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극복하면 사랑은 사라질까요? 더 심화될까요?”
어느 날 미홍이 말했다.
“더 심화되겠지.”
진성이 대답했다.
“하지만 사랑을 극복하면 다른 모든 극복과 마찬가지로 점점 느낄 수 없어지고 유예되는 것이지. 그러다가 너무 깊어지면 사랑이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잃어버리고 말야. 제 속에 있겠지만 실종되어 버리는 거야. 극복이란 그런 거야. 왜 사랑을 극복해야 하지?”
미홍은 자신의 위태로움을 말할 수는 없었다. 사랑을 어떻게 두려워하거나 귀찮아하거나, 거부할 것인가. 더구나 극복하려 하다니.
“사랑은 집착하는 거야. 두려움 없이 집착을 키우고 만에 하나 잃어야 할 때는 태산 같은 집착의 고통을 순순히 치르는 거야. 그게 사랑이지. 사랑을 절약하고 집착의 고통에 빠질까 봐 두려워하는 건 진짜 사랑이 아니야. 난 지금과 같은 사랑을 원해. 마음껏 사랑하는 사랑을. 만질 수 있고 당신 가랑이 속에 파고들 수 있고, 수없이 혀를 감고 당길 수 있는 이런 사랑을, 행위가 분명히 존재하는 매우 성적인 사랑을.”
“일주일에 두 번만 와요. 새벽엔 안 돼요. 밤 10시 이전에 올 수 있을 때만 내 방에 와요. 그리고 전화는 하루에 두 번만 하도록 해요. 저도 이제 일을 해야 해요. 사람을 만나러 다녀야 하고, 자료를 수집해야 하고 책도 읽어야 하죠. 그러니까 생활을 해야만 하는 거예요.”
진성이 말이 없었다. 그는 실은 바쁜 사람이었다. 그는 대체로 일주일에 두세 번쯤 11시경에 돌아오고 다른 날은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진성은 일주일 내내 미홍을 방문했다. 늦게 들어온 날은 눈을 붙인 뒤 새벽에 미홍의 벨을 누르곤 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 심장이 칼에 베이는 듯 내 목에서 피 냄새가 올라와······. 난 실은 너무 바빠.”
그는 어린 남자애처럼 거의 울먹거렸다. 미홍은 이내 그 말을 취소했다. 심장이 베인 듯한 피 냄새가 그녀의 목 안에서도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일 같은 건 차차 어떻게 되겠지. 당분간 그를 사랑하고 남는 만큼만 하는 것이다. 사랑이 삶의 예외가 되는 때도 그저 시작의 한 시기일 뿐일 테니까. 어떤 사랑도 결국 일상의 틈 속에 스며들고 생활이 될 테니까. 그때엔 더 많은 일을 감당할 능력이 저절로 생길 테니까.
- 전경린, <열정의 습관> 중에서