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6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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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시를 읽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거칠게 말하면, 현실감각 없는 별종이죠. 모든 걸 돈으로 셈하는 세상에서 시를 읽는 건 쓸모없는 일이니까요. 도대체 시를 읽을 시간이 어디 있어, 그럴 시간에 효율성을 높이고 경쟁력을 키워, 요란한 소리는 끊이질 않고 사회에서 그리고 가슴속에서 메아리 치고 있습니다.

 

세상이 하라는 대로 살지만 바닷물을 마신 거처럼 충족은커녕 불만만 쌓입니다. 도대체 언제 행복할지 감이 전혀 오지 않습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사랑하는 님과 언젠가는 행복하게 살겠지, 그림 같은 집을 짓는 심정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림이 정말 그림일 뿐이더군요. 누구나 겪어서 알다시피 내일은, 다시 내일로 미뤄지기 때문에, 애타게 바라는 행복은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그림의 떡을 쳐다보지 말고 쌀을 찧고 떡 만들 궁리가 필요합니다. 몰아붙이는 대로 끌려가는 사람이 행복하기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행복하기보다 어렵습니다. 사람 목에는 워낭이 걸려 있지 않기에 충실하게 훈육되어졌다고 해도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의문을 결코, 잠재울 수 없습니다. 대중문화가 촘촘히 펼쳐놓은 그물에 갇힌 물고기가 되기보다 큰 바다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려면 힘들더라도 자기 삶을 일구어내야 합니다. 스스로 주인이 되는 길 가운데 하나가 시 읽기입니다.

 

책 볼 시간도 없는 사회, 읽는다 해도 자기계발서에 코를 박고 어떻게 몸값을 높여야하는지 머리를 싸매는 세태에서 시집 읽는 이는 서울하늘을 바라보며 별을 헤아리는 사람만큼 드뭅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 시를 읽어야 합니다. 자신이 불행하다면 고개를 돌려야겠지요. 자신이 몰랐거나 외면하였던 창 밖에서 파랑새가 지저귀고 있을 수 있으니까요.

 

멋진 시인들이 많이 계시지만 먼저, <슬픔이 없는 십오 초>(문학과지성사 펴냄)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등단한지 14년 된 심오선 시인의 첫 시집이지요. 천천히 차를 마시듯 하루에 몇 편씩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넘치지는 않았지만 가득 차인 슬픔이 고요하게 담겨 있는 시집이더군요.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놀라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습니다. 독특한 상상력으로 빚어내는 그의 말잔치는 아름다웠지만 쓰라렸거든요.

 

심보선 시인은 “세계가 점점 나빠진다고 생각해요. 나도 행복해질 것 같지 않고요. 그럼에도 어찌할 수 없이 살아야 하죠. 이럴 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것을 멍에로 짊어지고 사는 사람이 세계를 바라보고 관계를 맺을 때 생기는 파열, 갈등, 체념. 이런 정서가 저에게 있는 것 같아요.”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시는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과 절망스러운 희망이 얽혀 있지요. “사랑을 잃은 자 다시 사랑을 꿈꾸고, 언어를 잃은 자 다시 언어를 꿈꿀 뿐”「먼지 혹은 폐허」

 

굳건한, 너무나 굳건한 세상 앞에서 청춘의 꿈들은 허물어지기 일쑤지요. 푸르른 봄은 끝까지 저항하기보다는 투항하면서 저뭅니다. 20대에 주목받으면서 등단한 뒤 온 몸으로 밀어도 꿈쩍도 안 하는 세상 앞에서 시인은 얼마나 많은 절망을 하였고 그 안에서 가쁜 숨을 내쉬었을까요. 누구와도 나눠질 수 없는 청춘의 무게를 그는 고뇌하면서 이렇게 쓴 걸까요.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청춘」

 

세상을 온 몸으로 밀어내야 간신히 한 뼘 정도 자신의 자리가 생깁니다. 가까스로 자리를 마련하였다는 기쁨에 앞서 버거운 세상살이와 무너지는 자신을 바라보면 눈물이 차오르죠. 수많은 핑계를 대면서 타협하고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살아가는 모습을 느낄 때마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그 뿐이죠. 다른 길로 발걸음을 돌리기보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거라며 자위하곤 합니다.

 

그렇다고 과거로 뒷걸음질할 수도 없고 다른 길을 찾지 못하죠. 그렇기에 인생은 고통이고 사람은 눈물을 흘리는 존재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들을 끝없는 바닥으로 슬픔은 떠밉니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는 십오 초만 슬픔이 없기에 너무 슬픈 시입니다. 십오 초를 뺀 앞과 뒤 슬픈 시간, 그게 삶이겠죠. 가끔 슬픔 없는 십오 초를 위해 그 삶을 걸어가야겠지요.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중략)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중략)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꿈보다 해몽이 좋은 법입니다. 시인이 어떤 의도를 썼을지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모든 소통은 불완전하며 어떠한 표현도 온전하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단절과 오해는 숙명이죠. 그렇기에 외롭고 슬프지요. 다만, 사람에게는 상상력이 있습니다. 자신이 처함에서 시작하여 타인과 세상을 이해하고 품으려고 애를 써야하겠지요. 시가 풍기는 인상과 느낌을 곱씹으며 행복을 상상해봅니다. 그 맛에 시를 읽는 거죠. 시 읽는 맛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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