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여왕 - 안데르센 동화집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5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김양미 옮김, 규하 그림 / 인디고(글담)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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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나는 일이 너무 많은 세상사, 힘겨운 짐을 이고 가야 하는 인생사, 어른들은 투덜거리며 살아갑니다. 툭하면 짜증내고, 신경질 부리며 살아가는 사람들,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왜 어른들은 언제나 바쁘고 안절부절못할까, 진짜 이상해, 저럴 거면, 어른 되는 거 싫어, 개구쟁이들은 날마다 까르르 웃으며 자기들 세계에서 뛰어놉니다.

 

맑은 눈망울로 활짝 웃는 아이들을 보면 묘한 감정이 듭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누구에게나 깨끗하게 웃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인상 팍 구겨져있는 사람들을 비추며 거울은, 누구냐 넌, 물어도 어른들은 놀라지 않을 정도로 메말라있지요. 그저, 남.이.사. 한마디를 하거나 열폭하여 거울과 한바탕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밤이 쓸쓸합니다.

 

아이들의 고사리 같은 손짓이 그리운 날에, 동화책을 폈습니다. 현실도피, 과거회귀라고 자신을 몰아세우기보다는 현실성찰, 과거추억이라고 다독이며,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읽었습니다. 안데르센 동화집 <눈의 여왕>[2009. 인디고]에는 눈의 여왕, 인어공주, 나이팅게일, 백조왕자, 장난감병정, 성냥팔이 소녀이야기가 담겨 있지요. 익숙한 이야기들이지요. 오랜만에 동창을 만나서 지난 일을 떠올리는 기분으로 책을 봤습니다.

 

과거는 있는 그대로 기억되지 않지요. 자신의 입맛대로 미화되거나 나쁘게 변형되어 저장되기 일쑤지요. 그렇기에 동창과 함께 하는 ‘기억 맞추기’는 즐거운 불편을 주지요. 분명 이렇게 기억하고 있던 일인데, 다르게 얘기하는 동창을 보면서 자신이 알고 있던 과거를 되짚어보게 되죠. 동화책 읽기는 까먹고 있던 일들을 들추는 동창 얘기에, 맞다, 그런 일이 있었지, 할 때 느낌과 꽤 닮아있어요.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성냥팔이 소녀, 가슴 안에 작은 성냥불 하나를 켜다

 

동화는 어릴 때 읽던 거와 같겠지만 기억하고 있는 내용과 꼭 같지 않았고 다가오는 느낌도 많이 다르네요.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을 팔 때, 몇몇이 말도 걸어주고 그랬던 거 같은데, 다시 보니 혼자서 성냥을 켜다가 얼어 죽네요. 꽤 길었던 이야기 같았는데, 내용이 아주 짧네요. 또 몰랐던 게, 성냥팔이 소녀는 미소를 띤 채 죽었다고 나오네요. 이럴 수가! 행복하게 죽다니!

 

손이 꽁꽁 얼어 감각조차 없어서 ‘성냥불을 켜면 좀 나을지도 몰라’하며 성냥불을 켜는 소녀, 그 불빛 속에서 여러 환상들이 나타나죠. 난로, 맛있는 음식들이 등장했다가 성냥불과 함께 사라지죠. 한꺼번에 촛불을 켜자, 보고 싶던 할머니가 나타나고, 소녀는 데려가 달라고 하고 별똥별이 떨어지죠. 추위도, 배고픔도 없는 곳으로 소녀가 갔기에 미소를 띠었다고 안데르센은 적네요. 그래서 더 서글프네요.

 

까맣게 타버린 성냥 한 다발을 꼭 쥔 채 얼어 죽은 소녀를 보면서 사람들은 “몸을 녹이려 했나 보구먼.”이라고 쉽게 말하는 대목에서는 아찔하더군요. 어른들은 소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느끼기보다 타버린 성냥을 보고 어떻다, 해석하기 바쁩니다. 저런 어른들이 너무 많지요. 남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까맣게 타버린 가슴으로 살아가는 건 아니었는지 순간,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우리가 불행한 것은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을 잃어가기 때문이죠. 어릴 때는 친구들과 손잡고만 있어도 행복했는데, 어느새 황금을 손에 쥐고 있어도 불만족스러운 어른이 된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심장소리를 귀담아듣지 않고 뻔뻔해지는 얼굴로 살아가는 건 아닌지 가슴 안에 작은 성냥불 하나를 켜봅니다.

 

사랑에 모든 걸 거는 인어공주, 이 죽일 놈의 사랑

 

홀딱 반한 왕자가 난파를 당하자 구해준 뒤, 사람이 되려고 목소리를 마녀에게 주고 다리를 얻는 인어공주 이야기.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으악, 혀를 자르네요. 올드인어? 스스로 순화해서 이야기를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혀 자르는 건 19세 영화에나 적합하다고 판단한 분들의 배려로, 부드럽게 바꾼 내용을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소름이 살짝 돋네요. 혀를 자르는 것에, 노노, 그보다 기억이 조작될 수도 있다는 것에.

 

인어공주는 사랑하는 왕자님을 만나기 위해 바다궁전도, 가족도, 모든 걸 버리고, 거기다 혀까지 자르고 다리를 얻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였지만 포기하죠. 사랑, 이 죽일 놈의 사랑, 다시 봐도, 대단하네요. 그래도 왕자님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해하는 인어공주, 그러나 마녀가 얘기한 조건이 있지요.

 

“왕자의 사랑을 얻어 부모보다도 널 사랑하게 하는 길뿐이야. 왕자가 항상 네 생각만 하고, 신부 앞에서 널 아내로 맞겠다고 맹세해야만 해. 그러지 않고 왕자가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한다면 결혼식 다음날 아침, 네 심장은 물거품이 되고 말 거야”

 

발을 내딛을 때마다 칼 위를 걷는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춤을 추고 피가 흥건히 묻어나면서도 왕자를 따라 산에 오르는 인어공주. 사랑이 뭐 길래, 그러나 왕자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가씨라고 여겼을 뿐 아내감으로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인어공주는 눈으로 애타게 말을 겁니다. “절 누구보다 사랑하지 않나요?”

 

동화작가 안데르센 선생님은 잔인한 면이 있지요. 성냥팔이 소녀도 얼어 죽게 하더니, 인어공주의 사랑도 끝내 이루지 못하게 하네요. 이웃나라의 아름다운 공주에게 뿅 가버린 왕자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결혼식이 치러집니다. 아, 사랑을 얻지 못한 자, 죽을 수밖에 없구나, 언니들은 인어공주를 죽지 않게 하려고 자신들의 머리칼을 마녀에게 주고 칼을 얻어와 소리칩니다.

 

“해가 뜨기 전에 이 칼로 왕자의 심장을 찔러야 해. 왕자의 따뜻한 피가 네 발에 떨어지면 다리가 다시 붙으면서 꼬리로 변할 거야. 다시 인어가 되는 거야. 그러면 우리와 함께 바다로 돌아가서 물거품이 될 때까지 삼백 년을 살 수 있다고! 어서 서둘러! 해가 뜨기 전에 너희 둘 중 하나는 죽을 수밖에 없어.”

 

자기계발서도 아니고 동화책을 읽어? 내가 미쳤어, 정말 미쳤어?

 

알다시피 인어공주는 왕자를 찌르지 않습니다. 침실에 들어가 이마에 입을 맞추고 점점 붉어지는 새벽하늘을 바라만 보죠. 날카로운 칼을 파도 너머로 멀리 던져버리고 아련한 눈길로 왕자를 마지막으로 분 뒤, 바다 속으로 풍덩, 몸을 던지는 인어공주, 물거품이 되지요. 그녀의 나이 15살이었습니다. 톡 건드리면 쨍하고 금 갈 듯 푸르른 소녀였죠.

 

너무 슬프면서 아름다운 이야기야, 하고 어릴 때는 울먹거렸는지 모르지요. 그러나 지금은, 돌았나, 모든 걸 버리고 가게, 아직 어린 게지, 얕잡아보거나, 사랑이 밥 먹여줘, 쯧쯧 하며 혀를 차거나, 다른 여자에게 갔어, 칼로 찔러 버려야지, 하면서 아쉬워하는 마음이 드는 거 같아 괜스레 인어공주에게 미안해집니다. 연탄재는 누군가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웠을진대, 이거야 원, 항온동물을 자랑하기라도 하는 듯 냉정해지기를 애쓰니, 어른은 참 불쌍합니다.

 

어려운 시절입니다. 뭐, 따지고 보면, 쉬웠던 때가 있겠냐만 그래도 시민들 의식수준이 높아지고 기대치가 있는데, 세상은 거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죠.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하수상한 일이 자꾸 벌어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뭥미, 하다가도 워낙 잦게 일어나다보니 이제 사람들은 심드렁해졌습니다. 참을성이 그만큼 커졌다고 할까요. 사람들은 분노를 속으로 삭히면서 자기도 삭습니다.

 

늙어버린 세상에서 자기계발서도 아니고 동화책을 읽었습니다. 쟤가 미쳤어, 정말 미쳤어, 신화에 나오는 괴물, 사이렌의 소리가 21세기 한국에서 요란하게 울려 퍼집니다. 뭐가 미쳤는지 모르겠습니다. 집에 전기가 끊겨서 성냥불을 켜다가 소녀가 불에 타죽는 한국입니다.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들의 혀를 뽑아버리는 한국입니다. 동화책을 읽는 게 아니라 영어책을 외워야 하는 아이들, 텅 빈 놀이터에도 봄은 오는지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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