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 - 인권 운동가 오창익의 거침없는 한국 사회 리포트
오창익 지음, 조승연 그림 / 삼인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2008. 삼인]은 재미난 책입니다. 지은이는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 오창익으로 오랜 시간 이 사회의 그늘을 밝힌 인권운동가입니다. 그는 다른 나라에는 없거나 찾아보기 힘든데,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을 모아 정리합니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들이 그의 글을 읽다보면 당연하지 않게 다가옵니다. 낯설게 하기, 책을 보다보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되는 기분입니다. 뭬야, 이런 나라에서 산 게야?!

 

이 책에 실린 한국의 모습들은 대부분 한국 사회가 고쳐야할 것들입니다. 베트남 처녀는 절대 도망가지 않는다는 현수막, 명절증후군, 무노조왕국, 실례한다면서 묻는 나이, 영어라는 종교, 계급사회가 낳은 폭탄주, 시민들을 통제하는 주민등록증 등등 여러 가지 낯부끄러운 일들을 담았지요. 솔직히 다른 나라 사람들은 보지 않았으면 하는 대목도 적지 않지요.

 

지은이는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그동안 만났던 외국인들이 신기하다며 했던 많은 이야기들은 좋은 소재가 되었다고. 한국인들에게는 익숙한 것이지만 외국인의 눈에는 요상한 일들이 많지요. 그렇다고 어렵게 분석한 뒤 무조건 비난하는 책은 아닙니다. 읽는 이들이 쉽게 공감하면서 한번쯤 되돌아볼 수 있는 수준에서 글이 흘러가네요. 재미있는 이야기 2가지를 소개합니다.

 

통장에 29만원 밖에 없는 불우이웃 전직대통령

 

집요한 권력욕으로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를 감행했고, 집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광주시민을 무참히 살육했다. 그리고 그토록 원했던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집권하던 시기는 참으로 무서운 시절이었다.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그는 절대 권력이었고 왕 같은 대통령이었다. - 책

 

이 무서운 전직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난 뒤 한참 뒤, 그가 모아 두었다는 비자금이 드러납니다. 정확한 액수가 밝혀지진 않았지만, 1995년 기준으로 대체로 1조원 가까운 돈이라는 게 정설입니다. 재임기간 씀씀이가 큰 것으로 유명했는데, 쓰고 남은 돈이 그 정도입니다. 아직도 뭉칫돈들이 다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그가 법원에 출석해서 근엄한 표정으로 재산이 29만원이라고 말합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당황하면서 쓰러지는 국민들, 정부는 혈압약을 제공하라! 그래도 이 말을 믿고 그를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지요. 통장의 잔고가 29만원밖에 없기에 생활하기 어려울뿐더러 2.205억 원의 추징금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요. 극빈자가 되어버린 한국의 대통령, 쓸쓸한 한국의 모습입니다.

 

불우이웃돕기 덕분인지 요즘도 그는 왕 같은 행세를 하고 다니지요. 나들이를 할 때는 경찰이 교통 통제를 해주어 현직 대통령과 똑같은 호사를 누립니다. 부인과 골프를 치고는 기분 좋다고 수백 만 원짜리 나무를 심기도 하고 골프장에 갈 때는 왕년에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을 몰고 다닙니다. 짝짝짝! 박수가 나오는 흐뭇한 풍경이지요.

 

잠깐 있었다가 사라진 ‘석사장교’ 제도는 전두환 큰 아들, 전재국씨(78학번)부터 시작해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씨(83학번)까지 혜택을 보고 없어집니다. 대학원을 마치고 석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이 간단한 시험만 치르면 군 생활을 6개월만 하도록 만든 제도지요. 넉 달 동안 훈련받는 것을 빼면 달랑 두 달만 ‘군대 체험’하는 제도로 막상 자기 자식들을 면제시키기는 좀 거시기 했던지, 이렇게 훌륭한 제도를 만듭니다. 역시 군인출신 대통령! 다른 권력자들처럼 자기 자식을 군에서 빼지 않고 갔다 오게 하네요. 짝짝짝!

 

그의 그런 위대한 업적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전두환 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 전사모 팬클럽 회원수가 18,000이 넘었지요. 전씨가 태어난 경남 합천의 군수는 ‘새천년 생명의 숲’이라는 멀쩡한 이름의 공원을 ‘일해공원’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일해는 전씨의 호입니다. 아무래도 큰 인물이 태어난 곳이니 그를 기리고 싶었나 봅니다. 짝짝짝!

 

조폭 동원하여 납치하고 집단폭행했으나 집행유예 받는 회장님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 재벌 회장이 조폭 영화를 너무 많이 보셨나. 애지중지 아끼는 아들이 얻어터지고 들어오자, 완전히 한 편의 조폭 영화를 찍으셨다. 진짜 조폭을 동원하고, 아들을 때린 사람들을 야심한 밤에 납치해서 흠씬 두들겨 주었다. 죽지 않을 만큼 때리고는 술이나 마시라고 거액을 뿌리기까지 했단다. “니네들이 저지른 잘못을 반성하라”는 근엄한 멘트를 날리면서 - 책에서

 

이 사건은 전직 경찰청창이 한화 그룹의 고문으로 있기에 알려지기가 어려웠습니다. 상부의 비호 때문에 사건을 처리할 수 없었던 한 경찰관은 <한겨레>기자를 만나 자초지종을 털어놓음으로써 그제야 알려지게 됩니다. 여론의 힘에 밀려 겨우 구속은 되었지만, 구속된 직후부터 우울증과 불면증을 호소하더니 구치소 대신 대학 병원의 특실에서 생활하게 되는 김씨, 영화배우다운 연기력에 감탄이 절로 납니다.

 

누구든 구치소에 가면 잠을 뒤척이게 마련이죠. 처벌을 받기 위해 집이 아닌 특별한 장소에 갇혀있는데 잠이 잘 온다면 그게 이상한 일 아닐까요. 그리고 우울하지 않다면 사이코패스겠지요.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 재소자가 처음에는 우울증과 불면증을 갖게 되지요. 그렇다고 누구나 김씨처럼 대학병원으로 가는 특혜를 누리는 건 아닙니다.

 

특혜는 주구장창 이어지죠. 당시 법무장관이 나서 “부정이 기특하다.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분위기를 띄운 다음, 집행유예가 선고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되풀이 되고 있는 고장난 라디오 소리가 흘려 나옵니다. “어려운 경제사정에 어쩌고저쩌고~~” 그리고 회장님의 명연기가 재연됩니다. 면도를 하지 않은 초췌한 얼굴로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는 회장님, 오, 회장님!!!

 

법 앞에 만민이 평등하다는 헌법정신은 권력자들이 까먹은 지 꽤 되었지요. 1988년, 탈주범 지강헌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울분을 터뜨렸지만 한국 사회는 “맞아, 돈 없는 건 죄야, 억울하면 돈 벌어”라고 대답을 합니다. 납치, 위험한 물건으로 집단폭행을 저지른 범인이 집행유예를 받는 한국, 누구랑 말싸움이 나도 혹시 회장님 자제분이 아닌지 꼭 확인해야 합니다.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로 끌려갈 수 있습니다.

 

공정하게 법을 판단해야 할 사법부가 이상한 판결을 하도 자주 내놓은 턱에 깜짝깜짝 놀라는 시민들은 청심환이라도 하나 먹으면서 가슴을 진정시킵니다. 그래도 법인데, 하면서 교대역 근처에 있는 건물을 믿고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허탈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촛불판결에도 끼어든 게 드러났지만 신영철 대법관과 이용훈 대법원장은 비판 여론에도 아랑곳없이, 비밀이메일은 보냈으나 압력은 아니었다고 떳떳하게 말합니다. 평생 법 공부하신 분들이니까 그들이 맞겠지요. 대한민국은 법치주의국가니까요.

 

전직 대통령이 극빈자가 되고 사건을 일으키면 마스크에 휠체어에 앉는 재벌 회장들을 보면서 한국 사회를 돌아봅니다. 이만큼 온 게 어디야, 하면서 그들을 눈감아 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꼭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앞에서는 눈을 부릅뜨고 큰소리치기 일쑤입니다. 인권, 이 말을 누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는지 떠올려봅니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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