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말아요, 티베트 - 히말라야 넘어 달라이라마를 만나다 맛있는 책읽기 6
정미자 지음, 박선미 그림 / 책먹는아이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오늘날 사회가 돌아가는 원리는 애정결핍입니다. 사랑이 모자란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기만 사랑받고자 하는 욕심에 눈을 번뜩이죠. 학교마저도 교과서를 달달 외우는 아이에게만 사랑이 돌아가는 까닭에 소수만 사랑받는다는 망상은 진리가 됩니다. 가까운 사람 관계에서조차 진심어린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을 외롭게 내버려두지 말라며 세상 분위기에 무릎 꿇게 되죠. 애정결핍이 없는 척 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 아이들을 키워야 하죠. 올바르게 살라고 가르치기보다 남들보다 앞서야 한다고, 돈이 장땡이라고 가르쳐야 하는 시대입니다. 사랑을 듬뿍 받으며 한창 뛰어놀 아이들이 부모, 친구, 세상 어디로부터도 일체감을 느끼지 못한 채 회색빛 얼굴을 지닌 ‘차가운 인간’으로 만들어지고 있죠. 그런 아이들이 몸집이 커지고 세상에 나와 높은 자리에 올라가죠. 그렇게 세상은 사람 탈을 쓴 짐승들의 정글이 됩니다.

 

욕망으로 우거진 덤불들을 적절하게 잘라내지 않고, 욕망촉진호르몬제를 주사 놓는 사회에서 아이들은 욕망에 치이게 되죠. 갈 길을 헤매는 아이들에게 어떤 지도를 쥐어줘야 할까요? 나밖에 모르는 아이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어떻게 틔워져야 할까요? 동화책 <울지말아요, 티베트>[2009. 책먹는 아이]를 보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알려줘야 할지 고민하게 되네요.

 

망명하는 티베트인들에게 총을 쏘는 중국, 왜 티베트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히말라야를 넘는가?

 

이 동화는 실제 사건을 재구성하였지요. 2006년 9월, 중국 군인들이 망명하는 티베트인에게 총 쏘는 장면을 한 외국 카메라맨이 담아내죠. 어린아이들까지 끼어있는 망명객들에게 중국 군인들을 잇달아 총을 쏘고 두 사람이 쓰러져 결국 일어나지 못합니다. 이 영상은 인터넷을 통해 퍼져 세계에 큰 충격을 줬죠. 그렇다면 왜 티베트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그 험악한 히말라야를 넘는 걸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동화에 자연스럽게 녹아나있네요. 13살 한국 남자아이 정보건은 다큐멘터리 감독 아빠를 따라 중국에 오죠. 상해임시정부 청사를 촬영하고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아빠와 같이 따라다니는 보건이는 티베트까지 가게 됩니다. 거기서 오래 전에 잊었던 친구를 닮은 티베트 아이를 만나게 되고, 그들의 아픈 역사와 마주치게 되죠. 그 친구 따라 어른도 넘기 힘든 히말라야를 같이 넘게 되죠.

 

보건이가 티베트 사람들과 히말라야를 넘는 얘기는 가슴이 조마조마하죠. 수천 길의 낭떠러지가 발밑에 펼쳐져 있고, 언제 어디서 중국 공안이 총을 쏠지 모르며, 영하 수십 도까지 떨어지는 날씨에 가파란 히말라야를 넘어야 하니까요. 아이들은 지독한 감기에 시달리고, 먹을거리도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갈수록 불안한 일들이 터지죠. 역설이지만, 망명길이 멀고도 험한 만큼 티베트 자유와 독립을 향한 뜨거움이 전해지네요.

 

지난 1950년, 국민당과 전쟁에서 승리한 중국공산당은 티베트를 침략합니다. 승려들이 티베트 사람들을 착취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티베트를 해방시키겠다는 거죠. 해방되었다면 티베트 사람들이 좋아해야겠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봉기가 일어납니다. 그때마다 티베트를 해방시키겠다는 중국은 잔인하게 깔아뭉갤 뿐이죠. 수백만 명의 티베트 사람들이 죽고, 만 개에 가까운 사원이 파괴 되었죠. 티베트의 말과 역사를 없애고, 중국 말과 역사만을 강요하고 있지요. 그렇게 60여 년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앗, 어디서 귀가 따갑도록 들은 얘기 아닌가요? ‘대동아공영’을 위해 조선에 일제는 ‘진출’했다고 우기고 있죠. 잘 살게 되었다면 조선인들이 좋아했겠지만 수많은 봉기들이 일어났고 일제는 잔인하게 억누르죠. 내선일체, 조선의 말과 역사를 없애고 일본 말과 역사만을 강요하였지요. 그렇게 35년 동안 지배가 이뤄졌습니다. 티베트는 지난날의 한국입니다. 비슷한 경험과 상처를 안고 있는 한국이 중국과 티베트를 어떻게 봐야할지 곰곰 생각하게 되네요.

 

또 하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죠. 티베트에서도 중국에 빌붙은 ‘친중파’가 늘어나고 있듯 한국에서도 일제의 찌꺼기가 사라진 건 아니죠. 일제에 빌붙어 이득을 본 이들의 후손들이 일제가 한국의 근대화에 발판이 되었다며 일제를 치켜세우는 작업을 합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힘겹게 살아가고 있을 때, 친일파의 자식들은 역사교육을 ‘똑바로’ 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물어뜯고 있죠.

 

역사는 기억의 다툼, 중국유학생들이 폭력사태와 일본 역사교과서, 그리고 한국 역사교과서

 

역사는 기억의 다툼입니다. 지난날을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오늘은 딴 판이 됩니다. 일제가 철도도 깔아주고 공장도 세워줬다며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있죠. 일본? 하면 무조건 역성드는 것도 문제겠지만, 왜 철도를 깔아주고 공장을 세웠는지 이유는 묻지 않은 채 찬양하는 것은 더 문제죠. 소설 ‘꺼삐딴 리’에 잘 나오듯 자기 배만 챙겼던 사람들은 일본이든 누구든 상관없이 빌붙었고, 그렇게 쌓은 돈과 권력을 써서 역사를 바꾸려 하네요. 자신들이 옳았다고!

 

역사란 아이들에게 공통된 기억을 되 물려주는 작업입니다. 말이 안 통하는 ‘반공소년’들이 군사독재시대 수없이 만들어져서 오늘날까지 답답한 사회가 되었듯 오늘날에도 ‘제 2의 똘이장군’이 생겨날 분위기네요. 빛과 그림자를 다 알려줘야 하나 한국교육은 사팔뜨기로 키우려고 하죠. 한쪽은 쉬쉬하고 감춘 채 자신들이 믿고 싶은 기억만 머릿속에 쏙쏙 넣고 있죠. 이들이 커서 어떻게 될는지는 중국유학생들을 보면 대강 짐작할 수 있죠.

 

지난 2008년 4월, 수천 명의 중국인들이 "Powerful of China(중국의 강한 힘)", "중국 사랑해"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Pride of China(중국의 자부심)"과 "중국 만세", "북경 만세", "올림픽 만세"를 연이어 외쳤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티베트 침략에 항의하는 사위를 벌이자 환하게 웃던 그들은 폭력을 휘두르는 ‘사나운 조직’으로 갑자기 변하죠. 중국에서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서울 올림픽 공원에서 생긴 일입니다.

 

반성하지 않는 사람은 폭력을 쉽게 저지릅니다. 사랑이란 이름을 뒤집어쓴 파시즘의 역겨운 냄새를 못 맡죠. 이성을 바탕으로 한 대화가 이뤄지지 않고, 자기들에 반대하는 사람은 무조건 적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폭력을 가하죠. 정치와 종교 영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죠. 그렇게 빨갱이와 마귀들이 탄생합니다. 자신들이 옳은 것을 확인하는 길은 오로지 적을 만들고 그를 처단할 때죠. 애정결핍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냅니다.

 

냉전 시대가 끝났다지만 자기편과 적을 나누려는 이분법은 변화된 여러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죠. 어느 때보다 사람의 이성이 발전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짙은 그늘이 지구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세계화시대라고 소리는 치지만 정작 세계에서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자기 배 채울 생각에 골똘하고 있죠. 이미 너무 뚱뚱해졌으나 자신이 히딩크라도 되는 것처럼 ‘아직도 배고프다’며 씩씩대는 사람들.

 

여기서 우리 아이들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무엇을 가르치고 어디를 바라보게 해야 할지 고심에 고심을 해야겠죠. 중국유학생들을 보면서, 역사교과서를 고치는 일본극우파를 보면서, 한국 역사를 자기 입맛대로 뜯어고치려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면 어떨까 상상해봅니다. 중국이 최고라는 중국 아이와 일본이 한 일이 옳았다는 일본 아이, 힘 센 놈에게 붙어야 한다는 한국아이, 이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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