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보우 동경 - 김경주 시인, 문봉섭 감독의 도쿄 에세이
김경주.문봉섭 지음 / 넥서스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세상은 행복이나 고통만으로 설명이 다 안 되지요. 그렇다고 돈에게 그 자리를 내줄 수도 없지요. 누군가 인생살이를 알기 쉽게 풀어주면 좋겠지만 저들도 살기 버거운 건 마찬가지죠. 삶에는 사람의 머리로는 좀처럼 잡히지 않는 틈이 있지요. 그 틈은 말로는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죠.

 

메워지지 않는 그 틈으로 바람이 불어와 때론 삶을 흔들고 허무하게도 하지요.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들에게 그 틈은 발바닥부터 간질이는 뜨거운 유혹이지요. 그 틈을 느끼러 두 젊은이가 떠났네요. 동경으로 떠난 김경주 시인과 문동섭 감독은 <레인보우 동경>[2008. 넥서스BOOKS]에서 자신들의 틈들에 대해 얘기하네요.

 

서른 그 틈에 대하여

 

이 책은 그들이 동경하는 동경을 틈나는 대로 여행하면서 보았던 동경의 틈들이에요. 또한 동경 곳곳에 숨어있는 틈들을 돌아보면서 지은이들의 꺼내놓은 틈에 관한 책이에요. 지은이 둘은 28년 동안 같이 붙어 다녔던 벗이지요. 자신들은 33이고 아직 삼삼하다면서도 서른의 틈을 드러내내요.

 

시인은 선배들에게 아무 때나 전화해서 이생이 불편하다고 쓰나미처럼 욕설을 퍼부어대죠. ‘낭만이란 그런 것이다. 이번 생은 내내 불편할 것’이라는 구절로 시를 완성한 뒤 공원에 가서 질질 짰다고 고백하는 그의 모습에서 서른의 틈이 느껴지네요. 서른은 낭만 있는 불편과 재미없는 편함을 고르는 나이니까요.

 

이 사회에서 서른은 삶의 틈들을 덮어둬야 하는 시기죠. 20대에 꿈과 포부를 같이 얘기하던 사람들도 서른이 되면 이제 철 좀 들으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죠. 많은 청춘들이 서른이란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뜨거운 사랑과 설레는 꿈을 헐값에 넘기고 안정을 택하기 쉽지요. 가슴 안에 편지를 고이 묻어두고 언젠가 다시 꺼내봐야지 다짐하죠. 그러나 알고 있지요. 삶은 틈 사이로 빠르게 새고 있다는 걸.

 

서른이 되었는데 졸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가수 김광석은 <서른 즈음에>에서 푸르렀던 기상이 시들해지며 쓸쓸함을 알아가는 서른을 노래했지요. 지은이들 역시 20대 때는 이 삶을 달렸지만 ‘서른 살은 차의 종류를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 도로가 뭔지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다.’며 서른을 돌아보네요. 그리고 전진하다보면 반드시 하게 되는 후진도 알게 되었다고 말하네요.

 

‘안녕. 우리는 지하철 옆구리에 앉아 덜컹덜컹 졸면서 어깨를 한 번씩 빌려주었을지도 모르는 사이지. 우연히 옆자리에 나란히 졸면서 말이야.’라며 지은이들은 피로한 일상을 이해하죠. 자신들 역시 안정된 직장도 가져봤고 남들처럼 살려고도 했으나 삶에 틈을 못 본 척할 수 없었지요. 한 사람은 시로, 한 사람은 영화로 틈을 느끼려고 하네요.

 

늦은 저녁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나는 문득 내 인생이 30개의 정거장을 지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호기로 스물엔 친구들 앞에서 서른이 되면 정말이지 죽어 버릴거야라고 했지만 서른이 되었는데 졸면서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졸면서 삶이 지나가 버릴까 나는 눈이 번쩍 떠졌다.

 

아름다운 포토에세이

 

젊은 유명 시인이 쓴 글답게 읽는 이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네요. 그의 흘러넘치는 감성은 글에 머무르지 않고 읽는 사람들의 틈에 쏟아지지요. 동경의 사진들과 함께 눈으로 들어온 글들은 입에서 맴돌며 떠날 줄 모르지요. 4박 5일 동안 사랑하는 사람과 강원도로 여행을 갔다 온 뒤 ‘사랑이란 기차를 타고 달려와서 이렇게 불꽃놀이를 몰래 하다가는 거구나.’라며 시간의 틈에 끼여 있는 추억을 들추네요.

 

이 책을 칼럼집도 아니고 여행기도 아니에요. 장르를 굳이 따지지 않고 읽다보면 독특하게 사물에게 말을 거는 두 지은이를 만날 수 있죠. 부드럽게 때로는 거칠게 세상과 독자들의 틈을 건드리는 시인의 글에 숨죽여있던 감수성들이 깨어나죠. ‘사람이 욕조 안으로 들어가면 그는 섬이 된다. 난 여전히 이런 꿈을 자주 꾸곤해. 욕조를 바다 위에 둥둥 띄워두고 세상 끝까지 떠내려가는 꿈을.’라는 문구를 읽으면 욕조와 여행을 떠나고 싶어질 정도로.

 

소설가 박민규는 이 책을 아래처럼 칭찬하네요.

 

정말이지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드물지만 세상엔 그런 류의 책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가능하다면 나는 이 세계의 극.소.수만이 그녀의 책을 읽었으면 하는 입장이다. 아니 실은, 누구도 모르게 오직 나만이 ‘그녀’를 읽고 싶은 마음이다.

 

많은 예술인들이 그렇듯 그들 역시 가난을 벗 삼아 지내왔지요. 그들이 조금씩 이름을 얻고 이제 제법 유명해졌다지만 그들은 여전히 배고픔을 잊지 않고 달려가고 있지요. 그렇기에 그들은 늘 삶의 틈들을 느끼며 놓치지 않네요. 비가 내려 촉촉해진 하늘과 갠 하늘 틈으로 무지개가 생겨나듯이 책을 읽으니 틈 사이로 무지개를 피어내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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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 - 이오덕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말씀
이오덕 지음 / 길(도서출판)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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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역사 교과서 문제로 떠들썩하지요. 또한 교원평가제로 시끌벅적하네요. 아이들 역사관과 교육 환경을 놓고 논란이 벌어지는데 정작 주인공은 빠져 있어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잠시 제쳐놓고 보면 어른들이 자기 입 맛 대로 아이들을 길들이려고 하고 있지요. 아이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고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지요.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 이오덕선생님이 우리에게 남기신 말씀>[2004. 길]은 여러모로 어른들의 시선을 돌아보게 하지요. 2003년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님이 2002년 월드컵과 교육을 엮어서 쓴 이 책은 지나치게 줄을 세우고 입시시험으로만 내모는 현실을 따끔하게 따져요. 어떻게 아이들을 키워야할지 읽는 내내 고민하게 되네요.

 

종종 아이들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차마 소개하기 힘들 정도로 거칠고 험할 때가 많아요. 어른들은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그르구나.’라며 얼굴을 찌푸리시다가 고개를 돌리며 혀를 차곤 하지요. 그러나 결단코 날 때부터 아이들이 그렇지 않았고 학교가 그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지은이는 분개하네요.

 

오직 외우기를 경쟁시키고 시험을 쳐서 점수를 매기고 성적 차례를 매겨서 광고하고 하는 그 현장이 너무나 끔찍하기에 아이들의 몸과 마음은 황폐해지고 폭력이 난무하는 판이 되었다고 진단해요. 그런 나날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이 어떻게 고운 말을 쓸 수 있겠어요. 어떻게 상상력을 키우고 건강하게 자라겠어요.

 

한국 교육,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지은이의 주장을 옮기면 학교와 교육을 바꿔야 하지요. 학교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고 아이들을 믿고 그들의 한없는 가능성을 믿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새로운 학교를 만들어야 해요. 국민을 믿어야 민주주의가 되듯이, 아이들을 믿어야 교육이 바로잡히니까요. 아이들을 믿지 못하는 어른들이 문제지요. 어른들의 이런 생각을 바꾸지 않고서는 참된 교육이 될 수 없어요.

 

그는 온몸으로 그 무엇을 하는 게 좋은 교육이라고 하지요. ‘무엇을 만들고, 기르고 가꾸고, 살펴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과 놀이와 공부가 하나가 된 삶을 즐기는 것이다. 그 삶을 말로, 글로, 그림으로, 노래와 춤으로 마음껏 나타내면서 자라나는 것이다. 이렇게 즐거운 삶을 학교에서 보낸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그 삶을 그대로 이어가는 행복한 시민이 되고 행복한 국민이 될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며 책씨름만 강조하는 교육 실태를 비판하죠.

 

또한 학벌폐해를 꼬집지요. 학벌로 값을 매기고 사람을 쓰는 이 망국 풍조를 하루빨리 뜯어고치라고 하지요. 모든 이력서에 학력을 적지 않도록 하면 학벌 연줄이 줄어들 거라고 예상하며 당장 위정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고칠 수 있다고 해요. 온 국민이 깨닫고 목소리 높여 실행하면 좋겠지만 그 전에 학벌 지연 사회를 깨뜨려 나가야겠지요.

 

한국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어른들은 교육의 문제점을 얘기할 때는 너도나도 합창을 하지만 바꾸지는 않은 채 그대로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있지요. 어른들이 달라지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은이는 지적하지요. 모두 너무나 오랫동안 억눌려 살아오는 동안 그 질서에 길들여져서 참된 것을 볼 줄 모르게 되었다고 해요. 어른과 아이의 관계가 억누르고 눌려있는 관계라고 얘기하며 이제는 ‘아이들을 믿고, 우리 것을 믿고, 그래서 모든 것을 바꿔나가야 한다.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네요.

 

2002년 한일월드컵 축구를 따져보자

 

그는 교육과 함께 한국 현대사에 큰 변화를 가져온 2002한일월드컵에 주목하지요. 광장에서 쏟아져 나온 붉은 물결을 45년 광복과 비교하네요. 지금껏 한 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 적은 많았지만 광복 때 기뻐서 민중이 절로 나와 소리치던 모습이 57년 만에 다시 벌어졌다고 분석하지요. 그와 같은 해방의 소리를 다시 찾아 가지기 위해, 그 기쁜 소리를 삶에서 살려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자고 하네요.

 

사람들이 찬탄해 마지않았던 히딩크에 대해서 그도 한마디 거들지요. 그가 히딩크에게 탄복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말한 대로 학벌, 인맥을 아주 무시해버리고 선후배의 층계에 따라 위아래를 구분하는 질서를 여지없이 깨뜨려버린 것이죠. 어떤 유력한 사람의 추천 따위는 조금도 거리끼지 않고 순전히 사람 위주로 실력만 보고 선수들을 기용한 것에 박수를 보내지요.

 

그러나 칭찬만 하지 않지요. 이런 목소리는 예전부터 있어왔는데 한국 스스로 못해서 ‘백인 남성’에게 맡겨야 했던 씁쓸한 부분을 건드리네요. 이 밖에 월드컵에서 드러난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살펴가며 걱정하지요. 먼저 사람들이 몇 천 번 외쳤던 대한민국이 마음에 걸린다고 하네요.

 

"한국이면 그만이지, 어째서 그 앞에 대자를 붙였나. 오늘날 세계에서 나라 이름에 크다는 말 대자를 붙인 나라가 어디 있는가? 우리 밖에 없다. 우리보다 땅이 열배 백배 큰 나라도 대자를 붙인 나라는 없다. 내가 알기로 지난날 대자를 나라 이름 앞에 붙인 나라가 둘 있었다. 하나는 대일본제국이고 또 하나는 대영제국이었다. 둘 다 제국주의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강도질을 한 나라였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큰 소리로 ‘대한민국’을 떠들며 우월감을 느끼며 뭔가 된 것 같은 모습을 돌아보게 되네요. 빈부양극화는 점점 커져 날로 살기 힘든 사회이고 서해에서는 싸움이 벌어져 사망자가 발생하는 분단된 현실에 침묵하는 ‘대한민국’이지요. 솔직하게 말해서 부끄러운 이름이지요. 강박같이 자랑스러움을 내세우는 모습은 여전히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고 민족, 국가라는 허울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지요. 조선이 끝날 무렵, 높은 자리에서 정치하는 사람들 손에서 만들어진 ‘대한제국’이 떠오릅니다.

 

강요한다고 자랑스러운 한국이 됩니까?

 

지은이는 축구 경기 전에 나라 노래가 나올 때, 선수들 표정과 행동에 관심을 갖지요. 그는 ‘한국 애국가처럼 엄숙한 마음이 되어 불러야 하는 국가는 일본의 기미가요밖에 없는 줄 안다. 우리 아이들은 애국가를 부를 때마다 마음이 얼어붙는다.’라며 걱정하지요. 한국 선수들 꼿꼿이 서서 근엄한 태도를 보일 때 외국 선수들은 발랄함을 보여줘요. 그들의 표정은 자연스럽고 부동자세는커녕 동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몸을 풀기도 하지요.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고 굳어지게 하는 노래와 사람의 마음을 확 풀어주어서 기쁘게 하는 노래가 좋을까 그는 묻네요. 나라 사랑은 진지하게 노래 부른다고 생겨나지 않지요. 밝은 역사만 가르친다고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아요.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어릴 때부터 자연 속에서 즐겁게 뛰어놀도록 해야 하지요. 엉터리로 애국심을 키우려는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반문해요.

 

"산과 들에서, 논밭에서, 온갖 풀과 나무와 짐승들과 함께 어울려 노래하면서 살아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그 땅과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방 안에 갇혀 아귀다툼만 했던 사람들에게 자라나서 참된 애국심이 손톱만치라도 생겨난다면 그것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물론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끈질기게 한국인들을 물고 늘어졌던 열패감에서 많이 벗어난 게 사실이에요. 현대사에 강대국에 치이고 일제침략을 35년 동안 겪고 한국 전쟁을 치렀으며 독재정권에서 가난하게 살았던 서러운 과거가 결코 만족스럽지는 않으니까요. 그렇다고 무작정 ‘한국은 대단한 나라야, 나라를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해라’라고 할 수 없지요.

 

진실에 맞닥뜨리고 절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도록 해야 하지요. 애국심은 강요할 수 없지요. 한국 교육은 진실을 덮어두면서 역주행을 하려 하지요. 얼마나 한국 교육이 심각하면 반부패지수가 아시아 4개국 가운데 꼴찌를 했지요. 국제투명성기구(TI)가 11월 7일 발표에 따르면 한국은 10점 만점에 6.1점으로 인도, 방글라데시, 몽골 등 다른 조사대상국 보다 낮았지요. 지금 한국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고 어떻게 키워내야 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한국축구가 피나는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듯이 민주의식, 열린 사고도 많은 노력과 의지를 필요로 하지요 가만히 시간이 흐른다고 민주의식이 자라나지는 않지요. 경쟁력만으로 외치며 아이들을 암기 기계로 만드는 한국 교육은 크게 바뀌어야 하지요. 민주시민으로 키워내는 공교육, 홀로 우뚝 서서 살아가고 생각할 수 있게끔 아이들 중심으로 교육이 이뤄져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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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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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 라스까사스가 스페인 국왕에게 제출한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서’을 보면 신대륙 도착 이후 40년 동안 1200만 명 내지 1500만 명의 원주민이 학살되었다고 나오지요.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에서 저지른 일들은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일들이 많지요.

 

그 학살은 20세기에 아우슈비츠라는 곳에서 정교하고 빠르게 이뤄지죠. 몇 안 되는 유대인들은 지옥으로 끌려갔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뒤 끔찍한 인간상을 기억하고 증언했지요. 서경식 도쿄경제대학 교수는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2006. 창비]로 어두운 인류사와 한국근대사를 살펴보는 작업을 하네요.

 

쁘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를 써서 아우슈비츠를 세상에 알린 사람이지요. 지은이 서경식 교수는 쁘리모 레비의 책을 읽으며 그가 겪어야 했을 고뇌와 아픔을 헤아려보는 가슴 저린 작업을 하지요. 차마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잊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그는 쁘리모 레비를 찾아가네요. 그를 따라 가다보면 일그러진 인류근대사와 한국의 잘못된 역사가 드러나지요.

 

인간이 어떻게 이토록 잔혹할 수 있을까

 

파시즘 정권이 들어서자 쁘리모 레비는 반파시즘 운동을 하지요. 그러던 그는 스파이에게 속아 어이없이 체포되어요. 다른 빨치산들처럼 바로 처형을 당하지 않고 ‘유대인’이기에 아우슈비츠로 보내지지요.

 

그때까지 유대인으로서 인식은 ‘주근깨’정도의 사소한 차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쁘레모 레비는 174517라는 수인번호를 받고 인간이 만든 지옥으로 보내지지요. 그는 아우슈비츠의 몇 안 되는 생존자였으나 거기서 겪은 일들은 평범하게 살지 못하게 하네요. 기억해내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며 살아남은 그는 다른 생존자들에 비해 유쾌하고 명랑했으나 진실을 고발하고 끝내 자살하지요.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잔혹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은 쁘리모 레비 뿐 아니라 서경식 교수에게도 벗어지지 않는 굴레였지요. 인류와 세상에 대한 믿음이 송두리째 파괴된 20세기를 겪으면 사람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지요. 위 질문은 현재도 진행형이니까요.

 

인간존엄파괴와 인간성 상실은 독일만의 문제는 아니지요. 후발 제국주의국가 독일은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의 국가가 오랫동안 유럽의 ‘바깥’에서 벌였던 일을 짧은 기간에 ‘안’에서 터뜨린 것이니까요.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학살할 때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지요. 그것이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형태로 유럽에서 벌어지자 비로소 ‘인간’이 무엇인지 성찰하게 되었지요.

 

과거사 아우슈비츠, 끈질기게 부정하고 쉬쉬해

 

그렇다고 독일에게 면죄부가 주어져서는 안 되지요. 독일 국민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지만 독일이라는 정치 공동체의 행위에 ‘집단 책임’이 있어요. 독일 국민들이 자기 손으로 뽑은 지도부가 일으킨 사태를 광기서린 지도부만을 탓해서는 안 되지요. 독일 국민들의 무관심과 방관이 유대인학살의 숨은 주역이니까요.

 

독일이 처음부터 ‘대학살’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무척 인상 깊어요. 196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라인강 기적’이라고 불리는 놀라운 경제성장만이 칭송될 뿐 나찌 시대의 죄를 독일 스스로 밝히려는 움직임은 거의 없었지요. 1968년, 68혁명 때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문제제기가 일어났지요. 이것은 ‘세대 간 전쟁’으로 불릴 정도로 심각했다고 하네요.

 

나찌만행을 덮어두지 않으려는 지식인들의 솔직한 고백과 젊은이들의 진실을 향한 열정으로 아우슈비츠는 세상에 드러나게 되지요. 지금이야 수백만 명을 죽인 나치의 만행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지만 가스실은 없었다는 황당무계한 아우슈비츠 부정론은 전쟁 직후부터 끈질기게 이어져왔대요. 서독에서 나찌의 범죄를 부정하는 발언은 희생자에 대한 모욕이라는 이유로 1985년 이후 형법상의 처벌 대상이 될 정도로 과거를 부정하는 발언은 끊이지 않았지요. 법률로 제한할 만큼.

 

나찌 문제에 대해서 나라 지도부가 고개 숙여 사과와 용서를 구했던 독일, 나찌를 진솔하게 가르치는 독일교과서를 보면서 한국을 돌아보게 됩니다. 한국 역시 근현대사에 커다란 상흔들로 셀 수 없는 아픔들이 있는 나라니까요.

 

일본인의 긍지를 지키려 위안부 삭제하라는 목소리

 

정신대 문제는 한국 일본 모두 부정하고 덮어두려고 쉬쉬하지요. 가해자가 사실을 인정을 하지 않기에 1992년 8월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군 ‘정신대’였다는 산증인이 나타나지요. 한국의 김학순 할머니이지요. 김학순 할머니 이후 아시아에서 피해자의 고백이 이어졌지요.

 

산증인들이 나타나고 일본의 관여를 증명하는 증거자료가 발견되어 일본 정부는 종래의 공식견해를 바꿔서 ‘위안부’제도의 ‘강제성’을 인정했지요. 그렇다고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공식으로 사죄하거나 보상에 응하려 하지 않았지요. 그 뿐이 아니지요. 일본인의 긍지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교과서에 ‘위안부’에 관한 기술을 삭제하라고 목소리 높여 요구하기 시작했지요.

 

과거를 잊고 싶은 사람들은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지요. 일본은 그때는 ‘시대’가 좋지 않았고 ‘전쟁’은 그런 것이며, 일부 ‘광신 군인’이 폭주한 것이지 국민도 천황도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지요. 심지어 조선의 식민지 지배에 관해서는 일본이 아니었으면 러시아가 그렇게 했을 것이라며, 결과는 불행했지만 일본은 뒤처진 조선인을 일본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한 선의를 인정하라고 큰소리치지요.

 

그들은 실제 ‘증오’의 원인이 된 역사와 사회 현실을 바꾸기는커녕 가해자의 책임을 모호하게 만들고, 상처를 치유할 수 없는 피해자에게 은근한 어조로 과거를 잊어버리라고 강요하지요. 지금은 서로 ‘미래 지향’하여 앞으로 ‘공생’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지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들이죠. 좌편향된 역사교과서를 고치겠다고 어떤 사람들은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지은이는 쓴 말을 거듭 읽어보며 아이들의 역사관을 놓고 다투는 형국을 생각해봅니다.



도대체 어느 쪽이 앞이란 말인가? 그들이 확신하는 바는 언제나 새로운 것이 자신들이며 낡은 것은 내 쪽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에게 ‘새롭다’는 것은 경제 ‘풍요로움’과 동의어이며, 그것이야말로 ‘정의’보다 우선하는 척도인 것이다. - 책에서

 

미래 지향, 자랑스러운 역사를 외치는 한국

 

서경식 교수는 재일조선인으로서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닌 틈바구니에서 두 곳에서 다 소외받았지요. 그는 일제침략으로 한국인들이 받은 고통과 군부독재의 탄압, 거기다 ‘고향을 잃은 자’로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외로움까지 아는 사람이에요. 치열하게 시대를 아파한 사람으로서 쁘리모 레비를 민감하게 그려내지요.

 

지은이는 자신의 가슴 아픈 과거를 조심스럽게 얘기하지요. 지은이의 두 형은 ‘모국 유학’을 가게 되나 1971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 박정희 3선 저지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한 ‘북’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검거되지요.

 

큰 형 서승은 고문에 굴복하여 학생운동에 타격을 입힐까봐 분신자살을 했으나 실패하여 안면과 상반신에 큰 화상을 입고 붕대를 둘둘 감은채로 법정에 나타났다고 하네요. 작은 형, 서준식은 혹독한 더위와 추위, 불량배들의 폭력, 반복되는 고문, 절망스런 저항, 이어지는 자살을 회고록에 쓰지요.

 

형들이 고문을 받고 있다는데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을 때, 장기화되는 감옥 안 단식투쟁으로 형의 죽음을 각오할 수밖에 없던 그 때. 재판 방청을 위해 한국에 달려갔던 부모님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 앤, 화상을 입어 귀도 없더라.’며 통곡을 들었을 때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는 분노하기보다 역사를 기억하고 잊지 않으려 하지요. 그렇기에 쁘리모 레비라는 거울을 내밀면서 과거를 돌아보라고 말을 거네요.

 

한국의 유대인. 여성, 빨갱이, 호남, 노동자

 

판사보다 증인이고 싶다는 쁘리모 레비가 죽은 뒤 무덤에는 174517만이 적혀있지요. 죽은 자는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쁘리모 레비 부인은 그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만남을 거부하지요. 외부의 폭력과 억지로 ‘유대인’이 된 쁘리모 레비는 결코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지요. 한국 역시 여성, 빨갱이, 호남, 노동자라는 ‘한국의 유대인’들이 있으니까요.

 

홀로코스트는 ‘구워서 신전에 바치는 희생양’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로 나치에게 학살당한 유태인들을 순교자로 여기고 죽음을 미화하는 단어이지요. 이 문제점을 지적하며 최근에는 대파괴, 파멸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쇼아’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지요.

 

대학살을 마주보고 기억해야지 다시는 ‘쇼아’가 일어나지 않지요. 언제나 망각은 불행한 일들을 부르는 주문이지요. 한국에서도 가슴 아픈 역사들을 잊으려는 움직임이 있지요. 과거가 없이 미래는 있을 수 없답니다. 바삐 가기보다 조목조목 짚어가며 살펴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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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신현승 옮김 / 시공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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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맛있게 먹고 있는 쇠고기가 소를 죽인 몸의 부분이라는 것을 아시나요. 소는 태어나자마자 뿔이 잘려나가고 거세되며 호르몬과 항생제, 살충제가 뿌려지지요. 곡물, 톱밥, 찌꺼기, 오물을 먹으며 사람이 먹기 좋게 될 때까지 갇혀 있다 자동화된 도축장으로 운송되어 그곳에서 도살되죠.



산업화된 세계의 사람들은 하루에도 여러 번 먹게 되는 고기에 대해 잘 알지 못해요. 그들은 쇠고기를 장난감이나 의복과 같은 제품들처럼 물질쯤으로 생각하지요.

 

제리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시공사. 2002]을 읽으니 육식과 쇠고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쇠고기가 멀쩡하게 살아가는 생명체의 특정 부위라는 사실이 새삼 느껴지네요.

 

이 책은 인류 역사와 문화를 고찰하면서 쇠고기 문명을 날카롭게 파헤친 교양서적이에요. 노동의 종말, 소유의 종말을 집필한 제레미 리프킨은 육식의 종말에서 대단한 시도를 하지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인류와 얽힌 역사를 훑으며 쇠고기 산업의 문제를 여러 시각에서 조목조목 짚어주죠.

 

부자와 가난한 사람, 둘 다 죽이는 육식

 

가난한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고 부자들은 고기 때문에 죽고 있지요. 고기를 즐겨먹는 사람들의 몸은 지나친 콜레스테롤로 망가지고 있고 동맥과 조직은 동물성 지방으로 질식하고 있지요. 그들은 심장병과 암, 당뇨병에 걸리게 되고 끔찍한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지요. 10억의 사람들은 배부르게 먹으면서 늘어난 지방에 허우적거리는데 다른 10억의 사람들은 최소한의 영양분조차 공급받지 못해 날로 야위어가고 있지요.

 

오늘날 만성기아에 시달리는 사람이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13억 명을 넘었지요. 인류 역사상 전체 인구의 20%가량에 이르는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시달린 적은 없어요. 진보를 외치며 세상이 더 나아지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오늘날이 역사상 가장 굶주리는 시기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지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늘어난 생산량과 별개로 왜 사람들은 굶주리는지 책은 설명하지요. 10억에 달하는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시달리는데 세계 곡물의 1/3이 소와 다른 가축의 사료로 사용되고 있지요. 쇠고기 1kg을 얻으려면 곡식 9kg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덧붙이며 쇠고기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지만 불평등한 구조에 참여한다고 꼬집네요.

 

햄버거에 불타버린 정글이 숨어있다

 

전 세계에 퍼진 대규모 축산단지는 생태계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지요. 1960년대 이후 중앙아메리카 삼림의 1/4이 파괴되어 육우 사육을 위한 목초지로 바뀌었지요. 미국 소비자들은 중앙아메리카에서 수입한 쇠고기로 만든, 5센트 싼 햄버거를 먹을 수 있었지만 자연은 5조 달러를 투입해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훼손되었지요. 햄버거 하나를 만들려고 소가 자랄 목초지를 마련하기 위해 정글 5.4㎡를 없애고 있네요.

 

중앙아메리카에 거대한 축산 단지가 생기자 소수의 삶은 부유해졌지만 대다수 농부들은 극도로 궁핍해졌지요. 현재 중앙아메리카에는 3500만 명이 스스로를 부양할 농토가 아예 없거나 턱없이 모자란 상황이지요.

 

남아메리카에서는 삼림 개간, 토지 집중, 농업 인구의 강제 이주가 반복되었지요. 아마존 열대우림이 파괴되면서 수많은 생명들이 사라졌지요. 햄버거 한 개를 먹을 때 20~30종의 식물, 100여 종의 곤충, 수십 종의 조류, 포유류, 양서류가 사라지지요.

 

하지만 패스트푸드 체인점에서 치즈버거를 먹는 사람들은 자신이 먹는 고기 때문에 광활한 열대우림이 베어지고 불태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지요. 또 자신들의 땅을 빼앗긴 채 가난에 시달렸던 수백만 가족들의 분노도 느낄 수 없죠.

 

인간, 그 어리석음에 대하여

 

미국에서는 1961년부터 1970년 사이에 소들을 해칠 것이라고 간주되는 대형육식동물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지요. 덫을 놓고 가독가스를 살포하고 독약을 놓고 총을 쏘았어요. ‘살육의 향연’을 벌였지요.

 

육식동물들이 대량으로 학살되자 ‘유해동물’들이 들끓기 시작해요. 생태계 조절기능이 파괴되자 토끼, 다람쥐, 캥거루쥐, 땅다람쥐 및 여타 설치류들이 주기로 창궐을 하지요. 정부 관리들은 육식동물과 예전의 생태 균형을 되찾으려 하지 않고 독약이 든 곡식을 공중 투하함으로써 설치류의 수를 조절하려 하네요.

 

그러자 메뚜기, 방아깨비, 수확개미 및 여타 곤충들이 떼로 나타나면서 생태계는 더욱 불안정해졌지요. 정부는 어떻게 했을까요. 살충제를 대량으로 살포하며 대응했지요. 그로 인해 생태계는 더욱 약화되었고 토지는 사막이 되었다고 지은이는 지적하네요. 자연을 거스르는 인간은 환경도 파괴하고 살충제, 제초제, 살균제로 범벅이 된 고기를 먹게 되지요.

 

햄버거의 정치사회학

 

영양학자 진 메이어는 ‘남성들이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짐에 따라 남성다움의 마지막 상징인 피가 흥건한 고기조각을 먹음으로써 남성임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고 말하죠. 지은이는 더 나아가 날고기를 ‘힘, 남성지배, 특권’ 과 동일시하는 문화상징을 언급하며 쇠고기가 남성 지배를 단단하게 하고 계급차별을 조장했다고 분석해요.

 

또한 햄버거에는 현재 문명의 가치와 감수성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고 진단하죠. 햄버거를 구입할 때마다 미국의 세계관, 지배원리, 목적을 덩달아 사들이는 셈이지요. 햄버거는 국수주의와 식민주의의 이익을 늘렸으며 그것은 전 세계에 사회 불평등과 경제박탈을 강화했다고 자세하게 밝히네요.

 

싸고 빨리 먹을 수 있는 햄버거가 먹는 즐거움과 여유를 빼앗아 갔다고 분석하지요. 햄버거는 유기적인 조직대신 기계주의를, 정신주의 대신 실용주의를, 공동체 규범 대신 시장 가치를 보여주며 우리 자신을 생명체에서 자원으로 격하시켰다고 비판하네요.

 

쇠고기, 그 차가운 악을 넘어서

 

지은이는 강도, 강간 같이 눈에 보이는 나쁜 짓에 대비하여 쇠고기를 차가운 악(cold evil)이라고 규정해요. 차가운 악은 합리성을 갖춘 조직과 탄탄한 논거에 바탕을 한 제도와 개인이 저지르게 되요. 오직 시장의 효율성과 실용주의만을 내세우며 삶을 상품처럼 만들고 소외시키는 것이 차가운 악이에요.

 

책 원제가 beyond beef 듯이 제리미 리프킨은 육식, 그 차가운 악을 넘어서자고 해요. 쇠고기를 먹지 않는 않음으로써 방탕한 소비를 조장하는 시장을 멈추게 할 수 있고 현대식 초대형 비육장과 도살장에서 고통스럽게 죽는 소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지요.

 

육식을 그만두는 일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달라지는 위대한 상징이자 실천 의미라고 평가하네요. 육식을 끊으면 ‘생태계의 르네상스’가 오게 되어 심해부터 성층권까지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설명하지요. 자연을 사람들이 거주하는 근본 공동체로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고 전망하네요.

 

게다가 질병이 줄어 수많은 사람들이 보다 건강해지고 건강관리에 투입되는 막대한 자금이 삶의 질 향상에 쓰이게 되며 동시에 더 많은 농경지와 더 많은 곡물이 빈자들에게 제공될 수 있지요. 북적거리는 도시 빈민촌에서 농촌으로 대대적인 이동이 촉발되어 사람을 위해 곡물을 재배하며 소규모 자급자족 농업이 다시 이뤄질 것이라고 조망하네요.

 

수십 쇄를 찍은 이 책이 나온 지도 6년이나 지났지만 육식의 종말은 오지 않았지요. 여전히 열대우림은 불타 없어지고 사람들은 굶주리며 동물들은 햄버거로 만들어져서 패스트푸드체인점에서 사람들 입으로 들어가고 있지요. 책을 덮으며 “육식이 종말이 되면 역사상 가장 대단한 식량 재분배가 이루어져 인류가 새로운 형제애로 뭉치게 된다.”는 지은이의 말을 읊조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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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13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시대를 뒤서 가는 사람
정병오 지음 / 좋은교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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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가야 한다고 경쟁력, 효율성을 외치는 분위기에서 시대를 뒤서가겠다는 사람이 있네요. 시대를 뒤서가는 사람[2008. 좋은교사]을 펴낸 중학교 도덕 교사인 정병오가 그 주인공으로 교원단체 ‘좋은교사운동’대표이지요.

 

그가 월간지 ‘좋은교사’에 실은 칼럼을 모은 이 책은 솔직하게 경험과 속내를 밝히며 차분히 이야기를 이끌어가지요. 글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진득하게 사람 가슴을 깊숙한 곳을 건드려요.

 

‘386’으로서 불의한 시대와 기독교인으로서 갈등, 명문국립대를 간판으로 들어갔으나 비인기학과라 열등감이 있었다는 고백, 단기 장교로 친구들이 군대문제를 해결할 때 일반 병사로 군대를 간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방황과 아픔을 독자들에게 털어놓지요.

 

작은 개척교회에서 열정을 바쳐 일을 했으나 교회가 커짐에 따라 목사가 달라져서 배신감을 느꼈다고 토로하며,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의 신앙과 부딪히는 세상사에 대해 돌아보고 얘기를 건네네요.

 

청년시절 나와 많이 부딪히고 싸웠던 개척교회 목사님은 나를 향해 “병오 형제는 지금은 그런 소리를 해도 나중에 절대 가난하게 살지 않을 것이다. 현재 병오 형제가 가진 기득권이 얼마나 많은 것인지 아느냐?”라는 것을 이야기 했다. 아마 그런 이야기들이 나를 더욱 고집스럽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 책에서

 

그의 글은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불편함과 호기심을 같이 만들어내요. 기독교에 반감 내지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을 수 있겠네요. 그래도 묵직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이야기에 귀기울여보는 것도 좋을 듯해요.

 

차 운전을 않겠다고 하다가 가까스로 38살에 운전을 배운 사람, 대학 시절 집을 사지 않을 이유를 동아리 회보에 실을 정도로 생활에 있어서 한참 뒤서간 사람, 정병오의 칼럼에서는 한결 같은 뚝배기 맛이 나네요.

 

본질이 아닌 것에는 뒤서가되, 생각에선 앞서간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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