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당신이라는 안정제
김동영.김병수 지음 / 달 / 2015년 11월
평점 :
#
열에 하나는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한다. 통계가 잘못된 것이라고 확신한다. 너도 나도, 당신도, 이렇게 아픈데 고작 열에 하나라니. 아마도 지구인의 절반은 정신병에 걸렸을 것이다. 어쩌면 절반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정상이라고 착각하는 이들 중 과연 정상이 몇이나 될까. 그리고 그 '정상'이라는 범주를 과연 누가 정의할 수 있을까. 당신은 어떻게 아픈가. 당신은 정상인가. 당신은 괜찮은가.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나.
#
<당신이라는 안정제>를 읽으면서 떠오른 영화가 있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이라는 영화인데, 여자 주인공인 제니퍼 로렌스는 이 작품으로 제85회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의 큰 얼개는 이러하다.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고 모든 것을 잃게 된, 정신병원까지 들어갔다 나온 팻(브래들리 쿠퍼)과 남편의 죽음 이후 진짜 사랑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티파니(제니퍼 로렌스)가 만나 서로의 상처를 어루어 만져주는 착한 결말의 영화.
#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정신병원에 다녀온 팻만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분노 조절 장애와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그만큼이나, 그의 주위 사람들 모두 미쳐있다는 것이다.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타인과의 섹스로 풀려고 했던 티파니나, 야구 경기때마다 미신에 대한 강박증으로 주위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팻의 아버지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물질적인 헌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팻의 친구나- 저마다 하나씩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 누구 하나 정상이라고 할 수 없을만큼 미쳐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보듬을 수 있고 안아줄 수 있다. 그들은 아프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미치지 않았다.
#
<당신이라는 안정제>는 환자와 의사가 진료실에서는 차마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묶은 책이다. 김동영 작가는 책 속에서 작가이기 이전에 환자다. 그리고 7년이나 그에게 약을 처방해주고, 상담을 해줬던 김병수는 정신과 전문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단순히 작가와 전문의의 대화를 엮은 글이 아닌, 환자와 의사의 상담기록이기도 하다.
#
책을 읽는 내내 예술가들의 고통이 생경하게 와닿아 마음이 아팠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의 예술가, 문학인들은 병을 달고 산다. 창작의 고통이냐고 웃을 수도 있겠지만,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비롯해 기타 여러가지 장애가 그들을 덮친다. 예술인의 천명(天命) 쯤으로 해석하면 좋을 듯 하다. 김동영 작가 역시 타고난 불안과 우울로 인해 고통스럽다. 그런 그에게 김병수 전문의는 답한다.
"눈꺼풀이 내려오고, 가슴은 답답하고, 온몸이 무너져내릴 듯 사소한 의욕조차 날아가버렸을 때, 그래서 지금 여기서 나만 쏙 빠져나와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보고 싶다. 많이 힘들지 내가 돌봐줄게"라고 말해주기만을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현실의 수많은 일들로 마음이 얼룩지고 흐려졌을 때, "시간이 지나면 더러운 것들은 가라앉고, 다시 깨끗해질 거야"라고 빛을 그려주는 말을 얼마나 간절히 듣고 싶었던가. 내 마음에서도 똑같은 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나도 느낀다. 멀리 보고 강해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나이가 들어도 성숙해지지 않는다고 자신을 탓할 필요가 없다. 인간은 어짜피 모두 불량품이다. 나이가 든다고 불량이 고쳐지는 법이 없다. 그래도, 우리는 그럭저럭 잘 살아가게 마련이다."
이보다 명쾌한 대답이 있을까. 우리는 모두 불량품이어서, 시간이 지난다고 하더라도 고쳐질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러니 아파할 이유도 고통스럽게 자신에게 형벌을 가할 필요도 없다.
#
글을 쓰며 자유롭게 사는 삶에 대해 김동영 작가가 말했다. 늘 불안했다고. 어디든 떠날 수 있는 한 마리의 새 같았지만, 스스로 만들어낸 또다른 세상에 갇혔다고. 오히려 남들처럼 살고 싶었다고 말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아니 평생을 하는 이런 고민에, 김병수 전문의는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어딘가에 떠나고 싶은 마음은, 그러니까 자유에 대한 갈망은 어쩌면 자유에 대한 증오로부터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오히려 진짜 자유가 주어진다면, 정작 떠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
당신은 어떤 종류의 마음의 병을 갖고 있나. 나는 일종의 '착한딸 컴플렉스'를 갖고 있다. 그 흔한 사춘기 한번 겪지 않았다. 나쁜 아이들(그들 역시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겠지)과 어울려 놀지 않았고, 방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은 적도 없다. 그 흔한 중2병도 앓지 않았다. 스물 여덟살이 된 지금까지 정해진 통금 시간을 어기지 않는다. 이래라 저래라 말을 듣는 것도 아닌데, 아버지를 힘들지 않게 해야 한다는 어린 시절의 강박이 지금까지도 나를 착한딸 컴플렉스에 가둬놨다. 내가 만든 작은 방안에 몸을 구겨서 넣었다. 덕분에 가끔은, 주저앉을만큼 아프다. 적절한 시기에 적당히 감정표현을 하지 못해, 아프다. 당신은 어떠한가. 어떤 마음의 병이 있나.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멀쩡한 것처럼 보여도 그 속을 한 꺼풀 벗겨놓으면, 약한 부분, 흠집난 부분, 모난 부분, 병든 부분을 누구나 갖고 있게 마련입니다. 겉으로 보면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성숙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속속들이 알아가다보면 '그 사람도 나와 별반 다를 것이 없네'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그 사람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삶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
그러니 혹여 아프다면, 주저앉을만큼, 한 발자국 뗄 정도의 힘도 없을만큼 아프다면, 주위를 한번 둘러보기를. 당신만큼이나 나도, 또다른 누군가도 아프니까. 우리 모두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아도, 아프니까. 당신은 분명 잘 이겨내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김동영 작가는 여전히 아프지만, 어쩌면 그를 치료를 담당하는 김병수 주치의도 아플테지만- 한줄기의 빛, 영화의 제목인 '실버라이닝' 혹은 책의 제목인 '당신'이라는 안정제처럼- 그대를 안정시켜줄 '당신'을, 또는 한줄기의 빛을 기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