판단과 혼동하기 때문이다.“ 고통처럼 너무나 선명하고 강한 것을 지각하거나 인식할 때 우리는 이것에 대해 판명하다고 착각하기 쉬운데(이렇게 생생하게 경험했으니까) 사실 그렇지 않지. 고통처럼 선명한 경험이 나의 어떤 감각을 일깨운다면 그 경험에 대해 판명한 인식을 갖기 위해서는 결국 또 공부해야 한다. 내 아집에 갖혀서 편한 생각들 속에서 뱅뱅 오가는 그런 고민 말고 불편하게 만드는 사실들 속에서. 그래서 이 말이 매우 좋았다. ”그들이 고통의 감각과 닮았다고 가정하는 것의 본성과 관련하여 그들이 내리는 모호한 판단“. 1부 부록에서 스피노자가 말한 자기 기질에 따라가 연상되는 말인데 그러니까. 사람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자기 기질에 따라“ ”닮았다고 가정하는 것의 본성과 관련하여판단을 내리기 쉽고, 그 판단이 내 안에서 나왔으므로, 보통 나의 몇십 년의 역사와 경험이 응축되어 내린 판단일 것이므로 명석판명할 것이라고 쉽게 믿는다. 그러니까 인간은 인간의 이성과 인식을 너무 과신한다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또 칸트의 불가지론을 좋아할 수밖에 없네ㅋㅋㅋ 정신이 실존하지 않는 것들을 현존한다고 상상하는 것의 선은 어디에 그어야 하는가. 2부를 더 공부하다보면 더 생각할 수 있겠지. 아무튼 명석하지만 판명하지 않은 지각들이 있다는 것은 내 가슴에 꼭 새기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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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정신mens의 기원과 본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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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도 mens라는 말을 상당히 많이 쓴다. 여기서는 정신이라고 번역했지만, 주로 우리의 어떤 지적/인지적 기능을 가리킬 때 쓴다. mens에 비해 덜 쓰이지만 animus라는 말도 많이 쓰인다. animus의 경우 마음이라고 번역했는데, animusmens에 비해 좀 더 감정적 정서적인 걸 말한다. 그러니까 정신은 정신 똑바로 차려!” 마음은 마음이 지옥이야같은 용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anima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도 갖고 있는 걸 말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책 <영혼론>이 바로 <De Anima>. 이 단어가 넓은 의미로 확장되었을 때는 생명과도 관련된다. 스피노자는 이 단어를 많이 쓰지 않는다. 스피노자가 보기에 anima는 이미 너무나 중세 아리스토텔레스적 말이고, 정신과 육체가 섞여있는 의미라서 스피노자의 논리에 적절치도 않기 때문이다.

 

*

윤리학 2부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정리1 ~ 정리13 : 신체의 관념으로서의 정신

2부 정리1에서 정리13까지의 논의는 상당히 난해하다. 1부의 고비를 넘기자마자 다시 직면하게 되는 난해한 논의 때문에 대부분의 <에티카> 독자들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 이 부분이다. (심지어 스피노자가 독자들에게 여기까지 오는 데에 어려움을 느낄 텐데 날 믿고 따라오라고 따뜻하게 말함ㅋㅋ) 여기서 스피노자는 정신의 기원과 본성을 해명하면서, 또한 정리13과 정리14 사이에 나오는 [자연학 소론]에서 물체의 본성을 다루고 있다.

 

1-1) 정리1 ~ 정리7: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

전반부 첫 번째 부분에서 아주 유명한 명제가 나온다. 정리7 평행론. 이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 들뢰즈는 무려 두 챕터에 걸쳐서 설명한 바 있다. 최근 영미 스피노자 연구자들도 이 명제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작년에 한국에서도 이걸로 박사논문). 정리1에서 정리7까지에서는 존재론적 지위가 해명되고,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다는 것이 해명, 결국 평행론으로 귀결된다.

 

1-2) 정리8~ 정리13: 신체의 관념으로서의 정신

여기는 앞의 평행론 명제를 전제로 인간의 정신을 도출한다. 사유속성에 무한하게 많은 양태가 있는데 거기서 인간의 정신이라는 한 양태를 도출. 사유속성의 존재론적 자율성이 확립되고 난 뒤, 스피노자는 무한양태(사유속성의 경우 신의 관념), 곧 관념들의 생산의 연쇄를 다룬다. 그 다음 인간의 정신은 일종의 관념이며, 이 관념의 대상은 곧 인간의 신체라는 것을 증명 -> 인간이란 정신과 신체의 합일union이다. = 정신과 신체가 합일을 이루고 있는 게 인간이다.

 

2) 정리13 ~ 정리14 사이: 자연학 소론- 물체의 본성에 대하여

정리14가 바로 나오지 않고 뜬금없이 공리1로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나중에 연구자들이 [자연학 소론]이라고 이름 붙인 부분. 물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물체의 한 종류로서의 인간의 신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부록 내지는 보론. 자연학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긴 한데 길게 이야기하기는 힘들고(이 책의 주제는 자연학이 아니라 윤리학이기 때문에 원하는 만큼 길게 이야기하지는 못하고) 꼭 필요한 내용만 보론격으로 붙였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을 끝내고 자연학을 쓰고 싶다고 했었는데 아마 10년만 더 살았으면 정치론을 다 쓰고 자연학을 쓰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당시 뉴턴의 책도 나왔던 데다가 참 재미있었을 텐데. 자연학소론은 분량은 적지만 스피노자 철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과학혁명의 시기였고 스피노자도 과학혁명에 관심이 많아서 이걸 논의에 적용시키고 싶어 했다. 책을 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우리는 스피노자의 자연과학에 대한 생각을 모르지만 여기서 그 편린들을 볼 수 있다. “물체란 무엇인가

 

자연학 소론도 2-3개로 나눌 수 있다.

 

2-1) 공리1, 2에서 공리, 까지 : 단순물체의 본성

1부에서 진공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원자 이야기도 했는데, 정리15에서 스피노자는 진공을 부정하는 이야기를 했다. 사실 원자론을 이야기하려면 진공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스피노자는 원자도 진공도 다 부정한다. 공리1, 2에서 스피노자는 가장 단순한 물체의 본성에 대해 다루는데 이 단순물체는 원자인가? 미리 말하면 아니다. 스피노자는 자연의 모든 것을 복합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말하는 개체는 다 복합체.

 

2-2) 개체에 대한 정의에서 6개의 요청까지: 복합물체의 본성

공리 VS 요청- 둘 다 증명이 불필요한 자명한 명제로 참인 명제로 받아들여진다. 차이는 공리는 모든 영역에 걸쳐서 참, 요청은 특정한 영역에 대해서만 참. 요청은 어떤 영역과 관련된 건지 말해져야 한다. 여기에서는 인간 신체로 말해졌고 인간신체에 관해서만 타당하다. 시간이 있으면 이걸 참이라고 증명할 수 있겠는데 시간이 없으니 그냥 참이라고 하겠다고 요청하는 것. 에티카에는 총 8개의 요청이 나오는데, 6개가 여기에 나오고 3부 앞부분에 인간신체에 대한 2개의 요청이 나온다.

 

2. 정리14~ 정리49: 인식의 세 가지 유형

 

1) 정리14 ~ 정리31 : 부적합한 인식의 기원과 본성

 

1-1) 정리14~ 정리23 : 상상의 매커니즘

정의4에서 다룰테지만 스피노자는 인식을 크게 부적합한 인식/ 적합한 인식으로 나눈다. <에티카>에서는 상상에 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데, <신학정치론>에서는 아주 풍부한 상상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예언의 본질은 상상이다. 그가 보기에 예언자들은 지적능력이 풍부한게 아니라 상상력이 풍부하다. 스피노자에게 이마지나치오는 우리가 쓰는 상상보다 범위가 넓다. 감각, 지각 자체도 포함된다. 나중에 정리16~정리18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1-2) 정리24 ~ 정리31 : 부적합한 인식의 성격

 

2) 정리32 ~ 정리49: 적합한 인식

 

2-1) 정리32 ~ 정리39: 공통통념의 형성

공통통념 common notion notio communis. 아주 독창적이고 새로운 논의다. 들뢰즈가 평행론과 함께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common notion. 2부에서도 <에티카> 전체에서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부 부록에서도 스피노자가 상상적 통념notion에 대해 언급했었다. 미추, 질서와 혼란, 선악 이 모든 게 notion이라고.

 

2-2) 정리40 ~ 정리49 : 인식의 세 가지 유형

- 1종의 인식 imagination 상상

2종의 인식 참된 인식

3종의 인식 scientia intuitiva 스키언티아 인튜이티바 직관적 지식

 

- 1종의 인식: 오류의 유일한 원천이다. 그렇다고 1종의 인식이 다 잘못이고 거짓이라는 말은 아니다. 1종의 인식에는 참된 인식도 있다. 그런데 오류라고 이야기한 것은 결국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찍어서 어쩌다 맞은 것 같은 것. 맞을 수도 있지만 잘못일 가능성이 많은.

- 2/3종의 인식: 왜 그런지 근거를 파악한 인식. 공식도 알고 있고 논증도 알고 있고.

- 정리49는 지성과 의지가 다른 게 아니라는 내용이다. 주석이 붙어있는데 이 주석이 2부의 부록 역할을 한다. 데카르트가 의지와 지성을 구분한 것에 대한 비판.

 

*

2부 서문

- =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자

- 1부에서 신에 대해 다루었고(신의 본질, 신이 존재하는지, 원인으로서 무엇을 생산하는지) 2부에서는 양태들(=신이 필연적으로 산출해야 하는 모든 것), 그러나 양태 전부가 아니라 우리를 마치 손으로 이끌 듯이 인간 정신 및 그것의 지복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다루겠다. <- 자기 논의의 범위 한정. 신체에 대한 이야기보다 정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말이다. 정신이 갖고 있는 정서, 관념, 감정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정신이 지복, 지고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하여. , 나의 목표는 윤리적인 데에 있다는 말이다.

- 윤리적= 1) 어떻게 하면 정신을 파악하고 2) 그것을 지복으로 이끄는지. 스피노자의 책이 왜 <형이상학>이나 <철학>이라는 제목이 아니라 <윤리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시 스피노자가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윤리학><나의 철학>이라는 잠정적 제목으로 부르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철학>이 아니라 <윤리학>이라고 이름 붙었고, 2부 서문이 바로 왜 최종적으로 <윤리학>이라고 붙였는지 나오는 대목이다. “우리를 마치 손으로 이끌 듯이” = 길물어보면 손잡고 끌어주듯이 확실하게! 나만 믿고 따라와라. 내가 데려가 주겠다. (여기서 어쩐지 스피노자가 매우 가깝게 느껴져서 뭉클했다...ㅠㅠㅠ)

 

정의1

나는 물체를, 연장되는 실재로 간주된 한에서의 신의 본질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양태로 이해한다. 1부 정리25의 따름정리를 보라 (물체에 대한 정의)

- 물체 corpus/ body. 영어에서 body가 신체이자 물체이듯이 corpus도 마찬가지다. 비유적으로 쓰면 저작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막스의 corpus- 막스가 남긴 저작

 

정의2

나는 어떤 실재의 본질에는, 그것이 주어지면 그 실재가 필연적으로 정립되고, 그것이 제거되면 실재도 필연적으로 제거되는 것이 속한다고, 또는 그것이 없이는 실재가, 역으로 실재가 없으면 그것이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 속한다고 말한다. (본질에 대한 정의)

 

- 본질에 대한 아주 독특한 정의다. 스피노자의 본질은 종적 본질또는 여러 개체들이 공유하는 형상으로서의 본질이 아니라 매우 개체적인 본질이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을 가진 말을 할 줄 아는 동물이다라고 정의했는데, 이것은 동물의 한 으로서 인간의 본질은 이성을 가진’ ‘말을 할 줄 아는에 있다고 보는 것. 곧 여러 동물들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이성을 가지고 있고 말을 할 줄 알며 이것이 인간이라는 종의 고유한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 개념에 입각해서 생각하면, 인간 중 어떤 한 사람이 사망한다고 해서 으로서의 인간의 본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반면 스피노자의 본질 개념에 따르면 실재와 그 실재의 본질은 둘 중 하나가 정립되면 다른 것도 정립되고, 하나가 없으면 다른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 개념의 구체적인 사례는 3부 정리7에 나오는 코나투스’, 정리9에 나오는 욕구내지는 욕망이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현행적 본질 essentia actualis actual essence라고 부른다.

- 2부 정리40에서 스피노자는 ‘ ’을 상상적인 관념/통념으로 규정하며 비판한다. 스피노자는 인간 전체‘ ’돌고래 전체같은 집합적 를 비판하고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적 정의를 불신한다.

 

- 그러면 스피노자에게는 이런 개별화된 본질개념 말고 다른 본질 개념은 없는가. 이를테면 종적인 본질같은 것. 있다. 1부 정리8의 두 번째 주석에 나오는 형상개념. forma. 여기에 깔려있는 생각은 어떤 특정한 개인만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부르는 전체가 forma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 이 말은 forma라는 것이 우리가 방금 정의2에서 본 것처럼 개체화된 본질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공유하는, 종적인 성질의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forma 개념에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종적인 본질 개념이 녹아들어있는 것. (이 주석에서 이런 질문을 가질 수 있다. ”정서를 갖는다라는 성질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도 갖고 있는데 이건 다른 종끼리 forma를 공유하는 것 아닌가. 아니다. 인간도 정서를 갖고 동물도 정서를 갖지만 이것 역시 forma가 다른 것이다. 인간과 고양이는 forma가 다르니까 인간이 갖는 정서 forma와 고양이가 갖는 정서 forma는 다른 것이다)

 

- 한 가지 예를 더 들면 4부 서문. ”변형된다“ mutetio mutation. 여기서 스피노자가 변형된다는 말을 어떻게 쓰냐면, 말의 고유한 form이 있는데 이게 벌레의 고유한 form으로 바뀌게 되면 말의 고유한 form이 해체되니까 파괴된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하나의 form이 다른 form으로 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 스피노자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이 종적인 형상, 종적인 본질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 본질 개념을 가지고서는 개별적인 본질, 개체적인 본질을 설명하기 적절하지 않으니까 2부 정의2에서는 바로 개체화된 본질을 정의로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 그러나 들뢰즈 같은 경우는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한다. ”짐 끄는 말하고 경주용 말 사이의 차이가 짐 끄는 말과 짐 끄는 소의 차이보다 더 크다그러니까 들뢰즈는 form의 차이보다 무슨 일을 하느냐-들뢰즈는 이것을 affect의 차이라고 하는데-의 차이가 종적인 형상의 차이보다 더 크고 중요하다, 말과 소라는 form의 차이보다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떤 affect를 갖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스피노자 생각과 가깝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간 이야기다. 스피노자는 그렇게까지는 확실히 이야기 하지 않았다.

 

이것은 1부 정리17의 주석에 나오는 본질과도 또 다르다.

 

<<<<<<<<<<<<<<<<< *** 현행적 본질 VS 영원진리로서의 본질

 

-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가면 재미있는 논의로 이어지면서 어떤 문제가 제기가 된다. 한번 2부의 정의2로 가보자. 2부의 정의2는 실재의 본질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본질개념을 정의해놓은 것이다. 나는 어떤 실재의 본질에는, 그것이 주어지면 그 실재가 필연적으로 정립되고, 그것이 제거되면 실재도 필연적으로 제거되는 것이 속한다고, 또는 그것이 없이는 실재가, 역으로 실재가 없으면 그것이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 속한다고 말한다.

- 그러니까 여기에 따르면 A라는 사물이 있고 A라는 사물의 본질이 있다. 그러면 이 A라는 사물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것이 성립하면 A도 성립, 이것이 사라지면 A도 사라지는. 반대로 A가 성립하면 A의 본질도 성립하고 A가 사라지면 A의 본질도 사라지는. 이게 바로 사물의 본질이다.

- 그런데 이 정의2에 나오는 이 본질개념의 아주 독특한 특징은, 이 본질은 굉장히 개체화된 본질이다. A라는 개체, A라는 사물과 뗄레야 뗄 수 없게 긴밀하게 연결된 본질. 이게 정의2에 나오는 본질이다.

- 그런데 우리가 1부 정리17의 주석에서 사람의 본질 이야기를 했는데 다시 정리해보자. A라는 사람이 생겨나서 살다가 사라졌다. 2부 정의2에 따르면 이 A라는 사람의 본질은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1부 정리17의 주석에 따르면 A라는 사람의 본질은 남아있어야 한다. 영원본질이니까. 그런데 2부 정의2를 따르면 A라는 사람이 성립하면 A의 본질이 성립하고 A라는 사람이 사라지면 A의 본질도 사라진다. 그러니까 상호관계가 성립. 그러나 1부 정리17의 주석에서는 이러한 상호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 그리고 아까 1부 정리17의 주석에 삼각형의 본질 이야기도 나온다. 삼각형A의 본질이라고 안 하고 삼각형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본질은 보편적인 본질, 류적인 본질, 종적인 본질이다. 어떤 특정한 개체와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있는. 삼각형의 본질은 삼각형A 하나가 없어져도 남아있다. 사람의 본질도 사람 하나가 없어져도 남아있다. 그런데 2부 정의2에 나오는 것은 A가 사라지면 이 본질도 당연히 사라진다. 뭐지?????

 

- 3부 정리7로 가보자. “각각의(each)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노력(conatus)은 실재의 현행적 본질(actual essence)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가 여기서 코타투스를 현행적 본질이라고 말한다. 이 현행적 본질이 바로 2부 정의2에서 내리는 이 본질이다. 이것은 그 사물이 성립하면 이 사물의 코나투스도 성립하고 이 사물의 코나투스가 성립하면 이 사물도 존립하고, 이 사물의 코나투스가 없어지면 이 사물도 없어지고. 그러니까 이 사물과 이 사물의 본질 사이에는 상호성, 상호전제관계가 성립한다. 이걸 스피노자가 actual essence라고 부른다.

- 그러니까 2부 정의2는 사실은 3부 정리7의 코나투스를 염두해두고 제시된 정의다.

 

- 그럼 1부 정리17의 주석에 나오는 이 본질은 현행적 본질인가? 아니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영원진리로서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럼 영원진리로서의 본질과 현행적 본질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다. 이 답은 나중에 5부에 나온다. 그것도 아주 첨예한 문제로 나온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는 사람과 관련해서 영원성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안 하는데, 지금 영원한 것은 다 신, 속성 이런 것들인데, 5부에서는 인간 같은 유한한 것과 관련해서 영원성을 이야기한다. (1부 정리17의 주석에 나오는 본질: 영원진리로서의 본질 VS 2부 정리2에 나오는 본질: 현행적 본질) >>>>>>>>>>>>>>>>>>>>>>>>>>>>>>>>>>

 

- 여기서 1부 정리13의 따름정리를 다시 보자. 이 정리에서 신이 물체라면, 신도 분할될 것 아니냐, 물체는 분할되니까라는 적수들의 반론에 스피노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물체의 분할은 실체로서의 분할이 아니라 양태로서의 분할이다. 모든 물체가 분할하는 것은 아니다. 양태적으로 구별되는 것들로 물체를 이해할 때만 물체는 분할된다. 하지만 연장속성, 물질전체로서, 실체로서의 물체는 분할되지 않는다 (다시 들어도 딱 떨어지는 멋진 반박이다)

 

정의3

나는 관념idea, 정신이 생각하는 실재res이기 때문에 형성하는 정신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해명

나는 지각이 아니라 오히려 개념concept이라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지각이라는 명칭은 정신이 대상에 의해 작용을 수동적으로 겪는다고 지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개념은 정신의 작용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 정신도 res고 관념도 res->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다.

- 나는 개념이라는 것이 외부자극이 촉발해서 맺히는 상이라고 이해하지 않는다. 그것보다 개념을 훨씬 적극적, 능동적 활동으로 이해한다.

- 정의3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스피노자의 관념은 정신의 개념”, 정신의 작용을 표현한다는 점, 이것은 다시 말하면 스피노자의 관념은 사물에 대한 정태적인 표상과 다르고 더 적극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데카르트를 겨냥한 것이다.

 

- 정의3/해명과 아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은 2부 정리49/따름정리다.

- 데카르트 같은 사람들은 정신 안에는 상이한 두 가지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1) 표상으로서의 관념 2) 이 표상으로서의 관념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하는 의지.

그러니까 관념 자체는 참이거나 거짓이 아니고, 참 거짓을 판단하는 것은 의지의 작용이라고 본 것이다.

- 스피노자는 정리49에서 이를 반박한다. 정신 안에는 관념인 한에서의 관념이 함축하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의지 작용 또는 긍정과 부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관념하고 구별되는 의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리고 지성과 구별되는 의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관념을 갖는다라고 하는 것은 이미 참이라고 긍정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관념 자체에 긍정 또는 부정이 이미 다 들어있다. 관념은 수동적으로 형성된 표상이 아니라 그 자체가 무언가에 관해서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부정하는 작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2부 정리49의 따름정리에서 의지와 지성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 이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하려면 데카르트의 관념이론에 대해 먼저 더 이해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앞으로 2부를 하게 되면 관념이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쓰고, ’명석판명이라는 말도 굉장히 많이 쓸 것이다. 이 용어의 뜻들을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

 

*

데카르트의 관념 이론

 

관념에 대한 정의

- 넓은 의미의 관념: 정신적 상태 일체. 인지적 관념뿐 아니라 정신적/정서적 내용도 다 포함

- 좁은 의미의 관념 : 이미지와 같은 외양을 지닌 의식의 상태. 사물의 상을 갖는 것.

내 생각들 가운데 흡사 사물의 상과 같은 것이 있는데, 이것만이 본래적인 관념이라고 명명될 수 있으며, (중략) 그러나 나머지 다른 것은 이런 상 이외에 또 다른 어떤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예를 들어 내가 의지하거나 두려워하거나 긍정하거나 부정할 때, 나는 내 생각의 대상으로서 항상 어떤 것을 인지하고 있지만, 또한 그 사물과의 유사성 이상의 것을 인지하게 된다. 이러한 것 가운데 어떤 것은 의지 또는 정념으로, 다른 것은 판단으로 불린다” - <성찰> : 내가 어떤 걸 의지한다고 하면 의지고, 어떤 걸 두려워하거나 좋아하거나 희망한다고 하면 정념, 어떤 걸 옳고 그르다고 생각하면 판단이다.

 

- 데카르트가 <성찰>에서 주장하려고 했던 점은, 비록 내가 나의 외부에 있는 대상들의 존재 여부(내 앞에 탁자가 실제로 놓여있는지 등)나 특성(저 바깥의 사람이 실제의 사람인지 아니면 자동인형인지) 등에 관한 이런저런 판단에서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해도, 내가 이런저런 대상이나 그 대상의 특성에 관한 관념들을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점이다. 관념은 정신이 무매개적으로 자각하고 있는 의식의 상태이기 때문에, 내가 이런 저런 관념을 갖고 있다고 혹은 내가 이런저런 것에 대해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은 항상 확실할 수밖에 없다.

- 그러니까 관념을 표상하는 것 자체는, 관념이나 표상 자체는 참/거짓이 아니다 + 그것을 참/거짓으로 판단하는 것은 의지의 작용이다(의지가 작용할 때는 오류가 생길 수도 있다).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하는 것은 의지의 기능이자 수행.

 

- 스피노자는 정의3에서 데카르트의 저런 생각을 잘못이라고 비판하고자 한 것이다. 데카르트처럼 관념과 의지, 표상과 의지를 구별하는 게 잘못이라는. 스피노자에 따르면 관념이라는 것은 수동적으로 형성되는 표상이 아니라 관념 자체에 긍정/부정의 판단이 포함되어 있다. 2부 정리49 따름정리에서 스피노자는 관념과 의지는 하나다라고 말한다.

 

2. 형상적 실재성 대 표상적 실재성

- 형상적 실재성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관념은 동등하지만, 관념이 표상하는 대상을 생각하면 완전성에 정도에 따라 등급이 있다는 생각.

-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이상하다, 나는 유한한데 유한한 내가 어떻게 저 완전하고 지고하고 무한하신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가 있을까. 정말 놀랍다라고 반문했다. 관념이라는 것을 표상적 실재성을 갖는다고 생각하니까 저렇게 반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같으면 신 뭐 그거 그냥 허깨비야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갔겠지만 데카르트는 우리가 저 신, 완전한 분의 관념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 이게 더 멋진 생각이지 않은가.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아주 흥미로운 생각이다. 너무 신학적이고 종교적이다, 라고 생각해서 무시하는 것 보다는 거기에 담겨있는 다른 측면들을 더 살려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 데카르트의 놀라운 이것에 주목한 사람이 레비나스. 레비나스가 데카르트가 경이롭게 생각한 바로 이것, 나는 유한한데 저 무한하신 신에 대한 관념/이데아가 내 안에 있을까라는 것을 무한한 타자의 이념으로 발전시켰다.

 

3. 명석함과 판명함

 

- 데카르트 <철학원리> 145: ”나는 어떤 지각이 주의 깊은 정신에게 현존하고 그것에게 접근 가능할 때 그것을 명석한 clarus(클라루스) 지각이라고 부른다. 이는 어떤 것이 눈의 시야에 현존하고 충분한 정도의 강도와 접근성으로 눈을 자극할 때 우리가 그것을 명석하게 본다고 말하는 것과 꼭 같은 것이다. 나는 어떤 지각이 명석할 뿐만 아니라, 정신이 자기 안에 단지 명석한 것으로서 포함하고 있는 다른 모든 지각들과 아주 확연하게 분리될 때 그것을 판명한 distunctus(디스팅투스) 지각이라고 부른다

 

- 명료하고 두드러진 지각. 다른 말로 하면 생생한, 우리 정신에 아주 생생하게 나타난 지각. 반면에 어떤 지각은 미미하고 뿌옇고 obscure한 지각. 불분명한 지각.

- 명료하기만 한 지각들과 확연하게 분리되는 또 다른 지각이 있다는 것.

 

- 하지만 명석하지만 판명하지는 않은 지각들도 존재한다. 아주 명료하게 나타나지만 두드러지지는 않는.

- <철학원리> 146: ”누군가가 강한 고통을 느낄 때 그가 이 고통에 대하여 갖고 있는 지각은 실로 아주 명석한 것이지만, 늘 판명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개 이 지각을 그들이 고통스러운 지점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고통의 감각과 닮았다고 가정하는 것의 본성과 관련하여 그들이 내리는 모호한 판단과 혼동하기 때문이다.“

 

- 데카르트의 정의에 따르면 판명함은, 다른 지각들과 아주 확연하게 분리된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판명한 지각이 이처럼 다른 지각들과 분리되는 것은 그것이 다른 지각들과 다른 모종의 내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판명한 지각을 다른 명석한 지각들과 확연하게 분리시키는 내적 특성은 어떤 것일까?

- 그것은 판명한 지각이 어떤 사물과 관련하여 그것에 속하는 것과 그것에 속하지 않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해준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직각 삼각형에 대해 우리는 클리어한 아이디어를 명료하게 가질 수 있지만 이게 꼭 판명하지는 않다. 우리가 판명하려면 직각 삼각형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직각삼각형에 속하는 성질(세 내각의 합은 180도와 같다), 속하지 않는 성질(네 각을 갖고 있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 것. 그러니까 관념과 관련된 대상의 특성이나 본질을 제대로 제시해주는 것이 명석판명한 지각이다. 스피노자도 이 용법을 받아들여서 많이 사용한다.

- 따라서 명석 판명한 지각 내지 관념 자체가 어떤 대상이 지니고 있는 모든성질에 대한 참된 정보를 제시해주지는 않지만 데카르트의 관점에 따를 경우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한 명석판명한 관념을 갖고 있을 경우, 우리는 필요한 경우 이러한 관념을 바탕으로 그 대상이 지닌 다른 성질을 도출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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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정리33의 주석1이 무척 좋았다. 내용도 형식도 완벽한 주석이라고 생각한다. 스피노자가 형이상학적 이유로 우연의 범위를 매우 협소하게 잡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사건이 벌어진 앞뒤 원인 또는 과정과는 별개로 그 사건자체가 일어날 수 있는 확률상의 수치로만 따졌을 때 매우 희소한 경우 우연이라는 단어를 뉴트럴하게 붙이는 세속적 용법은 아마 고려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맥락상의 우연에 있으니까- ”우연이라는 것이 갖는 환상성에 너무나 많은 자기 안의 것들을 투사해서 읽어내려는 욕망, 그 투사를 사실로 믿어버리고자 하는 욕망, 그 인식의 결핍을 이용해서 거기에 이것저것을 입히려드는 시도들에 대해 우리는 언제나 경계해야 하고, 경계가 느슨해질 때마다 이 주석1을 나 자신에게 아주 차갑고 매몰차게 읽어주고 싶다. 우리가 간략하게 우연으로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따져가며(본질이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지 우리가 모르는 실재/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실재로 나누어서) 물샐 틈 없이 논리정연하게, 불필요한 말 하나 없이 완벽하게(”모순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원인들의 질서가 우리에게 감추어져 아무것도 확실하게 긍정할 수 없는 실재“, 이보다 더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설명한 이 주석을. 확실하게 긍정할 수 없는 실재가 필연적인 것으로도 불가능한 것으로도 판명나지 않을 때 우리는 판명나지 않았다는 틈새를 이용해서 그것을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거나 이도저도 아닌 나태한 단어를 붙여 우연적인 것이라고 얼마나 쉽게 결론 내리는지. ”어떤 실재가 우연적이라고 불리는 데에는 우리 인식의 결여 이외에 다른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 정리33 주석1

우리가 간략하게 우연으로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 설명해보고 싶다. 하지만 필연과 불가능성에 대해 설명해보고 싶다. 어떤 것은 그 본질로 인해 필연적이라고 하거나 그 원인으로 인해 필연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어떤 실재의 실존은 그 본질 및 정의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거나 아니면 주어진 작용인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그 다음 어떤 실재는 이 동일한 원인들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라고 불린다.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불리는 이유는] 그 실재의 본질이나 정의가 모순을 함축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이 실재를 생산하도록 규정된 어떤 외부 원인도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실재가 우연적이라고 불리는 데에는 우리 인식의 결여 이외에 다른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본질이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지 모르는 실재나, 아니면 그 본질이 모순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원인들의 질서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어서 그 실존에 대해 아무것도 확실하게 긍정할 수 없는 실재의 경우 우리에게 필연적인 것으로도 불가능한 것으로도 나타나지 않을 수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을 우연적인 것이라든가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2. 좀 더 신랄한 주석2도 좋았다. ”의 자리에, 여러 가지 것들을 넣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중세신학자들 같은 마음으로 신을 믿는 신앙인들에게는 일 테고, 별점 같은 것을 믿는 사람들한테는 혹은 별의 신일 테고, 물질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물질일 테고, 우리가 지나치게 절대성을 부여하는 어떤 것들에 대해서 자의식과 나의 욕망들을 다 걷어내고 잘 성찰하려는 의지를 갖고 세상에 제시되어있는 논리적인 증명의 계열을 올바르게 검토한다면 그들은 결국 지금 그들이 신에게 부여하는 것 같은 자유를 단지 유치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학문에 대하여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것으로 완전히 거부하게 될 것이다

 

그래, 과학적 논리를 넘어서 지나치게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들은 대게 다 유치하고 학문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지적 성장에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게 맞다. 뼈아프지만 인정할 수 밖에. 살아가는 데에 있어 잠깐 유치하게 혹은 천진하게 숨 쉴 곳으로, 알록달록한 꽃분홍, 형광연두, 파스텔 톤의 파랑, 노랑, 오렌지 빛깔까지 유아기적 감성을 과장되게 재현한 색색깔의 사탕을 입에 넣고 잠시 기분 좋아지는 것 같은 느낌으로 마음에 품는 것과 절대성을 부여해서 신앙으로, 사주나 별점 같은 것으로, 물질이나 세속적 기준으로 세상과 사람과 운명을 진지하게 판단하려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니까. 그 와중에 잊지 않고 모든 것을 신의 어떤 무관심한 의지에 종속시키고 모든 것을 신의 기분에 의존하게 만드는 이러한 의견이, 신은 모든 것을 선을 고려하여 실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보다는 진리에서 덜 멀어진 것 같다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라고 깨알 같이 후자를 까는 스피노자의 섬세함에 혼자 막 웃었다ㅋㅋ

 

3. 1부 부록은 1부를 장중하게 마무리하고 끝내는 악장 같았다. 인상적인 구절들이 참 많아서 필사하는 느낌으로 이 단락 저 단락들을 통째로 옮겨 적었다. 인간의 원초적인 한 가지 편견- 모든 것들이 어떤 목적을 향해 행위 한다는 편견-이 그릇된 신앙관과 미신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인간의 무지, 인간의 욕구와 삼각형을 만들 때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한다는 점을 거쳐, 그것이 사물들을 표현하는 흔한 통념들로 이어지는 고찰이 좋았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기질을 언급하는 것이 너무 적확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의심해야 할 그 이상의 이유가 없기 때문에 미신을, 그릇된 신앙을 그저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서 만족해버리는 어리석음을 그들이 이를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다면, 그들로서는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 그들 자신이 보통 이러저러한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목적들에 대하여 성찰해보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기질에 따라 다른 이들의 기질을 판단하게 된다로 설명하는 것을 보면서 박수쳤다.

 

주석에 나오는 내용은 아니지만 항상 나는 누군가가 누군가의 상태를 짐작하는(대개는 비난하는 경우에) 말 속에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너무나 투명하게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거의 예외가 없었다. 이를테면 자신이 누군가를 미워하는 원인이 질투이거나 자신이 미움 받는 원인이 질투이기를 바라는 사람은, A라는 사람의 행동을 분석할 때 질투해서 그런 것 같다는 분석을 가장 쉽게 내리고, 자신이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거나 혹은 그 역작용으로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서 성공한 스스로가 지나치게 대견하면(의식하지 않는 자신을 대견하게 여긴다는 것 자체에 이미 타인을 굉장히 의식한다는 전사나 전제가 내포되어있는데) A라는 사람의 행동을 분석할 때 A는 그냥 행동했을 뿐인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고 분석하고, 본인이 경쟁심이 많거나 누군가에게 지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이면 A의 행동을 남을 이기려고, 돋보이려고 그런다라고 쉽게 분석한다. 너무나 높은 확률로 그런데, 스피노자 말대로 객관적인 어떤 정보가 없고 사람은 사람을 객관적으로 보는 데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 그들 자신이 보통 이러저러한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목적들에 대하여 성찰해보는 것 밖에 다른 도리가 없으므로 결국 자기 자신의 기질에 따라다른 이들의 기질을 판단하기 너무나 쉽기 때문일 것이다. A라는 사람이 점심을 안 먹는 것을 두고 마음 속 화두가 건강인 사람은 A가 아픈 건 아닐까라고 생각하기 쉽고 화두가 우울인 사람은 A가 무슨 우울한 일이 있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하기 쉽고 화두가 다이어트인 사람은 A가 살 빼려고 그러나?라고 생각하기 쉬운 것처럼.

 

사람은 참 투명해, 타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에 가장.

 

모든 인간은 실재의 원인에 대해 모르고서 태어난다는 것, 그리고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apetito)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충동을 의식한다는 것을 기초로 삼으면 충분하다. 왜냐하면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들이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첫째,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여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욕과 욕구는 의식하지만, 그들로 하여금 욕구나 의욕에 사로잡히게 만든 원인은 모르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서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은 목적을 위하여, 곧 그들이 욕구하는 이익을 위하여 행동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성취된 것에 관하여 항상 목적인만을 알려고 하며, 그것을 듣게 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의심해야 할 그 이상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이를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다면, 그들로서는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 그들 자신이 보통 이러저러한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목적들에 대하여 성찰해보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기질에 따라 다른 이들의 기질을 판단하게 된다.

 

4. 스피노자는 그 뒤에 기질을 신을 숭배하는 상이한 방식으로 이어가는데 거기서도 박수쳤다ㅋㅋㅋ 종교를 믿는 사람이나 오컬트를 믿는 사람이나 물질적인 것을 믿는 사람이나 정말 자기기질대로 숭배의 대상을 정하고 방식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종교를 믿는 사람은 자연을 포함한 세상 전체가 신의 뜻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고, 오컬트를 믿는 사람은 자연에서 인간의 운명과 성격을 읽어내려고 하고, 물질적인 것을 믿는 사람은 자연을 의식주를 포함한 물질적 제공을 해주는 대상으로 생각하고. 스피노자가 자연과 신들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착란에 빠져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을 때 웃기 시작했다가 일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 한 번 보기 바란다!“라고 말할 때 빵 터졌다ㅋㅋㅋㅋ 자연을 좀 가만히 놔두라고 인간들아! 자연이 니들이 믿는 종교를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별들이 니들의 인생이나 운명 따위를 이야기해주는 것도 아니고, 자연이 니들 잘 먹고 잘 살라고 해를 비춰주고 물고기를 길러내어주고 그러는 거 아니고 그냥 존재하는 거라고! 인간 뭐가 그리 대단한가.

 

자신의 기질에 따라 신을 숭배하는 상이한 방식을 만들어냈다. 이로써 이러한 편견은 미신으로 변화되었고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연은 쓸모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애쓸 때, 그들은 다만 자연과 신들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착란에 빠져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 일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 한 번 보기 바란다!

 

5. 이 뒷 문장에서는 숙연해졌다. 가장 날카롭게 내 마음을 파고들기도 했다. 자기 믿음에 반대되는 것을 접하면 회의하는 것이 아니라 더 믿음에 종속되는 것. 성소수자 문제에 있어서 논리적 한계에 부딪혔을 때 성경에 그렇게 써있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사람들, 점성술사가 완전 잘못 맞춘 사례들을 이야기했을 때 별점이 틀릴 리가 없다는 생각에 더욱 사로잡혀서 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거 아니냐, 전혀 얼굴 본 적도 없는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을 10년 본 사람의 판단조차도 무시하고 점궤에 어떻게든 꿰어 맞추려고 했던 사람들, 무언가를 사들여도 공허하다는 걸 이미 깨달았으면서도 더 좋은 것을 사지 못해서지 않을까라는 마지막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사들이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 그렇게 정해진 대상이 없었을 뿐이지 대상을 바꿔가며 나도 믿는 것에 대해 더욱 믿으려고 그것에 회의가 드는 순간에 고집스럽게 믿음에 종속되었던 순간들이 많다. 특히 진로에 대해 그랬던 것 같다. 어쨌거나 이 모든 것은 그 용법을 모르는 다른 미지의 것들 가운데 하나로 놓고 그들이 현재 처해 있는 태생적 무지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이 모든 구성물을 파괴하고 새로운 구성물을 고안해내는 것보다 더 쉽기 때문일 것이다. 의식적으로 뒤엎으려고 해도 조금만 정신줄을 놓으면 다른 미지의 것들 가운데 하나로나의 문제를 쓱 묻어버리려는 유혹이 커지는 것은 나약해서일 것이다. 아니 나약해서였으면 좋겠다. 완고해서일 경우가 더 문제일 테니까.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뿌리 깊은 편견을 버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런 사실을 그들이 그 용법을 모르는 다른 미지의 것들 가운데 하나로 놓고 그들이 현재 처해 있는 태생적인 무지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이 모든 구성물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구성물을 고안해내는 것보다 더 쉽기 때문이다. (=자기 믿음에 반대되는 것을 접하면 회의하는 것이 아니라 더 믿음에 종속된다.)

 

6. 5번에 더불어서 상상의 힘, 정서의 힘, 욕망의 힘에 사로잡혀 자기를 더 자극하는 것에 마음이 기울게 되어있다. 이 역시 조금만 정신줄을 놓으면 그렇게 되기 쉽다. 더 공부해야 겠다는, 특히 철학과 과학을 더 공부하고 나를 어렵고 불편하게 만들던 것들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정신 차려야 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점점 체력은 떨어지고 사고력은 체력과 비례하지는 않아도 적어도 반비례 정도는 하는 것 같은데, 점점 달콤한 힘들에 사로잡혀 내가 듣고 싶은 것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발췌해서 세상을 보게 되지 않으려고. 철학과 과학이 진리의 다른 규준을 보여주어서,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탐구하는 방식에서 많은 반성을 하게 해줘서 다행이다. 아직도 갈 길이 너무나도 멀지만. 내가 믿고 있는 것,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것보다 나를 불편하게 하고 나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들과의 교류를 끊지 않도록.

 

- 우중 vulgus 스피노자는 엄청 답답했던 것이다. 저 자연의 해석자 혹은 신의 해석자로 숭배 받는 사람들은 학자도 아니고 미신을 조장하고 엉뚱한 해석을 유포하는 자들인데 대중들이 뭐가 진리인지 뭐가 논리적으로 맞는지 전혀 모르고(혹은 외면하고) 자기를 자극하는 것, 더 많이 현혹하는 것을 믿고 숭배하고 따르니까. 상상의 힘, 정서의 힘, 욕망의 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사람들은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이 있는 상상과 어떤 일이 나의 잘못이 아니라 별자리 같은 자연이나 신이 예비해놓은 운명이라고 생각했을 때 얻게 되는 커다란 위안의 정서, 모든 것을 심지어 자기 운명뿐만 아니라 타인의 운명이나 성향까지도 자기가 이미 다 파악하고 알고 있는 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의 힘에 너무 쉽게 사로잡히니까. 나약할수록 특히).

 

7. 클라이막스 중에서도 클라이막스 같은 3부는 마치 더글러스 애덤스가 근대에 태어나서 신랄하게 쓴 글 같다. 영국식 유머들이 곳곳에 있어서 숙연해지다가 반성하다가 빵터지고 감동하다가 빵터지고 그랬다. 앞에서 한 세 번 이미 웃었는데 뒤에 이러한 논쟁들로부터 회의주의가 생겨났다는 것에 놀랄 만한 것은 없다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크게 웃은 것 같다. 스피노자의 통찰이 예리한 건지 인간은 중세나 근대나 현대나 다 뻔한 건지, 맞아 편견과 무지에 사로잡혀 자연을 볼모로 잡고 신앙이든 오컬트든 물질적인 것이든 지나치게 빠져있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빠지는 곳이 회의주의지. 다 소용없어. 다 부질없어. 다 의미 없어.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내가 틀리고 내가 무지하고 내가 편견에 사로잡혀있다는 걸 인정하느니 태생적인 무지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냥 원래 세상이 다 인간이 다 부질없고 얕은 거야, 그게 내 운명이야, 내가 믿는 신이 예비한 나의 인생이야, 그러니 물질이 최고야라고 결론내리는 것이 쉬우니까

 

이 모든 것은 각자가 사물들을 자기 두뇌의 성향에 따라 판단했다는 것, 또는 오히려 자기 상상의 변용들을 사물들로 간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지나치는 김에 이점에도 주목해두자)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사람들 사이에 수많은 논쟁이 일어났으며, 마침내 이러한 논쟁들로부터 회의주의가 생겨났다는 것에 놀랄만한 것은 없다. (중략) 사물들을 이해하기보다는 상상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물들을 잘 이해했다면, 수학이 입증하듯이, 사물들은 사람들 모두를 매혹하지는 못할지 몰라도 적어도 납득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8. "상상을 지성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사물들 속에는 질서가 존재한다고 굳게 믿는다. 왜냐하면 사물들이 우리에게 감각을 통해 표상되고 우리가 그것들을 쉽게 상상하고 따라서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배열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것들이 질서정연하다고 말하며, 반대의 경우에는 무질서하다고 또는 혼란스럽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이 우리를 특히 더 기쁘게 하기 때문에." <- 상상과 지성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혼란스러운 상황은 불안정해서 견디기 어려우니까 혹은 혼란스러움은 나의 지성의 결핍을 표상하는 것만 같아서 어떻게든 혼란스럽고 애매한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A아니면 B로 결론 내리거나 애매한 것들을 다 잘라내어 네모반듯하게, 그게 나의 성마른 성정이 만들어낸 가상의 형상일지라도 컨트롤하기 좋게 만들어놓고는 쉽게 기뻐하고 안심하는 것. 그렇게 해놓고 혼란과 애매한 상태를 견디 사람들을 우습게 보는 것. 

사물들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물들을 상상하는 데 만족하는 사람들이 사물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긍정하지 못하고 상상을 지성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사물들 및 그들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사물들 속에는 질서가 존재한다고 굳게 믿는다. 왜냐하면 사물들이 우리에게 감각을 통해 표상되고 우리가 그것들을 쉽게 상상하고 따라서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배열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것들이 질서정연하다고 말하며, 반대의 경우에는 무질서하다고 또는 혼란스럽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이 우리를 특히 더 기쁘게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혼란보다 질서를 더 선호한다. 마치 질서가 우리의 상상과 독립적으로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신은 모든 것을 질서 있게 창조했다고 말하며, 따라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신에게 상상을 귀속시킨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그들은 신이 인간의 상상을 고려하여 인간이 아주 쉽게 상상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배열해놓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ㅋㅋㅋㅋㅋ


9. 그저 한없이 착하고 관대하고 낙관적인 방식으로 얻는 평온함이 아닌, 날카롭게 인식하고 명확하게 바라보며 이치를 엄밀히 따지는 방식으로 얻는 다른 종류의 평온함에 대하여. 그것을 담고 품을 마음의 그릇을 만드는 문제에 대하여. 단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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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리33 주석1

우리가 간략하게 우연으로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 설명해보고 싶다. 하지만 필연과 불가능성에 대해 설명해보고 싶다. 어떤 것은 그 본질로 인해 필연적이라고 하거나 그 원인으로 인해 필연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어떤 실재의 실존은 그 본질 및 정의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거나 아니면 주어진 작용인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그 다음 어떤 실재는 이 동일한 원인들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라고 불린다.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불리는 이유는] 그 실재의 본질이나 정의가 모순을 함축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이 실재를 생산하도록 규정된 어떤 외부 원인도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실재가 우연적이라고 불리는 데에는 우리 인식의 결여 이외에 다른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본질이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지 모르는 실재나, 아니면 그 본질이 모순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원인들의 질서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어서 그 실존에 대해 아무것도 확실하게 긍정할 수 없는 실재의 경우 우리에게 필연적인 것으로도 불가능한 것으로도 나타나지 않을 수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을 우연적인 것이라든가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정리33 주석2

실재들이 다른 방식으로 생산되었다면, 우리는 신에 대하여, 가장 완전한 존재자에 대한 고찰에 의해 우리가 신에게 부여하도록 강제된 본성과 다른 본성을 부여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이러한 주장을 부조리한 것이라 거부하고 검토해보려고도 하지 않을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신에 대하여 우리가 말했던 것(정의7)과 아주 다른 종류의 자유, 곧 절대적 의지를 부여하는 데 익숙하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또한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이 이 문제를 잘 성찰하려는 의지를 갖고 우리가 제시한 증명의 계열을 올바르게 검토한다면, 그들은 결국 지금 그들이 신에게 부여하는 것과 같은 자유를 단지 유치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학문에 대하여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것으로 완전히 거부하게 될 것이다.“

영원성 속에는 언제라는 것도 이전도 이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로부터, 오직 신의 완전성으로부터 신은 어떤 것도 다른 식으로 결정할 수 없으며 결코 그렇게 결정할 수 없었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또는 신은 자신의 결정 이전에 존재하지 ㅇ낳았으며, 그러한 결정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모든 것을 신의 어떤 무관심한 의지에 종속시키고 모든 것을 신의 기분에 의존하게 만드는 이러한 의견이, 신은 모든 것을 선을 고려하여 실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보다는 진리에서 덜 멀어진 것 같다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나는 이런 스피노자의 섬세함이 너무 좋다ㅋㅋ)“

 

정리34: ”신의 역량은 신의 본질 자체다.“

증명 왜냐하면 오직 신의 본질의 필연성으로부터 신이 자기원인이며(정리11에 의해) 만물의 원인이라는 점(정리16 및 그 따름정리에 의해)이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 자신과 만물이 그것에 따라 존재하고 행위하는 신의 역량은 신의 본질 자체다.

 

정리35 ”우리가 신의 권능(potestas) 안에 존재한다고[신의 권능에 달려 있다고] 인식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증명 왜냐하면 신의 권능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앞의 정리에 의해) 신의 본질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도록 신의 본질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리36 “주어진 그 본성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는다

- 자연 안에서 주어진 모든 것은 어떤 결과에서 따라 나온다

= 자연 안에 주어진 모든 것은 어떤 역량을 가지고 있다

= 자연 안에 주어진 모든 것은 산출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증명 실존하는 모든 것은 신의 본성 또는 본질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한다(정리25의 따름 정리에 의해). (정리34에 의해) 실존하는 모든 것은 만물의 원인인 신의 역량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며, 따라서 그것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 나와야 한다. Q.E.D.

 

문단띠로 사각형입니다.

1부 부록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편견이 있는데(“내가 설명한 방식대로 실재들의 연관을 파악하는 것을 방해하는 다수의 편견) 한 가지 원초적 편견에서 생겨난다.

 

내가 여기서 밝혀보려고 하는 모든 편견은 오직 다음과 같은 점에서 생겨난다. 곧 사람들은 모든 자연 사물들이, 그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목적으로 인해 행위 한다고 공통적으로 가정하며, 신 자신이 어떤 일정한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인도한다고 굳게 믿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신이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만들었으며, 자신을 숭배하게 하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 한가지 [편견]을 고찰해볼 것이며, 첫째,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편견에 대해 만족스러워하는지, 그리고 왜 그들은 모두 본성적으로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는지 따져볼 것이다. 그 다음 나는 이러한 편견의 거짓됨을 보여줄 것이며, 마지막으로 어떻게 이러한 편견으로부터 선과 악, 상과 벌, 칭찬과 비난, 질서와 혼란, 미와 추 및 이와 같은 종류에 속하는 다른 편견들이 생겨나게 되었는지 보여줄 것이다.

 

목적론적 편견: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 모든 것이 어떤 목적을 향해 존재한다고 믿는 것. 목적을 상정해버리고 자연이 그 목적대로 움직이도록 주재하는 초월자 을 상정한다. 초월자 신에 의해 자연 사물들이 인간을 위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실재의 원인에 대해 모르고서 태어난다는 것, 그리고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apetito)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충동을 의식한다는 것을 기초로 삼으면 충분하다. 왜냐하면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들이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첫째,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여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욕과 욕구는 의식하지만, 그들로 하여금 욕구나 의욕에 사로잡히게 만든 원인은 모르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서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은 목적을 위하여, 곧 그들이 욕구하는 이익을 위하여 행동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성취된 것에 관하여 항상 목적인만을 알려고 하며, 그것을 듣게 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의심해야 할 그 이상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이를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다면, 그들로서는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 그들 자신이 보통 이러저러한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목적들에 대하여 성찰해보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기질에 따라 다른 이들의 기질을 판단하게 된다.

 

- 모든 인간은 (그 원인에 대해 전혀 모르고) 무지한 채로 태어난다.

- apetitio 인간의 본질인 욕구. 프로이트의 용어로 하면 drive. ’충동과 굉장히 가까운 의미인데, 그래서 예전에는 충동이라고도 번역했지만 좀 부적절하다는 판단에 욕구라고 번역하기 시작했다.

-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건 가상이다. 자신이 뭘 욕구하는지,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잇는지는 인식하지만 그 욕구의 원인을 모르고, 그 원인을 모르겠으니까 그냥 그것을 우리가 우리의 의지에 따라서 그냥이것을 원해서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행동한다고 생각해버린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원인이라고 생각해버리고, 우리가 자유의지로 욕구하는 거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랑 굉장히 비슷하다. 무의식의 규정.

 

원시인들이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이렇게 많은 과일들이 있고, 낮에는 해가 나오고 물고기를 길러내는 바다가 있고(나의 미래와 운명을 알려주는 별자리가 있고ㅋㅋㅋ) 내가 스스로 만든 게 아닌데 쓸모 있는 게 왜 이렇게 있지? -> 누군가 인간을 위해 설치해놓은 것 같다 -> 그 존재는 대체 왜 인간에게 쓸만한 것들을 만들어놨을까? -> 생각해보니 이 존재가 나로 하여금 감사와 숭배를 받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 아니면 내가 그 존재를 숭배하고 감사를 많이 표할수록 인간보다 훨씬 더 강력한 그 존재가 나에게 더 좋은 걸 많이 해줄 것 같다 -> 신앙과 미신 생김 (또한 그들은 이러한 지배자의 기질에 관하여 전혀 듣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기질에 따라 그것을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목적론적 편견을 갖고 있다가 더 나아가 인간의 편익/이익을 위해 설치한 초월적 존재를 숭배하기 시작하고 미신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재앙이 생기면 우리가 모자랐구나 하면서 희생제물도 바치고 하면서 더 열심히 숭배한다.

 

자신의 기질에 따라 신을 숭배하는 상이한 방식을 만들어냈다. 이로써 이러한 편견은 미신으로 변화되었고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연은 쓸모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애쓸 때, 그들은 다만 자연과 신들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착란에 빠져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 일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 한 번 보기 바란다! (중략)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뿌리 깊은 편견을 버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런 사실을 그들이 그 용법을 모르는 다른 미지의 것들 가운데 하나로 놓고 그들이 현재 처해 있는 태생적인 무지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이 모든 구성물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구성물을 고안해내는 것보다 더 쉽기 때문이다. (=자기 믿음에 반대되는 것을 접하면 회의하는 것이 아니라 더 믿음에 종속된다.) 목적들이 아니라 오직 도형의 본질 및 특성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수학(목적 따위에 관심이 없는 학문)이 인간들에게 진리의 다른 규준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이러한 점만으로도 진리가 영원히 인류에게 감춰진 채로 남아있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학 이외에도 인간들이 이러한 공통의 편견들을 깨닫고 실재들에 대한 참된 인식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할 수 있는 다른 원인들을 지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목적에 관한 이러한 학설은 자연을 완전히 전도시킨다. 왜냐하면 이 학설은 원인인 것을 결과로 간주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이 학설은 본성상 앞에 오는 것을 뒤에 오는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학설은 지고하고 가장 완전한 것을 극히 불완전한 것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정리 21, 22, 23에 의해 확립되었듯이, 신에 의해 직접 생산되는 것이 가장 완전한 결과이며, 어떤 것이 생산되기 위해 매개적인 원인들이 더 필요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에 의해 직접 생산된 것들이 신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라면, 마지막으로 생산된 것들, 곧 그것들을 위해 처음의 것들이 만들어진 이 마지막 것들이야말로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들이 될 것이다.

 

- 신에 의해 직접 생산되는 것: 직접적 무한양태

이 직접적 무한양태를 매개로 해서 생겨나는 것: 매개적 무한양태

매개적 무한양태보다 완전성이 덜 한 것: 유한양태

목적론적 관점에 따르면 직접적 무한양태가 수단이 되어버리고 매개적일수록 근본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순서가 뒤바뀌어버림

 

이 학설은 신의 완전성을 제거한다. 왜냐하면 신이 어떤 목적을 위해 행위 한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신이 자신에게 결여된 어떤 것을 열망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 목적을 추구한다는 이야기는 그 추구하는 것이 결핍되어 있는 말이니까. 그러니 신이 어떤 목적을 추구한다 -> 신은 불완전하다

- 목적에는 2가지가 있는데 필요의 목적과 동화의 목적(<- 나는 갖고 있는 이걸 안 갖고 있는 사람을 위해 신에게로 끌어들이는 목적)

- 목적론적 관점에서보면 동화의 목적이었어도 신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 기독교 신학자 중 창조를 굉장히 숭배하고 그걸로 모든 걸 설명하려드는 사람들은 인간의 신체처럼 복잡하고 섬세하고 딱딱 들어맞는 구조가 자연의 진화로 어떻게 설명될 수 있냐고 주장한다.

-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6장에는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고대 구약성서를 분석해보면 구약의 기적은 사실 그냥 사람들이 자연적 사건을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 그 당시 사람들의 표현이, ’그냥표현이 신의 입김이었는데, 해석되는 과정에서 그게 곧이곧대로 기적이 되어버렸다. 모세가 홍해를 가른 것도 마찬가지. 그러니까 많은 기적에 관한 이야기는 언어적 표현법+ 자연적 이치에 무지하니 사실 자연적 현상인데도 그냥 초자연적으로 이해함 -> 이게 기적으로 둔갑한 것이다.

 

- 바보들일수록 세상에 대해 잘 놀라는 얼빠짐 놀람 stupor. 어떻게 신체가 이럴 수 있지! 어떻게 별자리가 이렇게 내 성격이랑 딱 맞을 수 있지!ㅋㅋㅋ

- 우중 vulgus 스피노자는 엄청 답답했던 것이다. 저 자연의 해석자 혹은 신의 해석자로 숭배 받는 사람들은 학자도 아니고 미신을 조장하고 엉뚱한 해석을 유포하는 자들인데 대중들이 뭐가 진리인지 뭐가 논리적으로 맞는지 전혀 모르고(혹은 외면하고) 자기를 자극하는 것, 더 많이 현혹하는 것을 믿고 숭배하고 따르니까. 상상의 힘, 정서의 힘, 욕망의 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사람들은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이 있는 상상과 나의 잘못이 아니라 별자리 같은 자연이나 신의 예비해놓은 운명이라고 생각했을 때 얻게 되는 커다란 위안의 정서, 모든 것을 심지어 자기 운명뿐만 아니라 타인의 운명이나 성향까지도 자기가 이미 다 파악하고 알고 있는 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의 힘에 너무 쉽게 사로잡히니까. 나약할수록 특히).

- 이런 우중을 상대로 정치론 신학정치론을 쓰려고 하니까 매우 답답했을 것이다. <에티카>에서는 오히려 불구스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는데, 그것은 <에티카>를 불구스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식인들, 진리를 추구하려 하고 지복한 삶을 추구하며 살려는 사람들을 위해 쓴 책이기 때문이다. <정치론> <신학정치론>에는 많이 나온다. 스피노자는 그 사람들이 철학을 통해 설득되거나 수학적 과학적 진리로 이끌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될 수 있으면 그 사람들의 상상적인 사고방식에 맞춰서,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의 상상적인 사고방식을 존중하면서 거기에 맞춰 이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해법을 찾아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 그래서 <신학정치론>에 가면 신, 초월적인 신, 때로는 영원불멸의 신에 대한 상상적인 믿음을 스피노자가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만약에 사람들이 그런 것도 믿지 않으면, 내세나 초월적인 신에 대한 관념이 없으면, 나쁜 일 하면 지옥가고 좋은 하면 천국 간다 같은 건 상상적인 생각이고 진리가 아니지만 사람들이 이런 상상마저 하지 않는다면, 대중이 더 타락하고 방탕한 길로 갈 것을 우려했다. 그것 자체는 상상적인 생각들이고 미신이지만, 그것의 유용한 역할을 다 할 수 있다. 올바른 대중들을 유복한 삶으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에티카>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오직 진리를 추구하는 것만이 목표다. 하지만 실천적인 철학으로 가게 되면, 그러니까 정치학 같은 쪽으로 가게 되면 진리만을 추구할 수 없다. 일단 대중들이 철학을 하고 싶어 하지도 않고 진리에 귀기울이려 하지도 않고 오히려 귀찮아하며 때로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실천철학에서는 철학의 역할이 조금 다른 것이다.

 

사물들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물들을 상상하는 데 만족하는 사람들이 사물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긍정하지 못하고 상상을 지성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사물들 및 그들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사물들 속에는 질서가 존재한다고 굳게 믿는다. 왜냐하면 사물들이 우리에게 감각을 통해 표상되고 우리가 그것들을 쉽게 상상하고 따라서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배열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것들이 질서정연하다고 말하며, 반대의 경우에는 무질서하다고 또는 혼란스럽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이 우리를 특히 더 기쁘게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혼란보다 질서를 더 선호한다. 마치 질서가 우리의 상상과 독립적으로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신은 모든 것을 질서 있게 창조했다고 말하며, 따라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신에게 상상을 귀속시킨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그들은 신이 인간의 상상을 고려하여 인간이 아주 쉽게 상상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배열해놓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과하며, 우리의 상상의 취약함으로 인해 아주 많은 것들이 우리의 상상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사실도 아마 그들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점에 관해서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

그 다음 다른 통념들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상상을 변용하는 상상의 방식에 불과하지만, 무지한 사람들은 이것들을 사물의 주요속성으로 간주한다.

 

마지막으로 귀를 움직이는 것들은 소음이나 소리, 화음을 만들어낸다고 말하는데, 이는 심지어 신 역시 화음에 즐거워한다고 믿을 정도로 사람들이 제 정신을 잃게 만들었다. 실로 천계의 운동이 일종의 화음을 이룬다고 믿었던 철학자들도 존재했다.

이 모든 것은 각자가 사물들을 자기 두뇌의 성향에 따라 판단했다는 것, 또는 오히려 자기 상상의 변용들을 사물들로 간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지나치는 김에 이점에도 주목해두자)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사람들 사이에 수많은 논쟁이 일어났으며, 마침내 이러한 논쟁들로부터 회의주의가 생겨났다는 것에 놀랄만한 것은 없다. (중략) 사물들을 이해하기보다는 상상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물들을 잘 이해했다면, 수학이 입증하듯이, 사물들은 사람들 모두를 매혹하지는 못할지 몰라도 적어도 납득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 신이 오직 이성의 인도에 따라 자신을 다스리도록 모든 사람을 창조하지 않았는가라고 묻는 사람들에 대해 나는 단지 다음과 같이 답변할 것이다. 이는 신에게는 가장 높은 정도의 완전성에서부터 가장 낮은 정도의 완전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물들을 창조할 수 있을 만큼 전혀 질료가 결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내가 정리16에 증명한 바와 같이, 신의 본성의 법칙은 무한 지성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생산하기에 충분할 만큼 아주 광대했기 때문이다.

 

- 신학적 어법을 빌려서 이야기한 것. 너희 신학자들의 어법에 따라 말하자면, 신의 질료가 무궁무진해서. 그 뒤의 문장이 스피노자의 입장에 가까운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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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축하다

스피노자가 1부에서 함축한다는 말을 매우 전문적으로 쓰는데, 자기원인을 정의할 때도 그랬고 정리24에서도 그랬다. 함축한다: involvere involve 불어로 번역할 때는 envelopper라고 번역한다. 이게 좋은 번역어인지는 잘 모르겠다. 특히 들뢰즈가 <스피노자 표현의 문제>에서 함축한다를 쓸 때 저렇게 쓴다. 이 단어가 편지를 봉인하다라는 의미가 있기도 해서 어떤 사람들은 저걸 봉인한다로 번역하는 사람도 있고, 특히 들뢰즈를 영어로 번역하는 사람은 이걸 envelope으로 번역하는 사람도 있다ㅋㅋㅋ 2부 정리49의 증명을 보면 스피노자의 함축하다의 아주 테크니컬한 의미를 볼 수 있다.

*** 정리25는 신플라톤주의자를 겨냥한 것이다. 이데아의 세상과 현상의 세상이 구분되고 이데아는 본질적이고 영원하고, 반면에 현상계는 생성됐다가 소멸됐다가하는 시간적인 것이고, 본질의 세계(이데아)- 실존의 세계(현상)로 구분해서 생각하는. 바로 신의 지성과 의지가 본질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저런 생각을 한다.

- 데카르트는 자신이 생산한 자연이 신 바깥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세계에서는 신이 한 번 생산을 하고나면 신이 관여하지 않고 자연이 알아서 작동하고 굴러감. 데카르트에게서 자연세계는 스스로 운동할 수 있는 힘은 없다. 신이 처음에 만들어놓고 충격을 주는 것, 그러니까 엄청나게 오래가는 태엽이 있어서 한번 감았다가 푼 것이다. 자연세계라는 작동장치. 이게 바로 데카르트가 말하는 자연세계다. 내재적 운동역량이 없는. 그러나 스피노자는 1부 정리15에서 자연세계는 신과 거리를 두고 있는 게 아니라 신 안에 있다, , 신이 만물에 내재해서 자연만물에 내재적 원인으로 계속 작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이 내용이 정리26부터 본격적으로 나온다.

- 사르트르의 매우 유명한 말이 있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다사르트르가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라는 것. 우리는 우리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태어나 있다. 그래서 지금 내 모습으로, 돈 많은 부모, 멋있는 부모 아래서 태어났으면 떵떵거리며 좋은 데 가서 있을 텐데 이러고 태어났다ㅋㅋㅋ 내가 이 모습 이대로 태어난 것은 선택하지 않았지만 나는 나의 존재와 내 모습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 거라는 것 그것은 나의 책임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스피노자 철학이나 17세기 철학이랑 크게 다르지 않다. 그걸 잘 이해하고 해석해보면. 사르트르가 스피노자에게 상당히 우호적인 태도를 갖고 있기도 하고.

 

정리26: “어떤 작업을 하도록 규정된 실재는 필연적으로 신에 의해 그렇게 하도록 규정되었다. 그리고 신에 의해 규정되지 않은 실재는 자기 스스로 작업을 하도록 규정할 수 없다.”

 

- 작업하다= produce on effect 농부가 땅을 일궈서 수확하는 것, 장인이 물건을 만드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작업. 사람들은 어떤 작업을 한다고 규정된다고 했는데 이 작업에는 에너지와 힘이 필요하고 이 힘은 신에게서 온다.

- 정리26은 신이 모든 것을 결정해놨다는 의미다. 실재가 작업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신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나올 수 있다. (다음 시간에 이 문제를 살펴볼 예정이다)

- 신이 필연적으로 양태의 작업을 규정하는 방식은 어떤 것인가. 신이 나의 인생을 다 정해놓았다는 말인가? 우리 점보러 많이들 가잖아요. 사주도 보고. 제가 아는 선배는 하이데거를 하신 분인데 부지런히 10년 넘게 점집을 찾아 다닌다고 해서, 저 양반이 미쳤나했는데 갑자기 역학에 관심이 생겨서 역술을 알아보러 다닌다고 하더라구요. 10년 다녀봤더니 별거 없더라고ㅋㅋㅋ 우리가 사실 알게 모르게 이런 생각들 많이 하죠. 난 전생에 뭐였을까. 미래가 이미 정해져있지 않을까. 좋은 미래가 정해져 있었으면. 과학문명 시대에 사니까 겉으로는 거부해도 속으로는 우리의 삶이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정해져 있다고 믿고 싶어 하고. 서양애들 점성술 믿는 거랑 비슷한데요. 내가 철학을 하게 된 것도 누가 정해놓은 것 아닌가, 어떤 한 개인, 개체, 출생에서부터 성장에 이르기까지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면, 이게 가장 강한 의미에서의 결정론이 되겠죠. “어떤 작업을 하도록 규정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실정적인 것이니까

 

- 하지만 다른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양태들의 출생 성장 개별적인 여러 행동들을 하나하나 다 지정한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양태들이 실존하고 행위하고 작업하는 방식, 패턴, 어떤 규칙 같은 것을 규정해놓았다는 것이다. 사람 같은 생물들은 물을 마시고 밥을 먹고 공기를 마셔야 산다 같은 법칙처럼. 몇월 몇일 몇시에 밥을 먹고 공기를 마시고 물을 마신다 이런 걸 정해놨다기보다 인간의 생존리듬, 법칙들, 패턴들, 이런 것을 규정해놓았다는 의미. 그러니까 신은 우리들 각자가 어떤 물을 마셔야 하고 무엇을 섭취하고 몇 시간을 자야하는지 하나하나를 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유기체로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수분과 양분을 섭취해야 하고 하루에 일정한 시간의 수면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규정해놓았다는 것이다.

 

*** 말브랑슈 malebranche: 기회원인론 occasionalism

- 유한한 인간을 비롯한 유한한 사물들이 행위하고 작용하는 모든 것은 신에 의해서다. 내가 이렇게 손을 든다면, 내가 손을 드는 이것이 바로 오케이션, 이 기회의 원인이 신이다. 말브랑슈 철학에서는 개인과 개체는 꼭두각시다. 신에 의해 규정되어 움직이는. 하지만 생각보다 미묘하다. 손을 드는 원인은 신인데, 말브랑슈 이야기는 이 근육의 운동, 인간이 가지고 있는 팔근육의 작용방식, 그러니까 팔을 들 때 근육이 이완되고 팽창되고 하는 방식, 이것을 신이 정해놓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라고 봤다. 인간의 신체를 규정하는 생리학적인 법칙. , 내가 움직이는 것은 임의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체를 규정하는 근육의 운동 패턴에 따라 움직인 것이다.

- 스피노자가 정리26에서 작업하도록 규정되어있다라고 이야기할 때는 말브랑슈 이야기처럼 어떤 개체, 개인, 사물이 수행하는 작용을 규정했다는 의미다. 그 개체가 임의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아니라 정해진 규칙이나 패턴에 따라 이루어진다. 1부 정리8의 두 번째 주석. 동화적 상상력을 비판한 내용. 근거와 규칙에 따라 작용하지 임의대로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나무가 되고 그러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 말브랑슈가 스피노자를 상당히 싫어했는데, 다른 비판가들한테는 저 사람 변장한 스피노자주의라는 비난도 받았다.

- 신이 몸짓 하나하나에 작용해서 매우 바쁠 거라는 상상과는 다르다ㅋㅋㅋ 신이 일단 규칙만 정해놓으면 알아서 작동하는 원리다. 신이 하나하나 작용하는 것은 신의 지혜와 어울리지 않는다. 신이 지혜롭다면 그렇게 번잡하고 바쁘게 멍청하게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신은 그냥 일정한 규칙 법칙을 만들어놓으시고 거기에 따라서 자연만물이 알아서 잘 작동하도록 세계를 창조하셨다.

- 그런데 여기에 어떤 문제가 생기냐면 신의 전지함 지혜를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신의 기적, 전지함의 포스가 약해지죠. 기적이라는 것은 신이 세워놓은 객관적 규칙이나 법칙을 위반하고, 벗어난다는 것인데 말브랑슈식으로 말하면 신이 자꾸 이렇게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신이 뭔가 설계를 잘못해놓은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가며, 말브랑슈가 신의 지혜를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기적의 필요성이 줄어드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기적의 필요성이 줄어든다는 것은 신의 초자연적인 전능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게 뭐 스피노자주의자지ㅋㅋㅋㅋ 이렇게 되는.

 

정리27 신에 의해 어떤 작업을 하도록 규정된 실재는 자기 스스로 그렇게 규정되지 않게 만들 수 없다

 

- 원인으로 규정된 실재가 나 그 원인이 싫어! 안 해!라고 할 수 없다는 것. 예를 들면 뭐가 있을까요. 잠을 자도록 되어있는데 잠 안 잘거야! 중력의 법칙을 거스를거야!(안티에이징 시술, 성형수술 같은 것도 이런 범주일까?)

심지어 정리28에서까지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정리28 “모든 독특한 실재, 곧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모든 실재는, 역시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다른 원인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지 않는 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될 수 없으며, 이 후자의 원인 역시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다른 원인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지 않는 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될 수 없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나아간다.

 

- 아주 특이하고 상당히 중요한 정리. 상당히 많은 주석가들이 이것이 일종의 연쇄과정을 표현해주는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뭔가 여기서 스피노자가 독특한 실재라고 부르는 것은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역량과 자발적인 힘에 의해 스스로 실존하고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AB에 의해 규정되고 BC에 의해 규정되고... 뭔가 계속 연쇄가 이어지는데 이것은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연쇄가 아니라 매우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연쇄로 보인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유한양태들의 세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정리28의 증명.

- 정리21 신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영원하고 무한하다(=직접적 무한양태) = 다른 말로 하면 신은 어떤 개별적인 실재를 직접 생산하지 않는다.

- 무한에서는 무한한 것만 나온다.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유한한 것은 무한한 것으로부터 절대 나오지 않는다. 유한-> 유한, 무한-> 무한.

- 어떤 양태가 만약에 어디에서 따라 나온다라고 하면, 신에게서 직접 따라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양태에 의해 변용된 한에서 따라나오는 것. 유한하고 규정된 양태는 무한에서 따라 나올 수 없다. 변용된 한에서만 따라 나올 수 있다!

- 변용되는 방식이 두 가지인데, 신의 절대적 속성에서 따라 나올 수 있는 것은 직접적 무한양태, 매개를 거쳐서 나오는 것이 매개적 무한양태. 유한한 실재는 신의 본성에서 따라나올 수 없다. 신은 무한하니까. 매개적 무한양태에서도 나올 수 없다. 유한 양태는 유한한 실재에 의해 변용된 신으로부터(=유한 양태),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어떤 변양에 의해 변양된 한에서의 신으로부터(=유한 양태) 나온다.

- 정리25의 따름정리를 다시 보자. 독특한 실재, 특수한 실재 자체가 신이다.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되는 한에서의 신. 다시 말하면 유한한 방식으로 변양된 한에서의 신. 이게 바로 독특한 실재다. 그러니까 독특한 실재는 신의 본성으로부터 나올 수도 없고 직접적 무한양태로부터 나올 수도 없고 매개적 무한양태로부터 나올 수도 없다. 오직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변양된 한에서의 신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

 

- 최초의 유한양태는? 아마 스피노자는 이게 의미 없고 쓸데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무한자에서 유한자가 나올 수 없으며, 그러니까 아담과 같은 것이 신에게서 처음 창조된다고 해야 최초의 유한자가 뭔지 같은 질문이 의미 있을텐데 스피노자 정리28에서보면 무한하게 계속된다고 한다. 기원도 없이.

- 구조주의에서 언어를 뭐라고 하는가. 구조언어학에서. 기호라고 한다. 기호는 기표와 기의의 결합. 언어는 기표들의 연쇄라고 이야기한다. 하나의 기표는 다른 기표에 의해 규정되고, 그 기표는 다른 기표에 의해 규정되고... 이런 식의 기표들의 연쇄가 언어다.

- 소쉬르가 일반언어학 강의의 측면에서 보면 굉장히 재밌는 이야기를 한다. ”언어학이라는 것이 자율적인 학문이 되려면 언어에 대한 이런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언어에 대한 이런 관점. 이 관점이 뭘까? 소쉬르가 이런 표현을 쓴다. ”언어를 목록으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 언어를 목록으로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냐면, 17, 18세가 학자들이 언어의 생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런 말을 한다. 가령 원시인이 하늘에 떠있는 저걸 태양이라고 하자 해가 지고 나면 떠오르는 저걸 달이라고 하자. 그 뒤에 솟아있는 것은 산이라고 하자. 저 앞에 차갑게 흘러가는 것은 강이라고 하자. 이렇게 해서 언어가 생겨나게 됐다, 라고. 원시인들이 자기 주변에 가까이에 있는 것에 하나하나 이름을 붙였고, 그 이름의 목록이 언어다. 라고. 이게 언어의 목록주의.

- 근데 소쉬르는 언어학을 자율적으로 만들려면 언어학을 목록으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벗어나야한다고 말한다. ? 언어를 목록으로 이해하는 관점의 전제는 이미 사물의 질서가 다 존재한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그러니까 원시인이 태양이라고 부르기 전에 이미 태양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고 달이라고 부르기 전에 달이라는 것이 정해져있고 산과 강과 바다와 문제는 거기에 다 그냥 명칭을 붙이는 것. 이게 목록주의가 전제하는 것. 그런데 그렇게 되면 언어라는 것은 그냥 실용적인 도구다. 이미 존재하는 세상의 질서를 표시하는 편의적인 도구.

- 그러면 언어학이라는 것은 학문이 안 된다. 소쉬르가 언어라는 것을 기표와 기의가 결합된 것이고 언어라는 것은 기표들의 연쇄다라고 했을 때 깔려있는 생각은 언어 이전에는 세상에 질서가 없다는 것. 기호 이전에는 세상은 카오스다. 아무 것도 없다. 언어라는 것이 세상의 질서를 비로소 만든다.

- 그러니까 소쉬르는 언어를 목록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소쉬르의 관점에 따르면 언어가 없으면 구별을 할 수 없으니까. 태양인지 달인지 산인지 강인지 같은 것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

- 그러니까 이련 경우에 최초의 기호가 뭐냐 최초의 언어가 뭐냐 라고 묻는 것은 구조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상하다. 최초의 단어가 뭔지 최초의 기호가 뭔지, 그런 것은 여기에 없다. 그래서 구조주의에 대해 역사성이 없다고 비판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름 일리가 있는 비판이면서 초점이 나간 비판이기도 하다.

 

- 띵스가 신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최초의 무한양태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스피노자는 이 문제에도 별로 관심 없었다. 원래부터 있었다라고 할 수도 있고. 스피노자가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몇몇 구절들이 있는데 <에티카>말고 <지성교정론>에 나온다.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다. 원시인들이 망치를 어떻게 만들게 되었을까라는 이야기를 하면서(이것도 데카르트 비판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스피노자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망치가 있으려면 망치를 만들기 위한 모루라는 틀이 있어야 한다. 모루가 있으려면 그걸 만들 재료와 틀이 있어야 하고 모루를 단련하기 위한 망치가 있어야 하는데 그 망치가 있으려면 또 모루를 만들어야 하는데 모루가 있으려면 망치가, 망치가 있으려면 모루가.... 무한퇴행. 우리가 참된 관념을 가지려면 전제가 되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무한하게 나가는데. 원시인들이 어떻게 망치를 썼냐에 대한 스피노자의 답은, 그들은 떨어진 나뭇가지나 돌을 망치로 썼다는 것. 처음에 망치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을 망치로 쓰게 되면서 망치가 기원했다는 것. 이게 스피노자가 기원의 문제를 다루는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다. 처음에 기원을 이룬 것을 원래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어떤 것을 그것으로 쓰면서 그게 기원이 됐다, 라고 이야기하는, 기원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 그런데 아마 양태에 관해서라면 스피노자가 아마 기원에 대한 문제를 답변할 수 없는 문제라고 했을 것이다. 그건 언어가 어떻게 생겨나게 됐냐, 언어의 시작이 뭐냐, 그런 문제와 마찬가지니까.

 

- 소쉬르와 스피노자의 차이점. 지금까지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뭔가 구조적이라는 바에서는 비슷. 하지만 다른 게 있다. 소쉬르는 스피노자처럼 양태가 실체의 변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실체를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각각의 개별적인 기호가 무엇의 변양이다, 어떤 중심의 변용이다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스피노자는 지금 양태라는 것이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고, 이 체계를 이루고 있는 이 각각의 양태가 전체의 변양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 그래서 구조주의의 전성기 때 스피노자 철학에 감화를 받았던 사람들, 이를테면 사르트르가 먼저 스피노자를 채택을 해서 자기 철학에 한 번 쓴다. 지난 시간에 다룬 정리29의 주석에서능산적 자연-> 산출하는 자연, 소산적 자연-> 산출된 자연으로 바꾸었었는데, 사르트르가 이것을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총체화하는 총체성, 총체화되는 총체성 totalizing totality totalized totality라고. 이게 구조주의 전성기에 가게 되면 사르트르의 이 용어법을 따라가지고 사람들이 구조화하는 구조 구조화되는 구조 structuring structure structured structure ”. 구조주의자들의 생각에서는 소쉬르의 책에는 구조화되는 구조만 이야기하기 때문에 어떤 역동성이 없다.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용어를 가지고 와서 이런 표현을 쓴다.

정리29 ”자연 안에는 우연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주석 좀 더 나아가기 전에 나는 능산적 자연 Natura naturans과 소산적 자연 Natura naturata으로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싶다. 또는 독자들에게 알려두고 싶다. 왜냐하면 앞선 논의를 통해 이미 능산적 자연은,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 또는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실체의 속성들(정리14의 따름정리1 및 정리17의 따름정리2에 의해), 곧 자유원인으로 간주되는 한에서의 신으로 이해해야한다는 점이 분명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소산적 자연을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또는 신의 속성들 중 하나로부터 따라 나오는 모든 것, 곧 신 안에 있으며 신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실제들로 간주되는 한에서 신의 속성들의 모든 양태로 이해한다.

 

* 능산적 자연 Natura naturans: 원인으로서 산출하는 자연

소산적 자연 Natura naturata: 결과로서 산출되는 자연

스피노자가 처음 쓰는 말은 아니다. 아퀴나스도 쓰고, 중세철학자들도 쓴 개념을 가지고와서 스피노자가 다시 고쳐서 쓰는 중

* 즉 스피노자가 산출하는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 신의 속성

스피노자가 산출되는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양태들의 전체.

 

정리30: ”현행적인 유한 지성이든 현행적인 무한 지성이든 간에, 지성은 신의 속성들 및 신의 변용들을 파악해야 하며,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파악하지 않는다.“

 

지성은 그게 무한이든 유한이든 지성이 파악하는 것은 신의 속성들과 변용뿐이다.

지성은 실체와 양태 외에는 아무 것도 파악하지 않는다. ? 존재하는 것이 실체 혹은 양태 밖에 없으니까

- comprehendere (comprehend) : 영어 comprehend에 비해 라틴어 comprehendere의 의미가 훨씬 다양하다. 포괄하다, 포함하다, 붙잡다 등등.

- idea 관념과 ideatum이 합치할 때 -> 진리 (공리6) : 진리라는 것이 무엇인가. 진리라는 것은 우리 정신 안에 있는 것과 정신 밖에 있는 것이 합치하는 것이다.

 

* 데카르트 전집. 7. <성찰> 성찰에 대한 반박과 데카르트의 답변을 수록한 책. 1641년에 출간되는데 참 이상한 책이다. 영어로 하면 Meditations 라틴어로 하면 Meditationse, 6개의 성찰로 이루어져있는데 사실 우리나라 성찰이라는 제목보다는 원래 용어의 뜻에 부합하려면 명상이어야 한다. 이 책은 데카르트의 책 중 가장 중요하고 데카르트 또한 그렇게 생각하며 연구자들도 그렇게 꼽는다. 이 책의 특이한 점은 책을 처음 구상할 때부터 유럽의 다른 학자들과 토론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성찰> 출간 전에 원고를 유럽의 신학자나 철학자에게 미리 보내고 반론할 것이 있으면 미리 반론해보라고 요청하고, 거기에 따라 데카르트 본인이 답변도 하는. 2중적 텍스트. 본문-반박-답변 이런 형식. 여기에 인용할(표상적 실재성에 관한) 내용은 두 번째 성찰에 반박한 것에 데카르트가 대답한 것이다

 

*** 표상적 실재성 objective reality : 이것을 절대 객관적 실재성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관념이라는 것이 갖고 있는 표상으로서의 실재성.

 

책상. ideatum ---------------------------- 책상에 대한 관념

: formal reality를 갖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 objective reality를 갖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 형상적 실재성을 갖고 있다. 우리 관념 안에 표상되어 있는,

우리 관념이 갖고 있는 실재성

= , 표상적 실재성을 갖고 있다

. formal reality ------------------------ 신에 대한 관념 objective reality

 

- 실재로 존재하는 것들인데, 책상과 신 중에 무엇이 더 완전한가? . 그러니까 데카르트가 말하는 formal reality에는 완전성의 차이가 존재한다 (스피노자의 말에서 책상은 양태)

그러면 책상에 대한 관념과 신에 대한 관념은 무엇이 더 완전한가? 신에 대한 관념

- 그러니까 관념의 완전성이 큰 것과 비례해서 objective reality도 큰 것이다. , 관념의 대상의 완전성의 크기에 따라.

- 하지만 관념이라는 점에서 다 똑같은 것 아닌가. 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그렇다. ‘관념이라는 기준에서는 양자 사이에 차이가 없다. 그러나 objective reality라는 기준에서는 양자 사이에 완전성의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관념 1) objective reality -> 2) 관념의 대상과 관련된 측면:

관념이 무엇을 represent하는 지에 따라 평가되는 것.

1) formal reality -> 2) 하나의 양태다.

formal reality라는 점에서 보면 그냥 다 관념이다.

 

- 요약하면, formal reality의 측면에서는 책상은 연장속성의 한 양태라는 점에서 formal reality를 갖고 있다. 관념은 사유속성의 한 양태라는 점에서 formal reality를 갖고 있다. 물론 연장속성인 책상은 objective reality를 갖고 있지 않다. objective reality는 사유속성의 한 양태인 관념에만 있다. 그러나 objective reality의 측면에서 보면 이것이 관계하는 대상의 완전성에 따라 다르게 측정됨.

- 데카르트는 왜 formal realityobjective reality를 구별할까? 관념이면 관념이지 왜 이렇게 두 개로 나눠서 복잡하게 이야기하는가.

1) 관념이라고 다 똑같은 게 아니다. 어떤 대상과 관련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완전성에 있어서. 이것을 설명하고자 objective reality라는 개념을 쓰는 것

2) 하지만 관념이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 formal reality

 

다시 풀어서 정리하면,

 

책상에 대한 관념 1) 사유속성의 한 양태

2) 표상적 실재성

신에 대한 관념 1) 사유속성의 한 양태

2) 표상적 실재성

 

1)의 측면에서는 사유속성으로 책상과 신은 같다

2)의 측면에서는 책상과 신의 완전성 차이가 있으니까 표상적 실재성에서도 차이가 있다

 

- 이게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관념에 대해 갖는 생각이다. 우리는 보통 1)만 생각하므로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2)는 매우 낯설다. 관념이 왜 다 같아. 우리는 1)만 생각하는데 이들은 2)까지 생각한다. 우리는 너무나 단순한 것일까 (사실 나는 실재성의 우열을 나누고 관념의 우열을 나누는 이런 위계적 관점에 매우 반감이 있다. 스피노자의 세계에 이렇게 반감 갖는 거 에티카 시작하고 처음이야ㅋㅋ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지 너무 잘 알겠는데 그럼에도 너무나 엘리트주의적인 생각이잖아. 물론 그 당시 철학자들, 혹은 지식인들의 어떤 사명 중 하나가 계몽이기는 하지만.)

 

- 다른 말인 듯 같은 말인데, 예전에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나누었다는 대화가 있다. 이성계가 스님은 왜 그렇게 돼지 같아요?“ 하니까 무학대사가 장군님은 왜 그렇게 부처 같아요?“라고 되묻고는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법이지요그러니까 관념은 다 다르다ㅋㅋㅋㅋ 그럼 그건 일종의 어떤 수준 같은 것인가? 신에 대해 생각하면 수준이 높고 책상에 대해 생각하면 수준이 낮고?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근대철학자라고 하지만 우리하고는 벌써 이런 부분에서 인식론적인 단절 관계에 있는 사람이다. 이런 부분이 벌써 다른 것이다. (정말 스피노자와 처음으로 인식론적 단절을 느낀다ㅋㅋ)

- 이런 생각이 나중에 데카르트 같은 사람에게 가면, 신 존재 증명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근거가 된다. 완전성의 정도의 차이가 있다, 우리 안에, 우리는 유한한데 우리는 신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이상하다. 신은 무한하고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지고하게 완전한 분인데 유한한 우리가 어떻게 그런 큰 분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다, 이상하다. 이런 맥락에서.

- 이런 측면이 우리의 근대철학이 칸트 이후에 상실하게 된 어떤 철학의 관념론적 세계다.

- 어쨌거나 요약하면: 형상적 실재성이 어떤 관념이 사고하는 실체인 정신의 양태라는 것을 뜻하며 또한 이런 한에서 관념들은 모두 동등하다는 점을 뜻한다면, 표상적 실재성은 이러한 관념들을 말하자면 그 관념의 내용의 측면에서 또는 그 관념의 대상과 관련하여 파악한 것이다. 형상적 실재성은 존재 그 자체로서 갖게 되는.

 

정리31: ”유한한 것이든 무한한 것이든 간에 현행적 지성은, 의지, 욕망, 사랑 등과 마찬가지로 능산적 자연이 아니라 소산적 자연과 관련되어야 한다.“

증명 왜냐하면 우리는 지성을 (자명한 것처럼)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지성은 절대적 사유가 아니라(=사유속성이 아니라) 다만 사유의 일정한 한 양태, 곧 욕망, 사랑 등과 같은 다른 양태들과 다른 것이며, 따라서 (정의5에 의해) 그것은 절대적 사유에 의해, (정리15 및 정의6에 의해) 사유의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신의 속성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며, 그것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리29의 주석에 의해) 지성은 사유의 다른 양태들과 마찬가지로 산출하는 자연이 아니라 산출되는 자연과 관련되어야 한다 Q.E.D

 

- 지성, 의지, 욕망, 사랑 이 모든 것은 변용 또는 양태라는 이야기

- ”현행적 지성 intellectus actu / actual intellect) 이라는 표현: 스피노자는 정리31의 주석에서 자신이 현행적 지성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 현행적 지성이라고 쓴 것은 잠재적 지성이라는 것의 존재를 인정해서가 아니다. 스피노자의 생각은 그와 정 반대다. 그는 오히려 잠재적 지성’, 실행되지 않고 있는 지적인 능력 faculty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실행되고 있는 지성의 활동으로서 현행적 지성이야말로 바로 지성활동그 자체라고 주장하고 있다.

 

*** 현행적 지성과 잠재적 지성

- 스콜라 철학에서는 현행적 지성의 반대말로 잠재적 지성을 말한다. ‘현행적 지성이라는 말은 원래 뜻대로 하면 지금 실행되고 있는 지성이고, 잠재적 지성은 지금 실행되고 있지는 않지만 지성의 본성을 갖는 것을 말한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대그리스 학파와의 논쟁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들이 일을 하지 않는 목수가 왜 목수인가. 지금 목수일을 하지 않는데? 집이라도 짓고 일을 해야 목수지.“라는 재미있는 의문을 제기하는데, 여기에 답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바로 이걸 구분한다. 잠재태와 현행태. 잠재적인 것과 현행적인 것. 지금 비 오고 있는데 무슨 집을 져. 쉬어야지. 근데 쉰다고 해서 목수가 아닌가. 아니다, 목수다. 지금 발휘되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은 쉬고 있지만 잠재적인 능력은 계속 존재하는 것. 잠재태. 가능태. 이걸 사람의 인식과 관련해서 보는 보면-

 

*** faculty 라틴어로 하면 facultas 파쿨타스.

 

- 우리말로 보통 능력이라고 하기도 하고 직능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

- 서양의 인식론은 보통 faculty와 관련된 faculty psychology 라는 개념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플라톤에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에서 사람의 정신이라는 것이 몇 개의 faculty로 나누어져 있다고 보는 것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의 정신 중에는 욕망을 담당하는 faculty가 있고, 이성적 능력 지적인 능력만 담당하는 faculty가 있고, 어떤 부분은 의지라는 정신의 활동을 전담하는 faculty가 있다는. 이성의 파쿨타스, 감각 또는 상상의 파쿨타스, 의지의 파쿨타스. 이런 개념.

- 플라톤의 <대화>를 보면 그것을 마차와 말의 관계로 표현한다. 말이 있는데 하나는 말을 잘 듣고 하나는 자기 멋대로 날뛰고, 후자의 말이 욕망이고.

 

- 스피노자는 이 파쿨타스라는 개념을 굉장히 싫어한다. 2부에서 보게 되겠지만 우리의 정신이 몇 개의 파쿨타스로 구별되어 있다는 이 개념을 부정한다. 정신은 이런 게 아니다. 스피노자가 주석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내가 현행적 지성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어떤 잠재적 지성을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작용하고 있지 않지만 지성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잠재된 게 있다고 생각해서 현행적 지성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다. 내가 볼 때 지성이라고 하는 것은 실행되고 있는 지적인 활동, 그게 바로 지성이다. 실행되지 않고 있는 지성 이런 것은 없다. 실행되지 않고 나중에 작용하려고 지금은 쉬고 있는 지성, 이런 것은 없다. 지성이라는 것은 항상 작용 중에 있고 작용 중에 있는 것이 바로 진짜 지성이다. 현행적 지성이야말로 지성 그 자체다.

 

- 주석의 마지막 문장, 왜냐하면 우리는 지성활동에 대한 더 완전한 인식으로 인도하지 않는 어떤 것도 (우리의 지성을 통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는 스피노자가 전하려는 의미를 잘 보여준다. 이것을 좀 더 간명하게 풀어서 번역한다면,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지성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지성활동에 대한 더 완전한 인식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우리가 우리의 지성을 통해 인식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지성활동이며 따라서 이러한 지성활동을 발휘하여 무언가를 인식하는 것은, 동시에 우리가 우리의 지성활동에 대해 더 완전한 인식을 갖게 해주는 것이다.

-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지성활동을 통해 하고 있는 모든 것이 현행적 지성. 이게 우리의 지적활동 그 자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걸 이용해서 쓸수록, 머리는 쓰면 쓸수록 우리는 지적작용을 더 잘하게 된다. 지적작용을 신체가 도와줄 수도 있다. 2부에 나올 텐데 우리의 신체가 능동적일수록 정신도 능동적일 수 있고 정신이 능동적일수록 신체가 능동적일 수 있듯이.

- 어쨌거나 스피노자의 관점에서는 생각을 더 많이 할수록, 현행적 지성을 더 발휘할수록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귀족적인 생각일 수 있지만.

 

- 정리31에서 주목할 만한 두 번째 지점: ”지성이라는 게 산출된 자연이다라는 것. 스피노자는 이미 정리17의 주석에서 지성도 의지도 신의 속성에 속하지 않는다고 (못 박듯이) 이야기 했다. 신의 지성과 의지를 신의 본질과 동일시하지 말라고, 상당히 긴 주석에서 이른바 창조적 지성 창조적 의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아우구스티누스에서부터 토마스 아퀴나스, 니콜라 말브랑슈까지해서,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는 이런 관점에 반대하는 것. 그리고 정리31에서 그는 유한한 지성만이 아니라 무한한 지성까지도 신의 절대적 본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산출된 자연에 속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 정리17의 주석 강의 노트 일부분:

 

2) 신의 지성과 의지는 신의 본질이 아님

- 스피노자가 논박하고 싶어하는 적수들의 주장: 인간이 가진 것 중 가장 완벽한 것이 의지와 지성이다 > 그러니 신의 그것은 그보다도 더욱 무한할 것이다 > 그러니 신의 무한한 의지와 무한한 지성이야말로 신의 본질이다!

- 신의 지성과 의지, 곧 무한지성과 무한의지는 신의 본질이 아니라, 그 본질에서 따라 나오는 특성이라는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나중에 가면 나오지만 스피노자에게 지성과 의지는 무한양태이다)

 

2-1) 신의 지고한 의지야말로 신의 전능함의 표현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

 

- 지금은 아무것도 수행하지 않지만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자체는 가진 사람: 잠재적 인식자

지금 인식하는 것을 수행중인 사람: 현행적 인식자

- 신을 옹호하는 스피노자 적수들의 주장: 신은 (무한지성을 통해) 무한하게 많은 것을 현행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무한의지를 통해) 그걸 하나하나 다 창조해서 실존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게 신의 전능함을 인식할 수 있는 증거이다. ? 신이 인식하는 대로 모든 것을 계속 창조해야한다면, 당연히 지성보다 우위에 있어야할 신의 자유의지가 제한을 받는다는 말이다. ”인식하는 대로 다 창조해야한다는 당위에 제한을 받는 자유의지는, 이미 자유의지가 아닌 게 되어버리니까. 그래서 그들은 신은 무한하게 많은 것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걸 다 창조해서 실존하게 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 게다가 그들의 관점에서 신이 인식하는 대로 계속 창조를 한다면, 남아있는 비장의 뭔가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건 신의 전능함에 위배되는 것이고, 신의 전능함을 폄하하는 것 아닌가. 신은 인식하는 대로 다 하는 게 아니라 창조해야 되겠다고 의지하는 것만 창조하신다(결국 의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의지가 없을 때는 필연적 법칙을 하지 않아도 되는 무관심함도 전능함에 들어가고, ”의지로서 필연적 법칙을 위배하고 거스르는 것도 전능함에 들어가니, 의지의 힘을 부각시키기 위해 의지하는 것만 창조한다고 주장)

 

-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신의 전능함은 여분을 남겨두고 부분만 수행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현행적으로 발휘되는 능력이다. 신이 무한하게 많은 것을 인식해놓고 나서는 무언가는 창조하고 무언가는 창조하지 않고 남겨두면 그거야말로 신의 전능함을 깎아먹는 것 아닌가. 신의 잠재적 역량, 현행적 역량을 나누는 것을 스피노자는 견디지 못한 것이다. 아니, 그게 무슨 전능함인가. 발휘되지 않는 능력이 있고, 발휘되는 능력이 있는 게 무슨 전능함이야.

- 스피노자에게 전능함이라는 것은 막 흘러넘치는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이 넘쳐서) 본성적으로 필연적으로 산출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것이야말로 진짜 풍부함이고 전능함이지 뭐가 부족해서 아껴뒀다가 나중에 꺼내 쓰고ㅋㅋㅋㅋ 이런 게 무슨 전능함이냐는 이야기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롤로그에서 짜라투스트라가 10년 입산수도를 하고 어느 날 해 뜨는 아침에 나와 해를 보면서 , 풍요로운 태양아, 너 어떻게 그렇게 나랑 비슷하냐ㅋㅋ 너 넘치도록 풍요로운 태양아 세상만물을 다 너의 열기로 빛으로 넘치도록 가득한 빛으로 비추는 태양아, 나의 지혜가 바로 그렇다. 내 지혜가 너무 넘쳐서 주체할 수 없으니 사람들에게 이제 나눠주러 가야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전능함은 이렇게 넘치도록 주체할 수 없이 매순간 발휘되는 것이다. 넘치도록 만들어내는 게 전능한 거지, 아껴놓다가 나중에 풀어주고 그런 게 무슨 전능한 것인가. 그러니 그렇게 말하는 너희들이야말로 신의 전능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 전능함은 영원히 현행적이었으며, 영원히 같은 현행성 속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해서,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신의 전능함에 대해 훨씬 더 완전한 관념이 확립되게 된다. 더욱이 신의 전능함을 부정하는 이들은 바로 반대자들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이 무한하게 많은 창조 가능한 것들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을 창조할 수 없으리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곧 만약 그가 자신이 인식하는 모든 것을 창조했다면, 그들에 따를 경우, 신은 자신의 전능함을 모두 소진시키고 자신을 불완전하게 만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이것은 신의 전능함에 대한 너무 소심한 생각이다. 다 써버리고 고갈된다는. 상당히 생태주의적인 생각. 신의 전능함이라는 건 너무 넘쳐서 무한하게 많은 것들을 매순간 만들어내는 것인데 너희들은 그게 고갈될 까봐 두려워하다니 신의 전능함에 대해 못 믿는 건 혹은 반대하는 건 너희들 아니냐) 따라서 신이 완전하다는 점을 확립하기 위해서 그들은 동시에 신은 자신의 역량이 미치는 모든 것을 해낼 수 없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나는 사람들이 이보다 더 부조리한 것 도는 신의 전능함과 더 양립불가능한 것을 꾸며낼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2-2) 신의 지성과 의지는 인간의 지성과 의지와 다르다

 

왜냐하면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지성과 의지는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야 하며, 이 후자의 것들과는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하늘에 있는 개의 별자리와 짖는 동물인 개 사이에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 이름만 같을 뿐, 우리가 우리의 지성과 의지를 지성과 의지라고 지칭하는 것과 신의 지성과 의지를 지성과 의지라고 지칭하는 것은 다르다.

상당히 재미있는 주장이다

- 스피노자가 초기에 썼던 <정신교정론>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이것도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다. 원은 둥글지만, 원에 대한 인식인 원의 관념은 둥글지 않다는 말이다. 이 말은 (2부에 가서 보게 되겠지만) 스피노자가 신체와 정신은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간섭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과, 앞서 봤던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의 맥락이다. 그러니까 사유속성에 속하는 관념과 연장속성에 속하는 신체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표현한 말이 바로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 , 원이라는 연장에 속하는 도형은 둥근 모양을 갖지만 관념은 둥글다 네모나다는 모양을 갖지 않듯이, 관념과 관념의 대상이 되는 무언가는 전혀 다르다.

- 여기서도 그렇다. 신이 갖고 있는 지성과 의지와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비교하고 있다. 양자가 천양지차로 다르다는 것.

 

만약 (신의) 지성이 신의 본성에 속한다면, (<- 적수들이 하는 주장) 그러한 지성은 우리의 지성이 그러하듯이 본성상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 ”신의 지성은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아까 데카르트의 영원진리창조론 이야기를 하면서 창조는 신이 의지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중세철학 근대철학의 또 다른 신학자들은 신의 지성이라는 것 자체가 창조적인 지성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의미냐면-

- 그러니까 인간이 인식한다= 인간이 관념을 갖는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지성/정신 바깥에 있는 어떤 현실적인 사물을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이야기다. 그게 우리 인간들의 인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인식한다= 인간이 관념을 갖는다에는 항상 사물/대상이 전제되어 있다. 사물/대상이 먼저 존재하고, 이 사물이나 대상을 인간이 나중에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논리적 시간적 선후관계로 보면 인간의 인식은 항상 지성보다 먼저 있는 사물을 전제한다.

- 이것을 현대적 용어로 하면 representation. 인식이라는 것은 representation의 성격을 갖고 있다. 다시 프리젠테이션한다, 무엇을? 여기 present에 있는 presence, 현존하고 있는 사물이다. 대상을 우리의 지성 안에서 다시 representation 재현하는, 다시 현존하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인식이다. 인간의 인식의 성격.

 

- 그렇다면 신의 지성은 어떨까. 신이 (지성으로) 인식한다는 것이 만약 인간의 그것과 같다면, 신이 인식하기 전에 인식할 사물이 있어야한다. 그러면 그 사물은 누가 갖다놓은 것인가, 신 이전에의 문제에 부딪힌다. 이건 말이 안 되니까, 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신이 지성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대상이 없는 인식이다. 그러니까 원형으로서의 관념이다. 원형으로서의 관념에 입각해서 신의 의지가 창조를 하는 것이다. 신학자들마다 차이는 좀 있지만 원형으로서의 관념은 일종의 모델이다. 우리가 건물을 짓거나 어떤 것을 만들 때 모형을 만들 듯이, 신이 지성으로 인식한다= 신이 관념을 갖는다는 것은 이 세계의 모형, 이 시계의 원형으로서의 관념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신의 의지. 그러니까 신의 관념= 신의 인식이라는 것은 미리 전제하는 대상이 없는 인식.

-스피노자가 여기서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실재라는 게 먼저 있고-> 실재 다음에 지성이 인식하고-> 그래서 실재는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이고. 그러니까 사물이 먼저 있고 지성의 인식이 있다)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뭔가를 새롭게 처음으로 구상하고 처음으로 원형을 만드는 것이 신의 지성이니까 신의 지성자체가 창조적이다)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objective)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

 

-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라는 테크니컬한 텀이 쓰였는데

- ”형상적 본질이라는 것은 인식과 지성과 독립해서 미리 존재하고 있는 사물의 본질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 인간이 인식한다 = 인간이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인식한다는 것. 즉 리프리젠테이션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데카르트나 스피노자는 표상적으로 인식한다“ ”표상적 본질을 갖는다라고 표현한다. 이때 표상적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오브젝티바. 뜻은 by representation. ”리프리젠테이션을 통해서 이것의 본질을 지성 안에 담는다라는 맥락에서. 영어로는 objective지만 흔히 쓰는 객관적인이라는 말과는 다르다.

- , 오브젝티바=표상적: by representation을 통해서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지성 속에 다시 한 번 담는다는 뜻.

- 이게 바로 objective essence라는 말의 스콜라철학적 용어법. <에티카> 영역본에 objective essence라고 나오지만 이것은 객관적 본질이 아니라 표상적 본질이다.

 

- 인간의 인식의 경우 이런 순서: formal essence가 먼저 있고(사물이 갖고 있는 형상적 본질이 먼저 있고) -> 그 다음에 by representation을 통해서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지성 속에 다시 한 번 담는. <- 이걸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objective essence라고 부른다. objective essence = 머릿속에서 재현된 사물의 본질.

-그러니까 형상적 본질 formal essence가 먼저 있고, 관념을 통해 재현되는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가 나중에 있는.

 

- 그런데 신의 경우에는 관념이 먼저 있다. 원형으로서의 관념이 있고 그 관념으로부터 신이 사물들을 창조하는 거니까.

-, 신의 경우: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가 먼저 있고-> 그것에 입각해서 신이 자신의 의지를 통해 그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에 합치하는 사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형상적 본질 formal essence가 나중에 온다는 것.

-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objective)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는 이런 이야기다. 신의 지성 안에서 신의 관념으로서(원형의 관념으로서= 표상으로서) 미리 존재했기 때문에 그걸 모델 삼아서 사물이 형상적 본질을 가지게 될 것이다.

 

*** 요약

왜냐하면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지성과 의지는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야 하며, 이 후자의 것들과는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하늘에 있는 개의 별자리와 짖는 동물인 개 사이에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점을 나는 다음과 같이 증명해보겠다. 만약 (신의) 지성이 신의 본성에 속한다면, (<- 적수들이 하는 주장) 그러한 지성은 우리의 지성이 그러하듯이 본성상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objective)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

= 만약 신의 지성이 신의 본질에 속한다면, 그 지성은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지성과 이름만 같지, 본질은 전혀 다르다. ? 우리 인간의 지성은 사물이 먼저 있고 나중에 그 사물의 표상이 있으니까. 사물의 재현을 통해서 사물에 대한 표상적 본질을 갖는 것이 인간의 인식이니까. 하지만 신의 경우, 원형으로서의 관념이 먼저 있고 여기에 입각해서 사물들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관념이 먼저 있고 거기서 formal essence를 가진 사물들이 창조된다, 이 이야기다.

따라서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인식되는 한에서의 신의 지성은 사실은 실재들의 본질 및 실존의 원인이다.“ <- ? 이때 신의 지성은 사물들을 창조하는 지성이니까.

 

- 이러한 창조적 지성의 관념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중세철학에 상당히 광범위하게 전해 내려오는 생각이며, 근대철학에서는 말브랑슈 Nicholas Malbranche에 의해 계승되는 생각이다.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에는 오직 신만이 존재했으며, 신은 인식 및 관념들 없이 창조할 수는 없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신이 갖고 있던 이 관념들은 신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다.“ <진리탐구>

 

- 이어지는 스피노자의 논점. 신의 지성이 실재들의 본질과 실존의 원인이기 때문에 신은 본질과 실존에서 필연적으로 실재들과 달라야한다. 왜냐하면 원인지어진 것(결과)은 정확히 말하면 바로 그것이 원인으로부터 얻는 것으로 인해 원인과 다르기 때문이다 , 원인이 되는 것과 그 원인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전혀 달라야 한다는 말.

- 이것은 정리29의 주석과도 연결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은 다르다. 소산적 자연은 항상 능산적 자연의 결과지 원인이 될 수 없다. 능산적 자연은 항상 원인일 수밖에 없다. 원인-결과의 측면에서 보면 두 자연은 전혀 다르다.

- 그러니까 정리17의 주석에서 만물이라는 것이 산출된 자연을 가리킨다면 신은 산출하는 자연인 것이고, 이 경우 만물과 신의 관계는 매우 비대칭적인 것이다.

- , 신의 지성은 우리 지성의 본질 및 실존의 원인이며, 따라서 신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서의 신의 지성은 이름 말고는 우리의 지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는 의지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논점이다, 땅땅! >>>>>>>>>>>>>>>>>>>>>>>>>>>>>>>>>>>>>>>>

 

정리32: ”의지는 자유원인이라 불릴 수 없으며, 단지 필연적 원인이라 불릴 수 있다.“

 

- ”필연적 원인이라는 단어가 가장 처음 나온 것은 정의7, 자유에 대한 정의. 정리32필연적, 정의7의 제약되어있는 바로 그 필연적이다. 규정된 실재가 원인으로 작용하는 상황 아래서의.

- 사실 정리31에서 의지는 양태고, 변용이고, 산출된 자연이라고 말했으니 정리32는 당연한 말이다. 스피노자가 정의한 양태는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도록 다른 것에 의해 규정되는 것, , 의지가 양태라면 자유원인일 수가 없다. 제약된 원인일 수밖에 없다. 의지는 지성과 마찬가지로 양태니까 당연히 필연적 원인, 제약된 원인이다.

 

따름정리1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 나온다. 1. 신은 의지의 자유에 따라 작업하지 않는다.

 

- 스피노자가 보기에 의지의 자유를 신에 대해 쓰는 것은 용어모순이다. 왜냐면 의지라는 것은 산출된 자연인데 그게 신의 활동을 규정할 수 없으니까. 의지는 양태인데, 양태가 신과 같은 실체를 규정할 수 없으니까. 그러므로 신이 의지의 자유에 따라 작업한다는 말은 스피노자에게 너무나 모순적인 말인 것. 다 신의 의지, 신의 자유의지, 신의 초월적 의지 같은 신학을 비판하기 위해서 스피노자가 하는 말들이다.

- 따름정리2동등한 관계, 직접적 무한양태.

 

직접적 무한양태- 사유: 지성

연장: 운동과 정지 <- 연장속성 안에 존재하는 직접적 무한양태

매개적 무한양태- 우주전체

 

- 의지와 지성은 신의 본성에 대해 운동과 정지가 맺고 있는 것과 동일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 의지와 지성은 직접적 무한양태다.

 

정리33: ”실재들은 신에 의해 그들이 생산된 것과 다른 방식으로, 다른 질서 속에서 생산될 수 없었다

 

- 실재들은 지금 존재하는대로, 지금 작업하는대로, 그렇게 존재하고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 = 필연적이었다 = 그 외의 다른 방식은 있을 수 없었다

- 증명 첫 번째 문장 왜냐하면 모든 실재는 신의 주어진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왔으며<- 실재가 따라 나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게 아니라 필연적으로 따라 나왔다.

- 스피노자는 정리33에서 주석가들이 대개 필연주의라고 부르는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실재들이 신에 의해 생산되어 지금 존재하는 이 방식과 다른 방식의 질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는 이러한 실재들의 질서가 필연적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신학정치론> 3장에 나오는 신의 선택에 대한 새로운 재규정

 

- 신의 선택 Dei electio (election of God)

- <신학정치론> 3장의 제목은 [히브리인들의 부름에 대하여]이다. , 히브리인들의 숙명에 대하여. 히브리인들을 누가 불렀단 이야기일까? 신이. 히브리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손으로 선택한 민족이라고. 이들이 쓰는 신의 부름, 신의 선택, 같은 말이 내포하고 있는, 혹은 전제하고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는,

- 1) 신이 마치 인간처럼 행위하고 있다는 것. 누구는 특별히 더 총애하고 누구는 더 미워하고. 히브리 민족, 모세, 여호수아를 선택하고. 그러니까 신의 선택에는 신이 인간처럼 행위한다는 뜻이 다겨있다.

- 2) 신이 선택하는 이것은 아주 예외적이라는 것. 인간의 선택과 달리 신의 선택이라는 것은 초자연적인 기적, 자연 질서를 거스르는, 내가 사랑하는 이 민족을 위해서 신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 홍해 바다를 갈라주기도 하고.

- 그러니까 정리하면 신의 선택이라는 말에는 1) 마치 인간처럼 행위하고 2) 아주 특별한 예외를 두고 기적을 행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신이 전제되어있는 것이다.

 

-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가 성경을 해체하는 작업을 하며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1) 신은 인간처럼 행위하고 선택하지 않는다 2) 기적이란 없다. 그러니까 초자연적이고 인격적인 것은 없다는 것.

-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자연에 예외라는 것은 없다. 신이 특별히 누구를 선택하고 누구를 예뻐하고, 누구를 위해 기적을 일으키고 이런 거 절대 없다.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이고 영원히 수행되는 것이다.

- 히브리 민족의 부름과 관련해서 자주 성경에 쓰이는 용어들, ”신의 인도“ ”신의 내적인 도움“ ”신의 외적인 도움“ ”신의 선택스피노자는 이런 말들을 해체하는 것이다. 자기 철학의 관점에서 성경의 말을 재규정하는 것. 신의 선택을 스피노자가 어떻게 재규정하냐면-

- ”이러한 고찰로부터 신의 선택이라는 말로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 쉽게 추론된다. 왜냐하면 누구도 자연의 예정된 질서에 따라서, 곧 신의 영원한 인도와 법령에 따라서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이로부터, 누구도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 앞서 이 일이나 저와 같은 삶의 방식을 실행하도록 선택한 신의 독특한 부름이 아니라면, 그 스스로 어떤 사람의 방식을 선택하거나 어떤 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원래 신의 선택이라는 말이 쓰일 때는 아주 특별한 사람, 아주 소수의 사람을 신이 점지해서 특별한 재능을 주거나 특별한 운명을 주거나 하는 것인데,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작업하고 살아가고 존재하는 방식이 다 신이 선택한 것이다. 그러니까 신의 선택이라는 것은 아주 예외적이고 신비한 초자연적인 어떤 것이 아니고 자연 일반의 보편적인 선택이 신의 선택이다.

 

- <신학정치론> 4장의 제목은 [신법에 대하여]이고, 법에 대한 이야기, 법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법이라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영어로 1) description 우리말로 하면 서술 기술.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2) prescription.

- 만약에 1)의 의미로 법을 이해한다: 법은 어떤 자연적인 필연성을 보여주는 법칙으로서의 법. 이를테면 만유인력의 법칙 / 2)의 의미로 이해한다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 , oo를 하기 위해 신의 본질을 파악해야하고 이성을 따라야하고 등등의 당위성. 규정. 명령. 처방. 이를테면 정치법이나 도덕법 같은.

- 스피노자가 가끔 드는 예인데, <신학정치론> 16장에 보면, 철학자만이 아니라 주정뱅이도 자신의 본질에 따라 본성의 권리에 따라 본성의 법칙에 입각해서 살아간다. 그 말은 무슨 말이냐면 철학자만이 아니라 주정뱅이도 코나투스를 갖고 있다.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것, 자기가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욕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의지도 있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철학자나 주정뱅이는 1) 의미의 법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법칙에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코나투스를 갖고 있고 그것에 따라 살고, 그 권리에 따라 살 권리가 있고. 누구도 그렇게 살라 말라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 하지만 2)의 법에 입각한 관점에서 보면 저 두 사람은 상당히 차이가 있다. 철학자는 신의 본질을 인식하려고 하고, 이성의 명령에 따라 지고한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prescription에 따라서. 하지만 주정뱅이는 그렇지 않다. 이걸 다 무시하고 사는 것이다.

 

*** 인간과 자유의지

- 스피노자는 의지의 자유, 자유 의지를 별로 믿지 않는다. 1부 부록의 1부의 서두에 그 내용이 나온다. 사람은 태어날 때 그 원인에 대해 전혀 모르고 무지한 상태로 태어난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를 갖고 태어나며,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그 욕구를 의식하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인간은 자기가 자유롭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 프로이트랑 굉장히 비슷하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에 관해 이야기할 때의 기본적인 논점은, 우리가 우리의 의지에 따라서 우리가 이것을 원하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프로이트에게는 우리의 행동이나 사고나 말을 규정하는 것은 무의식적인 어떤 원인이다라고 생각한다.

- 스피노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도록 욕구를 규정하는 원인이 있는데 우리가 그 원인을 모른다는 것. 원인을 모른 채 우리가 욕구한다는 것을 의식은 하고 있어, 그러니 이건 우리가 자유의지로 욕구하는 거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욕구의 원인이 나의 의지구나라는 착각.

- 그러니 자유의지라는 것은 무지의 산물로서, 항상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 그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는 것인가. 그렇다. 자유의지는 없고, 원인은 있고, 그럼 그 원인은 신이라는 의미인가. 아니다. 그 원인은 코나투스다. 인간으로 하여금 무엇을 하도록 규정하는 욕구. 그 욕구를 규정하는 어떤 원인. 코나투스. 스피노자가 나중에 하는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데, 욕구를 잘 이해하는 것, 자기가 뭘 욕구하는지, 무엇이 자기로 하여금 이걸 욕구하도록 규정하는지 그 원인을 잘 이해하는 것, 이것이 능동적인 존재가 되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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