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주인이 논에서 다 익은 곡식을 새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세워 놓는 것이 허수아비다. 허수아비 서너 개가 논 주위에 줄 하나로 묶여 있어서 주인이 줄을 잡고 흔들면 허수아비들은 일제히 몸을 흔든다. 생각도 없고 지혜도 없고 맹목적으로 서 있지만, 인간의 형상을 했다는 것 하나로 허수아비가 움직일 때마다 새들은 줄행랑을 친다. 참새들은 처음엔 허수아비를 피하는 듯 하다가 얼마 가지 않아서 허수아비가 그냥 껍데기라는 것을 눈치 채고 곡식 위에 겁 없이 내려앉기도 한다. 풍요로운 들판을 떼 지어 날아다니는 새들과, 그 새들을 쫓으며 내 것을 지키려는 주인의 승부가 가을마다 반복 된다. 곡식을 민주적인 방법으로 나누어 가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민주"란 무엇인가. 한자로 民主는 백성이 주인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 경우는 참새가 주인일리는 없겠지만, 그렇다면 "경제민주화"는 무엇인가? "이 땅의 모든 기업들이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투명경영을 하고, 그에 따른 세금을 양심적으로 내고, 그리하여 그 혜택이 고루 퍼지고, 또한 튼튼한 복지사회가 구축되어 우리나라가 사람이 진정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되는 것"이라고 조정래 작가는 "허수아비춤"이라는 소설에서 말하고 있다. 그의 소설 속에는 냄새나는 돈(남 회장)과 돈의 노예 같은 윤성훈, 박재우 강기준이라는 허수아비 같은 주요인물 셋이 나온다. 이 세 사람은 회장의 명령에 따라 정치나 법 세무 등 주요 기관에서 근무 하는 이들의 약점과 돈을 미끼로 그들을 매수한다. 그리고는 탈법, 탈세를 일삼아 거액의 비자금을 만들어낸다. 그런 인물들을 등장시켜 놓고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신랄하게 소설 속에 등장하는 대 기업의 생활을 까뒤집어 놓는가 하면, 등장인물인 전인욱과 아내의 대화에서는 '그렇지만 틀린 글자 잡아낸다는 게 얼마나 힘들겠어'라고 하여 부패의 깊은 늪을 바로 잡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소설속의 이 말은 읽는 이에게 강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꼭 이루어야 하는 것이 경제 민주화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작가는 그들은 먹을수록 더 허하고 굶주린 듯 날뛰는 수컷 동물에도 비유한다. "맹수가 사냥할 때 사냥감의 급소를 일격에 물어뜯듯 상대방이 원하는 바를 한 단계 더 선수쳐 자기 목적을 쉽게 달성시키는" 라고 하여 수컷의 속성으로 소위 그들의 악랄함에 비유한다. 그러나 큰 힘은 적은 힘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므로, 아직은 보잘 것 없지만, 양심을 가진 도덕적인 인물이 그가 생각하는 경제민주화실천연대를 이끌도록 등장시킨다. 

 

이 소설을 쓴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소설을 읽고 나서 대기업의 횡포와 부정부패와 권력에 대해 분개하라는 것인가? 분개해서 머리로 해딩 이라도 하라는 것인가? 결국 분개한 일개 국민인 우리더러 힘없음을 인정하고, 피터진체 쓰러져 이것은 내 운명이야 하라는 것인가? 아니면, 덤벼봤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테니 눈, 귀, 입 막고 가만히 나 죽었소 하라는 것인가? 힘없는 자를 조롱하는 것은 아닐 텐데,,, 그 두 가지 어느 것도 해결책은 아닐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이에게 생각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경제인은 비자금 형성과 권력을 쥐고 흔들며 자신의 배를 불리기보다는 투명경영으로 탈법 탈세를 일삼지 않아서, 이익을 사회 쪽으로 재분배 하자는 의도일 것이다.

 

그는 미약한 힘으로 맞서며 경제민주화실천연대가 불법에 대항하지만 질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어디선가 계속 순환되고 있다는 것을 독자에게 인식을 시킨다. 작가는 국민이 그러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면 이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라고 말한다. 권력의 노예요, 재벌들의 노예인 국민은 정작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비극이고 절망이다라고 말한다. 강기준이라는 인물처럼 대기업에서 허수아비 노릇을 일삼다가, 출세를 명분으로 회사를 옮겨 더 많은 부정을 돕게 되는 것을 빗대어 작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그동안 일방적으로 품어 왔던 그 기대와 희망은 바로 자발적 복종이었다. 스스로 노예 되기를 자청한 것이다." "긴 인류 역사는 증언한다. 저항하고 투쟁하지 않은 노예에게 자유와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런데 노예 중에 가장 바보 같고 한심스런 노예가 있다. 자기가 노예인줄을 모르는 노예와, 짓밟히고 무시당하면서도 그 고통과 비참함을 모르는 노예들이다. 그 노예들이 바로 지난 40년 동안의 우리들 자신이었다."

 

소설이라는 것은 참으로 많은 방면으로 유익한 재미를 준다. 좌절한 자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가 하면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들을 깨닫도록 이끌어 주기도 한다. 또한 작가의 철저한 옳은 의식아래서 내 뱉는 그 힘은 크다. 이제 현실은 '정치민주화'를 이루었다고 판단한 작가는 '경제민주화'의 시점이라고 감히 말하는 것이다.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피를 흘린 시기를 이미 지나왔다. 국민들의 의식도 얼마만큼 성장하여 작다고는 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경제민주화연대라는 단체까지 형성되었다. 이러한 모든 정황에서 아직 이기적인 욕심으로 경영에 임하는 기업은 앞으로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경고의 메시지로 보인다.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도 어느 날 대기업이 도산하고, 대기업의 간부들이 투신자살하는 뉴스보도를 접한 적 있다. 안타깝다. 기업인들이 생각의 전환을 서서히 단행하지 않으면 이미 경제민주화에 눈을 뜬 국민과 함께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그들에게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허수아비춤은 억, 억 돈의 소리가 나는 소설이다. 독자에게는 허황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허수아비춤은 의식 있는 작가의 글이어서 힘차게 뿌려지는 빗줄기 같다. 그 빗줄기가 골고루 국민들의 발을 적시어 푸르게 푸르게 국민성은 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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